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찾아서 (3)
교룡삭으로 사지를 봉한 마니교도 생존자를 앞세워 한 식경 가량 걸은 뒤에야 당도한 거검문의 대문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검붉은 휘장으로 치장된 검 문양이 인상적인 거대한 문 위에 거검문(巨劍門)이라 적힌 간판이 태양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다.
양 옆에 선 문지기들에게 소속을 밝힌다.
"성호단 단주 입니다. 거검문에서 벌어진 전임 문주와 아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하여 죗값을 치뤄야만 하는 이를 선물로 붙잡아 왔으니 부디 문주께 전해주시지요."
전대 문주를 거론하자 사색이 되어 안으로 황급히 달려가는 문지기들. 그들에게 이 사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한 다경쯤 시간이 흐르고 대문이 열리자 다섯 명의 남정네들이 포권지례를 한다. 불필요한 인사치레가 따로 없다. 양옆에 선 네 명의 노쇠한 장로들 틈에서 인사를 올리는 고작 약관의 나이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나이에 비해 성취가 대단한 저 훤칠한 남자가 바로 거검문의 새로운 문주로 등극한 추결일 것이다.
"성호단 단주 간소소 낭자시군요. 거검문의 문주 추결입니다.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부디 안으로 드시지요. 뒤에 아이들은..."
"제자들입니다. 아직 성호단의 관행과 무림의 법도에 대해 실전을 통해 가르치는 중이니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래라면 이렇게 어린 수련생들에게 한 문파의 치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공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전원 성호단 소속의 후기지수들이다. 추후 야수신궁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될 지도 모르니 쉽게 거절할 수는 없으리라. 어릴적부터 이들과 연을 쌓을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건 하수들만이 범하는 실책이다.
고개를 숙인 채 고심하던 젊은 문주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행을 허락한다.
"간소소 단주님을 믿겠습니다. 부디 안으로 드시지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성호단의 위엄과 정의를 일러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북란성의 실세라 불리는 거검문의 안뜰은 각양각색의 꽃들이 울거진 것으로 보아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팔괘의 정수가 담긴 초목의 배치에는 분명 공간 전체를 활용한 진법이 숨겨져 있다.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꽃들을 더욱 유심히 살펴보려던 찰나, 추결이 입을 연다.
"이 곳이 저희 거검문 안뜰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한 정자입니다. 이 곳에 앉아서 데려오신 서역인에 대하여 일러주시지요."
넓은 뜰에 비해 이토록 검소한 정자라니. 값싼 은행나무들을 둥그렇게 세워둔 모양새가 그 기세에 비해 내실이 부족한 거검문의 현실을 보여준다.
정자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뒤 최대한 간략히 상황을 설명한다.
"전대 소문주가 흑도 무리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 흑도 무리의 정체가 마교 무리라는 점을 문주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허를 찌르기 위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만 젊은 문주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곧바로 응수해 온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면 저는 물론 거검문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본문의 고수들이 진즉 알고 있었겠지요. 어찌 그리 섬뜩한 추궁을 입 밖으로 내뱉으십니까. 뭇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자연스레 추궁을 받아 넘기는 문주에 비해 순간적으로 낯빛이 어두워지는 네 명의 장로들. 노장들 답게 곧바로 안색을 회복했지만 '선물'과 함께 직접 행차한 이유를 내심 예상하고 있으리라.
"그렇게 나오기로 정하셨군요. 일단 제가 데려온 증인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오른손으로 수신호를 보내자 이곳까지 데려온 색목인을 감시하고 있던 맹웅이 입에 물려둔 재갈을 풀어준다.
자유를 되찾은 중년인의 입에서 저주 섞인 응어리들이 터져나온다.
"내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당신들 남만인들은 중원 무림을 장악한 마교인들에게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너희들 자녀는 물론 그 손주들도..."
물론 그 주절거림을 계속 들어줄 생각은 없다.
퍽.
살기를 담아 그의 턱을 철선으로 후려친다.
"묻는 말에만 답해라! 그리하지 않으면 최대한 고통스럽게 불구로 만든 뒤 돼지 우리에서 천수가 다할 때까지 돼지 노리개로 길러주마! 명예롭게 죽고 싶다면 진실만을 말해라!"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것처럼 붉게 부풀어오른 중년인의 눈. 아무리 살기를 담아 노려보아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어찌 모르는 걸까. 그 아둔함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타국 출신의 우자(愚者)가 허락없이 다시 입을 놀린다.
"네년이 아무리 협박하여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조용히 고향 땅을 그리며 함께 예배를 올리고 있었던 교인들을 살해하고 이제는 거검문의 소문주와 엮어 같은 남만인들마저 해하려 하는구나! 내가 비록 네년에게 패하였으나 똑똑히 알아두거라! 색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이들을 살해한 네년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역시 낯짝 두꺼운 마니교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마니교인이 아니라면 굳이 마니향초를 사용할 이유가 없거늘. 더 이상 궤변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의 처지를 일러주어야만 한다.
[남만인 첩이 낳은 아들이 있던데]
전음으로 숨겨둔 자식을 거론하자 붉게 달아올았던 얼굴이 이제는 바들바들 떨면서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감정 변화를 이리도 훤히 드러내다니. 협상과는 연이 없는 어리석은 중년인이 결국 입을 굳게 다문다. 이제는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할 것이다.
"소문주와 흑도 무리는 내통하는 사이였다지?"
"...우리가 흑도 무리인지는 모르나 소문주와 접선하였던 것은 맞소."
"갑작스레 이방인을 데려와 근거 없는 증언으로 본문을 어지럽게 하시니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중년인의 증언에 다급히 끼어드는 추결. 얌전히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전대 소문주가 마교 무리와 엮여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거검문은 진상조사를 위해 봉문을 당하고 끝내 멸문지화마저 당할 수 있기에 무작정 부정하고픈 그의 마음이 어느정도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저희 성호단에서는 흑도 무리의 배후에 마교 놈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그 거처를 급습하였습니다. 맹렬히 저항하는 마니교인들은 어쩔 수 없이 죽이고 핵심 인물로 보이는 이만 잡아왔죠."
"그것 참 잘 된 일이로군요. 성호단에서 마교 무리의 싹을 깨끗이 베어냈으니 북란성에는 앞으로 평화가 찾아오겠습니다. 허나 전대 소문주와는 대체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설마 그 자의 말을 믿으십니까?"
아쉽게도 바로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데려온 색목인이다. 정황적 증거들은 이미 충분히 모았지만, 소문주가 마니교의 교리를 배우고 마교의 무공까지 익혔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황. 그의 초소도 진즉 정리하였을 것이기에 여기서 이 중년인을 통해 연결 고리를 밝혀야...
쿨럭.
추결과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중년인이 갑자기 입 안에서 새빨간 핏물을 토해내자 그 안에서 선분홍빛으로 빛나는 짧고 굵은 고깃덩어리가 허망하게 꿈틀댄다.
중년인의 혀다.
황급히 그를 지혈하기 위해서 점혈법을 펼치지만 굳게 다문 입은 결코 열리지 않고 되레 입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넘쳐 흘러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한 쪽 입꼬리를 올린 채 비웃음을 흘리면서 장렬히 바닥으로 쓰러지는 색목인. 자신이 초래한 끝없는 출혈 속에서 순교할 생각이다.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자결을 택하다니. 역시 비겁하기 짝이 없다.
마교인다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이건 재갈을 다시 물리지 않은 잘못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의 증언을 토대로 거검문 안에 똬리를 튼 마교 잔당들을 색출하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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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악! 짜악! 짜악!
간소소는 거검문을 나서자마자 매서운 손길로 맹웅의 따귀를 세 번 때린다. 새빨갛게 부어오른 볼따귀를 부여잡고 조용히 바닥만 응시하는 맹웅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맹웅! 네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하여 마니교인들은 애꿎은 목숨만 잃었구나! 전당포에 숨겨둔 다른 증인이 있어서 망정이지, 영영 진실을 밝히지 못할 뻔 하였다!"
허나 간소소는 이미 알고 있다. 적절한 시기를 놓친 증언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중년 남성의 시체만큼 큰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다음에 방문하여도 거검문 안에 숨어든 마교 잔당들은 이미 충분한 대비를 마친 이후일 것이다.
게다가 아직 소문주가 마교와 연관이 있다고 시원스레 밝혀진 것도 아니다. 명예도 모르고 이득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것으로 유명한 색목인 상인의 증언만으로 공명정대한 것으로 유명한 거검문을 끌어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믿을 수 있는 증인이 필요하다.
간소소는 고심 끝에 아직도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맹웅에게 한 가지 명을 내린다.
"맹웅! 네가 저지른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건이 벌어진 날 밤에 객으로 거검문에 묵었던 어린 소년과 여인을 데려오거라! 분명 이상한 점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들의 증언만이 거검문에 스며든 마교 무리를 척살하는데 이바지 할 수 있다!"
"예, 사부님."
묵묵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맹웅은 곧바로 길을 나선다.
그날 밤 거검문에서 벌어진 참상을 몸소 체험한 어린 소년과 여인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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