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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2,640
추천수 :
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6.23 13:00
조회
25
추천
2
글자
12쪽

만연한 음모

DUMMY

제니스 반 피나르는 제국의 황후이자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녀가 가진 실권이 황제의 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며, 신하들조차 황제의 말보다 그녀의 말을 우선시할 정도였다.


심지어 그 권력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버나르 가문조차 그녀의 말에는 꼼짝하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하기야 현 가주인 버나르 공작은 원체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연금술과 마법에만 정진하는 인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신의 누나라 할 수 있는 제니스의 행동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겠지.


비정상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것이야말로 버나르라는 이름의 가문이 성장해온 동력이었다.

학문적으로 우수한 아이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정치적으로 우수한 아이로 하여금 그 외적의 일들을 일임하는 형태.


둘 중 하나가 배신하는 순간 곧바로 비틀려버릴 그 비정상적인 형태가 어찌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문으로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방침은 힘과 권력 양 쪽의 괴물을 동시에 육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무려 사 백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말이다.


그렇기에 제니스의 냉혹한 모습은,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냉정함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지도 모른다.

황태자가 죽었다면 자신이 대신하면 그만이라는 듯 단숨에 권력을 틀어쥐어버린 그녀.


그녀에게 있어 황태자, 알렉스 반 피나르는 그저 황제의 뒤를 이을 옥새였을 뿐이었다.

원하는 항목에 찍고, 원치 않는 항목에는 찍지 않는..제멋대로 할 수 있는 전능한 옥새.

허나 옥새 자체의 의지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을 테지.


그가 조금이라도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진득한 성격과 학문적인 태도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알렉스는 방탕했고, 무능했으며, 피나르를 속이기 위해 만든 탑승형 골렘에 매료되어버리는 멍청함을 보이고 말았다.

진정한 골렘의 정수는 사람이 탑승하지 않는 것에 있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제니스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죽어버린 이상, 이제 그는 기억할 가치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편인 황제를 자식을 낳을 도구로만 생각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버나르의 이름을 드높일 생각만을 하는 괴물.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철혈의 황후.


하지만 그녀가 이 나라의 유일한 황후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황후인 사실에는 틀림이 없지만 두 명의 후궁이 더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


본래의 그녀들은 제니스에게 있어 기억조차 나지 않는 먼지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알렉스가 살아있을 때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지만 이제 가장 유력한 황제는 그녀들의 자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제니스는 그저 ‘그렇겠군‘ 하며 단순한 감상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래봤자 옥새가 감정을 지니게 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제 역시도 그녀들에게, 그 자식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그녀 자신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





"길버트가 떠났다죠?"

"..네, 달시. 가버렸더군요..도망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아시잖아요?"

"네..그렇죠"


길버트의 어머니이자 후궁인 아시카 반 피나르는 궁궐 한 쪽의 공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풍성하고 밝은 빛의 갈색 머리칼이 허리까지 닿는 장발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길버트의 말마따나 어딘가 마리의 모습과 닮은듯한 인상을 가진이였다.

허나 얼핏 보면 그리 닮았다 하기에는 힘들었다. 닮은 것은 오직 외형적인 측면뿐이었으니까.

냉정해 보이는 마리와는 다르게, 아시카는 온화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버드나무 같은 인상이었다. 그 둘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한 것은, 길버트가 순전히 그녀의 혈육이었던 까닭이겠지.


아시카는 얼굴 가득 주름이 있으면서도 크게 나이 들어 보이지가 않는 사람이었다.

옷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궁이라 해도 너무 단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까.

화려하다기보다는 단정함에 가까운 모습이다. 길버트와는 제법 인상이 달랐다.


다만 그 깊고 푸른, 깊은 생각을 담은 듯한 눈동자만큼은 길버트의 것과 의심할 여지없이 꼭 닮아 있었다.


그녀는 가슴 속에 스치는 헛헛함에 자꾸만 옛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저기 저쯤이었던가. 저기 텅 빈 공터. 버드나무 옆에 서서 나를 보며 웃던 아이.

차마 마주 웃어주지 못했던, 그래서 늘 미안했던 아이.


누군가의 비웃음과 무관심 속에서, 끊임 없이 검을 휘두르던 어린 길버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능하고 무력한 자신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 모든 것을 바꿔보겠다며 우직하게 검을 휘두르던 아이.


그리고 차마 그것을 응원할 수 없었던 자신.


아무리 검을 휘두른다 한들 소용이 없노라, 그리 말하고 싶었던 것을 간신히 참아내곤 했었지.

그것이 그 아이의 유일한 버팀목인 것만 같았으니까.


결국 자신은 끝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언제나 자격미달의 어머니였으니까.

유폐된 황자를 가르쳐주겠다며 선뜻 나설만한 검술의 스승은 구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가문 비전의 오러법을 알고 있어 전수해줄 수가 있었다.


설마 그것을 통달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만큼 재능이 없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의 길버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혹독함을 넘어 무모하기까지 한 단련이 있었던 덕분이었겠지.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저는 오러법을 알려준 것 외에는 해준 것이 없는 셈이죠'


그렇기에 아시카에게 있어 길버트는, 언제나 미안하고 안타까운 자식이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잘 해주는 건데..


아시카는 후회했다. 제니스의 공격이 두려워 일부러 길버트와 거리를 벌렸던 것을.

혹여나 꼬투리가 잡혀 길버트가 상처 입을 것을 두려워했지만..


'제니스..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설마 당신이 직접 길버트를 차기 황태자로 삼을 줄이야..'


이쯤 되면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였다. 제 아무리 꼭두각시 황제라 한들, 길버트가 황위를 노리는 것으로 비치는 것이 두려워 평생 동안 조심하며 살아왔건만..


'황위 따위는, 진정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요?'


아시카는 제니스의, 버나르의 방식에 치가 떨렸다.


그들에게 있어 황가는 더 이상 자신들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을 숨은 검으로서 남게 해 줄 방패로 여기고 있을 뿐인 것이다.


어찌보면 참 그들다운 방식이었다.


골렘에 대한 것도 그렇고, 연금술에 대한 것도 그렇고..그들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까지 '진짜'를 숨기는 방식을 취해왔으니까.


"..자랑스러운 아들이에요"


그런 만큼 아시카는 스스로의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 모든 순간들을 이겨내며 마침내 오러 마스터가 되었고, 주어졌던 좁은 세상을 박차고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당신의 아이는 어떻죠. 달시? 아직까지도 그 아이를 숨기고 있나요?"

"후훗..글쎄요. 슬슬 말해줘도 좋을 지도 모를 일이죠"


또 다른 후궁, 달시 반 피나르가 답했다.


화려하게 치장하여 묶어 올린, 붉은 머리칼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어딘가 금빛이 도는 듯한 화려한 적발.

그리고 그 머리칼처럼, 그녀가 온 몸에 두른 옷은 붉었고, 장식품은 그 눈동자처럼 푸르렀다.


다만 아시카의 눈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 밝고 생기 있는 푸른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제니스의 눈동자도 푸르렀던 것 같다. 이쯤 되면 황제의 취향이 푸른 눈의 여성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니스야 정략결혼이었다지만 말이다.


아시카는 어색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달시의 아이에 대한 언급이 조금 불편했다.

길버트와는 다르게, 전혀 드러나지 않은 아이.

나이와 성별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알려지지 않은 아이.


무언가를 말해보려 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만큼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황실의 태생을 감춘다는 엄청난 일을 가능케 한 데에는 역시나 버나르의 무관심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그 아이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제국은 역사적으로 여자들이 왕이나 황제가 된 적이 없었으니까.


필시, 그렇다면 신경 쓸 이유조차 없다는 이유로 달시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겠지.


하다못해 저 제니스조차 스스로 황위에 오르지는 않았지 않았던가.


"그거 아시나요. 아시카? 제 아이는 무척이나 똑똑하답니다"


달시의 자랑 아닌 자랑에 아시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그렇지 않겠는가. 이 나라 최고의 석학이라 불리는 그녀의 딸이거늘.


허나 아시카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를.

설령 껍데기에 불과한 황위일지나, 그것이 달시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그녀의 가슴에 맺힌 한과, 그에 대한 집착을.





*





"도착했군요"


그리고 반 폰 클락 자작은 그곳에 서 있었다.

항구도시 아르바.

이 거대한 제국에서의 이야기를 작게나마 매듭지을 장소에.


"..따라왔군. 엠버 수사관"

"저는 보좌관이니까요"


반 수사관은, 아니 잠시 수사관으로서의 직책을 내려놓은 그는 엠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수도에서 말했던 것들을, 헤벨과의 일들을, 그 지옥 같은 숲에서 홀로 버텨내던 모습을, 그리고 산맥에 나타났던 칠채색의 골렘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찬란한, 밝은 청색의 눈동자를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휴직이라 했을 텐데?"

"하지만 저도 자작님이 없으면 반겨주는 이가 없으니까요"


반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평민으로서의 신분을 내세우고 있는 이상, 그녀를 반겨 줄 수사관은 어디에도 없을 테지.


반겨준다 해도 시덥잖은 이유일 테고.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알면서도 무시할 사람도, 의심가는 이를 곁에서 떼어두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필시 그 사실은 엠버 역시 알고 있는 것일 테지.


'그렇다면 노린 것일까?'


반은 마치 자신이 수사를 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늘상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유도하던 그가 처음으로 유도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대체 언제부터지?


자신은 언제부터 의도대로 놀아난 거지? 그렇지 않다면 증거는? 그 반대는?


"..좋네. 우선은 시장부터 만나도록 하지. 그 다음은 해군사령관이야. 모든 길을 막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그래. 우선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만약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죄가 있다면,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수사관의 의무이고.

혹여 붙잡히지 않은 죄인이 있다면, 끝까지 쫒아가 잡아내고 마는 것이 자신의 의무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당신 역시도 마찬가지다. 엠버.


반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지었다.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때였다.

파도가 일렁이는, 찬란한 새벽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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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2 0 12쪽
75 아가사와 파라크 21.07.16 21 0 10쪽
74 간파 21.07.15 19 1 14쪽
73 샤트라 21.07.14 19 1 12쪽
72 포교와 이단 21.07.13 35 0 10쪽
71 성국 21.07.12 32 0 9쪽
70 인어 21.07.11 21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6 0 11쪽
66 선동 21.07.07 26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31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9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 만연한 음모 21.06.23 26 2 12쪽
51 하녹 21.06.22 22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6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1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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