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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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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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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6.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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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쌓여가는 불만

DUMMY

차갑게 식은 돌바닥이 냉기를 뿜고 있었다. 때늦은 가을의 서리일까?


아니, 틀렸다.


"..눈이다"


문득 고개를 치켜든 행인이 하늘에서 떨어진 눈꽃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녹아내려 물이 되어버렸지만, 펼쳐낸 손바닥엔 아릿한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행인은 그대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첫눈을 보면서도, 들끓는 마음은 식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대체 언제 돌아갈 수 있다는 건데!"


행인이 참을성 부족한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건 행인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개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널려 있었으니까.

늦가을이 지나 찾아온 겨울. 그리고 조금 이른 첫눈에 아이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른들의 마음이 가진 차가움은 눈과 얼음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리에서 발을 구르는 그들 모두는 타국의 상인들이었다. 물론, 타국에서 온 그들은 마땅히 거주할 곳을 갖고 있지 않았다.

거쳐가는 장소에 집을 사두는 사람은 매우 드문 법이니까.


자연스레 그들은 여관이나 빈 집을 빌려 사용하곤 하였고, 그것은 수 세기 동안 이뤄진 일이었다.

봉쇄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이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만 해도..!"


관광과 상업의 도시답게 물가는 비쌌고, 배를 정박하는 데 드는 항구나 물품을 보관한 창고의 임대료 역시 비쌌다.

그렇기에 그들이 이 도시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소모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하는 셈이었다.

장거리를 건너온 만큼이나 대규모의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물론, 평소라면 그런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밀려든 사람과 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유동인구를 생각하면 분명 여유는 있을 테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아니, 저기 비어있잖아!"

"아 진짜. 저기는 예약이 된 곳이라니까!"


여관 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리자드맨의 등을 밀었다. 남부 대륙에서나 볼 수 있을 희귀한 종족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접받는 것은 아니었다.

신기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리자드맨은 매년 이맘때마다 이곳에 나타나는 만큼 이곳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물론, 일 년에 한 번밖에 오지 못할 도시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찾아온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잔혹한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젠장..운도 지지리도 없지!'


결코 넘지 못할 땅이라 불리는 리덴 사막을 넘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더라도 그들 역시 목숨을 걸고 항로를 건너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땅 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평야가 인간의 땅이 된 것과는 다르게 바다는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며 축배를 들던 입장에 있었을 터였다.

이제 돌아가서 이 천문학적인 이득을 나누기만 하면 된다고, 그리하면 이제 굳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고향에서 가게를 차려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런 꿈에 젖어 있었을 터였다.


"예약? 예약이라고? 우리가 어떤 종족인 지 다시 한 번 말해줘야 하냐? 그 잘난 예약은 왜 이종족만 걸러내는 거지?"


리자드맨 상인은 여관 주인의 얼토당토않은 변명에 윽박지르며 소리쳤다.

체온 변화에 민감한 그들은 타인의 거짓을 간파하는 것에 능했고, 그렇기에 지금 여관주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런 리자드맨의 특성은 여관 주인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변명할 필요가, 이들을 밀어낼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너야말로 다시 말해줘야겠어? 방이 없다니까! 그 따위 눈치로 대체 상인은 어떻게 해 먹겠다는 거야? 허구헌날 그 놈의 거짓 간파만 믿고 사니까 그렇게 눈치도 없어지는 거잖아!"

"뭐, 뭐?"


리자드맨은 적반하장으로 소리치는 여관 주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그런 충격 한 번에 주저 앉을 만큼 나약한 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랬다면 이미 오래전에 저 광활한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을 테고, 이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이지도 못했을 테지.


"닥치고 들어!"


그러나 리자드맨은 그가 자신의 머리를 끌어당기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렸다는 말에 반박하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그보다도 지금의 상황을 꼭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너도 이곳에서 장사하면서 들어본 적은 있겠지? 암흑가 말이야"


상인의 말과는 달리 그는 이곳에서 그 소문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모르지는 않았다. 먼저 이곳에 다녀온 이른바 선배 상인들로부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분명 피해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자네 같은 떠돌이들에게는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는 아니야. 늘 얼굴 마주하고, 매달 상납금도 낸다고"

"그게 우리랑 무슨..!"

"들으라고 좀!"


리자드맨은 상인의 기세에 밀려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상인 역시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양심에 못 이겨 입을 열긴 했지만 어차피 도시를 나가면 안 볼 얼굴 아니던가. 괜히 그런 놈들을 위한답시고 손해 보면 안 되는데..


아니, 아니지. 그래도 한 놈에게 설명이라도 해두는 편이 나으리라.

그래야 지금도 밖에서 고개를 들이미는 저 놈들을 돌려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네 말대로야. 방은 있어. 아주 썩어넘칠 정도지. 하지만 너희에게 줄 수가 없어. 리자드맨에게만이 아니야. 인간종을 제외한 다른 종족 모두에게 방을 주지 말라는 권유..아니, 경고를 받았다고"

"그딴 건 왜! 아무리 그래도 정상적인 장사를 막는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돼. 아무래도 그놈들 뒤에는 수도의 거물들이 있는 모양이니까"


수도?


리자드맨은 불현듯 이번 봉쇄령이 수도에서 도망친 범죄자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번에 도망친 놈들이 그렇게나 위험해?"

"도망자를 말하는 건가? 아니, 그놈들을 잡으려고 저러는 건 아닐거야. 그놈들을 잡으려고 했다면 좀 더 다른 방법을 썼을 테지. 그놈들을 진짜로 잡으려는 건 고작 두 명이야. 수사관이라고 하더군"

"그럼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이유야 나도 모르지"

"이봐, 지금 장난치자는 거야?"

"모르는 건 모르는 거야. 추측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괜히 입 놀렸다가 목이 달아날 수는 없잖아"


리자드맨은 혀를 찼다. 뭐라 말한들 입을 열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암흑가의 머리가 이 모든 것을 꾸미고 있다는 거야. 물론, 그들만으로 이 모든 일을 벌일 수는 없겠지. 모르긴 몰라도 시장 역시 손을 썼을 거야"

"그 말은?"

"너희는 엿 됐다는 거지"

"무슨 결론이 그래? 좀 더 자세한 상황은 모르는 거야? 그리고 왜 넌 아닌 척 하는건데? 너도 방을 몇 개밖에 못 쓰는 거잖아? 화도 안 나는 거야? 아니, 잠깐만.."


여관 주인은 창백해진 리자드맨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리자드맨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열이 뻗치다 못해 외려 식어버리고 나니, 그제야 모든 상황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이곳만이 아니라 모든 여관에게 그런 말을 했고..타의적인 담합이 이뤄졌다고? 당신 같은 사람들은 인간족 중 얼치기 놈들에게 큰돈을 받고 방을 빌려주고?"

"그래. 우리는 그래도 금전적으로는 손해가 없는 셈이지"

"그리고 우리는 언제 풀릴 지 모르는 이 봉쇄령 속에서 노숙을 해야 한다는 거군?"

"아마 곧 풀릴 거야"

"그건 그냥 예측이잖아!"


정작 봉쇄령을 요청한 반은 이 조치가 얼마 못 가 풀릴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었다.

특히나 타국의, 이 나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들에게 있어 피나르는 그저 세계 최강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지닌, 가장 부유한 국가일 뿐이었다.

항구를 떠나 내륙으로 가지 못하는 이들이니만큼 그들이 아는 피나르는 이 도시가 전부였고, 그들은 피나르의 모든 도시가 이럴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서로간에 심각한 오해가 발생한 셈이다.


허나 그 오해를 해명하는 사람이 없는 이상, 그들의 불안은 결코 해소될 일이 없을 테지.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암흑가는, 이 도시의 시장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자, 그럼 됐지? 이제 네가 저기 있는 놈들에게 설명해 줘. 나는 같은 말 하는 취미가 없으니까"

"뭐, 뭐라고? 이봐! 너! 나더러 이 상황에 설명까지..!"


여관 주인은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리자드맨의 몸을 밀어버렸다.

굳세게 닫힌 문 너머로, 우두커니 선 그에게 시선들이 내리 꽂혔다.

해명을 바라는 눈이었다.


그렇게 오해가 퍼져나갔다. 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휴,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응?"


문을 닫은 여관 주인은 안도함과 동시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 조용한 거지? 분명 손님을 받았을 텐데?


"그 돈 많은 얼치기 놈들..이제와 환불해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았을 적의 일이었다.


"오랜만이야"

"..하, 하녹씨?"


왜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여관에 잔뜩 들어찬 기괴함에 대하여..

지독할 정도로 비릿한 피냄새가 이리도 진하게 퍼져있는데 말이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왜 하필 여기였지?


"오랜만이야. 하보크"

"그,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입이 싸더군"


그 단도직입적인 말에 여관 주인, 하보크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설마 당신이 그런 걸 예상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요"

"네가 날 그리도 잘 아나?"

"그렇지는 않죠. 하지만.."

"그래, 그건 그냥 꼬투리를 잡은 거지"


그 순순하기까지 한 수긍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왜 이리도 강해져만 가는 것일까.

하보크는 알 수 없는 공포심이 가슴을 메우는 것을 느꼈다. 답답하고 어지러웠다.


"저, 저건!"


그러던 중, 그는 꿈틀대며 모습을 드러내는 기괴한 생명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름 아닌 오늘 아침 받은 손님들이었다. 아니, 손님이었던 이들이었다.

피에 젖은 몸이 꿈틀거린다.


"도플갱어? 하녹 당신, 지금 괴물들을 부리고 있는 건가?"

"역시 눈치가 빨라. 그래서 조금 아쉬워"


하보크는 그제야 하녹의 목적을 눈치 챈 듯 했다. 문손잡이를 움켜쥐는 그의 손 위로 은빛 선이 스친다.

하보크는 손잡이를 움켜 쥔 채로 떨어져버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저게 왜 저곳에 붙어 있는 거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텅 빈 왼 팔을 들었을 때.


차마 터져나가지 못한 비명 대신, 색색대는 쇳소리만이 울컥이고 있었다. 성대가 좁아진다. 목 안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다. 팽창하는 안구가 어둑하니 갈라진다.


"하..녹.."

"아니,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하녹의 몸이 점차 변해갔다. 여타 도플갱어들과 같은, 아니..그 이상으로 감쪽같은 솜씨의 변신이었다.


그의 웃음이 짙어진다.


"하보크라 불렀어야지"


뒤를 잇는 것은 퍼석한 가루가 내려앉는 소리. 먼지나 재가 되어버린 하보크의 잔해가 남긴 유언이었다.


메이거스, 하녹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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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1 0 12쪽
75 아가사와 파라크 21.07.16 2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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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인어 21.07.11 20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8 0 11쪽
67 예언 21.07.08 24 0 11쪽
66 선동 21.07.07 25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19 0 12쪽
64 맹약 21.07.05 28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3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5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5 0 12쪽
58 엠버 21.06.29 31 0 11쪽
»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8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8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5 2 12쪽
51 하녹 21.06.22 22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6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1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0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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