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협화음 (2)
"할아버지, 이대로 아란 낭자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아서라. 그런 불길한 말을 하는 것이 성심성의를 다하여 아해를 치료한 적야에게 실례가 되는 법이거늘. 어찌 그리 생각이 짧고 성정이 급한 것이냐!"
방바닥 한복판에 누워서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고 있는 아란. 고뿔이라도 든 것처럼 온몸에 홍조가 올라온 그녀의 곁에서 반웅은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반면 이지노괴 가천일은 벌러덩 누워서 연신 양화주(洋河酒)만 들이키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안방에서 쉬는 것처럼 너무도 편안해 보이지만 말이다.
그런 반웅과 가천일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봉소 마을의 촌장 적야. 한 때 단인소괴라는 별호로 남만 전역은 물론 중원 무림에도 그 이름을 널리 떨친 소괴가 이런 외진 마을에서 칩거하고 있을 것이라 그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평소라면 상인들만 방문하였을 그의 초가집에 이처럼 많은 방문객이 들린 것은 어쩌면 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로 처음일지도 모른다. 무려 성호단의 의복을 걸친 다섯 명의 불청객과 흑의에 붉은 전갈 자수가 새겨진 규헐단의 살수마저 조용히 구석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으니 말이다.
"저기 있잖아...티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노인에게 백화단을 넘긴거야? 아무리 십괴라 하여도 이미 그 빛이 바랜지 오래인데...겨우 한 명뿐이라면 지금이라도 다시...아, 알겠어! 조용히 있으면 될 거 아냐!"
'하...지금 이 방 안에 십괴 수준의 고수가 무려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을 모르니 용감하기 짝이 없구나...부럽다, 부러워...'
간소소의 귓속말을 듣자마자 살기를 한껏 끌어올린 티엔. 다른 이들은 눈 앞에서 기운을 감추고 있는 촌장의 정체를 결코 알아채지 못할 것이기에 별다른 설명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 또한 이지노괴에 버금가는 고수라는 것은 그녀에게는 자명한 사실이다. 규헐단 최고 살수 앞에서 이토록 철저히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은 그 이외에는 없으리라.
"웅아, 극음지체를 앓던 여아는 천년화리의 내단과 백화단을 복용하였으니 이내 기운을 차릴 것이다. 친정댁에서 겪은 별고가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지 모르나, 육신의 병은 이미 거진 나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깨어나면 다시 여행길에 올라도 될 것이야."
마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은 '웅아'라는 호칭과 극음지체라는 병명을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맹웅. 같은 이름을 지닌 반웅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전에 악부인과 맺었던 약속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악란 소저도 분명 극음지체를 앓고 있다고 하셨지. 그녀를 위해 극양의 기운을 지닌 영약을 어서 찾아야만 할텐데. 귀인께서 전수해주신 건곤대나이를 전해주고 부부로서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지 않으면 백화궁의 선조들은 물론, 그 뿌리인 배화교에 큰 죄를 짓는 것이리라...'
무림에서 목숨보다 귀한 상승 무공을 익히는 기연을 얻게 되었으니 그에 따른 언약을 지키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허나 맹웅이 지금 방 안에 누워있는 처자가 자신이 언젠가 찾아내어야만 하는 악란 소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먼 미래가 될 것이다.
"저는 방이 조금 비좁은 듯 하여 마당에서 비무라도 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저도 따라 나가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어색한지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맹저와 간약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섰다.
"그럼 저도 이만..."
"喝! 너는 여기 남아 있거라! 내상을 입은 듯하니 가볍게 추궁과혈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서려던 반고르는 적야 노인의 말에 그대로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아무리 가벼운 내상이라도 지금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 그럼 대체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우리를 쫓아온 것인지 들어나 보자꾸나. 내 제자를 습격할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북룡산맥에서 벌어진 사달과 무관한 아해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곧바로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간소소 일행들을 추궁하는 가천일.
바깥에는 긴 어둠이 자리잡았으니 담소를 나누기에 이보다 좋은 시간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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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고작 거검문 전대 문주와 소문주가 함께 자결한 이유를 듣기 위해서 반웅을 데려가려 하였다는 말이냐? 그런 일이라면 처음부터 정중히 도움을 요청하고 의사를 묻는 것이 순리가 아니더냐! 대체 언제부터 성호단이라는 집단이 증인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어린 아해의 손목을 앗아가려 하고, 나아가 납치까지 하는 곳이 되었더냐! 너희들이야말로 잔악무도한 흑도 무리들 보다 더한 놈들이 아니냐!"
취기가 올라왔는지 지금껏 숨겨온 기운을 거침없이 뿜어내면서 분개하는 가천일. 그 거대하면서도 폐부를 꿰뚫는 살기로 보아 적야가 필사적으로 그를 막아서지 않았다면 간소소는 물론, 반웅을 공격한 반고르의 손목은 그의 탄지공에 희생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사안이 워낙 시급하고, 그 배후에 마교가 엮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喝!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녀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로구나! 증인을 보호하지는 못할 망정 해를 가하려 하다니!"
"..."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한 간소소의 말을 단칼에 자르는 가천일. 아무리 마교 무리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 칼날을 대월국의 백성이자 남만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아이들에게 들이대면 안되는 법이다.
"하...적절한 시기에 백화단을 건내준 네 옆의 규헐단 처자 때문에 이 정도로 넘어가는 줄 알거라. 앞으로 내 제자는 물론이거니와, 나와 다시금 마주치게 된다면 고개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있거라! 고개를 들면 오늘 취하지 않은 네 녀석의 손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거검문은 물론 마교 무리와도 아무런 상관도 없고, 그들에 대한 정보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내일 이른 시각부터 다시 여행길에 오를 것이니, 너희들은 이만 돌아가거라!"
"우둔한 제 친우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얘들아, 이만 돌아가자."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우두커니 무릎만 꿇고 있는 간소소와 아이들을 데리고 촌장댁을 나서는 티엔. 복수심에 불타올라 여덟 개의 손가락을 버려가면서 무공을 연마한 이지노괴가 그들을 순순히 보내주었다는 것만으로 큰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밑에서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반웅 또한 분명 대단한 고수로 성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반웅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티엔이 너덜너덜하다 못해 구멍마저 숭숭 뚫린 문을 열자 마당 흙바닥에 앉아서 조용히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맹저와 간약이 부리나케 일어나 다시금 비무를 하는 시늉을 취한다. 티엔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내 그들의 귀를 잡아당기면서 끌고갔지만 말이다.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적야는 자신의 시야에서 야수신궁의 인물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의 의형제 가천일과 대월국의 명운이 걸린 대화를 나눌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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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은 남송의 사주를 받은 대리국에서 조만간 대월국을 침공할 예정이라는 것이냐?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땡중들을 무분별하게 관직에 올리더니 기어코 맛탱이가 가버린 모양이구나! 대리국의 병력은 우리 대월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형님. 전쟁은 수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리국이 서쪽 국경지대를 공격한다면 이 틈을 타서 남송 놈들이 그대로 남하하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의 국경지대와도 맞닿아 있는 곳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셈이니 참전한다고 하면 그들을 막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일전에 봉소를 방문한 상인들이 더 이상 남만의 화폐를 받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적야. 그가 각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무려 20년만에 다시 전서구를 날리지 않았더라면 이 사실을 결코 알아낼 수 없었으리라.
"우리 대월국은 송금림과 도채밀림이라는 천연 요새가 있다! 그 유명한 촉한의 와룡 선생조차 그의 저서 제갈량집(諸葛亮集)에서 남만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적어두지 않았더냐! 운귀고원조차 제대로 넘지 못하는 것이 중원 놈들인데 어찌 남송 놈들을 두려워 하겠느냐!"
"형님, 대월국이 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세의 침공을 이겨내지 못한 적이 없으나, 정사대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이 또 다시 전란의 그림자로 인해 고통 받아야 하겠습니까?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백성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전쟁이라니.
지금껏 평화로웠던 대월국에 어두운 전란의 기운이 드리워지고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반웅과 아란은 언쟁을 벌이고 있는 두 노인들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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