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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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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9.20 16:37
최근연재일 :
2021.01.19 20:00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853
추천수 :
0
글자수 :
204,498

작성
20.10.19 23:50
조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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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11.

DUMMY

나는 백스페이스 바를 연타했다. 그 소리는 실컷 써놨던 글자들이 서둘러 내 신경질에 도망치는 발걸음 소리를 닮았다.


“왜 그래?”


그 말과 동시에 내 손이 멈칫한다. 도망가던 글자들도 그대로 멈춰 섰다. 도망가는 발소리 대신, 글자를 새롭게 들여오는 그녀의 가벼운 샤프심 소리가 들려온다.

힐끗, 노트북 옆으로 몸을 움직여 그녀를 살폈다.

새하얀 A4 용지에 복사된 재작년도 토익 문제들이 쇠로 된 얇은 링에 침착하게 묶여 있다. 그녀는 그 링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차분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중이다. 지금 그녀와 나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샤프심 소리 옆에, 40분 정도 남은 핸드폰 타이머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나는 몸을 바로 했다.


“아뇨, 딱히···.”


방해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소설을 슬쩍 바라봤다. 또 그녀와의 일화를 내용에 넣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신경 쓰이는 건 알지?”


그녀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로 묻는다.

대단한 사람.

내 눈에는 정확히 그렇게 보였다.


“글이 잘 안 써져서요.”

“맞다, 너 글 쓴다고 했지?”

“네.”


대화는 그녀가 긴 지문에 딸린 문제를 연달아 풀어내고 나서야 이어졌다.


“글 같은 건 도대체 왜 써?”


악의가 없고, 그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알았다.


“첫날에도 말했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요.”


그녀가 나에게 4시간을 할애해서 사귀는 조건과 이런저런 서로에 대해 얘기를 할 때를 떠올리며 답한다. 물론 그때의 그녀는 조금 더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똑같이 말했다.


“가짜잖아.”


그때는 그저 웃으면서 넘길 정도로 가벼운 말로 여겼는데, 오늘은 눈빛 하나 없다고 작살처럼 꽂힌다. 손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다.


“꿈이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핸드폰 타이머를 멈추고 나에게 잠시 시선을 할애한다.


“꿈?”


드디어 나를 바라보나 싶었는데, 그녀는 그대로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 푼 문제를 채점하기 시작한다.


“20분······.”


그렇게 중얼거린 말은 그녀가 문제를 모조리 풀고 남은 시간이었다.

나는 붉은 눈이 내리고 있는 그녀의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한다.


“소설 속에 있는 주인공은 비록 제가 만들었지만 각자 꿈이 있거든요. 소설은 그런 그들의 꿈을 실현 해주는 일이에요.”

“무시하면 그만 아니야?”


동시에 그녀의 33번 문제에 빗금이 쳐졌다.


“별씨는 누군가 꿈을 말해주면 응원해주고 싶지 않나요?”


34번 문제에도 빗금이 쳐진다.


“전혀.”


그리고 35번 문제에도 빗금이 쳐졌다. 붉게 쳐진 빗금이 마치 철없던 때에 책상에 그어 놓은 경계선과 같이 느껴졌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아.”

“저는 응원해요.”

“뭐를?”


······별씨,


“꿈이요.”


별의 이름을 삼킨 건, 행여나 그녀에게 실례가 될까봐서다. 하지만 이미 그 삼킨 단어를 듣기라도 한 듯, 그녀의 시선이 드디어 나에게 꽂혔다.

나는 단번에 읽을 수 있었다. 힘을 주느라 찢어진 눈매. 흔들리지 않는 또렷한 눈.

원망이다.

나는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꿈같은 거 없어.”

“네?”


나는 그 말에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종이의 맨 앞에 92라는 숫자를 썼다. 아까 보았던 세 개의 빗금. 오답은 그것뿐이었다.


“10분 정도 남았으니까, 너랑 잡담할 수 있겠다.”


그녀가 샤프와 채점용 색연필을 때가 탄 하얀 헝겊 필통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너무 피곤하거나, 완전히 깊게 자면 꿈을 안 꾼다는 거 알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래. 너무 피곤해서, 완전히 깊게 자거든. 현실이든 아니든, 꿈을 꿀 시간. 그런 건 내 계획에도 없어.”

“그럼 되고 싶은 건 없어요?”

“되고 싶은 거?”


그녀는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시선과 고개를 비스듬하게 만든다.


“일단은 직장인?”

“너무 현실적이네요.”

“현실이니까.”


그녀가 필통의 지퍼를 잠근다.

부우욱.

그 소리가 내 입을 그대로 잠가버린 것 같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녀도 아무 말 없이 그런 나를 바라본다. 아무런 변화 없이 평온한 그녀의 표정에 나는 괜히 시선을 떨구었다.


“난 이제 갈 거야.”

“벌써요?”

“응. 너는?”


나는 서둘러 노트북을 닫았다.

이대로 아무 말도 못 하고 헤어질 수는 없으니 서둘러야 한다.


“저도 갈게요!”

“그래.”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잠시 나를 기다려주었다.


“가요.”

“응.”


제대로 정리하고 넣지 않은 노트북과 선들이 가방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게 느껴진다. 이러면 분명 어깨가 금방 아파져 올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걸었다고 어깨가 욱신대기 시작한다.


“어디 아파?”


그녀의 벙거지가 괜히 더 푹 내려온 기분이다. 그녀의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뇨, 아뇨!”


어깨의 통증을 잊을 만큼 그녀에게 말을 붙여보고 싶어 입술이 달싹댔지만, 그럴 때마다 가을의 때아닌 찬바람이 대화 주제를 훔쳐 달아나버린다. 결국, 그녀의 집 앞에 도달할 때까지 한 마디도 걸지 못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녀는 나에게 작별을 알린다.

원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개미굴 같은 골목의 끝에 세워진 건물의 벽에 “원룸 있음.” “시설 완비.” “빠른 인터넷.” 등이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안에 사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홍보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게 너무도 익숙한지 중간 문의 비밀번호를 꾹꾹 누른다. 그 소리가 내 안에 있는 용기라는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한다.

3···5···7···9···1···1···4.

놀랍게 비밀번호와 내 용기가 정확히 일곱 자리에서 불이 들어온다.


“해피 엔딩 좋아해요?”


내가 물었다.

중간 문이 특유의 자동화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과 동시였다.

그녀가 안으로 가볍게 들어서다가 멈춰 섰다. 그 정도로 나의 질문은 뜬금없고 이상했다. 나는 침을 크게 한 번 삼킨다.


“애초에 소설은 별로······.”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화두부터가 잘못됐다는 건 알았다. 나는 주먹을 꽉 쥔다.


“조심히 들어가요!”

“이미 들어왔어.”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안 돼!


“계, 계단! 계단 있잖아요!”

“그래, 알았어.”


그녀가 옅게 웃는다. 그리고 동시에 문이 닫혔다.

투명한 유리문 사이를 두고 그녀와 내가 서 있다. 그녀는 금세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나는 떠나지 않은 채로 그녀의 신발 밑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있었다.

그런 내 손에는 계단을 오르며 보낸 그녀의 문자를 담은 핸드폰이 단단히 쥐여 있었다.


“그래도 네 소설은 한번 읽어보고 싶어.”


그 화면은 나와 같이 아직도 꺼지지 않은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전히 그녀가 사라진 걸 확인하자, 나는 몸을 돌린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 화면은 그녀의 다음 말을 담은 채로 잠겼다.


“그리고 이왕이면 해피엔딩이 좋지.”


영원히 기억하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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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 21.01.13 18 0 18쪽
29 29. 21.01.12 17 0 20쪽
28 28. 21.01.11 22 0 15쪽
27 27. 21.01.06 15 0 19쪽
26 26. 21.01.05 16 0 20쪽
25 25. 21.01.04 18 0 15쪽
24 24. 20.12.30 18 0 14쪽
23 23. 20.12.29 19 0 14쪽
22 22. 20.12.28 17 0 20쪽
21 21. 20.12.23 17 0 14쪽
20 20. 20.12.22 18 0 19쪽
19 19. 20.12.11 17 0 18쪽
18 18. 20.12.09 17 0 18쪽
17 17. 20.12.07 23 0 16쪽
16 16. 20.10.28 16 0 8쪽
15 15. 20.10.27 19 0 9쪽
14 14. 20.10.27 17 0 14쪽
13 13. 20.10.21 34 0 8쪽
12 12. 20.10.20 20 0 11쪽
» 11. 20.10.19 21 0 8쪽
10 10. 20.10.14 21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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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 20.10.12 25 0 21쪽
7 7. 20.10.07 21 0 14쪽
6 6. 20.10.06 19 0 7쪽
5 5. 20.10.05 2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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