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2,639
추천수 :
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7.17 13:00
조회
31
추천
0
글자
12쪽

그레모리

DUMMY

저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린 아가사 수녀를 바라보던 그렉이 혀를 찼다.

보통은 치료술을 배우는 수녀임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전투계열인 것도 모자라 예비 심문관이라 불리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죽은 이상 비전투원이라 할 수 있는 그렉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운이 나쁘군"


그렇다 하여 그렉이 동료의 죽음에 애도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적의 공격을 방어해준 것조차 아가사가 곧 자신보다 직위가 높아질 것이기에 명령에 따라준 것뿐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렉은 지금 자신이 처한 위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위치를 특정당할 법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이 근처에 성국의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려졌을 테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렉은 성국 내에서도 온건파에 속하는 편이었다. 물론, 이종족을 직접 죽이려 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의 온건함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 역시 인간 외의 모든 종족을, 나아가서는 무교인나 타종교를 혐오하다 싶이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성국에서의 온건파는 그저 소극적인 차별주의에 불과했다. 적극적으로 나서 다른 이들을 공격하지는 않지만, 관계되고 싶어 하지 않고 마주치는 상황에 처하는 것도 꺼려하곤 했다.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그렇기에 성국 밖으로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그가 이곳에까지 끌려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 그레모리였다.


과격파 중에서도 극단적인 축에 속하는 그녀로서는 아들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다.

물론, 그렉의 능력이 공격과는 거리가 멀기에 직접적인 처형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성향이 조금은 달라질까 싶었던 것이다.


"정말로..운이 없어"


허나 그런다 해서 타고난 성품이 바뀔 리는 없었다. 그렉은 결국 한숨 쉴 뿐이었다.


"그래, 정말로 그렇군"

"큭!"


푹!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부터 꽂혀든 검은 칼날이 그 원인이었다.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약할 것 같다 생각하긴 했지만..운이 좋군"


검을 뽑아든 나가. 사마현이 웃음 지었다.




*




"그렉?"


하녹을 향해 메이스를 들어 올렸던 그레모리가 행동을 멈췄다. 하녹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급히 기어서 자리를 피하려 했다.


"큭!"


허나 그레모리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도 실수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발이 도망가려던 하녹을 짓밟았다.

간신히 지혈되었던 상처가 다시 터져나갔다.


"라팔"

"네, 그레모리 님"


라팔은 어딘가 심상치 않은 그녀의 분위기를 보며 몸을 사렸다.


"아가사 수녀가 어디로 갔지?"

"동쪽의 골목입니다. 암흑가 쪽으로 간다 하더군요"

"그런가?"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라팔은 혹여나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조심스레 입을 여는 그의 모습은 과연 조금 전까지 시민들을 붙잡던 그 남자가 맞는 지를 의심케 했다.


"그렉이 죽었다"

"..네?"

"아가사 수녀와 함께 간 것으로 아는데. 틀렸나?"

"..아뇨,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아가사 수녀 역시 죽었을 가능성이 높군"


라팔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하려다 간신히 말을 눌렀다. 아가사 수녀가 당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인물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라팔의 두려움은 실로 합당했다. 아들의 죽음을 입에 담는 그녀는 도저히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표정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얼굴 가득 새겨진 흉터가 파르르 떨린다.

슬픔을 감추는 미소는 아니었다. 오직 환희와 광기, 분노만이 있을 뿐.

그렇기에 라팔은 감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 웃음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잘 알고 있던 까닭이다.


불신자들의 앞에서야 광신도 그 자체인 라팔 조차도, 보다 더한 광기 앞에서는 평범해 보였다.


"이 자를 데리고 가라. 그리고 지원을 요청해. 타국에서 신의 아이들이 두 명 살해당했다. 전쟁을 염두에 두도록"

"자, 잠시만..! 그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레모리는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에서 꿈틀대는 하녹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버나르의 신하인 그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결코 달갑지 않았던 까닭이다. 몇 년을 계획한 일이었던가!


"약속? 메이거스와 약속을 했다고? 내가?"


무심히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하녹은 그 평온함 속에 숨어있는 잔악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하녹을 방치한 채, 그레모리의 눈이 유리알처럼 빛난다. 감정 없는 인형은, 인간으로서는 이해 못할 광기를 품고 있었다.


"버나르! 버나르입니다! 메이거스가 아니라요! 저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쿵!


하녹은 끝모를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자칫하면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으리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하녹의 머리 바로 옆에 메이스가 떨어졌던 까닭이다.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를 속도였다. 하마터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모를 뻔 하지 않았는가.


"버나르라.."

"예! 버나르..!"

"닥쳐"

"..네"


그레모리가 미간을 모으며 생각에 잡혔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성국에, 정확히는 그들의 이름 모를 아버지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이번 일에 자원한 것 역시 그런 이유가 가장 컸고, 보통 타국과의 일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축에 속하는 이들을 보내게 되어있음에도 억지를 부려 온 것이었다.


'그러니 최소한의 성과는 내야만 할 테지.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과 교황에게 잔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까'


심문관 중에서도 특출 난 이들만이 오를 수 있는 수석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녀였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한 발짝 내려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전력 가지고는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그녀와 비슷한 실력의 사람이 두 명만 더 있어도 성왕국 최고 전력인 '성검'과도 대적할 수 있다고 평가될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뭐, 좋아"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수긍에 하녹의 얼굴이 밝아졌다. 허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 웃음이었다.


"너의 연명을 허락하마. 허나 연명일 뿐이다.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을 양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널 죽일 테니까"


그 선의 없는 선심에 하녹은 이제 돌아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있었다.


'뭐, 우선은 좋아. 상대방도 만만치는 않았으니 기회를 틈 타 도망가면 될 일이지'


물론, 그렇다 하여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하녹은 스스로의 계획이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이가 우연찮게 찾아와 일을 그르쳤을 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만약 산맥의 거인, 탄캄이 하녹을 보았다면 그를 비웃었을 테지.

계획이란 것이 오래 고심한다 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마노가 증명한 일이었으니까.


모든 계획을 부수는 거대한 변수..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





시점을 바꿔 다시 바다.


바다 위를 떠가는 유령선이 흰 물거품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오크들은 어렵지 않게 선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배가 워낙 큰 탓에 멀미가 적었던 까닭도 있긴 했지만 그들 종족이 원체 적응력이 높았던 이유가 컸다.


반대로 길버트의 경우는 오러 마스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산맥에서 잠을 자지 못해 거무죽죽했던 안색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기야 오러와 멀미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길버트의 수난은 계속될 테지.


아가사 수녀가 죽기 전, 샤트라의 검을 보며 오러 마스터의 위험에 대해 떠올리곤 하였지만..글쎄. 적어도 이제껏 길버트가 보여준 모습들만 보면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그가 오러 마스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테지만, 여전히 ‘통달’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고,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에게 없는 재능이 필요했으니까.

하다못해 죽음의 위기라도 있다면 모를까.

.

여러모로 첫 등장과는 꽤나 인상이 달라져버린 그였다.


"루루가, 정말로 괜찮겠나? 우리의 계약에 이런 것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 길버트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마노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있어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제국의 황자가 저러는 모습이 썩 달갑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유라 역시 배의 흔들림에 맞춰 균형을 잡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검집 위에 한 발로 선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오크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박수 소리에 놀란 인어들 중 몇몇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내민다.

그러다 루루가와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다시 바다로 몸을 던졌다. 수줍음이 많은 종족이었다.


"크륵..말하지 않았던가. 자네를 믿겠다고"

"믿음을 가졌다 하여 목숨을 거는 것이 말이 된다 생각하나?"

"적어도..우리에게는!"


마노는 묘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실로 간만에 느껴보는, 무척이나 그리운 감각이었다.

자유?

아 그래, 이것은 자유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의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가, 이들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크륵"

"마리인가?"

"크륵"


루루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륵. 우리는 다른 종족보다 오래 살지는 않아. 물론..인간보다는 오래 살기는 하지. 하지만 400년의 시간을 기억하지는 않아. 웨어울프들처럼 후각으로 그 핏줄을 판별하지도 못하지. 그 덕에 마리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그 약속을 지킬 이유가 있나?"

"지키지 않을 이유 역시 없다.크륵크륵"


가볍게 답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루루가의 모습은 확실히 오크답지 않은 면모가 있었다.


하기야 오크다운 것이 무엇이던가. 결국에는 괴물이라는 것부터가 인간에 의해 규정지어졌을 뿐이다.

인간에게 해를 가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어느 종족은 이종족으로 불리며 함께 살아가고, 어느 종족은 괴물로 분류되어 토벌의 대상이 되곤 한다.

태초의 괴물은 오직 마물이라 불리는 것들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에게 알려진 오크라는 종족은 무척이나 괴물다운 모습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일 근거가 빈약해지는 까닭이다.

하기야 인간보다 적응력이 높은 것도 모자라 비정상적으로 식량을 많이 소비하는 그들과 함께 살기는 실로 위협적이었겠지만..


"크륵..비록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기억하는 이도 남아있지 않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승하고 있다. 크륵..한 때 중앙대륙을 떠나 북쪽으로 진격하던 선조들의 혼과 후손들을 위해 나눴던 약속들을"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지. 크륵..우리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피는 이어져 결국 그 재앙에 휩쓸릴 것이다"

"너희가 낫군"


마노는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보았다. 한 때 스무 명도 채 남지 않았던 오크들의 숫자는 이미 백을 넘도록 늘어나 있었다.

반요정이어서일까. 비정상적으로 빠른 번식력이었다.


"오크들의 힘은 무리의 숫자와 비례한다지?"

"크륵..그렇기에 골렘들의 각개격파에는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이제는 달라. 크륵크륵..기대해도 좋을 거다"


루루가의 웃음과 함께 배가 나아간다. 석양이 저무는 대해로 나아가는 유령선이 안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그레모리 21.07.17 32 0 12쪽
75 아가사와 파라크 21.07.16 21 0 10쪽
74 간파 21.07.15 19 1 14쪽
73 샤트라 21.07.14 19 1 12쪽
72 포교와 이단 21.07.13 35 0 10쪽
71 성국 21.07.12 32 0 9쪽
70 인어 21.07.11 21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6 0 11쪽
66 선동 21.07.07 26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31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9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5 2 12쪽
51 하녹 21.06.22 22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6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1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2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