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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무문어입니다.

무인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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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무문어
작품등록일 :
2021.02.16 23:20
최근연재일 :
2021.08.19 23:07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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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4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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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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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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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Almost Haven (2)

DUMMY

짐을 가능한 많이 실어야하는 만큼 역마차는 시내에서 흔히 보이는 마차의 배는 되는 크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안락한 여행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루니샤는 짐칸 빼곡히 실린 가방들과 어디에 쓰는지도 알 수 없는 도구들을 노려보다가, 마부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미안하게 됐수다. 보통 이렇게까지 물건을 꽉꽉 채워넣지는 않는데, 다른 두 명이 짐이 워낙 많아서.”


싸구려 궐련을 뻐끔거리던 마부가 진정성이라고는 추호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그리 놀랍지는 않은 일이다. 승객이 짐더미에 깔려 압사당하기 직전의 상태이건 편안하게 여행을 즐기건, 결국 마부의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똑같으니까.


그녀는 눈대중으로 자신의 몸을 끼워넣을만한 공간을 찾아 살폈다. 비집어 들어간다면 앉을만한 자리는 몇 군데 보였으나 누울만한 곳은 없었다. 나흘간 깨어있는 채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퍽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다음 마차편을 타도록 하지, 루니샤 양. 이건 말도 안되는 짓거리야.”


“말도 안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요? 엄연히 마차 사무국 조항에 수인은 짐칸에 태우라고 씌여 있는데.”


“그러면 자네 생각에는 좌석이 멀쩡히 남아있는데도 사람을 이런 장소에 쳐박는 게 합리적인겐가, 젊은이?”


짜증섞인 하인리히의 타박에 마부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가슴팍에 달린 보안관 뱃지와 하인리히의 얼굴을 번갈아 힐끗거리더니, 곧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뭐, 나야 이 여자가 어디에 앉건 상관은 없다만... 다른 한 명이 수인이랑은 못 앉겠다고 성화여서...”


“그래서?”


“난들 뾰족한 수가 없다 이거요. 그쪽 보안관님이 직접 따진다면야 모르겠지만.”


정말 다른 승객과 담판이라도 지을 작정인지 하인리히가 승객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루니샤는 그가 마차의 문짝을 젖혀 열기 전에 하인리히의 어깨를 붙잡았다.


“선잠 정도는 익숙합니다. 이동이 늦어지는 것에 비하면야 사소한 불편입니다.”


“터무니 없는 소리 하지 말게. 이건 자네의 정당한 권리야.”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일은 필요없지 않습니까. 괜히 승객과 실랑이를 벌일 바에는 갈라져서 탑승하는 편이 나을겁니다.”


그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마부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결국 루니샤의 말 역시 일리가 있다 판단했는지, 하인리히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하게.”


그럴 것 같지는 않았으나 루니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그녀가 퍽 불편한지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마부석에 올라타버렸고 하인리히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승객석으로 들어갔다.


그녀 역시 마차에 오르고서 짐칸을 살폈다. 그나마 덜 불편한 여행을 위해서는 바닥 수북히 쌓인 물품들을 정리해야 할 터였다. 캐리어, 어디다 쓰는지 모를 도구로 가득한 가방, 그리고 관짝.


관짝? 루니샤는 때와 장소에 알맞지 않게 당당히 뉘여진 나무 상자를 노려보았다. 세로로 길쭉한 열린 육각기둥. 그리고 옆에 비치된 뚜껑까지. 그나마 내용물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거, 출발할 테니까 일어서 있다가 머리나 박지 마쇼!”


마차의 앞에서 마부의 고함이 들렸다. 뒤이어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인다. 저런 꺼림칙한 물건이 어째서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부에게 따진다고 상황이 달리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루니샤는 무질서하게 널브러진 관짝과 상자들을 천천히 벽면으로 밀었다. 차체가 흔들리는 탓에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정리를 마치고 나니 예상했던 것보다는 넓은 공간이 짐칸 가운데에 생겼다.


끝내주는 신세군.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소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뒤, 그녀는 관짝에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다음 식사 전까지는 한참 남았으니 선잠이라도 자둘 작정이었다.


나무 뼈대에 천을 씌워 만든 벽을 뚫고 들리는 삐걱거림. 그리고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바닥을 제외하면 그리 나쁘지 않다.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대자 곧 졸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루니샤 웨스트는 잠들지 못했다. 차체가 내는 소음과 자잘한 충격 때문이 아니라, 승객석에서 들려오는, 신경을 긁는듯한 째지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혼혈을 부사수로 들였다고! 믿기지가 않는군!”


“입 조심하게, 젊은이. 자네 때문에 내 보안관보가 짐짝 취급을 받는 것만 생각해도 열불나니까.”


“그런 족속과 같은 마차에 탄다는 걸 진즉 알았다면 다른 차편을 탔을거요! 출발 직전에야 수인이 일행에 섞여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참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이 양보하는 거라 생각하네만.”


하인리히가 짐칸과 승객석을 나누는 벽 너머에서 으르렁댔다. 월간 행사처럼 으레 생기는 일이 다시 터진 모양이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반 할렌 보안관은 소득없는 싸움에 쉬이 뛰어들 정도로 혈기왕성하고 어리석지 않다. 또 멀쩡한 정신머리를 가진 작자라면 보안관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마에 구멍이 뚫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러나 소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4인용 승객석에 한 자리를 비우면서까지 사람을 짐칸에 실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 가뜩이나 뒤에는 자리도 없을 텐데. 제 짐이 좀 많거든요.”


“옷차림을 보니 중부 출신인데. 서부에 온 지는 얼마 안됐나 보군? 그 짐승놈들이 가진 변변찮은 직업이라고는 창녀, 좀도둑, 강도가 다야.”


“저쪽 노신사분 말씀을 들어보자면, 거기다 보안관보도 추가해야 할 것 같은데요.”


“웃기고 앉아있네. 보안관보가 여자라고? 그 자리를 따내려고 뭔 짓거리를 했을 것 같나? 보나마나 창녀짓이지.”


그 문장을 끝으로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소년이 입을 다문 듯 했다.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반응이 시원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주의해야 할 작자가 한 명 뿐이라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다른 승객 한 명은 중부 출신이라 하니 그녀를 신기하게 보기는 하겠으나, 그 뿐일 테고.


생각했던 것만큼 이동이 험하지는 않을 것 같다. 루니샤는 마차의 천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졸음이 오지는 않았으나 피곤하다. 그녀는 완전히 잠들지 못한 채 얼마간을 보내다가, 마차가 멈춰 섰음을 깨닫고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정오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볕이 강하다. 해가 어느 정도 떨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출발할 생각인 듯 했다.


“이쯤에서 잠깐 끼니나 때우고 갑시다! 거기 뒤쪽에 있는 아가씨도 나오쇼!”


마부가 소리치는 것을 들은 루니샤는 관짝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똑같은 자세로 앉아서인지 다리가 조금 저렸으나 달리 불편한 점은 없었다.


밖은 밝았다. 모자나 다른 그늘을 만들만한 물건을 들지 않는다면 버티기 힘들 정도로 볕은 강하고 뜨거웠다. 굳이 안락한 마차를 두고 야외에서 식사를 할 필요는 없다 판단했는지, 마부는 이미 자기 몫의 비스킷과 말린 고기, 그리고 물 조금을 들고 있었다.


“이미 사무국에서 들었겠지만 거창한 건 뭐 없소. 그쪽같은 사람이 육포를 먹는지는 모르겠는데, 내키면 먹고. 아님 말고.”


“건량과 물이면 충분합니다.”


“어, 정말로? 그럼 그쪽 몫 육포는 보안관 영감한테 맡겨두지.”


그 말을 하고서 마부는 물병과 유산지로 감싼 음식을 루니샤에게 건넸다. 묵직한 것을 보니 맛은 몰라도 양은 꽤나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을 받고 다시 짐칸으로 돌아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마부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가적인 용무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뭣하면 식사 정도는 승객칸에서 하라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랄하는 양반도 기가 좀 꺾인 것 같더라고.”


그 말을 하고서 마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들었던 대화를 생각하자면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승객칸의 소년은 그녀같은 사람들이 서부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았고, 하인리히 보안관도 있으니 어떻게든 밀어붙인다면 식사 정도는 승객칸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동석할 필요가 있을까. 기껏 받은 식사를 거슬리는 작자와 신경전을 벌이며 먹고 싶지는 않았다.


루니샤는 가볍게 목례한 뒤 뒤돌아섰고, 그대로 멈춰 서서는 마차의 열린 창문을 노려보았다.


“그러지 말고 같이 드시는 게 어때요? 나흘 간 한 배에 탈 사람들인데, 적어도 통성명 정도는 하는 게 어떤가 해서요.”


소년이 상체를 창문 밖으로 빼내다시피 내밀고선 말했다. 퍽 살가운 말투였으나 루니샤가 대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소년의 외양 때문이었다.


머리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높은 모자를 썼고 인중에는 가짜 티가 물씬 나는 콧수염을 붙였다.


목소리로 짐작했듯 스물은 됐을지 모를 앳된 얼굴이었으나, 입고 돌아다녔다가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만한 옷을 걸친 탓에 제대로 된 나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좋은 점심 되십시오.”


루니샤는 간신히 그의 옷에서 시선을 뗐다. 중부의 옷차림이라고 했던가. 저런 의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닐 사람이라면 어지간한 뜨내기가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강도고 소매치기고 너나할 것 없이 표적으로 삼기 딱 좋은 부류인데. 아직 밑천까지 다 털리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루니샤 양. 그냥 여기 앉게. 혼자서 식사하면 복 나간다는 소리도 있잖나. 젊은이, 그래도 괜찮겠지?”


“그냥... 맘대로 하쇼.”


마차의 안쪽에서 하인리히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잠깐 눈을 붙이는 사이에 모종의 대화라도 오갔는지, 의외로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 그렇다면 식사는 이곳에서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이야기야 전부터 들었지만, 사람을 짐짝처럼 취급하니 음식이 넘어가질 않더라고요.”


덜컥. 문짝보다는 경첩을 단 널빤지에 가까운 물체가 열렸다. 승객칸이라고 사정이 짐칸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단지 거슬리는 짐들이 없고 의자라 부를만한 것이 네 개 정도 비치되어 있을 뿐.


오른쪽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하인리히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루니샤 역시 간단한 목례를 하고난 뒤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우연인지 혹은 승객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는지, 불쾌하기에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 남성의 자리는 대각선 방향에 있었다. 마주보거나 이웃해 앉자면 서로에게 불편할 테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비스킷이 어지간한 돌덩이보다도 단단하네요. 이걸 그냥 씹었다가는 이가 부러질 것 같은데, 평소에도 서부 분들은 이런 걸 먹나요?”


“아니. 우리도 이런 걸 제대로 된 음식이라 부르지는 않네. 다른 걸 가져왔다가는 여행 도중 썩어버릴 테니 울며 겨자먹기로 먹는 거지.”


“다행이네요. 다른 식사도 이랬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했을 텐데.”


“그러면 자네는 중부로 되돌아가는 게 좋겠군. 솔직히 이곳 사람으로서 정직히 말하자면, 다른 메뉴라고 크게 나은 건 아니거든. 구운 렌틸콩이나 소금만 무식하게 친 고깃덩이가 대표적인 요리인 걸 보면 말 다했지.”


하인리히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소년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꽤나 친해진 것 같다.


“더군다나 자네는 고기도 안 먹지 않나, 루니샤 양. 식도락이 인생 즐거움의 절반이라는데, 나는 죽어도 그런 순례자같은 생활은 못할 것 같네.”


“...필요할 때는 먹습니다. 내키지 않는 것뿐입니다.”


“고기를 안 먹으면 어떻게 산다는 거예요? 콩같은 음식으로 때우는 건가요.”


소년이 고개를 기울이자 모자가 아슬아슬하게 마차의 천장을 스치고 지나간다. 마차 안에서까지 모자를 쓸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남에게서 복장을 지적받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고 타인의 복장을 지적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기에, 루니샤는 어렵사리 말을 삼킬 수 있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독특하네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나요?”


“상관없습니다.”


“그, 혹시 동물들이 불쌍해서 고기를 드시지 않는 건가요?”


“나는 사람을 교수대에 올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루니샤는 그 말을 내뱉고서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우스갯소리로도 가치가 없는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기는 했으나,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어조였다.


그러나 소년은 오히려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는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으나, 루니샤는 그 동작을 보고서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루퍼트예요. 보레알리스 루퍼트.”


“...연방 보안관보 루니샤 웨스트입니다.”


악수라. 다른 곳에서 그녀가 취했다가는 돌이나 술병따위를 맞기에 딱 좋은 제스쳐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퍼트는 어색하게 한 팔을 내밀고 있었다. 루니샤는 마지못해 그의 손목 부근을 잡고 악수 비스무리한 행위를 취했다.


“믿기지가 않는군. 아무리 세상물정을 모른다지만-”


“아, 마침 잘됐네요. 선생님 성함을 여쭤본다는 걸 깜빡 잊었지 뭐예요.”


중년 남성이 궁시렁대는 것을 들은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남자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알 거 없잖나. 고작 며칠 지내는 사이인데.”


“말 좀 가려서 하지, 젊은이? 괜히 다툴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하인리히 보안관이 가시돋친 말투로 말했다. 남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결국 자신의 검지를 대단한 무기라도 되는 것마냥 치켜들고서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 나이나 먹고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건가! 살다살다 창녀 때문에 이 사달이 나는 것까지 보다니, 아주 어처구니가 없어!”


그가 씩씩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짐칸으로 가려는지 바깥으로 나가려는지는 모르겠으나 루니샤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용케 경첩이 나가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문이 거세게 닫혔다. 하인리히는 굳은 얼굴로 남자가 뛰쳐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루퍼트는 이 상황이 우습기라도 한 건지 마냥 웃고 있었다.


“저는 식사나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네.”


더 이야기해봤자 골만 썩일 일이다. 그녀는 종이로 감싸인 비스킷을 꺼내 베어물었다. 호밀과 도정하지 않은 보리의 씁쓸함 이외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건량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에 루퍼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모자가 마차의 천장에 부딪히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이더니, 마차의 덜렁거리는 문을 열었다.


“저는 그 분한테 가볼게요. 괜히 서로 피곤한 일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괜찮겠죠, 루니샤 씨?”

“상관없습니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그 작자를 달래준다니 되려 고마워해야 할 판국이다. 화를 돋우다 이동에 차질이라도 발생하는 것보다 백배는 나은 일이니.


루퍼트는 더 말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나갔고, 하인리히와 그녀는 식사를 마무리했다. 적당히 뒤처리를 마치니 해의 고도가 어느 정도 떨어진 상태였다.


남자와 루퍼트가 돌아오고, 마부가 신호하는대로 출발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마부는 출발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그의 다급한 고함이었다.


“보안관 영감님! 거 여기 좀 와주쇼!”


마부가 외치는 소리가 마차의 얇은 나무 벽을 뚫고 들렸다. 순간 루니샤는 노상강도나 근처를 배회하던 수인 부족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으나, 그의 목소리에 담긴 조바심은 미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그 꼴통새끼가 전갈에 쏘였는데! 이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가지가지 하는구만. 전갈이라니.”


하인리히가 투덜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전갈이라. 야외에서야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벌레였으나 쏘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발견하지 못하고 전갈 위를 밟거나 섣불리 움직이는 것만 아니라면.


그녀 역시 보안관을 뒤따라 밖으로 걸어나왔다. 중년 남성은 헐떡이며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그의 발은 신체 부위보다는 기형 선인장에 가까운 모습으로 부풀어 있었다.


“재수 옴붙었구만. 아주 제대로 쏘였어. 대체 어쩌다가 이 사달이 난 겐가?”


“낸들 알겠소. 그냥 전갈을 밟았다고만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요?”


마부가 불안한 눈초리로 말했다. 하인리히는 그저 혀를 몇 번 차고는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었다. 루니샤 역시 엎드린 남자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 자세로 두었다가는 독이 온 몸에 퍼질 것이다. 전갈의 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인 것은 확실했다.


“이보게, 루퍼트. 무슨 일이 난건가?”


"큼직한 바위 근처에 서 계시던데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셔서 잘 안 보였는지 전갈을 밟으신 모양이에요.”


“그늘로? 이곳에서 그늘로 들어갔다고? 이 작자 머리통에는 뇌 대신 뭐가 들어있는지 도통 모르겠군.”


그녀 역시 통감하는 바였다. 볕을 피하고자 하는 생물은 사람이 다가 아니다. 섣불리 응달로 기어들어갔다가는 뱀이고 전갈이고, 온갖 끔찍한 것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품에 들린 남자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단순한 전갈의 독이 아니었는지, 벌써부터 동공이 풀리기 시작했다.


“미치겠구만. 제발 그 전갈놈이 갈색만 아니었다고 말해주게.”


“하지만 갈색이었는데요?”


“맙소사.”


하인리히는 그 말을 남기고서는 붕대를 남자의 다리에 묶었다. 그가 고통에 겨운 신음을 토해냈으나 하인리히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보안관이 다리를 묶은 매듭을 당겨 확인하고선 루퍼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만 좀 웃게. 이런 말 하긴 뭣하다만 지금이 우스운 상황은 아니지 않나.”


“아, 그런가요?”


루니샤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인리히 보안관의 말처럼 루퍼트는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었다.


“여기 혹시 의사같은 사람 있소?”


옆에서 초조히 손톱을 물어뜯던 마부가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네 사람 중 둘이 보안관인 것은 이미 들었고, 한 명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 누워있었으니.


“그런 표정 짓지 마쇼. 사무국에서 좆같은 일이 터지면 꼭 물으라고 했으니까.”


“제가 비슷한 사람이긴 한데요.”


잠시 마부의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이내 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의사였습니까, 루퍼트 씨?”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와서는 남자의 목덜미에 검지와 중지를 가져다 대었다. 압박이 큰 효과가 없는지 남자의 안색은 파리해진 것을 넘어 무채색에 가까웠다.


맥을 짚는 것일까. 점차 루퍼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중년 남성의 가슴팍을 두드리거나 귀를 가져다대는둥 진찰하는 시늉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끝났네요.”


“...살았다고? 저거 상태가 많이 안 좋아보이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잘 끝났다니까요. 확실하게 죽었어요.”


루퍼트는 게거품을 문 채로 쓰러진 남자를 가리켰다. 루니샤는 애써 웃음을 참는 표정인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거요? 그쪽이 아까 전에 의사랍시고-”


“아, 그랬었나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는지,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장의사인데요!”


작가의말

반갑습니다. 김우무문어입니다!


여태껏 오래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또 지금껏 더 성실히 쓰지 못해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 나아지는 모습 꼭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1. 05. 04 - 퇴고 이전의 원고를 붙여넣기했던 걸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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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most Haven (2) +11 21.05.04 104 12 20쪽
16 Almost Haven (1) +11 21.03.30 169 16 11쪽
15 Lord, I Ain't Coming Home With You (8) +12 21.03.15 195 19 8쪽
14 Lord, I Ain't Coming Home With You (7) +5 21.03.12 163 21 17쪽
13 Lord, I Ain't Coming Home With You (6) +11 21.03.08 165 20 7쪽
12 Lord, I Ain't Coming Home With You (5) +2 21.03.04 160 20 10쪽
11 Lord, I Ain't Coming Home With You (4) +4 21.03.04 157 23 9쪽
10 Lord, I Ain't Coming Home With You (3) +9 21.02.28 191 24 11쪽
9 Lord, I Ain't Coming Home With You (2) +6 21.02.26 256 20 11쪽
8 Lord, I Ain't Coming Home With You (1) +8 21.02.24 205 25 9쪽
7 What Maketh a Good Man? (7) +9 21.02.22 235 32 9쪽
6 What Maketh a Good Man? (6) +7 21.02.21 203 26 11쪽
5 What Maketh a Good Man? (5) +7 21.02.20 232 26 9쪽
4 What Maketh a Good Man? (4) +9 21.02.19 271 25 10쪽
3 What Maketh a Good Man? (3) +4 21.02.18 294 28 10쪽
2 What Maketh a Good Man? (2) +4 21.02.16 423 30 14쪽
1 What Maketh a Good Man? (1) +14 21.02.16 1,098 3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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