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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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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9.20 16:37
최근연재일 :
2021.01.19 20: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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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498

작성
21.01.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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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6.

DUMMY

별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는 지나간, 끝난 이야기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투였다. 잠시 나는 그녀의 시점으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봤다.


“부모님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항상 가는 중국집이 있어.”


그녀의 이야기는 흔하고 잘 웃는 알바생이 일하고 있는 중국집을 배경으로 한 채, 투덜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의 그녀가 앉아 있는 배경으로 시작한다.



* * * *



처음에 말 꺼내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짜장면의 면발이 불어 터질 때까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지 잘만 드시더라.

그래서? 음······. 그냥 말했지. 바짝 마른 목구멍에 물 한 번 끼얹고 나서.


“할 말 있어요.”


두 분은 내 결단이랑 상관없이 잘만 드시더라. 알아서 지껄여라 그런 느낌. 그래서 더 오기가 생겼어.


“저 면접 관둬요.”


세게 나갔어. 오기가 생겼으니,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싶었거든.

두 분의 눈이 휘둥그레 해지면서 날 쳐다 볼 때, 너도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게 진짜 가관이었어.


“무슨 말이냐?”


아버지가 그렇게 물었을 때는 솔직히 조금 무섭긴 했는데, 그래도 침 한 번 삼키니까 별거 아니라고 느껴지더라. 물은 엎어졌으니까, 될대로 돼라는 식이었지.


“저 면접 관둔다고요. 하고 싶은 거 할래요, 이제.”

“그게 무슨 말이냐고!”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먼저 그렇게 역정을 내시더라니까? 진짜 놀랐어, 그건. 평소에 나한테 소리 지르신 적이 없으셨는데 말이야.


“하고 싶은 거 할래요. 이제 지쳤어요. 뭘 하는 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회사 들어가서 제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요.”


두 분 할 말을 잃으신 건지 아니면 내 말에 정말 한 방 먹어서 그로기 상태이신 건지, 순 대화는 없고 욕만 가득했어.


이 표현이 재미있다고? 거기 있었어봐. 거의 울 뻔했어. 근데, 막상 그렇게 욕 들으니까 오히려 후련하더라고. 욕지거리 듣고, 지원을 안 해주네, 마네. 딸이니, 마니. 그딴 소리를 들으니까 참···. 선택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웃었어.

응? 응. 그냥 웃었어. 욕 들으면서. 그냥 편하게 웃고 있었어.

왜냐고? 후련하잖아. 저 욕을 들으면. 저 사람들 딸이 아니면. 저 사람들의 지원이 없으면.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으니까.


으응. 대단하지는 않아. 대단한 거 아니야. 너는 잘못 묶어 얽혀버린 신발 끈을 푸는 게 대단해 보여? 그렇지? 간단한 거야. 그냥 나도 그 사람들이랑 얽혀있던 걸 푼 것뿐이야.

감사하지만. 평생 내가 감사해야 하는 건 맞지만, 나는 그들이 아니잖아? 그들도 내가 아니고.


그래서 말했지.


“제가 행복 하고 싶어요. 제 인생. 두 분이 관여하실 수 있는 건 맞는데, 그게 주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먹여주고 키워준 건! 너 학교 보내고 우리 굶어가면서 먹인 거. 네 옷! 이런 거!!”


자장이 여기저기 튀었어. 난 아버지나 어머니의 분노보다 그게 더 눈에 들어오더라. 그리고 속으로 “저거 내 옷에 튀진 않겠지?” 라는 생각이든 순간, 끝이라는 걸 알았어.

뭐냐니, 당연히 그 상황이었지.


“다 놓고 갈까요?”


내가 물었을 때 두 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건 오히려 내가 짓고 싶은 표정이었어. 왜냐면 난 서운했거든. 어이없는 게 아니라.


“어이없으세요?”

“뭐?”

“전··· 서운한데. 두 분은 계속 어이없어만 하시는 것 같길래요.”


아무 말도 않더라. 욕도, 말도. 심지어 따귀도. 자장까지도.


“여태까지 저한테.”


한숨이 다 나오더라. 하아? 하? 이런 한숨.


“그렇게 베풀어주시면서. 그렇게 아까울 정도로 아껴주시고 지원해주셨으면서, 왜 제 행복은 그렇게 안 해주세요? 두 분이 투자하신 딸이. 두 분의 만들어주신 제가···. 돈, 차, 뭐 이런 거 다 때려 치고 좀, 쪼옴! 그 귀한 몸뚱어리가··· 행복 하고 싶다는데! 그건 못 도와주세요?”


그렇게 다 토해내고 나서 뒤돌아 뛰쳐나가서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어.

그냥 영화처럼 거대한 차창에 비친 날 봤거든. 무슨 영화. 응. 드라마처럼, 붉은 눈시울에 뚝, 뚝 눈물이 떨어졌어.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게 아니라 그냥 뚝, 뚝!


그래도 다행인 게 머리가 복잡하지는 않더라고.


앞으로 뭐하지? 정말 지원 끊으면 어쩌지? 화나셨으면? 이제 얼굴 안 보자고 하면? 얽힌 게 풀어지고 뜯겨나간 것 같은 기분에 더럭 겁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뭐 그런 걱정들이 하나도 없었어.


내가 담이 센 거라고? 후후, 아닐걸?

난 단지 정말 행복 하고 싶었을 뿐이야. 정말 내 행복. 누구를 행복하게 만들거나, 누구를 위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내가 행복 하고 싶었을 뿐이야.

정말 절실하게.



* * * *



다시 얘기는 돌아와, 그녀와 나는 마주 앉아 있다. 앞에 나와 있던 음식은 다 먹어 비었지만, 우리 둘의 이야기가 대신해 있으니 더 앉아 있어도 될 듯했다.

그녀의 얘기에 감상평을 남기자면, 나는 정말 절실하게, 라는 말이 와 닿았다.


“그리고요?”


내가 물었다.

별은 이젠 얼음 밖에 남지 않은 컵에 꽂힌 빨대를 빨며 답한다.


“그리고? 그리고는 없지. 끝났어.”

“부모님한테 연락은 안 왔어요?”

“왔지. 근데 뭐··· 예상하는 거랑 별 다르지 않아. 전부다 끊겼지. 돈 모아 놓은 게 있으니까 이거 다 쓰면 알바 알아보려고.”

“힘들지 않을까요? 하고 싶으신 것도 많잖아요.”


그건 무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땐, 그녀의 눈이 나에게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바라본다.


“목적이 있잖아. 행복하려고 하는 건데, 힘들 건 없지.”


그녀가 턱을 괸다. 잠잠히 날아드는 햇살과 먼지를 맞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시간을 쪼개면서 빈틈없이 해야 할 것들을 했는데, 지금은······. 음, 뭐랄까? 시간이랑은 상관없이 해보고 싶은 걸 해. 너처럼.”

“저요?”


나는 놀랐다.


내가 그러고 있었나?


뒷목이 괜히 달싹 소름이 돋았다.


“응. 내가 이렇게 올 수 있었던 건, 너 덕분이니까. 그때 빗속에서 네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네가 그렇게 어이없는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똑같았겠지.”


차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유독 조금 붉어졌다. 햇빛을 많이 받아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면서 완전히 깨어졌다.


“고마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붉혀진 얼굴이 단순히 햇살 때문이 아닌 걸 알았다. 부끄러움을 가득 실은 그녀의 감사의 말이 얼마나 많은 망설임을 품고 있었는지는 오로지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분명.”


그녀가 조용히 잡아준 손은 두려움을 잊을 정도로 무척이나 따뜻했다.



* * * *



시간을 죽이기 딱 좋을 정도의 조명에 눈이 따갑다. 별안간 터지는 다른 곳의 웃음소리가 나에겐 약간 비명처럼 들려 얼굴이 찡그려졌다.

무심코 붙잡은 후드의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바라봤다.


“힘내!”


별에게서 온 소중한 응원이 보물 상자를 닮은 박스 안에 단단히 잠겨있었다.


“약속이 있었니?”


중후한 목소리. 톤 자체는 경박하지만 분위기로 낮게 깔아 누르는 나이를 먹은 목소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 화면을 끄고 고개를 든다.


“아뇨. 따로 없어요.”


아버지로부터 형성되는 불편한 분위기가 목안에 쌓여간다. 사이다가 놓인 테이블의 위로 꼬치 몇 개가 김을 모락모락 피어 올렸다. 얼굴을 구기게 했던 주변의 떠드는 소리가 이제는 어색한 분위기에 가로막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의 말에 나는 뒷목을 매만졌다. 그리고 빠짝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시선을 옮긴다.

팔자가 사나웠던 걸 기억하듯, 주름이 깊게 새겨진 그의 입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예전의 생기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피부가 그 주름에 붙들려 움직이려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그만둔다.

나는 그게 내 쪽에서 먼저 화두를 던지라는 의미임을 알고 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입을 뗐다.


“아버지는 어쩐 일이세요. 갑자기 술집에 다 오시고.”


나의 아버지.


이제 흰 머리가 보기 싫게 자리 잡은 아버지가 악에 받쳐 고생하던 어린 눈만은 그대로 간직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이 뭐하고 사나 궁금해서.”

“저번에 보셨잖아요.”

“또 보고 싶을 수도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얼굴도 보고 싶었고.”


사이다를 집어 들어 벌컥 삼켰다. 하지만 목은 시원해지기는커녕, 목에 쌓인 답답한 분위기가 탄산과 엉켜 더 끈끈하게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그래. 학교는 잘 다니고 있고?”


여전히 이 사람은.


“저 휴학했잖아요.”

“휴학?”


처음 듣는 다는 듯, 놀라는 그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진다. 그러자 그는 하려던 말을 앞에 놓인 꼬치 하나와 맞바꿔 삼켰다.


“잘 생각했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너도 이제 일 이 학년은 아니잖니?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아들이 휴학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이 대화의 정답이었다.


“목표는 정했고?”

“네.”

“하긴. 아들은 뭐든지 알아서 잘 하니까.”


나도 꼬치 하나를 집었다.


“어떤 목표든지 아빠가 응원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응원한다는 게 무척이나 우스웠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도 무척이나 웃음이 난다.


“그럼요.”


예전에는 이 말이 너무도 달콤하고 따뜻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든든해서 누구에게 뺏길 새도 없이 단숨에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곤 했지만, 이제 이게 미끼라는 걸 알고 있다.


“몇 시쯤 가세요?”


대화고 뭐고 당장에 일어나고 싶어서 내가 물었다. 그저 응원만 한다면, 내 이야기는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음···. 네가 편할 때?”

“그럼 곧 일어나실래요?”


내 말에 아버지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더 있다 가지? 꼬치도 아직 남았고. 더 시켜도 되니까!” “그러니까 언제쯤이요?”


아버지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바라봤다.


“한, 한 시간 정도?”

“알겠어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편하게.”


내가 아닌, 아버지가 먼저 물어봐 주길 바랐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내가 자신에게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아버지가 사이다를 한 모금 들이킨다. 그리고 꼬치 하나를 잡아 뜯으며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아직 글 쓰고 있니?”


아직.

그 날카로운 말이 심장을 파고든다.


“여전히 쓰고 있죠.”

“그래? 잘 써져?”

“뭐···. 그럭저럭요.”

“요번에······”


저번에 나눴던 공모전 이야기는 어디로 날려버렸는지, 궁금하지 않은 회사의 입사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간단한 정보 수준이 아니라, 명확하고 세세한 정보였다. 그게 누굴 위해서,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힘들게 얻어 낸 정보인지를 알고 있는 나는 더 주먹이 꽉 쥐어질 수밖에 없다.


그럴 시간에 조금 더······.


“저한테 관심을 가져주실 수 없어요?”


조금 악에 받쳐 그렇게 물었다.

아버지는 순간 당황스러운 얼굴로 변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는다.


“아빠가 우리 아들한테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 우리의 기둥이잖아.”

“우리가 도대체 누군데요?”

“뭐?”


난 아버지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당연히 아빠랑 엄마, 그리고 너지!”

“그럼 기둥은요?”

“·········그건······”


도대체 뭐가 뭔지.

기둥? 우리? 나한테 그저.


“땅이랑 천장에 붙들려 있을 뿐이에요. 제가 기둥이면요.”

“성운아.”


아버지가 나를 다루기 위해 조금 부드럽게 이름을 부른다.


“저번에 만나 뵀을 때, 제가 한 말 기억은 하세요?”


그때야 아버지는 고민에 빠진다. 조금은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나 싶었다.


“아··· 그때.”


하지만 역시나 그렇게 나는 속아버리고 만다.


“그래. 기억하지. 그래도 아빠는 말이다, 성운아.”


나를 생각해 준다고 생각하고 만다.


“글은 언제든 쓸 수 있는 거잖니? 좋은 직장. 원하는 업종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면서도 충분히 글은 쓸 수 있잖아?”


결국, 사람은 자기만 생각할 뿐인데.


“제가 그걸 원한다고 말한 적 있어요?”


옆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 웃음이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내 다짐이. 내 말을 한껏 낮추는 웃음처럼 들린다.


“저··· 그런 거 진짜 아무 상관없이 그냥 글 쓰고 싶어요. 배 고픈 거 알아요. 찢어지게 가난할 것도 각오하고 있어요. 그냥 저······.”


좀 내가 하고 싶을 걸 하자.


“제가 하면서 행복한 걸 하고 싶어요.”


꾹꾹 담은 말들.

힘들게, 오랜 시간 동안 가슴 속에 새기고 지우고를 반복한 나의 말. 그 어떤 글의 대사보다 나의 감정이 순수하게 배어있고, 읽어왔던 어떤 명대사보다 나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말을 아버지는 단 한 번의 고민 없이 답한다.


“그래. 글 써.”


내 마음에 새긴 말은 그렇게 받아쳐진다.


“그래도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다양한 길이 있다는 말이지, 아빠는.”


내가 새긴 말보다 더 단단한 심지에 튕겨 나온다.

어이가 없어 뱉은 물음.


“다양한 길이요?”


그것마저도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응. 글이란 것도 경험이잖니? 사회생활도 해보고, 직장을 구하는 경험도 해보고, 그렇게 겸사겸사 안정적인 자리에 잡았을 때 써도 되지 않나 싶어. 아빠가 주변에 책 낸 사람들을 많이 아는데, 그 사람들도 막 작정하고 쓴 사람은 없더라고.”


주절주절.


“무슨 여행을 다니다가, 회사 일을 하다가, 뭘 하다가 썼는데 그게 대박이 난 경우가 많아. 이제 그때 직업을 바꿔도 된다는 말이지. 아니면 겸하거나. 요즘은 한 가지 직업만 갖는 시대가 아니니까. 아빠는 성운이가 그렇게 좁은 시야를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제가 글을 쓰기 보다는 회사에 들어갔으면 한다는 거죠?”


아버지가 서둘러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런 방법도 있다, 이거지. 워낙 글이라는 게···.”


그런 건 도대체 뭐고. 글이란 게 도대체 뭐.


“워낙 힘드니까···.”


폐가 꽉 조여 온다. 명치도 아리고 폐가. 그것도 아주 단단히.

이 거북함에. 과한 배려에 내 폐는 먹어서는 안 될 산소마저 흡입해 버린 건 아닐까?


“알아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리판별도 못하고, 감정적으로 화가 난 건 아닐까.


“응?”


응.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되질 않아.


“안다고요. 글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배고픈지 알아요. 주변에서 그 말 밖에 안 하니까. 글 쓴다고 하면 그런 말. 그런 시선 밖에 안 보내니까.”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말했다. 감정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상태로 말을 뱉으면서도 나는 단 몇 점 몇 초의 깜빡이는 순간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이걸 말하는 순간에는 어둠이 없었으면 싶어서였다.


“저희 과 없어졌어요. 타 과라 합쳐졌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글 쓴다고, 쓰고 싶다고 온 애들을 융합한답시고, 비슷하답시고, 전혀 관계없고 만져 본적도 없는 과랑 합쳐 버렸다고요.”

“그, 그랬어?”


잠시 숨을 골랐다. 안 그러면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내 꿈을 장려해줘야 하는 과에서 이제 다른 걸 알아보라는 말이랑 뭐가 다르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싶은데, 다 말려요. 해보지도 않았는데 불안하대요. 넘어지지도 않았는데 약부터 발라요. 기침도 안했는데 열부터 재고요.”


그리고 또···. 또·········.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먹은 것도 없이 꼬치 하나와 사이다를 마셨을 뿐인데 목이 콱 막힌다.


“그게 지금.”


그래, 그런 것들이 지금.


“아버지랑 뭐가 달라요?”


조용하다.

물음이었지만, 대답은 없다. 마치 수능 마지막 서술형 문제처럼. 말이 아닌 써내야 하는 것처럼.


“아까 말하셨죠?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아들은 휴학하지 않았을 거라고. 맞아요. 제가 휴학한 이유는 이십 오년. 스물다섯 살이 될 때 동안······.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기둥이라는 말. 믿는다는 말. 언제나 지원하겠다는 그 말 때문에! 출발 선 하나 넘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기분이 구리다. 시원하게 모두 뱉어냈음에도 뭐가 더 남았는지 구역질이 올라온다.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이 구역질나는 감정 그대로 구토로 토해내 뒤덮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단숨에 사라질 정도로, 아버지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지은 표정은 처음 본다. 덜컥, 겁이나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는 화가 나셨다.


“그걸 왜 내 탓으로 돌리니?”

“네?”

“그걸 왜 아빠한테 돌리냐고. 성운아.”


한숨.


“이 아빠는 꿈이 없었을 것 같니? 아빠도 스무 살 때 너처럼 글 쓴답시고 글 써서 신문에 투고하고, 속된 말로 별 쌩지랄을 다했었다.”


또 다시 한숨.


“밤새 글 쓰는 게 즐거워서 웃은 적도 있고, 밤새 내가 쓴 글이 너무 슬퍼 운적도 많아. 아빠가 왜 네 글을 응원하는지 아니? 아빠도 그걸 알기 때문이야. 근데 왜 또 이렇게 막아서는 지 아니? 아빠가 현실을 알기 때문이야.”


현실······.

처음 듣는 표정과 처음 듣는 이야기에 뒤섞여 던져진 그 단어가 거대한 장벽이 돼 내 앞을 막는다.


“원하는 걸 다 할 수는 없어. 원하는 걸 하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것도 선택할 줄 알아야해. 그게 용기야. 성운아. 네가 여태까지 원하지 않은 것을 해온 적이 있니? 공부? 학원? 그런 시시한 걸로 변명할 생각 말고 방금 네가 한 말들처럼 진지하게 생각했을 때. 네가 여태까지 원하지 않은 것을 해온 적이 있느냐 말이야.”


낮고 차분히 쏟아지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반박할 것을 찾지 못했다. 정답을 알지 못하는 퀴즈의 마지막 문제의 앞에 놓은 최후의 1인이 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글을 쓰고 싶어서 글을 써왔고, 가고 싶은 대학에 갔고, 먹고 싶은 걸 먹었고, 입고 싶은 걸 입었고, 신고 싶은 걸 신었다.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었고,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었다.

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원하지 않은 걸 한 적이 없었다.


“네가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해 보렴. 글을 써서 가능하니? 아빠가 너에게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 그래요. 스물다섯 살이나 됐으니, 우리 아들도 조금은 꿈에서 벗어나 현실을 살았으면 싶구나. 꿈은 꿈인 거야. 깨어나면 가볍게 주변에게 말해줄 수 있는. 그새 까먹을 뿐인 꿈인 거야.”


나는 비겁하게 별을 떠올렸다. 그리고 더욱 비겁하게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버지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요번 공모전은 잘 해 봐. 우리 아들과 했던 그때 약속은 안 잊었어. 꿈에 깨기 전에 그걸 현실로 바꿀 수 있다면,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인 거잖니?”


나는 다시 한 번 비겁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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