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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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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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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6
추천수 :
60
글자수 :
44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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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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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인어

DUMMY

유라의 창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녀의 앞에는 더 이상 괴물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구멍 난 가죽을 덮어쓴 시체들만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지면에 몸을 눕힌 것은 보통의 에이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괴물이었다.

숨을 가프게 헐떡이는 에이프의 털은 붉었다. 어쩌면 라탕카가 지배하던 레드 에이프들과 동족인 지도 모를 일이었다.


"드디어 해안에 도착했네"


길버트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마른 세수를 하는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것인지 눈 밑은 새카맣고 몸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도저히 오러 마스터의 모습이라고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기야 오러에 통달한 것이지 정신과 육체적 피로마저 달관한 것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으로 생각하게. 목숨 걸고 이 산맥을 넘으며 안전 구역을 만들어 나갔던 수많은 패스파인더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야"

"..안전구역..이라고?"


길버트는 마노의 말이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이제껏 유령을 만난 적이 없었던 만큼 그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이 단순한 투정과 어리숙함이었던 것은 아니다.


패스파인더들이 만든 것은 오직 유령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둔 최소한의 장치였을 뿐, 괴물과 독충을 비롯한 여타 수많은 위험까지 제거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저 강대한 피나르 제국은 단숨에 산맥을 넘어 대륙 전체를 지배했을 테지만.


"끔찍한 밤이었어"


그렇기에 순전히 저런 말 하나로 끝낼 수 있는 길버트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자라온 환경이 황궁이라는 지극히 안전한 장소였던 만큼 더더욱.


단지 그와 비교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터무니 없는 존재였던 것 뿐이다.


"킁..그래도 제법 살 만했는데 말이야"


루루가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를 비롯한 오크들에게는 인간에게는 지옥이라 불리는 산맥마저 조금 위험한 캠핑 장소에 불과했던 까닭이다.

기본적으로, 괴물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만 활동할 뿐, 먹잇감과 포식자 관계가 아닌 이상 서로를 상대로 싸우지 않는 까닭이다.


"오크들의 적응력이 높다더니.."


길버트는 그런 루루가의 모습에 질색한 듯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이대로 산맥에 머무는 건 어때?"

"크륵. 그건 위험해. 그냥 지나가는 정도야 봐줬다지만,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 영역을 개척해야만 하거든"

"조금 힘든가?"

"위험하지. 크르륵. 우리는 숫자도 적고 이곳에는 천적들이 있으니까"

"천적?"

"크륵. 하피들 말이야"


루루가는 그렇게 말하며 턱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길버트의 눈매가 좁아졌다. 지금껏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라고만 생각했었기에 시야에 편견이 끼어있던 까닭이다.


"나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공격할 수나 있나?"


길버트의 의문에 루루가는 말없이 나무를 두드렸다. 단숨에 쪼개지는 나무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길버트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르. 우리는 너희가 괴물이라 부를 정도잖아? 이 정도는 평범하지 않겠어?"

"그렇군..그런데 지금은 왜 덤벼들지 않지?"

"크륵크륵. 유라가 있잖아. 아무리 새대가리라 해도 힘의 우위 정도는 파악할 줄 알거든"


길버트는 그런 루루가의 말에 새삼 유라를 다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처참한 자신의 검술에 비해, 유라의 오러는 마치 세월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것 마냥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대단해"


길버트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맛이 무척이나 썼다.

가진 힘의 불균형 같은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텐데..


"크르르. 너 역시 대단한 건 마찬가지야"


그런 길버트의 마음을 헤아린 듯, 루루가가 그의 등을 툭 하고 쳤다. 나무를 가볍게 쪼개는 괴력이니만큼 길버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악! 루루가!"

"하하하"


루루가의 장난으로 인해 간만에 밝게 웃는 일행들이었다. 그리고 그 즐거움에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허나 그 웃음에 합류하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마노였다.

그는 심각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해안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에 잡힌 주름이 펴질 줄 모르고 깊어졌다.


"마노?"


길버트의 부름에 마노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시선을 그곳으로 옮겨보았지만 무엇을 가리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다 한복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길버트는 눈에 오러를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알 수 있었다. 색상 자체가 바다와 비슷하여 일순 놓칠 뻔 하였으나, 그곳에 있는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바다에서 상반신만을 내놓은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이야?"

"..아니"


길버트가 검을 뽑으려던 찰나, 마노는 그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해안을 향해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길버트는 어쩐지 그들이 웃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친구와 재회한 듯한, 반가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마노, 인어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들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유라였다.


"..나도 모르겠군"




*




"오랜만이야 마노"

"라프라스"


마노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한 명의 인어 남자였다. 마노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그는 다른 인어들과 마찬가지로 바다 색의 머리칼과 바다 빛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인어들에 비해 조금 더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민간에 전해 진 것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물 밖으로는 나서지 못하는 지 여전히 바다 속에 있었는데, 라프라스라 불린 남자가 그나마 모래사장까지 나온 것에 비해 다른 이들은 여전히 바닷속에 머물러 있었다.


마노가 반갑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뭍으로 나서는 것이 무척이나 꺼려진다는 기색이었다.


"많이 자랐구나"

"그러는 자네는 여전하군"

"그 이상한 말투는 뭐야?"

"인어는 어떨 지 몰라도, 인간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어린 시절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네"

"그것 참 귀찮겠군"


그렇게 짧은 평을 남긴 라프라스는 그대로 뒤돌아 물 속으로 들어갔다. 단숨에 물속에서 몸을 돌린 그는 다른 인어들처럼 상반신만을 내밀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 중에 미안해. 비늘이 말라버려서 말이야. 너와 다시 만날 날을 위해 조금 연습을 해뒀는데..아직은 무리인 것 같아"

"이해하네. 오히려 내가 고맙군"


마노는 그렇게 답하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걷어 올린 바지 아래 찰랑이는 바다가 발목을 간지럽혔다.

바다는커녕 호수조차 본 적 없는 길버트는 흥분한 기색으로 마노의 뒤를 따랐다.

신발조차 벗지 않고 들어선 그의 모습에서는 이미 피로의 흔적이 지워 진 지 오래였다.


"살고 있는 곳을 옮긴 것인가?"

"뭐, 그렇지. 인간들의 항로가 점점 더 개척되고 있어서 말이야. 이전에 살던 곳은 이미 점령되어버렸어"

"..힘들겠군"

"그렇지만도 않아. 바다는 넓거든. 인간들이 개척한 항로라고 해봤자 티끌 만큼도 되지 않는단 말이지. 뭐, 이전에 살던 곳은 운이 나빴던 거야"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루가가 반색했다. 인간들의 영역과 겹친다는 말에 걱정이 앞섰던 까닭이다.


"그런데 못 보던 친구들이 많다? 그리고 특히 저쪽의 친구들은 아무래도 오크 같은데..평야에서 산다는 종족을 바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래 어쩐 일이야? 그쪽도 인간 때문이야?"

"..크륵"

"어..진짜야? 미안, 내가 아무래도 아픈 곳을 찌른 것 같네. 그럴 작정은 아니었어"

"크륵, 괜찮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우리 부족이 바다에서 살아도 될까?"

"물론 되지. 애초에 우리 허락을 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말이야. 바다는 넓어, 주인 없는 영역도 수두룩하지. 뭐, 너희들이라면 섬에서 사는 게 좋겠지만"

"섬?"


루루가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마노에게 섬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최악의 경우 바다 위에 배를 띄우고 살아가는 것도 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항로와도 멀지. 너희들 종족이라면 우리가 아는 항로를 이용할 수도 있을 거야. 배는 있어?"

"크륵, 아니. 지금부터 만들까 생각은 했는데"

"없으면 뭐, 우리가 하나 주지 뭐"

"배도 가지고 있나? 그게 그..뭐랄까. 얕보려고 한 말은 아니고. 크르륵. 자네들은.."


루루가가 말끝을 흐리며 그들의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라프라스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껄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인어들도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우리는 배를 타지 않지. 하지만 매해 인간들이 바다로 헌납하는 배가 아주 많이 있단 말이야. 뭐, 우리에게 필요하진 않지만 언젠가 마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줄 선물로 몇 척을 쟁여뒀거든"


라프라스는 그렇게 말하며 손짓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을 당기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다가 열렸다. 하긴, 솔직히 바다가 열렸다는 진부한 표현은 육지에 사는 이들이나 쓸 표현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단숨에 갈라진 바다의 단면으로 배의 선상과 돛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갈라졌던 바다가 다시 봉합되었을 때, 그것들은 단숨에 치솟으며 품고 있던 물들을 뿜어내고 있었다.


"와"


그리고 다시금 바다가 평온해졌을 때, 모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길버트만이 순수한 감탄을 터트렸을 뿐이다.


바다 위에는 열 척도 넘는 수의 배가 떠 있었다. 오래토록 바다에 잠겨있고 방치되었던 만큼, 사람들에게 이른바, 유령선이라 불릴 법한 형상을 하고 있는 배들이었다.


"저거 뜨기는 해?"


길버트는 무심코 질문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모두가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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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1 0 12쪽
75 아가사와 파라크 21.07.16 21 0 10쪽
74 간파 21.07.15 19 1 14쪽
73 샤트라 21.07.14 19 1 12쪽
72 포교와 이단 21.07.13 35 0 10쪽
71 성국 21.07.12 32 0 9쪽
» 인어 21.07.11 21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6 0 11쪽
66 선동 21.07.07 26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31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8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5 2 12쪽
51 하녹 21.06.22 22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6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1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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