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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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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9.20 16:37
최근연재일 :
2021.01.19 20:00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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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4,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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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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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2.

DUMMY

끝날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연락이 없자, 나는 참지 못하고 별에게 문자를 보냈다.


“끝났어요?”


이 말이 위에 수십 개. 그리고 안부를 묻는 변형된 나의 물음들이 탑처럼 대화창에 쌓여 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답장이 오질 않았다.


“오늘도 답장 없어?”

“······네.”


삼일 째였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가 답했다.

채윤이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달콤한 티라미수 케이크 하나를 내밀었다.


“진정해. 평소에도 답장 느리다며?”

“그건 뭘 할 때죠. 어디가면 간다. 뭘 하면 뭘 한다. 말은 해주고 잠수 탄다고요.”


걱정되는 마음에 풀이 죽었던 내 목소리가 잠시 힘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내 말을 마치자마자 원상태로 돌아와 버린다.


“그렇게 걱정 돼?”

“당연하죠. 문자 없던 적······ 없었으니까.”


문자가 없어도 마지막에 보낸 문자로 이어져 있었으니까.


불안함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걸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앞머리의 가르마를 마구 만지기 시작했다. 나의 앞머리는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엉망이 돼 간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멈출 수 없다.

그런 나를 향해 채윤이 피곤하다는 느낌의 한숨을 토해내며 나에게 포크를 건넸다.


“일단 단 거라도 입에 물어. 진정 좀 해. 내가 더 불안해.”


포크의 끝이 먼저. 그리고나서 채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일그러진 미간과 입술 끝이 그나마 나의 불안감에 목줄이 돼 채워진다.

나는 포크를 받아 부드러운 티라미수의 끝을 떠먹었다.


“맛있어?”

“맛은 있죠.”

“진정 돼?”

“진정보다는··· 멍해졌어요. 결국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별이 답장을 해주지 않는 이상, 저는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때, 손님이 들어와 채윤은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커피를 내리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채윤의 시선이 떨어져나간 나는 내 시선을 둘 곳을 잃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쓰던 소설을 아무 의미 없이 훑어본다.


“별씨가 오늘 면접 있다고 했지?”

“네. 그래서 더······. 아니 많이 불안해요.”


커피콩이 갈리는 소리가 시끄럽다. 그래도 그 소리 덕분에 불안하게 떨리는 마음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근데 이상해.”


채윤이 목소리를 키워 그 소리를 뚫고 들어온다.


“뭐가요?”


나도 시끄러운 소리를 뚫기 위해 목소리를 조금 높여본다. 그랬다고 몸 안에 답답함이 조금 토해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아쉽게 그건 단 한 번뿐이었다.

커피콩이 갈리는 소리는 멈추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얼음물이 담긴 잔에 커피를 붓기 시작한다. 금방 만들어진 아메리카노가 물에 잠겨 서서히 얼음들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불안하면 전화하면 되잖아.”


채윤이 손님에게 커피를 전달하며 나에게 말한다.

너무 오랫동안 잊었던 전화라는 단어에 나는 바보처럼 고개를 까닥인다.


“전화요?”


되묻고 나서야 나는 문득 깨닫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당장 핸드폰을 들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무엇인가에 붙잡힌 듯, 움직이질 않는다.

채윤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문자가 안 되면 전화도 안 받을까봐 안 한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닌데.”


아마······.


“전화하는 걸 싫어···할 거예요.”

“무슨 대답이 그렇게 애매해? 그래도 불안하면 전화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패드 위에 놓인 나의 손가락에 의해 내려가고 올라가던 스크롤이 멈춰 선다.

그녀에게 고백하고, 이 카페에서 처음으로 사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기록에 가까운 나의 소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그리움과 걱정이 배가 된다. 이렇게 확실하고 정확한 사람이 문자도 없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설마 하는 마음이 덜컥 들어 휴대폰을 든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를 담은 소설 내용이 나의 손가락을 부여잡았다.


“두 번째는 전화 금지.”


메신저만 이용할 것.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는······.


쏟아져 나오려는 나의 답답한 말들을 소설 속 그녀의 대사가 막아선다. 그때의 그녀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온 말. 그때도 나의 말을 잘라먹은 그 말.



“잘········· 있을 거라 믿는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



세 번의 통화 연결 음이 이어진 끝에 덜컥하고 별이 전화를 받았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 안 받은 건가 싶어서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바로 보니, 통화 시간은 그런 나를 비웃듯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다시 핸드폰을 귀에 데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로는 아무 말도 넘어오지 않았다.

마음이 갑갑해지기 시작한다. 그 갑갑한 것들이 내 몸 안에서 시끄럽게 외치고 있다.


묻고 싶은 게 많아. 요번엔 불평할 것도 많아.


“별씨? 별씨 뭐해요?”


몸속에 울컥이고 있는 말들을 간신히 억누르며, 나는 잠시 반응을 기다려본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그녀를 불러 봤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여보세요! 별씨?”


목소리는 계속 커지고, 카페에 앉아 있던 자들이 슬슬 나의 눈치를 볼 정도가 됐다. 내가 아닌 채윤이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조금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수화기에서 간신히 별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왜.”


높다란 담벼락을 넘어온 지각생처럼 그녀가 말했다.


뭐야 이게······.


별의 물기가 먹먹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갑함이 무너져 내린다. 그걸 또 내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 애쓰는 소리에 머리가 멍해진다.


“뭐해요?”


내가 물었다.

그녀가 다시 한참 답이 없다.

그러다 그녀 쪽에서 “아.” 하고 이제야 뭔가를 발견한 소리를 낸다.


“내가 집에 도착했다고 안 보냈구나······. 미안. 좀 잤어.”


듣고 싶었던 사과를 막상 들으니 그게 무척이나 부당하고 못쓸 짓이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느새 내 마음은 새로운 갑갑함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무너진 것보다 더 빠르게. 아까보다 더 옥죄일 정도로.


기운 차렸으면 좋겠어. 힘냈으면 좋겠어.


그 갑갑함들이 나를 이끌어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그럼 오늘 계획은 없으신 거예요?”

“······응.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려고.”


그녀가 답했다.


“그럼 놀러가도 돼요?”

“어딜?”

“별씨 집.”

“왜?”


그녀 쪽에서 조금 짜증이 난 투로 말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답한다.

그녀가 말했었다. 이럴 땐,


“같이······있어 주게요.”


같이 있어 달라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그녀가 앞에 없음에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질끈 감은 눈으로 나는 잠시 그녀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본적 없는 침대. 끌어안은 이불. 컴컴한 방안을 비추는 유일한 휴대폰의 불빛. 피부색을 닮은 그 불빛 아래에 반짝이는 한쪽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내 전화가 끊기면 그 부분마저 어두컴컴한 배경에 삼켜질 것 같아 불안했다.

수화기 너머로, 그리고 내 상상에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껴안고 있던 이불을 놓고, 뺨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손을 붙잡았다. 뺨에서 조금 떨어진 불빛이 눈동자에서 넓어져 그녀의 얼굴 한쪽을 반짝반짝 비추어줬다.

그런 그녀가 말한다.


“계획은 있어?”


내가 답한다.


“전혀요.”


질끈 감을 눈을 떴음에도, 내 앞에.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 내 소설에. 그녀는 어디든 존재하고 있었다.



* * * *



“쉿!”


별이 자신의 입 앞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말했다.

나도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응시하면서 앞에 놓인 맛있게 튀겨진 닭 날개를 붙잡는다.


“야, 야. 그건 아니지.”

“왜요?”


내가 당황해서 닭 날개를 반쯤 들고 묻는다.


“지금 중요한 장면인데, 소리 나서 대사 못들을 거 아냐. 조금만 참아.” “그럴 거면 다 보고 시켰죠.”


내가 웃으며 닭 날개를 그대로 입으로 가져간다.


“이 자식이! 그럼 소리 좀 키워줘.”

“알겠어요.”


버석.


닭 날개를 입에 물고 노트북에 손을 가져가 소리를 키운다. 그녀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글쓰기용인 나의 작은 노트북 화면에는 꽤 오래된 영화가 갑갑하게 상영되고 있다.


무드 인디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다른 영화는 없냐고 소리치던 그녀가 어느새, 이 기괴하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에 신경 쓸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는 게 제법 기분이 좋았다.

다급하게 준비한 치킨도, 영화도 모두 내 취향이었음에도 그녀는 충분히 즐거워해주고 있었다.


“어땠어요?”

“처음에는 별 거지 같은 걸 들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괜찮았어. 뭐 끝까지 거지 같았던 건 똑같지만.”


그녀가 그제야 닭다리를 뜯으며 말한다.


“영화보다는 소설책 읽는 느낌? 그랬어.”

“그렇죠? 그래서 좋아요.”

“근데 뭐 먹으면서 보기엔··· 후반 비주얼이 좀 그래. 왜 그렇게 어둡게 그린 거야?”

“사랑을 색으로 표현한 영화래요.”


그녀는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초반에는 밝고 뒤로 갈수록 어둡고······ 으응. 알겠다.”

“특이하죠?”

"배드엔딩이라는 점만 빼면."


그녀가 웃는다. 나도 따라 웃었다.

크진 않지만 그런 소소한 미소가 나를 벅차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다음은 계획은?”

“밖에 나갈 거예요.”

“밖에?”

“네. 오늘 제가 돌아다니기 정말 좋아하는 날씨거든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창을 막고 있는 커튼을 거둬본다. 오후 3시 밖에 되지 않아 눈부신 태양 빛이 그대로 방안을 채워 갔다. 그리고 그 빛은 후두둑. 빗소리를 몰고 왔다.


“나도 이 날씨 좋아해.”

“그래요?”

“응. 이날 널 만났잖아.”


혹시 비가 굵어질 수 있으니 우산도 하나 챙겼다. 겹겹이 옷을 껴입은 그녀가 마무리로 후드 티를 입는다.


“마트료시카 같아요.”


그녀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고민하다가 입을 뗀다.


“변태.”


그 한 마디에 순진무구했던 내 얼굴은 봉숭아물이 들어버린다. 단단히 실에 묶인 손가락들처럼 벌게져서 내가 외쳤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럼 왜 마트료시칸데?”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재차 묻는다.


“응? 응?”

“뭐든 간에 별씨가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무슨 생각 했는데?”

“그, 그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정말 이상한 생각 따위는 안 했는데········· 억울하다.


“다 컸으면서 부끄러워 하긴. 그게 더 이상한 거 알지?”


내가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성운이 삐졌어?”


그녀가 웃음기가 듬뿍 담긴 목소리로 묻는다.

뒤에서 폴짝 거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몰라요.”


너무 많이 담은 웃음기가 새어나가는 줄도 모르고 내가 답한다. 그녀는 조용히 그런 내 손을 뒤에서부터 붙잡았다.


“고마워.”


내 손을 잡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그녀가 머리에 쓴 후드의 고무줄을 바짝 당겼다. 그러자 더욱 마트료시카를 닮아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다시 얼굴을 붉힌다.

접어 올린 청바지. 그 밖으로 삐져나온 흰 양말. 양말을 감싼 비 올 때 신으면 안 될 것 같은 단화. 조금의 다른 패턴과 색을 빼고는 신기하게 닮은 그녀와 나의 발이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젖은 바닥을 밟아간다.

내가 찰박하고 얕은 웅덩이를 밟으면, 그녀가 찰박하고 따라 온다. 빗줄기는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그건 특수효과처럼 그녀를 빛낸다. 그 모습은 해가 산 너머에 숨어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


그녀가 빙글 돌아 물었다.


“발길 닿는 대로요.”


대가 답했다.

그녀가 다시 빙글 돌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언제까지?”

“비가 그칠 때 까지요.”


사라져가는 태양은 발악이라도 하듯,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뒤늦게 하늘에 가을 단풍이 물든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풍경을 처음 본다는 듯, 황홀한 눈빛으로 끊임없이 담아내려 애쓴다.


“예쁘죠?”


내가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응. 이렇게 가만히. 제대로 본적은 처음이야. 한숨 쉬느라 땅도 많이 보고, 후회하느라 하늘도 많이 봤었는데. 이렇게 정면을 오랫동안 본적은 정말, 처음이야.”


또 이상한 소리.


“맨날 저는 앞에 있었는데요?”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틀어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고갯짓을 닮은 부드러운 눈길이 나에게 쏠렸다.

찬바람이 후다닥 지나간 내 코끝이 그 부드럽고 따스한 눈길로 움찔거린다.

중력을 타고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눈 한쪽을 조심스럽게 가릴 때, 그녀가 답한다.


“응.”


그 짧고,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말을 그녀는 일부러 입술을 올려 미소를 담아주었다.


“그러네. 정말로.”


그 소소한 하나, 하나에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 지.

그 가벼운 친절이 나에게 얼마나 깊게 다가오는 지.

그녀는 알지 못하겠지.


“여긴 진짜 처음 와본다.”


꽤 걸었다고 높이를 가진 건물들은 모조리 모습을 감추고 추위에 옷을 벗어던진 밭과 논만이 쭉 깔려 있었다. 간간이 바람 소리와 함께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와 나는 아주 작은 강줄기를 따라 마련된 산책로에 진입했다.


“이런 산책로가 있는 줄도 몰랐네.”

“여기 토박이시지 않아요?”

“맞아.”


그녀가 무릎을 굽혀 앉아 가까이 흐르고 있는 강의 물에 손끝을 살짝 데 본다.


“으··· 차갑다.”


손끝이 깜짝 놀랐는지 물러섰다.


“저는 세 달 전인가······ 여기 와봤었어요.”

“너 많이 돌아다니는구나?”

“그런 편이죠.”


내가 그녀 옆에 똑같이 쪼그려 앉는다.


“원래 토박이들이 더 지리를 모르는 법이래.”

“누가 그래요?”


그녀의 손끝이 강물의 온도에 적응이 됐는지 이젠 물러서지 않고 휘, 휘 강물을 저어갔다.


“내가 그래. 가는 곳이 정해져 있다 보니까, 다른 길은 잘 몰라. 조금만 벗어나도 금방 길을 잃어 버려서 구글 맵이나 켜거나 콜택시 불러야지.”


그녀가 자신의 무릎을 붙잡은 팔 안에서 조용히 웃는다.

그리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지금 강물을 휘적이는 손끝보다 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있지, 성운아.”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촉촉했다.


“네.”

“오늘 면접 보는 데 그런 기분이더라.”


나는 그녀가 강물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고갤 그녀를 향해 돌려줄 수 없었다.

그녀보다 내가 먼저 울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 길. 진짜 내가 이 길 밖에 몰라서. 이 길만 줄곧 다녀와서. 이걸 넘어간다면 길을 잃을 것 같아가지고······. 내가. 내가 면접에서 꼭 떨어지는 이유가 어쩌면. 내가 이 앞으로 나아가기 싫어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따라 차가운 강물에 손을 담갔다.

잠시 움찔거렸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그렇게 면접을 보는데······. 그렇게 보고 그렇게 떨어지는 데. 그렇게 내 과거를 돌아보고 나 자신을 분석하고 내가 뭘 했고, 내가 뭘 잘하고, 내가 뭘 못하고, 못하는 걸 어떻게 고치고 내가··· 내가!”


그녀의 한숨을 뱉었다.

손을 집어넣은 강물은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그렇게 나를 알아봤으면서 정작 내가 당장 뭘 좋아하고 있는 지도 몰라. 뭘 하고 싶은 지도 몰라. 면접이 끝나고 그 결과 발표까지. 또 다음 면접까지. 내가 늘 다니던 길에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안심에 휘감겨 우울해 하지도 않는 내가······ 그러고 있는 게 사실 진짜 나라는 것도 몰라!”


바람이 불지만, 소리가 담기지 않는다. 함께 날아오던 잡다한 소리들. 심지어 강물이 흐르는 소리까지도 모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대로 지금 여기에 있는 그녀와 나의 소리는 뚜렷했다. 숨소리 하나하나 까지도 들릴 정도였다.


“그 때도 그랬어. 내가 너랑 처음 만난 날.”


처음이라는 말이 덜컥했다.


“네가 한 고백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어. 네가 나를 알고 있지도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근데, 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이었어.”


그녀가 강물에 담긴 손을 빼낸다. 그리고 그 차가운 물기를 머금은 손으로 똑같이 잠겨 있던 내 손을 붙잡았다.

꽉 잡은 두 손에 묻은 물방울들이 중력을 따라 아래로 물방울을 맺는 것처럼. 그녀의 눈에도 그렇게 눈물방울이 맺혀 있다. 그녀가 손에 힘을 준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 사이, 사이를 파고들고, 서로의 젖은 손이 물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강물에 담가놨던 차가운 두 손이, 맞잡으니 무척이나 따뜻했다.


“내가 바라본 나를 봐주는 게 아니라, 직접 나를 바라봐준다고 말한 사람이 네가 처음이었어·········.”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힘을 따라 손을 꽉 쥐었다.


“설령 그게 거짓이라고 해도 난 그런 사람이 너무 절실했어.”


나의 몸이 그녀의 손에 이끌린다.

난 정말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강물도 바람도 어수선한 소리들도.

내가 그때 들었던 건 복잡한 박자를 지닌 두근거림과 나의 옷깃과 그녀의 옷깃이 움직이는 소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거라면 충분했다.


“그런 거 가지고. 그런 거 가지고 아무 고백이나 받으시면 어떡해요? 제가 쓰레기였으면 어쩔 거였어요?”


마주했던 입술이 떨어지는 게 아쉬워 나는 그녀에게 이마를 데며 말했다.

그녀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촉촉한 눈을 깜빡이며 나에게 이마를 내민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쓰레기일리 없잖아.”

“처음엔 쓰레기였어요.”

“나도.”

“전 그저 소설 소재로 이용하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어때요? 진짜 별로죠.”

“응.”


우리는 이마를 데고 있어서 서로의 무릎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눈물 때문에 더 반짝이는 얼굴이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이런 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마를 떼고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난 이제 그것도 좋아. 네가 쓴 소설들 보면서, 네가 날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 얼마나 날 제대로 봐주고 있을지 알게 됐으니까.”

“······몰라요.”


얼굴이 뜨겁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연스러운 온도가 거칠게 뜨거워지고 있다.

그녀의 볼도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말한다.


“정말 좋아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뱉을 수 있는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절감했다.

나는 절대 로맨스를 쓸 수 없다. 이 감정을 글로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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