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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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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2,648
추천수 :
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7.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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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성국

DUMMY

"이거 진짜 유령선이 따로 없네"


갑판에 올라섰을 때 길버트가 남긴 솔직한 감상이었다. 사실 가라앉지 않는 것이 용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배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돛은 소금에 절어 바스라지고, 물먹은 나무들은 삐걱였으며, 갑판 위에는 따개비나 해조류가 가득했다.


"가라앉지는 않을 거야. 마법을 걸었거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닐 테지만 아무튼 라프라스는 그 사실이 사뭇 자랑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는 갑판 위로 올라오기 위해 몸에 해초를 둘러 몸이 마르는 것을 막고 있었는데, 사실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갑판 위는 습하고 축축했다.


"그리고 매우 빠르지"

"빠르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인어들이 배를 타보지는 않았을 텐데"

"타보지는 않았지만 쫒겨 본 적은 있거든"


길버트의 질문에 라프라스는 성국의 배를 묘사하며 답했다. 그들이 장소를 옮긴 것 자체가 그들 때문이었기에 배의 속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논리였다.

사실, 배라는 것이 크기에 따라 속력이 다르기는 하지만 길버트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튼 성국의 배만큼은 따돌렸다는 것일테니까.


루루가에게나 자신들에게나,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가 충족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나저나 신기하네.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야? 원래 영역에서 쫒겨나는 바람에 우릴 못 찾아 올 줄 알았는데"


일행들이 그렇게 주위를 살피던 중, 라프라스가 마노에게 물었다.

물론, 인어들에게도 이 뜻밖의 재회는 반갑고도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그럼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부터 안색이 어둡던 유라의 얼굴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유라와 보리스를 호위 대상으로만 여기는 그녀였기에 자연적으로 그들의 힘에 대한 평가가 낮았던 까닭이다.

뭐, 실제로 보리스의 경우 룽겔이었다가 한 번 죽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우리도 몰랐네. 자네들이 여기 있다는 걸 누가 알았겠는가"

"엥? 그럼 대체 어떻게 찾아온 거야?"

"우연일세. 사실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자네들을 찾아갈 예정이었지"

"다른 이라니? 이봐 마노. 우리가 아무리 너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다른 인간에게 서식지를 알려 주는 건 너무하지 않아?"

"그래서 알려주지 않았네. 자네들과의 약속이었으니까"

"그럼 더 이상하잖아? 우리가 어디 사는 지도 모르는데 우리를 어떻게 찾아온다는.."


라프라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가다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늘어놓던 말 사이에서 단서를 찾아버린 까닭이었다.

마노와 재회한 이래 시종일관 밝고 유쾌했던 라프라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진중해졌다. 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새파란 빛을 내뿜었다.


"농담은 아니겠지?"

"내가 농담을 좋아하긴 하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래, 그런 걸로 헛소리를 할 너는 아니지"


라프라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그의 몸을 뒤덮던 해초들이 말라 갈 쯤에야 간신히 고개를 움직였다.


"되돌아가야한다는 거구나. 우리의 고향으로"

"무리할 필요는 없네. 나 역시 자네들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말이야"

"무리한 일이라도 해야만 하는 때가 있는 거야 마노. 너도 알다시피, 그것들은 우리에게 있어 너무나 중요한 일이거든. 기억하지?"

"..그래"

"그 때와는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아 다행이네. 너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거든"


마노는 라프라스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처참하면서도 그리웠던 시절이 자꾸만 떠오르는 까닭이다.


"자네들은 변함이 없군"

"시간이 다르게 흐를 뿐이야. 마노. 하지만 때때로 그게 더 좋을 때도 있지"


라프라스는 그렇게 말하며 해초를 벗어던졌다. 바다로 뛰어드는 그에게로 인어들이 모여들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가고, 그들에게 동요가 퍼졌다.

마노는 새삼 저들에게 있어 마리가 어떤 의미인 지를 깨달았다.


막상 자신이 저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저들과는 달랐겠지. 지금의 자신이 가는 길은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도 아버지가 바랐던 길과는 다르니까.


그들은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용서해줄까? 이해해줄까? 그렇지 않다면 분노할까.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처럼은 되지 않아요"


담담히 내뱉는 말에는 치기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사춘기는 분명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나, 이제는 끝이 난 일이니까.

그는 더 이상 피 끓는 혈기로 반항을 일삼던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남은 것은 알차게 속이 들어찬 거목처럼, 꺾이지 않을 신념뿐이었다.



*



"더럽구나"


배에서 내려 항구에 발을 들인 남자는 온통 새하얀 옷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새하얀 사제복이었다. 저렇게나 하얗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 의복은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었지만 항구에서 볼 수 있을법한 색은 더더욱 아니었다.

소금기 있는 바람이 밀려든다. 남자의 옷자락은 미동도 없이 고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 남자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런 옷자락 따위가 아니었다. 태양빛을 반사하여 더욱 눈부신, 마치 백은으로 짠 실을 엮은듯한 촘촘한 백발.

보석처럼 빛나는 그 머리칼은 마찬가지로 한 점 미동조차 없이 어깨를 덮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온 거잖아? 안 그런가 그렉 사제?"


남자의 뒤를 따라 항구에 내려 선 것은 마찬가지로 새하얀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다만 그렉이라 불린 남자와는 다르게 그녀의 옷은 사제복이 아닌 수녀복이었다.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감아버린 그렉과는 달리, 그녀의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은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당장 이곳에 정화의 번개를 불러서..!"

"그만두시오 아가사 수녀. 우리의 목적을 잊으셨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수도승의 옷을 입은 대머리의 거한이었다. 다른 이들처럼 새하얀 옷을 입은 것은 같았으나 그 역시 특징적인 면이 있었는데, 가볍게 쥔 주먹 하나가 웬만한 성인의 머리보다도 컸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포교를 하러 온 것이오. 이교도의 숨소리와 핏자국이 남아있다는 점은 소인 역시도 무척이나 불쾌하나, 잘못된 점을 스스로 바로잡으며 우리를 불렀다는 점에서 회개의 여지는 있지 않겠소"

"그 우스꽝스러운 말투 좀 바꾸면 안되겠나 라팔?"

"우스꽝스럽다니..최근 수도원에서 가장 유행하는 말투이거늘.."

"그만두지 않는다면 말투가 아니라 역병을 유행하게 만들어주겠어"

"..그만두지"


아가사 수녀의 위협적인 말투에 수도승 라팔은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들은 모두 성당과 수녀원, 수도원의 정예였고 각기 비슷한 수준의 직급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의 대장은 어디에 계시지?"

"먼저 하선하여 도시를 둘러보시고 계신다더군"


아가사의 질문에 그렉이 답했다. 냄새조차 역겹다는 듯 코를 틀어막은 탓에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무척 이상했지만 그 누구도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티를 내지 않을 뿐, 그들 역시 이곳의 모든 것을 역겹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화되지 않은 땅이란..끔찍하군"

"이런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참으로 불쌍하구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호흡하지 못한 것과 무엇이 다르지?"


두런두런 불만을 늘어놓는 그들은 심지어 연민마저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이래뵈도 세계 최강국의, 가장 발달된 도시 중 하나에 살아가는 이들인데 말이다.


"아, 아악! 사, 살려줘!"


그러던 중 어디서부턴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성국에서 온 세 명의 성직자들은 이야기를 나누던 것을 멈추며 표정을 굳혔다.


죽어 가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껴서일까?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보여도 성직자이긴 하다는 것일까?


"역겨운 비명소리..이교도의 것이군"

"나가인가? 토할 것 같군"


그들의 표정에 어린 것은 혐오와 경멸이었다. 그렉과 라팔은 끔찍하다는 듯 걸음마저 멈춰서 버린 상태였다.

아가사가 그들의 등을 두드리며 앞으로 밀었다.


"가자고. 저곳에 대장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그와 동시에 골목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머리칼의 또 다른 여인이었다. 꽤나 젊은 축에 속하는 아가사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면을 할퀴는 커다란 메이스를 끌고 오는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을 비롯해 몸 전신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왼쪽 눈 하나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을 외견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봐도 성직자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광전사라면 모를까.

허나 성직자 세 사람은 그녀를 향해 어떠한 부정적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들의 눈에는 선명한 존경심마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레모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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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2 0 12쪽
75 아가사와 파라크 21.07.16 21 0 10쪽
74 간파 21.07.15 20 1 14쪽
73 샤트라 21.07.14 19 1 12쪽
72 포교와 이단 21.07.13 35 0 10쪽
» 성국 21.07.12 33 0 9쪽
70 인어 21.07.11 21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7 0 11쪽
66 선동 21.07.07 27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31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9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7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6 2 12쪽
51 하녹 21.06.22 23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7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2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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