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계약
3. 계약
당직의가 다녀갔다. 일시적 쇼크에 의한 거라고 큰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는 울었고, 간호사는 아이의 링거에 이것저것 주사약을 섞는 것 같았다.
아이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시퍼렇고 매우 창백했다. 아이를 쳐다보았다. 다크 서클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도 날 쳐다보았다.
-왜 그러고 있니? 엄마 곁으로 가지 않고.
-꿈을 꿨어.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꿈, 발이 진흙탕에 빠지는 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안 좋아.
-그래서 발작을 일으킨 거니?
-아니
-....
아이는 날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섬뜩했다. 고개를 돌리며 그가 와 주길 기다렸다.
-기다리지 마.
-응? 누구?
비밀을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느 새 아이는 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 남자. 아줌마를 끌고 가려하고 있잖아.
-어차피 난 가야 해. 언제가 됐든.
-가지 마...
아이는 울었다. 난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왜니? 왜 아줌마가 아저씨를 따라 가지 않았으면 좋겠니?
-무서워...꿈에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아줌마를 데리고 가면 바로 날 데리러 온다고 했어.
아이는 울었다. 난 혼란스러웠다. 그가 나에게 접근한 목적이 순전히 날 데리러 가기 위한 거라면, 그래서 그가 가면을 쓰고 내게 접근한 거라면...
-아니야. 이건 가면이 아니야.
그가 벽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유명 패션쇼에나 등장할 법한 모델 같았다. 그는 검 먹은 아이 앞에 서서 양손을 들어보였다. 그럼에도 아이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했다. 사자는 웃으면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아이 앞에 앉았다. 그리고 아이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런 무서운 사자가 아니지? 후훗. 난 그 사자가 아니니까. 지금 모습이 내 모습이야. 온전한 내 모습.
아이는 사라졌다. 다시 육체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저승은 아름다운 곳이니 자기와 함께 가자고 했다.
-약속해 주셔야 해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요.
보채는 날 그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은 내 몸에 바윗덩어리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침묵을 참고 기다린다는 건 내가 아주 뻔뻔스럽게나 노련하거나 그를 많이 사랑해서 일 것이다. 나의 인내를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내 영혼은 그를 따라 갈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내 몸의 기능들은 예전에 비해 많이 안정되어 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내가 살 수 있다는 뜻이겠죠?
-아내분은 의지가 아주 강하신 분입니다. 절대로 쉽게 돌아가시지 않을 겁니다.
의사와 남편은 날 사이에 두고 희망을 주고받았다. 저들은 모를 것이다. 내겐 살고자 하는 의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계음과 기계의 도표를 보며 나의 남은 생을 점치는 사람들, 나의 삶과 죽음은 기계가 정해 주는 것 같아 우스웠다. 의사와 나의 식구를 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문득 내 몸을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 내 몸은 오히려 안정을 되찾았다니. 대신 아이의 상태가 나빠졌다.
-힘드니?
내가 물었다. 아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쪼그리며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절대로 생명줄을 놓아선 안 돼.
아이는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니?
아이는 머뭇거렸다.
-해 봐.
그제야 아이가 천천히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줌마, 아줌마는 속고 있는 거예요.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자는 저승사자가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니?
-그자는 영혼 사냥꾼이에요.
영혼 사냥꾼?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이는 나보다 많은 걸아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니?
-난 너무 어리기 때문에 전생의 일이 완전히 잊혀 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행태의 유령들이 있다는 게 생각났어요.
-그자가 왜 내게 접근 한 거지?
-저승사자와 모종의 계약에 의한 걸 거예요.
-모종의 계약?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눈가에 또 다시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앉았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혼 사냥꾼 얘기를 듣고 나서인지 그자의 모습이 섬뜩했다.
그자는 속삭이기 위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지 마.
그자를 밀쳐내며 나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왜 그래?
-너는 악마야. 남의 영혼을 팔아먹는 치졸한 악마!
그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날 향해 웃었다. 아무리 악마라도 그의 미소는 내 심장을 녹일 수 있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우린 사랑하잖아. 사랑하는 영혼끼리 저승으로 가 함께 있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쁘다고.
-거짓말. 당신은 날 저승사자에게 팔아먹으려 했어.
-아니야...아니야...
그의 몸은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대신
-하하하...
지독한 저승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가 나타나자 내 영혼은 자유를 잃고 몸 안으로 던져졌다.
-헉!
-어차피 너는 죽게 돼 있어.
그는 가만히 누워 기계에 호흡을 맡기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저런 주검들은 골치 아프단 말이야. 전생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그건 저 아이에게도 좋지 않아. 물론 나에게는 많이 해롭지.
그의 입에서 기다란 검은 혀가 나왔다 들어갔다.
-살고 싶나?
삶이 나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호해졌다. 그러나 저자에 의해 내 영혼이 거둬진다는 것은 싫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의 손에 끌려가고 싶지는 않아.
사자는 웃었다.
-나는 너를 지금 당장 죽일 수도 있어.
그의 혀가 뱀처럼 뻗어 나왔다. 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꼭 감았다. 사자는 날 비웃었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고개가 앞으로 향하여졌고, 감았던 눈은 사르르 떠졌다. 사자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돌기안의 구더기들 때문에 혀가 하얗게 보였다.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내 눈은 감기지 않았다. 혀가 내 얼굴 가까이 다가오고 마치 혀를 맞듯이 내 입도 벌어졌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자는 더 크게 웃었다. 살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내 영혼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자의 혀가 내 입 안으로 돌아왔다. 썩은 내와 비린내를 동시에 풍기고 있는 혀는 내 입안을 구경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난 침을 삼킬 수 없었다. 사자의 눈은 생글거렸다. 붉은 눈동자는 더 붉었고, 흰자위는 더 희었다. 그렇게 내 입안에서 돌기만 하던 혀가 갑자기 멈추었다.
-널 죽일 수도 있어!
그의 외침은 송곳처럼 내 귀에 꽂히고 혀는 말뚝처럼 내 목구멍에 꽂혔다.
-컥!
숨을 쉴 수 없었다. 내 목구멍에 저 혓바닥이 박혀 있어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
-띠 띠 띠 띠..
기계들은 내가 숨을 멎었다고 신호를 보냈고, 간호사와 의사가 단숨에 달려왔다.
그들은 내 심장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인간들의 모습을 보며 사자는 경쾌하게 웃어댔다. 기계의 소음과 사자의 웃음소리와 허둥대는 의사의 목소리에 나는 괴로워 몸부림쳤다.
사자의 혀가 한순간 쑥 빠져 나갔다. 공기가 한꺼번에 몰려 들어와 납작해진 폐를 부풀려 놓았다.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의사는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 내렸다.
-고생하셨어요.
옆에 있던 간호사가 말했다. 의사는 내 몸에 청진기를 갖다 대며 심박동 소리를 들었다. 간호사는 그런 의사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관찰하였다. 잠시 후 의사가 말했다.
-휴- 살았어.
그들은 기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자가 배를 움켜쥐며 웃었다. 한동안 웃던 사자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때, 나와 계약할 맘이 있는가?
-계약의 내용은 어떤 건가요?
-영혼 열을 빼내 내게 건네주면 널 살려주지.
-그렇다면 내게 다시 건강한 삶을 주실 건가요?
사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면 계약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기회일는지도 모른다.
-단, 그 영혼들이 너에게 자기 영혼을 다 줘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널 사랑해야 해. 허나 네가 영혼 사냥꾼이라는 게 탄로 나는 순간, 끽-
사자는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저승사자의 웃음과 소용돌이처럼 사라졌던 남자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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