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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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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60
글자수 :
44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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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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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선동

DUMMY

거리 가득 쌓인 시체들로 인해 일었던 소란이 잦아들고, 땀에 젖은 이들이 마실 것을 찾아 가게들로 들어섰다.

이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만큼 집에 들어가면 될 일이지만, 그들이 할 말들은 아내나 아이들에게 들려줄 만한 말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더없이 가벼워진 입으로 갖은 추측들을 던지며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간밤에 비명 소리를 들었다 던 사람과, 나는 그런 것을 들은 적 없다 말하는 사람.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부터 시작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오간다. 심지어는 누가 더 시체 앞에서 태연했는가 따위의 의미 없는 이야기마저 터져 나올 정도였다.


사람들로 하나 둘 차오르던 주점들은 이내 만석이 되어 북적이기 시작했다.


기괴한 일이었다. 그렇게나 무수한 시체를 눈 앞에 두고도, 피로 물든 거리를 치우다 왔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애도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하기야, 그런 감정을 지닌 자들은 이미 옛적에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지.

이곳에 남은 자들은 누구보다도 저런 광경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암흑가 내부의 항쟁이나, 그에 휘말려 죽어버린 사람들의 시신에 눈이 익어버린..


스스로를 맹수라 착각하는, 스스로를 속이는 먹잇감들.


"잘된 일이지"


하지만 단순히 착각을 넘어 실언을 지껄이는 사람도 있었다.


중개상인 클로버였다. 항구 도시 특성 상 타국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중요한 고객이었지만 개중에는 저런 종류의, 마치 자신의 이득을 저들에게 빼앗기기라도 한 것 마냥 행동하는 사람 역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로 인해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음에도, 마치 그것이 순전히 자신의 능력인 것 마냥 과신하고 있는 경우였다.


대개 그런 경우 능력이 몹시 부족한 탓에 저렇게 발언권을 갖는 경우가 드물었지만..애석하게도 그는 예외였다.


"더러운 이종족 놈들이 죽은 거잖아? 안 그래?"


클로버는 그렇게 말하며 마치 과시하듯, 성국의 증표를 내보였다. 이종족은 물론이고, 이교조차 용납하지 않는..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나르에 필적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종교.


종교이자 국가인 그들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피나르와 인접하고 있었다. 영향이 없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안돼죠.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하시다니..아니면 뭡니까? 이미 벌만큼 벌었다는 겁니까?"


그 말에 반박하는 것은 이곳 식당의 주인인 아서스였다. 이미 이득을 볼만큼 본 클로버와는 다르게, 그로서는 손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음식을 팔아야 할 손님들 중 태반이 죽어버렸으니 그럴 법도 하지 않은가?


"인간족도 있지 않나. 이번에 죽은 건 이종족 뿐일 텐데?"


클로버는 코웃음 치며 반박했다. 지독한 차별주의자답게 인간에게는 따스할 것 같은 그였지만, 결국 그를 뒷받침하는 것은 극심한 자기애였다.

결국,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의 그러한 성향과는 별개로, 그가 말한 것은 하나의 진실이었다.


"..가게 주인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죠? 이종족은 받지 말라는.."


사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을 거리로 내몬 사람이 누구인지를. 갈 곳 없이 내몰린 이종족을 죽인 것이 누구인지를.


"시장은 대체 무슨 생각이야?"


짙은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그 사람도 알고 있을 텐데? 작은 이득 하나로 던져버릴 만큼, 이종족과의 무역이 가벼운 것은 아닐 거 아니야?"

"이종족을 죽인 건 암흑가잖아?"

"멍청이..바로 그 암흑가의 주인이 시장이잖아!"


그들이 보고 있는 힘의 역학 관계는 그야말로 단편적인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그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피나르라는 거대한 국가를 등에 업은 시장과, 한낱 도시의 양아치 따위를 비교했을 때..후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무척이나 적었기 때문이다.


도시에 팽배한 대다수의 생각은 암흑가가 시장의 사병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버나르가 바라고 있는 것일 테지.


"그럼 이 모든 게 시장이 꾸민 짓이라고?"

"정말 그렇다면 용납이 안 되는데?"

"정말..물건만 받고 돈을 안준 채로 죽어버렸단 말이야. 그 놈의 나가 놈들..!"


풀릴 곳 없어 들끓던 분노가 점차 명확한 적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기괴한 일이었다. 암흑가는 그리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그 주인이라는 시장 부르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지 않은가.

물론, 그들에게는 설마 국가 기관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무슨 짓을 하겠냐는 인식이 있기는 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인식의 흐름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들의 생각에 개입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자본금이 필요해. 그 놈들에게 받지 못한 정당한 내 돈 말이야. 그 돈이 없으면 난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암흑가가 아무리 두려워도 기껏 죽이기밖에 더 하겠어?"

"그래! 그리고 생각이 있다면 시장 녀석도 대놓고 암흑가를 부리지는 못할 거야. 우리 전부의 입을 막지는 못할 테니 말이야"


암흑가가 두렵기는 하지만, 보아하니 도시의 분위기도 엉망이고 제 기능을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도시를 떠나게 되더라도 보상금을 받아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함께 할 사람 있나?"


저울은 이미 기울었으나, 실행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결국, 그들은 맹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딴 도시. 돈만 아니었어도 붙어있을 이유가 없었지"

"하지만 이제 그 돈조차도 불분명해졌잖아. 안 그래?"

"다른 도시에 가면 정착하는데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거긴 오러 나이트가 찾아와서 돈을 빼앗지는 않을 거야"


그것을 지켜보던 남자, 클로버는 묘한 기분에 눈알을 굴렸다. 대화의 흐름이 이상했다. 무언가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물론, 어쩌면 결과적으로 지금과 같은 대화가 이뤄 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 몇 개월은 흐른 다음에야 벌어질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화의 흐름이 너무 빨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리의 피를 지우고 온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것이 단숨에 사라질 공포였던가?


저들이 그렇게나 용감했던가?


자신과 같은 악덕 상인이라면 모를 일이지. 허나 지금의 저들은 대화의 단계를 몇 개 씩이나 뛰어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들을 지켜보던 클로버는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람을 의심했다. 그의 목에 걸린 성국의 증표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넌 여관 주인 하보크잖아? 어쩐 일이지?"

"네? 제가 있으면 안 된답니까? 어차피 손님도 없어서 온 건데요"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클로버는 그 말이 혀 위에서 꺼끌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눈매가 좁아진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상인에게 있어 시간은 금이고, 그 금은 찰나의 순간에 잡아채야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결정했다.


"그렇군"


신경을 꺼버리기로.


"..훗"


그리고 클로버는 하보크의 눈 위로 스치는 미소를 보며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늦었나? 돌이킬 수 없는 건가? 내가 왜 말을 걸었던 거지? 젠장, 그냥 넘어가는 거였는데.


오랜 시간 장사를 하며 단련된 그의 감각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클로버는 스스로도 자신의 미소가 굳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뭐, 좋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모른 척 넘어가는 것 같았다.


"당신도 가시겠죠? 보상금을 받으러요"

"..물론이지. 이익을 챙길 기회인데 말이야"


허나 클로버는 깨달아야만 했다. 그 자신은 이미 잡힌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들의 목적이 시청에 있다는 것까지도.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젠장'


클로버는 한숨을 쉬며 맥주를 들이켰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선동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들은, 잔 위에 일렁이는 얼굴과 매우 닮아 있었다.




*



기괴한 광기가 흐르는 주점 옆, 가만히 졸고 있던 고양이 하나가 기지개를 펴듯 몸을 늘렸다.

치즈 색의 털, 양말을 신은듯한 새하얀 발. 휘어진 꼬리와 도도한 걸음. 마치 평범한 고양이처럼 거리를 거닐던 그녀는 이내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그녀에게로 고양이들이 모여들었다.


"샤트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들 모두가 캐트 시였다.


"어떻게 된 거야?"

"인간들이 세뇌당했어. 변장하고 있는 기괴한 녀석에게 말이야"

"도플갱어야?"

"아니, 인간이야. 아마도.."


캐트 시들은 묘하게 자신 없어하는 샤트라의 모습에 웅성였다. 그녀의 안목마저 혼란케 할 정도의 실력자가 있단 말인가?


"도시를 떠나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인간들의 싸움에 휘말릴 수는 없어"

"체셔 캣은 어디에 있지? 장로는 그잖아?"

"체셔는 잠들었어. 예언을 보기 위해서"


샤트라의 대답을 끝으로 그들 모두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눈치를 보던 그들 중 하나가 물었다. 회색 털의 캐트 시였다.


"시계가 움직였어?"

"그래"


캐트 시들이 일제히 소란스러워졌다. 질문들이 섞여 단숨에 날아들고 있었다. 샤트라는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움켜쥐다 발을 굴렀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직은, 나도 아는 게 없어. 체셔 캣이 오면 그에게 물어봐"

"그럼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지?"


캐트 시들이 샤트라에게 물었다. 그들의 장로는 분명 체셔 캣이었지만, 그들만의 검술을 창안한 샤트라는 그 다음으로 높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샤트라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샤트라?"

"우리는.."


그녀의 시선이 잠시 거리에 머물렀다. 결심은 짧았다. 이미 오래도록 고민해왔던 까닭이다.


"한 인간을 찾아갈 거야"


그녀는 수백 년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때, 그녀 앞에 나타났던 한 사람. 그리고 그와 겹쳐 보이던 어제의..


"검은 머리의 여자를 찾아. 갈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있어"


샤트라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 모두가 이미 떠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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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2 0 12쪽
75 아가사와 파라크 21.07.16 21 0 10쪽
74 간파 21.07.15 19 1 14쪽
73 샤트라 21.07.14 19 1 12쪽
72 포교와 이단 21.07.13 35 0 10쪽
71 성국 21.07.12 32 0 9쪽
70 인어 21.07.11 21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7 0 11쪽
» 선동 21.07.07 27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31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9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6 2 12쪽
51 하녹 21.06.22 23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7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2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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