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귀고원(云贵高原)을 오르는 사내 (3)
두 노인을 따라 마침내 운귀 고원 정상에 도착한 무진은 뒷간 옆 뜰에서 축국을 즐기고 있는 반웅과 아이들을 발견했다.
‘저 나이대 애들은 역시 구희(球戱)를 즐기는군.’
40명 남짓의 아이들이 반씩 나뉘어 상대편의 구문에 공(氣球)을 차넣기 위해서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에 무진은 물론 두 노괴마저 흐뭇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이들의 유희를 관람했다.
‘축국은 모름지기 전략과 전술을 겨루는 놀이다. 누가 판을 짰는지 몰라도 실력 한 번 볼까?’
마침 맨 앞에서 기구를 뺏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이가 무진의 눈에 들어온다. 나이에 비해 체격도 크고 듬직한 것이 자신의 어릴적 모습 같다. 아마 하후진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형님, 아이들이 저리 열심히 임하고 있는데 우리도 오랜만에 같이 뛰는 건 어떻겠소?”
“아우님, 우리가 끼어들면 아이들이 어찌 편히 뛰어놀 수 있겠는가. 그저 조용히 구경만 하시게나.”
나이에 맞지 않게 아이들 노는 판에 끼어들려고 하는 가천일을 말리는 거야휘. 두 노인 중에 그나마 한 명이라도 상식을 갖추어 안도하는 무진이었다.
“그래도 그냥 지켜만 보면 재미없으니 누가 먼저 점수를 낼지 내기해 볼까 하는데, 아우님은 어떠신가?”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좋소! 지금 공을 들고 뛰는 아해에게 아껴둔 주과(酒果) 한 알을 걸겠소!”
주과라니. 북룡산맥 가장 깊숙한 곳에서 오 년에 단 한 번, 한 나무 당 열 알이 열리는 술기운 가득한 열매가 아닌가. 얻지 못할 영약은 아니지만 복용하면 최대 3년치 내공이 증가하는 별미(別味)라 명문세가들이 나오는 족족 쓸어가니 실제 값어치는 그 이상이리라. 무진은 어릴 적 그의 사부 몰래 꺼내먹은 그 달콤한 과육의 향과 맛이 떠올라 입맛을 다셨다.
“아우님이 그리 귀한 물건을 내기에 걸어주시니, 형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겠나. 내 흔쾌히 막아서고 있는 아해에게 아껴둔 백초탕(百草燙)을 걸겠네.”
‘이제 보니 순 허풍쟁이 들이로군. 주과에 백초탕이라니. 노괴들이 나이가 들면서 헛바람만 찼구나.’
엇비슷한 체격의 올돌궈에게 백초탕을 걸겠다는 거야휘에 말에 무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백가지 약초를 넣고 무려 사흘 밤낮으로 저으면서 끓여야 완성되는 백초탕은 중간에 한 시라도 눈을 떼면 성질이 변질되기에 만드는 이가 거의 없는 약이다.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고 내상을 치료하는 데 탁월한 성능을 지녔지만 그 수고로움을 감안하면 그 값을 논하기 어려우리라.
‘...만약 두 노인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면 둘도 없는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나도 무언가 걸어야겠다.’
두 노인 모두 인지를 뛰어넘는 고수들이 아니던가. 무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기에 걸 물건을 찾다가 자신의 품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전낭을 꺼내 들었다.
“노야들께서 귀한 영약을 내기에 걸어주시니, 어찌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허나 두 물건에 비견할 만한 귀한 물건이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여, 전재산인 은자 50냥이라도 걸면 안 되겠습니까?”
비록 은자 50냥이 일가족이 몇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이라 하여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운귀고원에선 짐덩이에 불과하다. 무진의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은자 50냥이면 두 물건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그것이 전재산이라면 기꺼이 받아주마. 물건이란 본디 그 소유주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지기 마련이지.”
“끌끌끌. 네놈을 거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라니 마음에 드는구나. 형님 말씀대로 지닌 돈 전부 걸도록 해라!”
무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별 탈 없이 내기가 성립되었다. 무진은 주저 없이 반웅에게 그의 묵직한 전낭을 걸었다.
–
‘무진 사부님은 대체 왜 여기까지 오신거지?’
무진을 발견한 반웅은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을 다 하면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망을 보던 올돌궈가 아니었다면 무려 세 명이나 농장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무공 수련하던 걸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설마...우리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아이를 다시 수련동으로 데려갈 생각인건가?’
반웅은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가지 생각에 꽂히고 말았다. 티엔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을로 찾아와 자신들을 거두어 갔던 것처럼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고. 표정을 잃은 채 자못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는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다 함께 무공을 익히자는 쓸데없는 제안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애꿎은 바닥만 연신 차대면서 매번 하후진과 올돌궈에게 축국 영웅 역할을 떠넘긴 것을 후회해 보지만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반웅은 중앙에서 팽팽히 맞서고 있는 아이들 무리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쪽이야, 이쪽! 우리 편이 이겨야 눈에 뛸 수 있어!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뛰어!”
“헛소리 하지 말고 뛰기나 해!”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진 반웅과는 다르게 하후진은 아이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면서 하나로 뭉치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미 공에 눈이 돌아가 난전을 벌이고 있는 다른 아이들은 그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지만 말이다.
결국 하후진은 앞뒤로 연신 너울대는 전선(前線)에서 벗어나 상대편이 점수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해 구문 쪽으로 돌아갔다.
‘젠장. 이대로는 진다.’
거듭된 무공 수련으로 체력이 방전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축국 영웅을 많이 해 본 올돌궈는 망을 보면서 쉬다 왔기에 아직도 쌩쌩하다. 그러니 기력이 바닥난 아이들이 연거푸 달라붙어도 공을 빼앗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질 뿐. 몇몇 아이는 이미 바닥에 누워 간신히 호흡만 하고 있을 지경이다.
“내가 바로 오늘의 축국 영웅이다! 이거야말로 천운이라 할 수 있겠지! 고맙다!”
자신만만하게 아이들을 도발하며 나아가고 있는 올돌궈는 신이난 모양이다. 하후진이 물러난 이후로 추풍낙엽처럼 적이 쓰러지는 모습에 그 누가 흥분하지 않겠는가. 전율이 온몸에 넘쳐흐르다 못해 전능감마저 느껴진다.
“마지막은 역시 네 녀석이로군.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 두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
마침내 구문 앞에 당도하여 하후진에게 엄포를 늘어놓는 올돌궈. 위풍당당한 모습이 마치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온 장수 같다.
“어차피 네놈만 쓰러지면 서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놈의 쓰러진 몸뚱이를 밟고 유유히 반대편 구문까지 걸어갈 테니 덤비기나 해!”
분명 축국 경기임에도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사나운 말을 주고받는 하후진과 올돌궈. 먼저 움직이는 건 체력이 충만한 올돌궈다.
‘저 현란한 발재간에 넘어가면 안 된다. 공을 봐야만 한다!’
앞뒤로 발을 휘저으며 하후진을 도발하는 올돌궈. 곧바로 기구에 달려들 줄 알았건만 그 또한 축국 영웅 노릇을 몇 번 해봐서 그런지 단번에 그의 허초를 간파해냈다.
‘네놈은 분명 쉽지 않은 상대다. 하지만 오늘 네놈의 체력은 여기까지다.’
올돌궈는 연신 좌우로 기구를 조금씩 차대면서 구문과 거리를 좁히고 있다. 체력이 부족한 하후진은 이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슬슬 끝이 보이는군.’
충분히 가까워졌다 판단한 올돌궈는 왼발 발등 위에 기구를 올렸다. 비장의 수를 선보일 예정이다.
‘들어와라. 들어오지 않으면 이대로 차 넣을 뿐이다.’
하후진은 올돌궈의 노림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본 기예가 아니던가. 허나 나서지 않는다면 이대로 공이 구문을 가르는 걸 구경하게 될 것이다.
올돌궈에게 재빠르게 다가와 오른발로 기구를 바깥으로 차내려는 하후진. 그의 동작은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웠지만 올돌궈는 오히려 왼발 끝자락으로 기구를 툭 치고 허공에 띄웠다.
‘놓쳤다!’
‘놓쳤군!’
결국 빈 공간을 가르며 반 바퀴 돌게 된 하후진은 올돌궈에게 등을 보이고 말았다. 구문까지 향하는 길이 열리고 만 것이다.
‘이걸로 끝이다!’
올돌궈는 훤히 열린 문을 향해 여태 수십 번이나 반복해온 왼발 발길질로 공중에 뜬 기구를 걷어찼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빨려들어가는 공 뒤로 무진과 함께 수련동으로 돌아가 고행 끝에 야수신궁의 소궁주로 등극하는 환상이 올돌궈를 덮쳐온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속으로 나직이 환호성을 지르는 반웅. 구문 뒤에서 슬며시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고 올돌궈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웅은 날아드는 공을 그대로 자신의 발로 이어받은 뒤 구문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첫 점수를 내는 데 성공한 건 반웅이었다.
-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과(酒果) - 3년치 내공이 증가하는 술맛이 나는 과실. 인기가 높아 명문 세가들이 사재기 해간다.백초탕(百草燙) - 100가지 약초를 넣고 달여내는 약. 내상 치료에 효과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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