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까르보치킨 님의 서재입니다.

망나니 백작의 생존전략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까르보치킨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1.01.02 18:12
최근연재일 :
2021.02.03 21:20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34,633
추천수 :
1,211
글자수 :
204,097

작성
21.01.02 21:20
조회
1,974
추천
47
글자
12쪽

눈 뜨니 백작

DUMMY

김현우, 평범한 군필 남자였다.

혈혈단신으로 제대로 된 직장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빈곤한 처지.

지금 이 호화롭고 거대한 침대에서 깨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살아왔다.


“여긴 어디···"


잠이 덜 깬 눈으로 김현우는 비몽사몽 주위를 둘러보았다.

웬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여자들이 거의 땅으로 꺼질 듯 자신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김현우는 영문을 몰라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중후하고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


“뭐야, 감기 걸렸나?”


김현우는 생전 처음 듣는 자신의 목소리에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목을 만지작거렸다.


“주, 주인님!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당장 의사를!”

“뭐, 뭐?”


김현우는 적잖이 당황했다.

겨우 목감기 가지고 의사를 부른다니.


'그것보다, 나보고 주인님이라고 하는 이 여자들부터 좀 진정시켜야겠어. 정신이 하나도 없네.'


김현우는 여자들을 향해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자, 잠시만요! 전 괜찮아요!”


김현우가 내지른 한마디에 여자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 주인님이 우리에게 존댓말을···”

“쉿! 잘못 들은 거야! 어찌 그런 불경한 착각을···”


김현우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어올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 이 상황을 설명해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모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길 꺼리고 있었다.


“의사를 불러왔습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훤칠한 키의 남자 시종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데리고 왔다.


-


가볍게 진찰을 마친 의사는 백작가의 시종들에게 서둘러 김현우의 증상을 설명했다.


“가벼운 기억상실증으로 보입니다. 스스로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더군요.”

“그럴 수가···”

“몇 번이고 자신이 칼리스 유피테르 백작이 맞는지 저한테 확인하셨습니다.”


김현우는 푹신한 벨벳 의자에 앉아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몇 차례나 곱씹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눈을 떠보니 자신이 칼리스 백작이 되어있었다.


칼리스 유피테르 백작.

분명 자신이 읽던 소설 ‘천민출신이 일을 너무 잘함’의 등장인물이었다.


'믿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내가 읽던 소설 속 등장인물에 빙의한 것 같아.'


게다가 선역도,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도 아닌 지독한 망나니 악역.

영지 내의 주민들에게도 엄청난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하인들을 마구 때리거나 술을 마시고 난동을 피우는 것은 일상.

칼리스 백작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칼리스 백작은···직접 황제가 되려고 했지. 자기 딸이 황후가 되지 못하니까 아예 판을 엎어버리려고.’


칼리스 백작은 그런 이유로 황제가 되기 위해 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주변 왕국들과 이권을 거래하고 손을 잡았다.

게다가 영지 내의 주민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사병으로 만들고 불법으로 거래해왔던 무기를 공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완전히 실패했지. 칼리스 백작과 그 딸이 대단한 망나니라 주변 사람들이 다 배신해버려서.’


영지 내의 주민들과 시종들이 전부 뭉쳐서 백작 가를 고발했고 무장한 사병들은 그 무기를 가지고 황실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황실에 투항했다.


'여주에게 뺏겼는데도 여전히 황태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딸의 배신도 칼리스 백작이 몰락하는 결정적 원인이었지.'


김현우는 소설 속 칼리스 백작의 최후를 떠올려내려 애썼다.


‘딸인 키르케는 마녀라고 화형을 당했고···칼리스 백작은 어떻게 죽었더라? 국가반역죄로 공개 거열형에 처해 졌다고 했는데. 거열형이라는 게 그 사지 다 찢겨서 죽는 그거 맞지?’


저절로 몸이 오싹해지고 목까지 탔다.


“여기, 물 마실 곳은···”

“지금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김현우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시종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얼마 안 지나 김현우는 무슨 물을 종류별로 가져온 하녀들을 볼 수 있었다.


“찬물입니다.”

“따뜻한 물입니다.”

“뜨거운 물도 있습니다.”

“서, 설탕을 탄 물입니다.”

“약초를···”


겨우 물 한 잔 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이런 대접이 익숙하지 않은 김현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마지막 하녀의 말을 끊었다.


“아, 아니. 찬물이면 됐어.”


찬물이 든 잔을 집어 든 김현우는 무심코 존댓말을 하려다 말을 삼켰다.

또 그런 소동이 벌어지는 건 사양이다.


“고맙습···아니, 고마워.”


하녀들이 일제히 서로를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본분을 깨닫고 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 그래. 수고했다.”


하녀들은 수고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무언가에 쫓기듯 허리를 숙인 채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김현우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물을 들이켰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하녀들이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방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앞에는 자신의 무릎에도 조금 미치지 못하는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발랄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백작의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김현우는 그대로 물을 뿜을 뻔했다.


'아버지? 설마 저 여자아이는···'


여자아이는 그대로 칼리스에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키르케의 얼굴도 기억 안 나시나요? 저예요!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딸, 키르케!”


김현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품에 달려들어온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눈처럼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 윤기가 도는 까만 머리카락, 커다란 보라색 눈. 입가의 매혹적인 점까지.

아직 어린아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네가 키르케라고?"

“아버지! 정말 저까지 잊어버리셨군요! 어쩜 좋아!”


김현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여자아이는 훗날 소설 속 악녀로 자라게 되는 키르케 유피테르였다.


'이제야 정말 실감이 나네. 난 정말 소설 속에 들어온 거야.'


김현우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키르케를 슬쩍 떼어놓았다.


“키르케, 당연히 기억하고 있고말고. 아까 그건 말실수였어.”

“아버지! 그럼 기억이···”

“그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어.”


대충 그렇게 둘러댄 김현우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키르케에게 말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까 자리 좀 비켜줘.”


그러자 키르케는 아까의 하녀들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천천히 방을 나갔다.

방 안에는 여전히 시종과 하녀 몇 명이 남았다.


'아, 얘네들한테도 따로 나가 달라고 해야 하는 건가.'


아까부터 영 익숙하지 않은 상황들만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저기, 너희들도 잠시 나가주지 않을래?”


방에 남아있던 시종과 하녀들이 눈치만 보다가 시종이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 하지만 주인님께 무슨 불편이 생긴다면···”

“필요할 때 따로 부를 테니까.”


하지만 시종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하녀들도 겁을 집어먹은 표정만 지을 뿐 마찬가지였다.


“하, 하, 하지만 시종이란 주인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언제든 편리한 수족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예전에 주인님께서···”


김현우는 후, 숨을 한번 내쉬더니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한껏 깔아 내렸다.


“편리한 수족이라. 그렇다면 묻겠다. 지금 여기 계속 머무르는 건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이다. 그래도 나갈 수 없다는 거냐? 그게 편리한 수족이 할 짓인가?”


본인이 들어도 놀랄 정도로, 위압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종과 하녀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당장 물러가겠습니다!”


시종과 하녀들이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다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일단 김현우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지금은 정말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김현우는 팔짱을 낀 채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넓은 방을 돌아다녔다.


“지금 내 모습을 한번 볼까.”


김현우는 탁자 위에 놓인 진주가 박힌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본 김현우는 무심코 감탄했다.


“와, 키르케랑 거의 똑같이 생겼잖아.”


아버지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키르케가 그대로 남자가 된 것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원래 20대 후반 밖에 안되는 젊은 나이의 백작이긴 했지만, 그래도 딸을 가진 아버지인데 수염은커녕 주름도 거의 없었다.

현실의 투박하고 거칠거칠했던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환골탈태였다.


“흠, 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고 취해있던 김현우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거울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김현우는 앞으로의 소설 내용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칼리스 백작은 결국 딸과 함께 죽게 돼.”


이대로 빙의한 채 소설이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두다가는 자신이 덤터기 쓰고 죽게 된다.

그건 억울하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비참하게 사형당하고 싶진 않았다.


“안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떠올랐다.

그러자 우왕좌왕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가장 큰 목표. 우선 죽지 않는다.'


그리고 남한테 맞는다거나 시비 털리는 등 험한 꼴 당하지 않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며 즐겁게 잘 먹고 잘산다.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인 목표가 그려졌다.


딱히 이제 와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름에는 찜통 같은 곳에서 막노동하고, 겨울에는 시베리아보다도 더 추운 곳에서 일하고.


'솔직히 또 그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


죽을 위기만 넘기면 등 따습고 배부른 백작가 생활이 여기 있으니까.


“그래. 죽을 위기만 넘기면 돼. 난 이 소설의 내용을 아니까 어떻게든 피해갈 수 있을 거야.”


다행히 완결 화까지 전부 읽었었고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해야 할 행동들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나온 결론은 한 가지.


“먼저, 칼리스 백작과 그 딸이 나쁜 망나니로 살아서는 안 되겠지.”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이것이었다.

모든 죽음의 위기는 둘의 망나니 성질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얌전히 잘 있으면 아군을 당장 늘리진 못해도, 적이 늘어나는 건 방지할 순 있을 거야.”


행패 부리는 백작을 그대로 연기했다가는 파국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음, 너무 백작답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되, 평판이 좋아질 수 있도록 하려면···”


소설 속 백작의 행패는 망나니라는 말보다 싸이코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흉악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무조건 채찍이나 지팡이부터 휘두르는 폭군이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착해질 필요 없이 적당히 사람 수준만 되어도 평판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겠지?”


김현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래의 자신도 그렇게 착한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딱 평균 정도.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죽기 싫다면 뭔들 못하겠어.”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가득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김현우는, 아니, 칼리스는 눈에 힘을 주고 잠가둔 방문을 열어 재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망나니 백작의 생존전략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중공지 +5 21.02.03 298 0 -
공지 제목을 변경했습니다 21.01.07 139 0 -
공지 매일 오후 9시 20분에 연재됩니다. 21.01.03 646 0 -
36 너의 이름은 +1 21.02.03 262 15 14쪽
35 실력 좀 볼까?(3) +1 21.02.02 297 16 11쪽
34 실력 좀 볼까?(2) +1 21.02.01 333 17 12쪽
33 실력 좀 볼까?(1) +1 21.01.31 397 16 11쪽
32 간만의 나들이 +1 21.01.30 479 23 12쪽
31 통성명 +1 21.01.29 525 22 11쪽
30 물건 관리는 철저히 +1 21.01.28 559 23 12쪽
29 또 털렸죠? +1 21.01.27 606 27 13쪽
28 고쳐 쓸 수 있는 사람(2) +2 21.01.26 687 28 15쪽
27 고쳐 쓸 수 있는 사람(1) +2 21.01.25 739 27 12쪽
26 다 털렸죠? +2 21.01.24 770 30 15쪽
25 내 딸 내놔 +1 21.01.23 807 28 12쪽
24 신발 찾아 삼만리 +3 21.01.22 789 26 14쪽
23 독 안에 든 쥐 +1 21.01.21 796 35 14쪽
22 속일 걸 속여야지 21.01.20 895 32 14쪽
21 쉴 틈을 안 주네 +1 21.01.19 875 35 13쪽
20 너를 구하게 될 줄은 +4 21.01.18 933 34 14쪽
19 너를 보게 될 줄은 21.01.17 942 32 12쪽
18 호랑이를 길렀네 +2 21.01.16 946 33 15쪽
17 고양이를 기른 줄 알았더니 +1 21.01.15 947 37 14쪽
16 그래봤자 손바닥 안(2) +1 21.01.14 942 38 15쪽
15 그래봤자 손바닥 안(1) 21.01.13 966 39 14쪽
14 원수와 아군은 한 끗 차이(3) 21.01.12 1,053 38 16쪽
13 원수와 아군은 한 끗 차이(2) +1 21.01.11 1,058 44 12쪽
12 원수와 아군은 한 끗 차이(1) 21.01.10 1,090 42 13쪽
11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봐라(3) 21.01.09 1,139 44 12쪽
10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봐라(2) +1 21.01.08 1,164 4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