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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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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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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6.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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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소매치기

DUMMY

스물 하나, 스물 둘. 좋아. 확실하군.


"아주 확실하게 망했어"

"네?"


나는 마리의 반문에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주머니 속을 보여주었다.


"은화군요"

"정확히는 은화 22개와 동화 8개지"

"부족한가요?"

"오크들과는 헤어진다 해도 너와 나, 마노, 길버트, 유라 다섯 명이 쓴다고 가정하면 3개월 정도를 버틸까?"

"여행지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적은 돈은 아니군요"

"하지만 많은 돈도 아니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를 닫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품 속 깊은 곳에 넣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도시이니만큼 치안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도한테 돈을 뜯길 만큼 마검사라는 이름이 우습지는 않겠지만 소매치기를 막을 만큼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안 그래도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미 있는 돈마저 잃어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문제는 성국이야. 성국에서는 제국화폐를 쓰지 않으니까 환전을 해야 하는데, 십중팔구는 수수료를 떼가기 마련이거든"

"안 그래도 부족한 돈이 더 줄어든다는 뜻이군요"

"그래. 그나마 성국화폐는 수요가 그리 없어서 수수료가 높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해야 할까?"


이종족을 배척하지 않는데다가 남대륙과의 직항 항로가 개척되어 있는 제국과는 다르게, 성국은 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종족들의 비율이 제법 높은 남대륙 상인들은 성국으로 가는 일이 없었고, 당연히 남대륙의 특산품들은 제국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성국 화폐가 인기 없을 만도 했다.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나라 내부에서 이뤄지는 만큼, 성국은 상인들에게 있어 그리 인기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성국을 가려면 제국의 항구를 들렀다가 제국과 성국 사이를 오가는 항로를 타고 들어가야 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종족들이 굳이 들어가 감금당하거나 처형당할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성국은 몇몇 인간에게야 성스러운 곳이었지, 다른 종족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자본이 필요해"

"방법이 있나요?"

"아주 간단한 방법과 복잡한 방법이 있지.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공손하게 말을 하려는 거야? 내가 마노처럼 네 고용주인 것도 아닌데"

"음.."


마리는 내 말을 듣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누군가를 존대하고 싶지도, 굳이 그녀에게 존대 받고 싶지도 않았다.

마이크였을 적부터 말을 놓아 얼떨결에 놓고야 있다지만 지금은 룽겔이니 그리 나이 많은 사람도 아니지 않던가.


"그렇군요. 아니. 그러네. 생각치도 못했어. 그 동안 말을 놓을 일이 없었다 보니..그래서 방법이 뭐야?"


나는 말을 놓은 마리의 모습과 억양에서 귀족 특유의 냄새를 느꼈다. 거만함이나 오만함이 아닌, 정돈되고 격식있는 분위기가 느껴진 까닭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가 귀한 핏줄을 타고 났음을 확신했다. 하기야 하녀와는 다르게 시녀라는 직업 자체가 하급 귀족 자제들이 하는 일이 많지만..

그러나 나는 그녀가 여타 시녀들과는, 하급 귀족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신분이나 혈통 따위의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부터 느껴지는 질높은 교육의 흔적을 발견한 까닭이다.


그리고 아직 이 시대, 이 세계에서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의 신분은 한정되어 있을 터였다.


'이 세계? 또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네'


나는 스스로의 생각을 비웃음과 동시에 마리의 신분에 대해 확신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마노의 친척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조금 더 굳건히 했다.

물론, 그것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첫 번째는 내 물건을 파는 것"


나는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떤 물건을 말하는 거야?"

"이런 거"


나는 마리에게 후드로 가려진 군복에 장식된 단추들과 백금 사슬들을 보여주었다.


내 이름, 룽겔 폰 클락에서도 알 수 있듯 나는 귀족이었고, 야전에서 직접 싸우지 않는 입장이었기에 실용적인 복장을 하고 있진 않았다.


하기야 싸우러 가는 판국이었던 만큼 이것도 꽤나 사치를 줄인 셈이지만..


"잘 팔면 금화 한 주먹은 받을 테지"

"어..내가 살던 나라는 그런 게 없어서 그러는데..그렇게나 비싼가?"


나는 마리의 대답에 마그나의 상황을 떠올렸다. 하기야 먹고살기도 바쁜 곳에서 보석 따위에 신경 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마노 정도 되는 인물이면 구할 수 없는 건 아니겠지만 굳이 구할 이유도, 관심도 없어보였으니까.


애초에 마그나는 화폐 자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나라였다. 아무리 그래도 돈 자체를 모르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제국민만큼의 금전 감각을 바라기는 힘들 테지.


"너희 나라에서 팔고 있는 북방 철보다 귀한 보석들이 박혀있으니까"

"..이해는 못하겠지만, 일단은 알겠어. 그럼 그걸 팔면 충분한 거야?"

"팔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답하며 단추 중앙의 문양을 보여주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귀족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다름 아닌 클락 자작가의 것이었다.


"백금 사슬이야 팔 수 있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할 테지"

"그럼? 어려운 방법을 쓰려고?"

"병행해야지. 어차피 수배된 입장에 일일히 일자리를 구하고 있을 수도 없고, 시간도 많지 않으니까"

"인어들과의 접선은?"

"그것도 동시에 할 거야"


나는 그렇게 답하며 단추와 사슬을 뜯어 동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니, 넣으려고 했다.


"하"


나는 어이가 없어 탄식했다.


"없어진 거야?"

"그래..소매치기는 아니고. 어떻게 당한 거지?"


나는 말없이 주머니를 들어보였다. 터무니없이 가벼워진 주머니가 힘없이 나풀거렸다.


이쯤되면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주머니를 흔들었다. 짤랑거리는 소리는 나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매우 적은 소리였다.


"동화 8개 뿐이네"


나는 마리의 담담한 말을 흘려들으며 내 주머니를 살폈다. 아무런 구멍도 나지 않은, 심지어 가죽 끈조차 풀리지 않은 주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은화만 가져갔군"


나는 단추들을 백금 사슬에 엮어 마검에 묶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는 건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찾았다. 나는 동화만이 남아 짤그랑거리는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황녹빛의 위습들이 번쩍인다. 나는 마이크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때는 사냥꾼이었던, 이후에는 밀수꾼이 되었던 이의 추적술을.





*





나는 마리와 함께 골목 사이를 빠르게 걸었다. 바닥에는 온갖 오물들과 말라비틀어진, 부패한 해산물들이 널려있었지만 위습의 도움을 받는 나에게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발에 차이는 것이 없었기에 앞으로 나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마리가 내 걸음 속도를 쫒아오지 못하는 까닭에 그녀의 손목을 쥐고 걸어야 했지만 말이다.


나는 현재의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소매치기 당한 상황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야 말로 내가 생각했던 다른 방법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룽겔 폰 클락이다. 제국의 중령이고, 골렘 부대의 사령관이었다.


내가 아무리 해병의 일에 무지하다 한들, 인어와 같은 이종족의 일에까지 생소하다는 점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마노는 알고 있었지. 제국의 인사도, 국민조차 아닌 그가'


나는 내가 마이크였을 적에 날 향하던 그의 적대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어린 아이들을 데려와 팔았다는 말에 다가서던 혐오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적대감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엇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결코 정상적인 길로는 다닐 수 없었을 테지'


현재의 그의 상태로 보아, 그 이전의 알 수 없는 과정은 모조리 무시한다 쳐도, 그는 도망쳤던 것이겠지.


필시, 탈출했던 것이리라. 그들, 노예 상인들에게서.


그리고 필시, 그 시절 마노에게 있었던 일들이야 말로 단서가 될 것이다.


'좁고 굽은, 오래된 길. 인적은 드물고, 범죄는 많으며, 팔아치운들 몇 푼 되지 않을 어린아이보다는 항구에 넘쳐나는 돈을 기어이 움켜쥐려 애쓰는 장소. 혹은 어린아이를 앵벌이 도구로만 내버려둘 장소'


뒷골목.


나는 내가 아직 로버트일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록 로버트는 개척지의 가난한 도시에 살고 있었다지만 상황 자체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린아이를 파는 것보다 많은 돈을 벌 방법이 넘쳐나는 이곳과는 다르게, 그곳은 어린아이를 팔 곳조차 없었다는 점이지만.


"..이곳..온다!"


나는 벽을 타고 웅웅거리는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위습들이 들려주는 소리였다.


당황이 섞인, 어린아이의 목소리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걸음은 소리가 작았다. 종종대며 움직이는 간격은 무척이나 짧고 긴박했다.


필시 키가 작고 행동반경이 좁은 까닭이겠지.


그리고 그렇기에 이런 골목길을 터전으로 삼은 것이리라.

다 큰 어른들은 이런 곳에서의 행동이 무척이나 제한될 테니까.


나는 현재의 상황들로부터 저들이 어느 조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상납금을 바치는 종류의 아이들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경계하는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들의 상납은 보호비가 아닌 자릿세에 가까운 것일 확률이 컸다.


혹여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더라도 방해하거나 때리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뇌물인 것이겠지.


"잭, 여, 역시 도망치자!"

"걱정 마. 내가 실수할 것 같아서 그래?"


치기어린 목소리다. 하지만 나는 저 목소리가 단순한 치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 아이는 지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자신보다 훨씬 큰 어른에게 덤벼들 용기가 어디 있는 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평소라면 대견하다 말 할테지만, 애초에 상대를 잘못 봤다는 점에서는 감점이었다.


그것은 어른과 아이, 숫자의 차이를 넘어선 상성의 문제였다.

나는 이미 내 돈을 훔쳐간 기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티펙트"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지척에서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검을 뽑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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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6 0 11쪽
66 선동 21.07.07 26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31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9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6 2 12쪽
51 하녹 21.06.22 22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6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 소매치기 21.06.19 22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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