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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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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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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1
추천수 :
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7.01 13:00
조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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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3쪽

보리스

DUMMY

"더럽군"


반은 무감각한 감상을 내뱉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찐득한 오물들이 발바닥에 들러붙고 있었다. 지독한 악취다. 코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이곳에선 흔한 일이에요"


스스로를 메트라 소개한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반은 가만히 아이들을 보았다.

누구든 자신이 사는 곳을 욕하면 좋은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저 아이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익숙하다는 것일까? 그러한 폭언과 모멸이?


저 아이들에게는 이 거리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필시 이곳에서 나고 자란 것이거나,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겠지. 이 거리에 익숙하고, 계속해서 살아왔다는 흔적이 저 아이들의 행동 이곳저곳에서 보이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갖은 오물에 발이 멈추는 자신들과는 다르게, 저 아이들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헤진 신발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다만..그렇게 되면 이상한 점이 생기는군'


반은 가만히 발 아래를 굽어보았다. 분명 낯선 장소 만을 통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반은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지도 하나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지금, 계속 같은 구역을 돌고 있었다. 다른 길과 이미 갔던 길을 교묘하게 번갈아 통과하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이라면 분명 눈치채지 못했을 속임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벽과 같은 바닥, 심지어 오물들로 가득한 곳이 아니던가. 어디를 가든 다 비슷하게 보일 만도 했다.


물론, 눈썰미 좋고 의심 많은 사람이라면야 쉽게 속지 않겠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풍경을 눈치챌 만큼 머리 좋은 사람이 이렇게 순순히 뒤를 따를 리는 없을 테지'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문제는 그거군'


반은 그렇게 걷던 중에 걸음을 멈췄다. 잭과 메트가 움찔하며 그들을 돌아보았지만 반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작님?"


엠버가 그를 불렀으나, 반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것들이 많아졌을 때 행동이 멈춰버리는 것은 그의 좋지 못한 버릇 중 하나였다.


허나 반은 고작 소년 소녀들이 무엇을 숨기는 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단서를 찾아버린 까닭이었다.


"..너희는 이곳을 자주 다니느나?"

"..저희 집인걸요"


잭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메트만이 입을 열어 답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허나 반에게 필요한 정보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어느 한 쪽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오물들이 그의 무릎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못에 박히기라도 한 듯, 뚫어져라 어느 한 발자국을 보고 있었다.


"..그 시녀"

"네?"

"그 시녀의 발자국이군"


언제 그런 것이 남아버린 것일까. 아 그래. 아마도 룽겔과 마리가 이 도시에 들어와 잭에게 소매치기를 당하기 직전, 마검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던 순간의 일이었겠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흔적은 단편적이었고, 반은 그저 우연찮게 그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종전부터 쫓고 있었기에 그저 눈에 띄었을 뿐.


허나 반이라는 사람은 한 번 눈에 띄어버린 이상 그것을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엠버는 보았다. 반의 미소를..철혈이라 불리던 남자가, 미소 짓는 모습을. 도박에 승리했음을 깨닫고 환희하는 순간을.


"..그렇군요"


잠시 엠버의 말문이 막히고, 메트는..아니, 메리는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듯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채 하염없이 눈빛을 흔들고 있었다.


반이 돌아섰다. 그는 메리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챈 듯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발자국 옆에 찍혀있는 조그만 발자국의 정체는 이미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래, 어린 숙녀 분. 네가 숨기는 게 무엇인 지 한 번 들어볼까?"




*




반은 확신했다. 이곳에는 분명 그들 중 일부가 들어왔다는 것을. 그 중 하나는 시녀일테고, 다른 하나는 암살검이나 그에 준하는 아티펙트를 지닌 누군가이겠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이미 죽어버린 헤벨 일병, 사라져버린 샤스포 수사관, 배신해버린 메이지 아크롭스, 묘한 행동을 보이던 그 웨어울프.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것만 같았던, 비슷한 분위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달랐던, 유별나면서도 규칙적인, 그 기괴했던 흔적들은 무엇이었던가!


마치 한 명의 사람이 차츰 여럿의 허울을 뒤집어 쓰는 것만 같은 그 불쾌하면서도 조악한 흉내의 정체는 무엇이었던가!


정신병자일까? 다중인격의? 그렇지 않다면 혼란을 주기 위한 단순한 기만이었던가? 그러한 기만이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있었던가?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드디어 그 실체를 잡을 단서를 얻었으니'


반의 눈빛이 메리에게 닿았다. 메리는 그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얼어버렸다.

이 남자는 어딘가 달랐다. 그때 보았던, 그 얼어붙은 것만 같은 눈빛의 남자와는 달랐다.


이 사람은..


"미쳤어..흡!'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다, 당신! 그 손 놓지 못해?"


잭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으나, 그는 엠버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메리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다.


"누구였지? 남자였나? 여자였나? 인간이긴 했던가?"


메리는 반사적으로 룽겔의 모습을 떠올렸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잡아뗄 작정이었다. 그것이 최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 남자였군"


허나 그녀는 단숨에 자신의 마음을 꿰뚫는 반의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반의 손바닥이, 그녀의 맥박과 호흡을 모조리 측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눈빛이 메리의 눈빛을, 동공의 수축을, 호흡의 속도와 깊이를, 피부의 떨림과 색을, 입술의 두께 변화를, 그리고 묘하게 기울어지는 몸의 각도까지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젊었나? 늙었나? 그렇지 않다면..그렇군. 나이는 어린 편이야. 그렇다면 키는 어느 정도였지? 컸나? 다부진 체격이었나? 머리는 짧았나? 문신이나 흉터는?"


그렇기에 메리는 한없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던 이 남자에게는 발각되고 마리라는 착각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호흡이 가쁘다.


"그의 이름을 알고 있나?"

"모, 몰라요!"

"그렇다면.."


반이 최후의 질문을 던지려 했던 순간의 일이었다.


탕!


돌연히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반은 무심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탄환을 쏜 것은 다름 아닌 엠버였다.

그녀는 허공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뭘 쏜 거지?"


그는 그녀에게 왜 그런 짓을 하였냐 묻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그것의 정체를 물었을 뿐이었다.


"글쎄요"


허나 엠버는 그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 했다. 과연 맞추기는 한 것인지도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던 중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여자였다. 반이 몸을 일으켰다.

메리는 이제야 겨우 그에게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호흡이 가빴다. 지금껏 가장 두렵다고 여겼던 하녹이 우습게 보일 정도의 사람이었다.


"메리!"


그와 동시에 해방된 잭이 메리에게 달려갔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본명을 부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듯 했다.

잭이 메리의 어깨를 쥐며 상태를 살폈다. 반은 잠시 그들에 대한 관심을 접어둔 듯 했다. 그들이 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들을 후 순위로 미루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뭐지? 조금 전의 총성인가? 그렇지 않으면..


"붉은 머리군"


반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불청객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을 입에 담았다. 그것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반이 붉은 머리에 대한 인상 깊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머리에 불만이라도 있어?"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머리칼이다. 오물 투성이의 골목에서조차 빛 바래는 기색 없이 화려한 머리칼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화염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반은, 그 머리칼을 최근에 본 기억이 있었다. 그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폭풍처럼 내달리던, 불꽃처럼 타오르던 이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치운다.

뼈로 된 창 하나로 제국의 정예들을 농락하던 그녀.


"유라 란가타"

"..맞아. 난 그 아이를 찾고 있어"


여자는 조금 놀란 듯한 기색이었다.

허나 그 이상의 감정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이 나라에서 어떻게 불리고 있는 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전설이라더니..눈썰미가 좋은데?"

"..내가 설마 란가타를 모르리라 생각했나?"

"우리 가문까지 아는군. 산맥 너머의 일인데도 말이야"

"제국 정보부의 힘이라네. 그래, 투기장에 팔려갔다 탈출까지 한 그녀를 이제 와서 찾는 이유는 뭐지? 대륙 최고의 정보 단체를 자칭하는 란가타가 설마 지금까지 행적을 몰랐다고 하지는 않을 텐데?"


란가타의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반은 그것을 보는 순간 품 속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아티펙트의 마력이 방아쇠처럼 당겨지고 있었다.


그녀가 꺼낸 것이 다름 아닌 커다란 바퀴처럼 생긴 칼이었기 때문이다.


"아, 당신들을 공격하려고 한 건 아니야. 그저 설명한 것 뿐이지"

"..유라 란가타를 죽이러 왔다는 뜻인가?"

"그래, 뭐. 그렇게 봐도 좋겠지. 그나저나 자리를 옮기지 않겠어? 여긴 냄새가 너무 심해서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섰다. 총을 가진 그들을 상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반은 무심코 그 모습으로부터 유라 란가타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 실력의 반의 반만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저것이 과한 자신감은 아닐 터였다.


"기왕이면 맞춰버리지 그랬나?"

"아뇨, 제가 쏘려 던 건 저 사람이 아니라.."


반의 너스레에 엠버는 무어라 변명하려 했으나, 이내 입을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면서도 끝까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을 터인, 텅 빈 허공을 말이다.




*




모두가 떠난 골목. 적막함이 남은 그곳에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쓰러졌다.


"룽겔!"


마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나, 룽겔에게는 더 이상 말을 남길 힘이 없어보였다. 그는 체념한듯, 락픽과 돈주머니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마리는 숨이 막힐듯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포기하지 마! 죽고 싶지 않은 거잖아? 아니야?"

"..나는"


룽겔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자신이 죽고, 혼자 남을 마리를 위해 수사관 일행이 떠날 때까지 버틴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힘이 다해버렸다.


반 수사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자신의 정보에 불안감을 놓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룽겔 폰 클락에게 있어 반이라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두려운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그가 살아있을 적에는 물론이고, 죽었음에도 여전히.


"룽겔!"


마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이 룽겔이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




나는 누구지?


아 그래. 나는 이 곳 아르바에 찾아온 리자드맨 상인, 보리스.


일확천금의 꿈을 갖고 이 도시에 찾아와 꿈에서도 바라던 거금을 벌어들여 돌아갈 일만 남은 상황에서 죽어버린 비운의 남자.

바다는 닫히고, 여관은 없어 쫒겨나고, 하는 수 없이 노숙을 청하려다 초겨울 한파에 얼어죽어버렸다.


하기야 도마뱀 인간에게 한파는 너무한 일이긴 하지.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나는 일어남과 동시에 검을 뽑았다.

암살검, 블랙라인은 곧바로 우리들의 시신을 뒤지고 있는 부랑자들을 향해 뽑혔다.

단숨에 쓰러지는 그들의 모습에 누군가가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치안을 위한 병사들이나 주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창과 함께 쏟아지는 얼음 결정이 나의 확신을 굳히게 했다.


저들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얼어죽게 만든 것이다. 실로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나를 그 지옥으로 밀어넣다니..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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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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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샤트라 21.07.14 19 1 12쪽
72 포교와 이단 21.07.13 35 0 10쪽
71 성국 21.07.12 32 0 9쪽
70 인어 21.07.11 20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6 0 11쪽
66 선동 21.07.07 26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29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3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8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5 2 12쪽
51 하녹 21.06.22 22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6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1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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