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란성을 떠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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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분주히 오가지만 정작 물건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는 기묘한 저잣거리. 페르시아 상인들의 뒤를 봐주던 흑도 무리가 갑작스런 습격에 죽음을 맞이하여 다들 몸을 사리고 있다. 그 안에서 습격자인 간소소의 명에 따라 거검문에서 묵었던 이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는 맹웅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불과 몇 시진 전에 벌어진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허름한 금은방에 자리를 잡은 흑도 무리로 추정되는 마니교인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을 방관하고 유일한 생존자였던 중년인마저 결국 눈 앞에서 자결했다. 이것이 정녕 내가 상상하던 무림인가.'
아무런 죄도 없이 무작정 간소소가 그들을 살해하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싶지만, 무공 실력마저 미천한 평범한 마니교인들에게 그녀가 보인 무위는 무자비한 학살극에 가까웠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을때 어찌나 놀랐는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순간적으로 바닥에 주저앉지 않았던가. 간소소는 그들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무리더라도 그런식으로 몰살하는 것이 정녕 옳은 것인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하여 야수신궁에...나아가 성호단에 입단한 것이더냐.'
고요하게 가라앉은 맹웅의 두 눈은 한참동안 우두커니 허공만을 응시한 뒤 다시 초점을 되찾는다. 크고 작은 객점들에 들러 간소소가 명한대로 사건 당일 거검문에 묵었던 남녀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만 한다.
"어서옵시..."
"성호단 신입 단원 맹웅이라 합니다. 며칠 전 이곳에 들렀던 어린 소년과 소녀를 아십니까? 제 나이 또래였을 겁니다."
"성호단 수습 단원이라니, 어린 나이에도 성취가 대단하구려. 또래로 보이는 소년은 보았는데..."
객점주가 성호단이라는 말에 기민하게 반응하여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빠르게 읊어준다. 도성에서 성호단의 위세가 제법 높은 모양이다.
이렇게 여러 곳에 수소문하여 얻어낸 증언들과 간소소가 일러준 정보를 조합해 보면 소년은 키는 자신과 비슷하지만 전체적으로 계집아이처럼 선이 가늘고 피부가 창백하여 마치 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멀리서 보아도 새하얀 피부색 때문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계집아이 같이 생겼다니. 그 녀석과 인상이 정말 비슷하네. 창백한 피부색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맹웅은 몇달 전 비무에서 자신이 큰 잘못을 범한 반웅이 문득 떠오른다. 내공을 끌어올려 그를 공격했던 맹웅의 손끝에는 반웅의 복부를 파고든 불쾌한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온 힘을 다하여 가격하였기에 잊을 수가 없다.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반웅이 바로 다음 날 탈락한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허나 지금은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다. 창백한 소년, 적발이 인상적인 소녀, 그리고 항상 뒷짐을 지고 있는 노인으로 구성된 기묘한 삼인이 대체 어디로 향하였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맹웅이 골목 끝에 위치한 허름한 객점으로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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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야, 여기는 어른들이 식사하는 곳이니..."
"성호단 신입 단원 맹웅입니다. 여쭤볼게 있습니다."
맹웅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16살 가량의 점소이가 맹웅의 옷차림을 찬찬히 살펴본 뒤 성호단의 복장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연다.
"크흠. 성호단 신입 단원께서 어쩐 일로 오셨소."
"근래 제 또래의 사내 아이와 적발의 아리따운 낭자를 혹시 보셨습니까? 그들에 대해 알고 계시다면 속히 알려주십시오. 사례는 넉넉히 하겠습니다."
맹웅이 품에서 꺼내든 전낭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점소이. 금새 표정과 말투를 바꾸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다.
"소협 또래의 소년과 아름다운 적발 낭자라니. 그런 조합은 저희 객점에서는 흔치 않습니다. 어디 보자...흐음...아! 딱 한 번 그런 무리의 손님들이 방문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사흘 전에 저희 객점에서 만두를 시킨 손님들일 겁니다! 저는 기억력이 무척 좋은 편이니..."
"그렇군요. 혹시 그들이 어디로 떠났는지 들으셨습니까? 그에 대한 조금의 실마리라도 제공해주신다면 좋겠군요."
허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맹웅을 응시하기만 하는 점소이. 손가락을 엽전 모양으로 만들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낸다.
'돈을 달라는 게로구나.'
맹웅이 천천히 전낭을 열고 그 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점소이에게 건네자 굳어있던 점소이가 다시 생기를 띠고 과장스러운 표정으로 장황한 말들을 쏟아낸다.
"어디 보자...크흠. 그분들이 대화하던 것을 결코 엿들으려 한 건 아닙니다! 듣자하니 낭자와 소년은 어느 노인에게 이끌려 전국을 여행중인 것 같았습니다. 노괴?라는 작자에게 납치를 당한 뒤 고약한 술수에 당해 어쩔수 없이 따라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여 낭자가 소년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하였으나 결국 거절 당하더군요. 그 뒤에 어떤 유명한 분의 이름이 들렸는데...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워낙 널리 알려진 분의 이름이다 보니 자연스레 들렸다고나 할까...보름 전에 저희 북란성에 들러주신 귀인이시기도 하고, 워낙 무림에서도 유명하신 분이다 보니...아, 저희 민초들을 위해 힘써주시는 분이기도..."
몰래 엿듣지 않았다는 점을 연신 강조하는 점소이. 돈값을 하기 위해서 더욱 필사적으로 쏟아내는 그의 말 속에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정보들이 넘쳐흐른다. 억지로. 납치. 도망. 노괴. 전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 아닌가! 사이좋게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던 남녀가 사실은 어느 노괴에게 붙잡혀 강제로 끌려다니는 사이였다니! 맹웅이 다급히 점소이의 말을 끊어낸다.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그들이 추적하고 있는 것이 대체 어느 분인지 일러주십시오! 한 시가 급한 사안입니다!"
소년과 소녀를 구하기 위해선 그들의 행선지를 반드시 알아내야만 한다!
"조상님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무려...망각행승을 찾아 나선다고 했습니다!"
망각행승이라니! 비록 무림에 나온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본가에서 자주 들어보았던 맹웅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점소이를 바라본다. 남만 대월국의 백성 중에서 백성을 위해 힘쓰는 망각행승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다.
허나 그를 찾는다는건 떨어진 모래알 속에서 좁쌀 한 톨을 찾아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정처없이 남만을 떠돌아 다니면서 민심을 구제하고 있기에 그의 행보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름 전에 북란성을 이미 방문했다면 적어도 수개월 동안은 이 곳에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젠장,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건가! 대체 어떤 연유로 망각행승을 찾아다니는지 모르지만 그를 찾기 위해 노괴가 소년과 낭자를 납치하였다면 분명 그와 깊은 연이 있을 터! 어쩌면 숨겨둔 혈육일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안이다! 어서 사부님께 알려 그들을 구해내야만 한다!'
점소이의 왜곡된 기억과 과도한 열정으로 인하여 단단히 오해하게 된 맹웅. 그의 뇌리에서 소년 소녀는 이미 망각행승의 혈육으로 둔갑하여 이들을 납치한 노괴는 사악하기 그지 없는 악한이 되어있다. 맹웅은 은자 두 냥을 추가로 주어 고마움을 표한 뒤 객점을 박차고 나선다.
"많은 도움이 되었소! 그럼 이만..."
멀어지는 그의 등 뒤로 거금을 받아 기분이 좋아 보이는 점소이가 큰 소리로 결정적인 정보를 덧붙인다.
"망각행승께서는 봉황의 둥지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우연히 맹각행승도 북란성을 떠나기 전 이 객점에서 식사를 한 모양이다. 추적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생각했지만 점소이가 전해준 새로운 실마리 덕분에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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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린 소년과 소녀는 어떤 노인과 동행하고 있고, 행선지조차 묘연한 망각행승을 찾아 나서겠다고 하였다고?"
"사부님! 소년과 젊은 처자는 망각행승의 혈육일 것입니다! 이들을 제압하여 망각행승의 뒤를 쫓는 노괴는 분명 남만에서 손꼽히는 악인이겠지요! 하루라도 빨리 이들을 찾아나서야 큰 화를 막을 수..."
성호단 분타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들을 추격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맹웅. 자신의 생각에 심취하여 이제는 맹신에 가까운 그의 발언에 간소소는 나직이 한숨을 내쉰 뒤 그를 다그친다.
"맹웅! 네가 점소이에게 들은 정보는 주관적인 감상으로 가득하여 정확성은 물론 신빙성마저 떨어진다! 겨우 한 사람의 주장만으로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은 우매한 자들이나 저지르는 실책이니 머리를 식히도록 해라!"
간소소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맹웅. 어차피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으니 달라질 건 없다.
"후. 어차피 거검문에서 벌어진 일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선 그들을 찾아야만 한다. 한 번쯤 들러야 하는 곳이니 이참에 가자꾸나."
봉황의 둥지라 불리우는 국경 마을 봉소.
그곳으로 성호단 단주와 네 명의 신입 단원들이 향할 예정이다.
-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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