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vs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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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목요일.
평소보다 조금 이른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해 전담팀과 회의를 가졌다.
SW 11층을 사용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어제, 오늘 인테리어를 하고 내일부터 용강빌딩을 사용할 예정이다.
SKY대 교수진으로 구성된 면접관들이 수·목 이틀간 면접을 보고 나면 30명을 선발할 계획이었다.
거기에 재성이 준 영입대상자 명단 중 1차로 13명을 영입했다.
모두 43명이 내일부터 출근할 계획이라 용강빌딩 입주를 미룰 수 없었다.
한참 조사에 대한 대비책을 의논하고 있는데 국정원에서 사람이 나왔다.
재성은 담담한 얼굴로 주동수 변호사와 함께 따라나섰다.
소공동에 위치한 전통가옥.
소위 말하는 국정원 안가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외형과 달리 그냥 사무실이었다.
두 사람은 좁은 밀실이 아니라 의외로 넓은 회의실로 안내를 받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주 변호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조사 받으러 온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재성의 얼굴은 평온했다.
회귀를 해서 그런지, 이미 75년의 삶을 경험해서 그런지 웬만한 일에는 감정의 동요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한국인은 1명뿐이었고 미국인은 9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각기 다른 배지(badge)가 달려 있었다.
배지는 미국의 각기 다른 정부기관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여기에 올 기관들이라면 당연히 정보·수사 관련 기관일 것이고 무려 9개 기관이 동원되었다는 뜻이었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워낙 많아서 한창 많을 때는 20개나 된 적도 있었고, 지금도 모르긴 해도 15개는 될 터였다.
재성이 배지 문양까지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배지 주변에는 해당 기관을 나타내는 글자가 적혀 있지만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배지를 열심히 훑어보고 있는데 둘레에 약간 큰 글자로 SEAL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라고 적힌 배지가 있었다.
재성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는 백악관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자는 백악관에서 나온 사람이고 이 자리의 수장이라는 의미였다.
이 말은 곧 부시가 자신과 타협할 의향이 있다는 뜻이었고, 사전 조사에서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만약 저들이 자신에게서 테러 혐의점을 찾았다면 바로 체포를 당했을 터였다.
또한 타협할 의향이 없다면 그는 결코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으리라.
그들은 소개도 없이 백악관 요인의 손짓에 따라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
정체 모를 미국 수사관이 질문했다.
“당신은 알 카에다 요원입니까?”
드디어 알 카에다가 나왔다.
한국인 요원이 통역해 주려는 것을 막고 재성은 바로 영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알 카에다란 말은 처음 듣습니다.”
유창한 영어에 그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고 1 중퇴라고 들었는데 영어를 잘하시네요?”
“혼자 독학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고 한국과는 혈맹의 국가입니다. 6.25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려주신 덕분에 오늘날 민주국가 한국이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미국을 존중하며 언젠가는 미국에 가서 공연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기에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왔습니다.”
재성의 답변에 조사관들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지나갔다.
“좋습니다. 당신은 테러조직과 접촉한 사실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아랍인과 접촉한 사실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당신은 9월 11일 테러가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테러 발생 직전에 한국 주가지수 풋옵션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죠?”
사실 재성에게 유일한 약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테러 발생 전에 만기가 겨우 2일 밖에 남지 않은 풋옵션을 14억원 어치나 구입했으니 테러 발생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14억원은 그 당시 재성의 전 재산이었다.
“그 점을 설명하려면 8월 27일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보세요.”
“저는 그 날 아침 갑자기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병원에 간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 날부터 며칠간 간헐적인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통증을 느낀 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총 천연색 꿈을 꾸었습니다.”
“....”
“그 꿈에서 이상한 차트와 화면들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하도 꿈이 생생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HTS(증권사 홈트레이딩 시스템) 화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꿈에서 본 그 화면은 현실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확인한 뒤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코스메틱을 구입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말이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백악관에서 나온 사람이 불쑥 끼어들더니 물었다.
“그 꿈은 아직도 꿉니까?”
여기서 재성은 약간 긴장했다.
물론 준비한 대답은 있었다.
“꿈은 8월 31일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꾸지 못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스쳐가는 듯 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다시 조사관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별 시시콜콜한 내용을 40분 넘게 물어댔다.
재성으로서는 숨기거나, 더하고 뺄 것이 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 답변했다.
이미 조사관들은 근대증권과 SW, 가족들을 상세히 조사했기에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성의 답변은 그들이 조사한 사실과 조금의 어긋남도 없었다.
문제는 조사관들이 돌아가면서 똑 같은 질문을 해댄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의외로 피곤했다.
8명에게 똑 같은 질문을 받고 대답하니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시간도 무려 6시간 넘게 걸렸다.
중간에 딱 한 번 화장실을 다녀오고 커피를 한 잔 마셨을 뿐, 점심 먹을 시간도 주지 않았다.
독한 놈들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번갈아가며 점심을 먹고 왔다.
그 길고 힘든 과정이 끝나자 그제야 백악관에서 나온 사람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이미 CNN을 통해서 1억 달러의 성금을 전달했으며, 여러 언론에 추모 광고를 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당신은 이번에 896억 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이것을 어디에 쓸 계획입니까?”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재성은 여기가 고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가는 혐의가 있건 없건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저는 그 돈 중 30억 달러를 제외하고는 전액 미국 금융시장에 투자할 계획입니다. 현재 미국 경제가 침체되어 있지만 금방 떨치고 일어나 세계 경제를 선도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지금 미국 증시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화요일에 재개장해서 14% 급락했고, 어제도 5%가 넘는 하락세를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 경제가 다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미국의 저력을 믿습니다. 급락장세는 금방 끝날 것이고 오히려 강력한 상승장세가 펼쳐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도 꿈에서 보았나요?”
“아닙니다. 이번에 주식공부를 하면서 느낀 사실입니다.”
그는 웬지 다시 실망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요. 구체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 계획입니까?”
여기서 재성은 마지막 갈등을 했다.
마침내 거래일로부터 5일이 지나 오늘부터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바로 거래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을 대비한 것도 있고,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탓에 돈을 그냥 두었다.
한성그룹의 중심은 단연 한성일렉트로닉스다.
이 회사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복수는 요원한 일이다.
전자회사를 인수해서 사업을 통해 한성일렉트로닉스를 무너뜨리거나, 아니면 주식을 매집해서 인수 합병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 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의 기업문화상 적대적 M&A가 성사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폐쇄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시장이었다.
짧은 순간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재성은 이윽고 두 가지를 다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자칫 자신이 추진할 전자회사가 한성일렉트로닉스를 압도적으로 눌러버리면, 한성일렉트로닉스 주식은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복수를 위해 그 정도 비용은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미국의 대표적 IT업체인 MDS와 대표적 은행인 시피은행에 투자하겠습니다.”
“전액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재성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피은행은 사정이 좀 나았지만 MDS의 경우에는 2000년 3월 시가총액이 무려 6천억 달러를 넘었다가 IT버블이 붕괴되면서 급전직하해 지금은 2970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현재 미국에서는 IT업체에 대한 불신론이 팽배해 있었고 훠런 버빗 같은 사람은 ‘기술주는 끝났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MDS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겠다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재성이 MDS를 사는 이유는 세 가지였다.
우선 MDS는 한성일렉트로닉스의 최대주주로 10%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MDS의 주식 1.5%를 한성일렉트로닉스 주식 10%와 교환했기 때문이다.
제2 대주주는 9.8%를 가진 시피은행이고 그 다음이 8.8%를 가진 한성생명이다.
두 번째 이유는 내년 초에 MDS는 사상 최대의 현금배당을 실시한다.
그때를 놓치기는 아까웠다.
세 번째 이유는 이게 결정적인데 9월 말부터 내년 4월까지 계속되는 단기 상승장에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 상위 10종목 중 최대의 수익률을 기록한다.
무려 85%가 상승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에 비하면 시피은행은 불과 17% 상승할 뿐이다.
잠시 생각하던 백악관 요원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미국 증시가 다시 강력한 상승세를 탈 것이라고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왜 미국 주가지수 선물에 투자하지 않습니까? 선물이 주식보다 훨씬 수익률이 높지 않습니까?”
그는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재성을 골탕이라도 먹이려는 듯이 말이다.
황당해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896억 달러로는 MDS와 시피은행의 주식을 충분히 사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멍석을 깔아주니 얼씨구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연색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고 있다고 했는데 낼름 선물을 사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 미국의 의심을 살 것이다.
그러니 무척이나 지금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재성은 일부러 당황한 척했다.
“그, 그래도 선물은 너무 위험성이 커서...”
“그럼 결국 당신의 말은 립 써비스에 불과한 것입니까? 사실은 미국을 전혀 못믿는 것이 아닙니까?”
화·수요일 이틀간 미국 주식시장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어지간히 간이 붓지 않고서야 그 지옥에 발을 들일, 그것도 선물을 살 사람은 없을 터였다.
한동안 망설이던 재성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시피은행의 주식 대신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 선물을 사겠습니다.”
“금액은요?”
다시 망설이는 척 연기를 한 재성이 말했다.
“100억 달러...”
“그건 너무 적지요.”
“그럼 150억 달러를 사겠습니다. 더 이상은 힘들겠습니다.”
“브라보! 굿! 나는 믿습니다. 당신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조사관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어떤 사람은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어떤 사람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어떤 사람은 짓궂은 표정으로 재성에게 환호를 보냈다.
백악관 요인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왜 지금 전화를 하지 않습니까?”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정말 밉살스러웠다.
그 말에 재성은 울며 겨자 먹는 표정을 실감나게 연기하며 전화를 들었다.
수신인은 이익시 회장이었다.
“회장님! 오늘 미국 시장에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 선물 150억 달러를 사주시고 나머지는 모두 MDS 주식을 사 주세요.”
“예? 고객님. 지금 미국은 아수라장입니다. 그런데 미국 주식과 선물을 사라고요?”
“...사정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 자의는 아니고 상황이 그렇습니다.”
“아? 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선물은 지금 사도 되지만 주식은 미국 증시가 밤 11시 30분에 개장하니 그때 주문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사실 2001년 최저점을 기록하는 날은 내일이다.
하루만 더 참으면 최저점에서 살 수 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어쩌면 이게 맞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최저점에 사서 최고점에 판다면 미국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분명 다시 꿈을 꾼다고 의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성이 전화하는 내용을 한국인 요원이 실시간 통역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전화를 끊자 백악관 요인이 손가락을 탁하고 튕겼다.
그러자 나머지 조사관들이 우르르 일어나 나갔다.
그가 눈짓으로 주 변호사를 가르키며 고개를 까딱했다.
내보내라는 소리였다.
재성은 걱정하는 주 변호사를 안심시키며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회의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그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백악관 정치고문 칼 로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머리가 띵한 느낌이었다.
이 자식이 그 악명 높은 칼 로프라니?
‘아? 정말 더러운 놈에게 걸렸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놈이라면 능히 자신에게 150억 달러 엿 멕이는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그럼 칼 로프가 누구냐?
그는 아들 부시 대통령의 모든 선거를 총지휘한 최고 심복이었다.
또한 부시를 대신해 뒤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한 청소부이자 해결사였다.
지금은 정치고문을 맡고 있지만 곧 비서실 부실장이 되고 사실상 공화당의 정치자금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네오콘 중에서도 극우 보수주의자로,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찾지 못하자 소형 원자로와 원심분리기 등을 몰래 갔다놓고 증거를 조작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 칼 로프를 보낸 것은 매우 복잡다단한 의미가 있었다.
어쨌거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부시와 네오콘이 자신에게 상당한 비중을 두고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던 재성도 이때는 털이 쭈볏하고 서는 느낌이었다.
“악수하기 싫어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당신이 미국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숨에 세계 최고의 부자인 필 케이츠를 능가하는 거물이 등장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특히나 동양인이 말이에요.”
뒤의 동양인이라는 말이 핵심이었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백인 남성이 아니면 사회의 중추가 되지 못한다.
파월 국무장관 같은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그러니 외국인, 그것도 동양인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으니 미국 백인 남성들이 얼마나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고 있겠는가?
구성원 대부분 미국백인우월주의를 신봉하는 네오콘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터였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훨마트의 훨튼 일가 재산은 1200억 달러가 넘지 않습니까?”
이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는 필 케이츠와 롭슨 훨튼이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재산으로는 훨튼 일가가 최고였다.
롭슨 훨튼이 2위, 크리스티와 짐, 앨리스 훨튼이 각기 6, 7, 1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신은 일개 개인이 그에 버금가지 않습니까?”
“아직은 300억 달러가 넘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이번 투자를 통해 당신이 훨튼 일가를 제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시 칼 로프의 얼굴에는 짓궂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내년 4월말이면 그의 얼굴이 어떻게 바뀔지 정말 궁금했다.
재성이 침묵하자 그가 본론을 꺼냈다.
“이렇게 둘만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혹시 짐작이 가나요?”
“어느 정도는요.”
“하하! 그래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영리하고 눈치가 빠르군요.”
“별말씀을요. 저는 부시 대통령과 네오콘을 존중합니다. 제가 어느 정도나 성의를 보이면 될까요?”
“당신은 얼마나 생각하고 있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재성이 검지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설마 million은 아니겠죠?”
속에서 욕짓거리가 올라왔다.
당연히 million이었다.
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필 케이츠가 엘 고어 민주당 후보측에 100만 달러, 즉 1million 달러를 기부했다가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만큼 이 당시 100만 달러의 정치헌금은 큰돈이었다.
그런데 이놈이 하는 꼴을 보니 milliom이 아니라 billion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미국이 강대국이고 칼 로프가 하이에나 같은 놈이라고 해도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billion은 million의 천배, 즉 10억 달러를 말한다.
정치헌금을 넘어서, 한몫 단단히 뜯어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작정을 하고 온 것이 분명한 이놈에게 100만 달러라고 말했다가는 자칫 판이 깨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성은 자신이 생각했던 최대한도를 불렀다.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 한국식으로 1억 달러를 말한 겁니다. one hundred million 달러요.”
“뭣? 겨우 one hundred million 달러? 당신 아직 사태 파악이 안되나 본데...”
재성은 그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보시오. 10억 달러를 가져다 받치느니 목을 메고 자살하겠소. 하지만 나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은 물론이고 부시까지 몰락시키고 말테니. 896억 달러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 번 해볼까요?”
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험악한 인상을 그리며 악을 쓰듯이 말하자 칼 로프는 움찔한 표정이었다.
이미 자신은 최선의 패를 던졌다.
여기서 호구 잡혔다가는 끝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재성은 잘 알고 있었다.
죽어도 물러 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두 사람은 눈싸움을 벌였다.
재성은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칼 로프가 고개를 흔들더니 문을 쾅!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대로 끝인가? 그냥 10억 달러 줄 걸 그랬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긴장과 초조 속에 지옥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무려 2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들어온 칼 로프가 말했다.
“Two hundred million 달러! 마지막 제안이오.”
칼 로프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오늘 쉽지 않겠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왜 나쁜 예감은 꼭 맞는 것일까?
험악하게 일그러진 놈의 얼굴을 보니 더 이상 협상은 무리였다.
거절했다가는 어렵사리 여기까지 끌고 온 판이 이대로 깨질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재성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방법을 바꿔, 그에 필적하는, 아니 훨씬 능가하는 이익을 뜯어내기로 했다.
아예 이번 기회에 뽕을 뽑기로 했다.
“2억 달러도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만약 이 사실이 새어나간다면 나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무사치 못할 겁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좋습니다. 다섯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받아들이지요.”
“다섯 가지 조건이라니? 무슨 조건을 다섯 가지씩이나...”
“나도 남는 게 있어야할 게 아닙니까?”
칼 로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째려보았다.
재성도 지지 않고 마주 째려보았다.
잠시 눈싸움을 벌리던 그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일단 말해보세요. 무엇입니까?”
“첫째, 네덜란드계 투자회사 홉스에 압력을 넣어 한국에서 발을 빼라고 해주세요. 둘째,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근대증권의 부동산 펀드에 대해 새로운 규제를 만들거나 상환압박을 하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셋째, 미국 시장에 투자한 주식과 선물을 담보로 시피은행에서 미국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넷째, 제가 한국에서 군 복무를 마치는 대로 미국 시민권을 주세요. 다섯째, 블랙비트가 한국에서 인기를 얻을 경우 미국 AMA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주시고 CNN과 3대 전국 방송에도 출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재성이 말한 AMA란 American Music Awards의 약자로, 그래미 다음 가는 권위 있는 음악 분야의 상이다.
한국 가수로는 2012년 싸익이 처음 초청받았다.
그러고 보니 싸익도 어떻게 해야할텐데...
아니 그보다 더 급한 것은 겨울현가려나?
“의외의 조건이네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문제가 없습니다. 네 번째는 우리로서도 환영할만한 조건이고, 다섯 번째도 어렵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겠군요. 다만 세 번째는 어렵습니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미국에서 대출을 받아 다른 곳으로 돈을 옮겨버리면 투자하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자산가치의 80%를 대출 받아 그 중 절반을 미국시장에 재투자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이건 내가 결정하기 어렵군요.”
칼 로프는 다시 나가더니 40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여러 기관들과 의논한 결과 당신은 자산가치의 60%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중 80%를 미국에 재투자해야합니다.”
하마터면 Your Mother Fuck!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뻔했다.
재성의 계획으로는 일단 미국 시장에 866억 달러를 투자한 뒤, 그걸 담보로 미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일본, 한국으로 옮겨서 일본의 부실자산들과 한국의 대후를 통째로 먹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계획이 와장창 박살난 셈이었다.
하지만 분노를 가라앉히고 찬찬히 생각을 해보니 내년 4월까지 처리되는 대후그룹의 업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일본도 비슷했다.
내년 4월만 지나면 미국과 일본, 한국에서 동시에 사업을 벌여도 충분한 돈을 마련할 수 있다.
재성은 몇 달간 참기로 했다.
더구나 60% 대출을 받아서 20%만 가져오더라도 대충 100억 달러가 넘었다.
급한 회사들을 인수하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미국 시피은행에서 확실히 ‘미국 금리’로 대출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미국 모든 은행에서 미국 금리로 대출 가능합니다.”
“한국에 제 명의의 투자회사가 전적으로 투자하는 부동산 펀드가 있습니다. 그 부동산을 담보로도 미국 은행에서 ‘미국 금리’로 대출을 받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실 이것도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다.
한국의 은행 금리는 10%나 되고 일반 대출 금리는 12%에 달한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지만 매년 12%의 이자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반면 미국 금리는 5%로 대출이자도 6%를 넘지 않았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펀딩 금액이 1조원이죠?”
“그렇습니다.”
“크지 않은 금액이니 받아들이죠.”
재성은 속으로 비웃었다.
멍청한 놈!
부동산 펀드 1조원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수십조원으로 불어날 터였다.
한국에서 갓 시작된 갭투자의 개념은 미국에서도 아직 없었다.
그러니 칼 로프가 모르는 것이고, 그 결과로 미국 자산을 담보로 대출받는데 대한 규제가 무색해질 터였다.
더구나 이자가 6%에 불과하니 재성은 여기서만 수 조원의 이익을 볼 수 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
“Welcome!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길고 지루한 조사와 협상이 모두 끝났다.
칼 로프의 환송을 받으며 안가를 나오니 어느새 저녁 8시였다.
너무 허기가 져서 근처 국밥집에서 주 변호사와 함께 허겁지겁 국밥을 먹었다.
점심도 안주고 칼 로프는 정말 독한 놈이었다.
- 작가의말
좀 기네요.
2회로 나눌까 하다가 왕건이 866억 달러가 어떻게 처리되느냐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그냥 한꺼번에 다 올렸습니다.
대신 추천 많이 눌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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