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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2,632
추천수 :
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7.0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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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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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노블 텐

DUMMY

마리는 그 웃음을 보고 있었다.

이름으로 추측컨데, 필시 그의 혈육일 터인 시신을..그것을 보면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그의 환희를.

그것은 마리에게 있어 익숙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반의 표정으로부터 이미 죽어버린,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평생토록 한 줌도 쥐지 못할, 진리의 편린에 매달리며 모든 것을 등한시하던 모습을.

그것은 광기였던가. 그도 아니면 미치광이가 된 척 스스로조차 속인 것에 불과했던가.

그래도 추억 속에 미화되었던 아버지의 모습에 한 줌의 애정은 있었을 것이라 믿었지만..


"엠버"

"네, 자작님"

"이곳에 있나?"

"..아마도요"


이해할 수 없는 문답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불현듯 떠오른 직감에 반사적으로 호문클루스, 파라크에게 손짓했다. 실로 감각적인 판단이었다.


카득!


텅 빈 공터 위로 바득거리는 것은 파라크에게서 쏟아진 팔이었다. 마리는 눈을 치켜뜬 채 자신에게 쏟아진 검격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의 검기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힘이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단순한 마력이라기에는 너무도 불길하고 음습했다. 마법이라기보단 저주에 가까운 힘이었다.


마리는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저주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미약한 통증이었으나,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스칼렛 위치"


그리고 마리는 그 단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알다 뿐일까. 그 단검과 쌍둥이 격인 또 하나의 아티펙트를 직접 보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오랜만이군"


허나 마리에게 감상에 젖을 만한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반의 청록 빛 눈동자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는 그녀를 숨겨주던 아티펙트의 힘이 끊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티펙트 간의 간섭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군요"


덤덤한 대답이다. 반은 입매를 비틀며 나섰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기괴한 표정이다. 눈에 보일 정도로 끈적한 광기다.


그렇다면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이지?


마리는 저것이 그의 본모습이라는 편견은 갖고 있지 않았다.

한 때 반의 정상적인 면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와 처음 조우하였을 때, 그는 결코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단언컨데, 그것은 결코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간에 있었던 사건 때문일까? 그 짧은 시간 벌어졌던 일들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만든 것일까?


'그럴 리가'


아무리 사람이 변하는 법이라지만 딱 봐도 그의 사춘기는 옛 적에 끝이 났다.


시련이 사람을 바꾼다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제 아무리 좁은 우물에 갇혀있었다 한들, 제국의 수도라는 것이 시련 한 번 겪지 못할 만큼 만만한 곳도 아니었다.


그는 단단했고, 우직했다. 그렇다면 저것 역시 그가 가진 모습 중 하나라는 것이 옳을 테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 아무리 온갖 사건을 겪은 수사관이라 해도 룽겔의 그것은 별난 사건이라는 단어로 치부할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수수께끼라는 단어의 틀을 벗어난 현상이었다.


'잘하면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마리는 그의 광기 어린 모습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냉정함을 유지하던 모습에 비해, 빈틈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마리는 어쩌면 지금의 그야말로 속여 넘기기에는 제격인 것이 아닐까 하며 눈을 빛냈다.


그야말로 착각이었지만 말이다.


쾅!


"..골렘?"


마리는 불현듯 그녀의 뒤쪽으로 떨어진 두 기의 실버 골렘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거지?

설마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간파하고 함정을 파두었던 것일까?


"..엠버. 자네의 짓인가?"

"..네, 자작님께서 짐작하시는 대로.."

"숨기는 건 포기했나보군"


하지만 마리의 생각과는 달리, 골렘들의 등장은 반 역시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하긴 했지만 어안이 벙벙했다.

반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으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이기에 자신을 이리도 무시한단 말인가?


보아하니 란가타의 일원들 역시 지금의 상황은 예측하지 못한 듯 했다. 대체 저들의 손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거지?


'일반 병사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존재를 찬장 위의 초콜릿처럼 손쉽게 꺼내는군. 뭐, 좋다. 지금에야 환영할 일이지.'


지금, 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진실이었다. 죽었다 살아난 배신의 마녀 올가 론디아르와 그들의 관계. 방화 사건의 전말. 되살아나는 시체들과 그 원인.


그리고 그들 일행의 정체와 목적.


"되갚아주겠다 맹세했었지"


반의 시선 위로 불타버린 시민들의 시체가 겹쳐보였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까마득했다.

그 위로 겹치는 잔영들이 있는 까닭이다.


화염에 녹아버린 동료들과 목이 꺾인 수사관. 배신의 오명을 뒤집어 쓴 샤스포와 산맥에서 스러져 간 병사와 기사들.


지금 이곳에 누워있는, 어리석은 사촌 동생까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다행이야. 조금도 식지 않았으니 말이야"


허나 말과는 다르게, 그것은 영원토록 식지 않을 감정이었다.

빙글거리며 회전한 단검이 역수로 쥐어졌다. 스스로의 팔을 찌르는 그의 몸짓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피가 쏟아진다. 흐른다고 하기 보다는 뽑혀나가는 것만 같다. 허공에서 몽글거리는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탄환인 것 마냥 마리를 향해 겨눠지고 있었다.

끝은 뾰족한 나선형이다. 맹렬히 회전하는 모습이 적중하는 순간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다.


"경고하지. 항복하게"

"아쉽게도, 그걸로는 절 잡을 수 없어요"


저 묘한 자신감은 뭐지?


'허세인가? 모르겠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렇다면..'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탕!


굉음과 함께 밀려난 탄환이 허공에 충격파를 남기며 날아갔다. 길게 늘어난 파라크의 손이 후려치듯 탄환을 움켜쥔다. 그와 동시에 파열하는 탄환에 의해 파라크의 손등이 울룩불룩 꿈틀거렸다. 움켜쥔 주먹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피로 되돌아간 탄환이었다. 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고작 저 정도로 끝날 위력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구경만 할 참인가 엠버?"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저 골렘들을 제가 보낸 건 아니라서요"


자기는 어디까지나 꼬리라는 건가? 시치미를 떼는 엠버의 모습을 보며 반이 조소할 때, 때맞춰 손을 뻗는 실버 골렘들을 파라크의 손들이 제지했다.


"저 손, 숫자가 많군"

"줄여볼까요?"

"아니, 관두게"


엠버가 권총을 꺼내들었으나, 반은 고작 그 정도의 화력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탕!


피로 된 탄환들이 일제히 쏘아졌다. 다각도로 휘어지는 그것들은 무수히 뻗어 진 손들의 사이로 파고들어 곧바로 마리를 향해 쇄도하는 듯 했다.

허나 육체적으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반과 연금술의 정수, 호문클루스의 반사 신경 사이에는 넘을 수 없을만치 거대한 벽이 놓여져 있었다.


가지를 뻗는 듯, 증식하는 파라크의 손이 일제히 탄환들을 빗겨낸다. 뒤에서 덮쳐 들던 실버골렘들은 예상 밖의 공격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단단하기로 소문난 외피가 둔탁한 소음과 함께 찌그러졌다.


"노릴 곳이 잘못 된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군. 숙부님께는 사과해야겠어"


반은 그렇게 말하며 단검을 휘저었다. 마리는 그 모습이 사뭇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다음 순간, 쓰러져 있는 룽겔의 시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끓어오르는 듯한 모습이다. 불룩거리는 피부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체내의 피가 모조리 뽑혀나갔으니 어쩔 수 없었다/

파라크의 팔이 합쳐진 것은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콰득!


다음 순간,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형제 아니던가요?"

"날 배신하고, 적에게 이용당하기까지 한 어리석은 사촌 동생이지"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 엎드려 있던 파라크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갈래로 뻗어있던 팔을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파라크의 팔은 세 방향으로 꺾인 채 반투명한 팔의 내부 구조를 내보이고 있었다.

금속으로 된 혈관이 파르르 떨린다. 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블 텐다운 위력이네요"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항복하게. 순순히 정보를 털어 놓는다면, 고문 따위의 불이익은 없으리라 약속하지"

"거절하겠어요"


마리는 단호히 답하며 파라크에게 손을 얹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익숙한 무기와 재회하게 된 것이 무척이나 놀랍기는 하지만 상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라크를 진화시킨다면 이야기는 빠르지만 이런 일로 파라크에게 무리를 시킬 수는 없어. 태어난 지 얼마 않았는데 진화는 너무 빠르니까’


마리는 머리 속에 떠오른 계획 하나를 우선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의 파라크는 아직 미완성의 단계였지만 그렇다고 단계를 진행 시키기에는 현재 단계의 진행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어지간한 상대에게는 지금의 힘으로도 충분했다. 잠시라고는 하지만 칠채색 골렘의 몸마저 한 순간이라도 구속했던 존재가 아니던가.

물론, 상대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노블 텐. 마검과 성검, 정령검 따위에 필적한다 일컬어지는 10개의 아티펙트.

저것은 그 중 하나이자 한 때 마왕에 맞서 싸웠던 다섯 영웅 중에 하나인 알냐 크라임 법원장의 기억이 깃든 두 개의 단검 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영웅의 유품이라.."

"감회가 새로운가? 론디아르?"


떠보는 듯한 반의 물음에, 마리는 웃었다. 조금의 즐거움도, 기쁨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웃음이었다.

반은 순간적으로 물러서며 단검을 치켜들었다.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론디아르..라고요?"


차가운 목소리다. 사람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는 목소리였다.

어느 쪽 편을 들어야할 지 망설이며 방관하던 사라와 남자가 참전을 결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론디아르라는 이름은 그들에게도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늦은 생각이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다면 진작 누군가의 편에 서서 참전하거나 혹은 일찌감치 도망쳐야만 했을 테니까.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마리의 시선이 반에게 머문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시선이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실로 저런 종류의 눈을 하고 있을 테지.

우스운 일이지만, 그 시선을 보는 순간 사라는 겁을 먹어버렸다. 마리의 편에 서겠다고 결심 한 것이 바로 조금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을 번복하려 했을 정도였다.


사라 란가타, 새장 밖을 뛰쳐나와 처음으로 세상을 본 여인.

일찍부터 란가타의 기술을 전수받고, 세상에 적수가 없으리라 여기며 살아왔던 말괄량이.

타인의 죽음을 쉽사리 입에 담으면서도, 스스로의 죽음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어리석은 이.


허나, 그녀는 지금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시련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다시는 새장 안으로 돌아가지 못할 혹독한 지옥이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물론, 가장 잔인한 것은 그녀는 단지 휘말린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지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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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1 0 12쪽
75 아가사와 파라크 21.07.16 21 0 10쪽
74 간파 21.07.15 19 1 14쪽
73 샤트라 21.07.14 19 1 12쪽
72 포교와 이단 21.07.13 35 0 10쪽
71 성국 21.07.12 32 0 9쪽
70 인어 21.07.11 20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6 0 11쪽
66 선동 21.07.07 26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29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8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5 2 12쪽
51 하녹 21.06.22 22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6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1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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