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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비칰의 이야기

남만야수왕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와사비칰
작품등록일 :
2022.05.11 22:17
최근연재일 :
2022.08.31 08:38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8,208
추천수 :
139
글자수 :
263,461

작성
22.06.08 22:23
조회
141
추천
1
글자
10쪽

운귀고원(云贵高原)으로 보내진 아이 (2)

DUMMY

'왜 나만 항상 이 모양인건데.'


바닥에 엎어진 채 노인과 복면인이 사라질 때까지 떨고 있던 반웅. 굳게 움켜쥔 작은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차가운 흙의 감촉이 그의 비참한 심정에 날카롭게 파고든다.


'난 수련동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임했어. 하지만 오독환은 무슨 연유인지 제대로 듣지도 않았고, 무진이라는 감독관은 다짜고짜 함구하라며 협박했지. 그 모든 걸 견뎌내고 무공을 익혔음에도 끌려가는 노인네 한 명조차 돕지 못하다니. 하늘이시여, 이게 정녕 공평합니까?'


애써 억눌러 왔던 수련동의 인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그를 비웃는다. 그를 업신여기던 수련동의 아이들. 암굴에서 벌어진 돌발 상황에도 제때 대처하지 못하고 되레 협박한 무진. 배운 대로 하지 않는다며 꾸짖던 강휘. 비겁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뒤 비무에 임한 맹웅과 결국 자신을 퇴출당하게 만들었던 간소소까지.


'내상을 입은 상태로 최대한 수련하려 노력했지만 그들은 내막도 묻지 않고 꼴찌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내쳤지. 나도 스스로 기감을 일깨웠는데! 이곳에 버려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충분히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재능을 지녔는데! 대체 왜 나만...'


터져 나오는 눈물을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닦으며 어금니를 꽉 깨무는 반웅. 몰래 나온 것이 거야휘에게 들킬까 두려워 조용히 오열하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다.


'그저 중원에 나가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태양 신궁의 소궁주도 아니고, 천하제일고수는 더더욱 아니고! 이게 그렇게 과분한 꿈입니까?'


소리 없이 하늘을 원망하던 반웅. 한 식경이나 이어진 그의 한탄은 묘시를 맞이하여 떠오른 태양이 은은히 타오르는 모습에 가려져 자취를 감추었다. 농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무거워진 발을 옮기며 요동치던 마음을 겨우 추스른 반웅. 농장에서 그런 그를 맞이하는 건 거야휘의 일갈(一喝)이었다.


"예끼 이놈아! 은월랑(銀月狼) 젖은 왜 아직도 안 짜고 있는 게냐? 또 어디서 무공을 익힌답시고 농땡이나 피우고 온 게로구나!"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분명 무언가 달라졌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과 달라진 반웅의 말투를 듣는 순간 고산선의 거야휘는 그의 변화를 직감했다.


'새벽에 몰래 나가서 무공을 연마하다 변고가 생긴 모양이로구나. 이제 포기할 때도 되었거늘.'


거야휘가 조심스레 지켜본 결과 반웅은 기감을 일깨우는데 성공했지만 소질은 많이 부족한 아이였다. 비록 누구보다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무학은 노력만으로 경지에 이를 수 없는 잔인한 학문이다. 그렇기에 힘이 전부인 무림이라는 세상에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기 보다는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란 것이다.


게다가 반웅은 역마살을 타고난 아이였다. 부족한 무공 실력으로 이리저리 세상의 풍파에 휘말리기 보단 성인이 되어 조용히 상인이나 표객(鏢客)을 하는 것이 맞으리라.


'만야환상대법(萬野喚相大法)을 완성시키지 않고 수련을 해도 결국 시간 낭비인 것을 어찌 모르느냐.'


무거운 항아리를 들고 다시 길을 나서는 반웅을 보며 거야휘는 작게 읊조렸다. 야수의 기운을 흡수하는 단계를 거치지 못했기에 조만간 벽을 만나게 될 것이 뻔하다. 수많은 무림 고수를 길러낸 백발노인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굳이 입으려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저는 강해질 겁니다, 할아버지. 부디 노여워 마시길...'


뒤에서 바라보는 거야휘의 걱정 어린 시선을 모르는 반웅은 입술을 깨물며 오늘 처음 만난 노인의 조언대로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모른 채.




은월랑 앞에 항아리를 내려놓고 젖을 짤 준비를 하는 반웅. 먼저 손을 닦은 뒤 열심히 비벼서 따뜻하게 만드는 모습으로 보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준비를 마친 그가 보드랍게 어미 늑대의 젖무리를 쥔다.


'언제. 까지. 이런. 식으로. 젖이나. 짜야. 하는. 건데!'


박자를 타면서 어미 은월랑의 젖을 당기는 반웅. 비록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이지만 정신을 집중한다면 매병 걸린 노인의 말대로 능히 행할 수 있으리라. 육포 값으로 일러준 심법이지만 과연 수지타산이 맞을지 알아볼 차례다.


'아해야, 잘 새겨 듣거라. 타고난 자질은 둔재가 분명하지만 일러주는 대로 운기하면 언젠가 일류 고수는 족히 될 수 있을 게다. 애초에 네가 익힌 심법은 채기법(採氣法) 흉내만 낸 조악한 놈이라 제약이 많다. 그러니 본좌가 말년에 깨달음을 얻고 창안한 심법을 전수해주마. 네가 이걸로 고수가 되면 사부의 은혜를 베푼 이 늙은이를 구하러 오거라.'


채기법이라니. 게다가 야수신궁의 만야환상대법이 채기법의 일종이라니. 악명이 자자한 전설의 흡성대법(吸星大法)이 채기법의 정점이 아니던가. 무림 공적이 되어 익힌 자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 것이 벌써 60년 전이다.


반웅은 매병 걸린 노인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은월랑에게 이를 시전해 보았다. 애초에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이 내몰린 탓에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반웅이다. 게다가 수련동에서 진실의 부재를 몸소 겪어보지 않았던가.


'단전에 있는 기운을 팔맥에 먼저 흩뿌리고, 속으로 주문을 외우면서 음기가 충만한 상대와 접촉한 부위에 집중하여 기를 끌어낸다. 이후 추출한 기운을 전신세맥으로 흡수한 뒤 흩뿌려진 기운과 함께 감싸서 이동하되, 흡수한 기운은 절대 단전에 모으지는 말고 팔맥에 그대로...두는 거였나? 그 다음에는...'


반웅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은월랑의 유통을 살포시 쥐고 노인이 일러준 구절대로 따라해 본다.


"옴 바라한 움 바라칸. 메네 마잇 수."


몇 번이나 주문을 외워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은월랑의 기운. 노인이 일러준 주문을 그저 무아지경에 이르기 위한 구문으로 치부하던 반웅은 멀뚱멀뚱 쳐다보는 은월랑의 눈빛이 부담스럽다. 그 안에 담긴 외설스러운 진의를 알았다면 아마 입 밖에 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역시 허풍쟁이 매병 노인네였던 게 분명해. 천하제일인은 무슨. 노망난 노인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의지하는 내 꼴이 우습구나.'


반웅은 한숨을 쉬면서 아무 생각 없이 전신에 흩어져있던 기운을 다시 단전으로 불러들인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이건 대체 무슨...'


은월랑과 맞닿아 있던 반웅의 손끝에서 소량의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텅 비어버린 기맥을 따라 그의 전신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어미 늑대의 음기다.


'어? 어어?'


천천히 움직이던 기운이 어느새 기하급수(幾何級數)적으로 탄력을 얻고 기맥을 따라 질주한다. 목표는 반웅의 단전이다. 당황한 반웅의 머릿속에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절대 단전에 모으지는 말고.'


허나 이미 때는 늦었다. 단전으로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은월랑의 기운과 본신의 내공이 부딪힌다.


'젠장! 멈춰! 멈추라고! 으악!'


콰콰쾅.


반웅의 몸속에서 두 가지 이질적인 기운이 부딪히고 섞이면서 새로운 성질의 기운이 형성되었다. 용암이 바다와 섞여 새로운 대지가 만들어지듯 단단하고 뜨거운 기운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다.


쿨럭.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붉은 핏덩이를 바닥에 토해낸 반웅. 안색은 창백하지만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고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전에 들어온 기운을 다시 전신세맥으로 옮겨야만 한다! 노야가 그리 일러주신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반웅이 식어버린 대지처럼 꿈쩍도 안 하는 새로운 기운이 단전에서 굳어버린 건 아닐지 너무나 두려웠다. 다행히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집중하여 찬찬히 밖으로 밀어내자 기운이 밖으로 배출되며 조금씩 단전에서 올라오던 열기가 사그라진다.


'이래서 단전으로 흡수하면 안 된다고 하셨구나. 내공이 많았다면 단전이 망가져서 이미 죽었겠지.'


반 시진이나 이어진 사투 끝에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반웅은 노야를 만났던 방향으로 구배지례를 올렸다. 심법의 효용을 인정하여 사부로 맞이한 것이다.


사실 반웅이 단전으로 은월랑의 기운을 새롭게 익힌 채기법으로 흡수하였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의 내공이 한 줌 밖에 안 되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만야환상대법이 지닌 성질 덕분이기도 했다. 야수의 기운을 정해진 방식대로 흡수해야 완성할 수 있는 만야환상대법을 반웅은 위험천만한 방법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하늘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다음부턴 단전으로 완전히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천천히 전신세맥과 기맥을 따라 순환시켜야겠어. 게다가 운기하는 속도에 따라 변화하는 오묘한 이치가 담겨있다니. 기필코 절대고수가 되어 이 은혜를 갚고 수련동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테다. 노력만으로 재능을 뛰어넘는 모습을.'


외문기공에 재능이 있던 반웅은 본능적으로 노인이 일러준 음양조화신공(陰陽調和神功)이 자신이 익힌 만야환상대법과 상성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속에 담긴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와 노인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건 먼 훗날의 일이지만 말이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두 손을 불끈 쥔 반웅의 얼굴을 연신 혀로 핥아주는 은월랑. 반웅은 새롭게 익힌 내공심법을 매일 아침 연습할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채기법(採氣法) - 타인의 기운을 흡수하는 무공. 종류가 다양하다.


흡성대법(吸星大法) - 60년 전 첫 정사대전 때 나타난 악랄한 무공. 채기법의 정점이라 불린다.


감언이설(甘言利說) - 꾸며낸 달콤한 말과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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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동의 회의 - 억취소악 (憶吹簫樂) +1 22.05.23 300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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