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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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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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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4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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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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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잭과 메리

DUMMY

바닥을 구르는 것은 괴물들의 목이었다.


단칼에 수 십 개의 목을 날려버린 창날이 붉은 빛으로 번쩍인다.

불안정하면서도 강렬한 빛이다. 그 빛이 아슬하게 꺼질 무렵, 유라가 창을 수습하며 지면을 구르는 괴물의 머리를 찼다.

사마귀를 닮은 괴물의 목이 낭떠러지 너머로 굴러 떨어졌다. 오러 나이트에 필적하는 괴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간단히 숨이 끊어진 것이다.


푸른 오러를 흩날리던 길버트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저번 싸움에서 오러의 감각이 뛰어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이야..


반면, 길버트의 검술은 여전히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유라에게 오러를 가르치는 대신 그는 검술을 배우고자 하였지만, 스승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넘을 수 없는 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라가 너무 천재적이었던 까닭에 길버트가 따라가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오러의 사용법이나 섬세함에 대해서는 유라의 것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거야 20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유라야말로 지금껏 오러에 대해 무지했던 만큼 장기간 수련한 길버트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않겠는가.


물론, 오러의 질이나 양에 대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주는 만큼 앞으로도 격차가 있을 테지만..


"..굳이 마리와 떨어질 필요가 있었던 거 맞아?"

"왜 그런 걸 묻지?"

"생각해보니까 조금 이상해서"


유라의 물음에 마노는 손에 들고 있던 사마귀의 낫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마노는 유라에 대한 평가를 고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기야 사람을 단기간에 판단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기야 굳은 머리로 투기장을 무너트리고 살아남았을 리는 없을 테지.


"..음"


길버트는 유라의 말을 듣자 무언가를 떠올린 듯 했다. 주경야독의 삶이었다. 낮에는 검을, 밤에는 공부를 하던 시절들.

책에서 보고 들은 것이 많은 만큼 나름의 지식도, 지혜도 있는 편인 그는 감각과 응용력이 없을 뿐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통달해 있는 편이었다.


"마검의 존재를 당신이 알았을 리는 없을 테지..저건 그야말로 우연이니까. 그렇다면 저 검이 없었다면 어떻게 들어갈 작정이었던 거야?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래. 맞네"


마노는 순순히 인정했다. 유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다.

아무리 작은 것 하나라도 무엇 하나 제대로 밝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설마 마리가 죽을 때까지도 숨기고 있을 작정이었단 말인가?


"화난 건가?"

"화나지 않을 리가 있어? 내 약속은 그들을 지키는 거야. 당신이 아니라"

"하지만 어쩔 수 없다네. 그녀가, 마리가 찾아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본래라면 내가 같이 도시에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한동안 그녀를 떼어놓을 작정이었지"

"뭐?"


그 말을 듣고 유라가 떠올린 것은 인어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노는 그 생각을 읽은 듯 고개를 저었다.


"룽겔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세. 우리에게는 정말로 인어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서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들일세"

"대체 이야기라는 게 무슨 뜻이야?"

"산맥에서의 이종족들에게 들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들이지"


마노는 그가 생각했었던 계획들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떤 것은 들어맞고, 어떤 것은 모조리 비틀렸다.


허나 그 모든 것에 자신이 개입한 것은 없었다. 수도에서의 테러나, 올가의 이야기. 무한히 되살아나는 이의 존재나 황자의 개입..그리고 그 정체 모를 수사관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조리 계획에 없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묘하게도, 동시에 그 모든 일들은 그가 바라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고블린과의 재회나, 산맥의 괴물들과의 만남. 추가적으로 오크들의 이야기들. 그리고 지금의 일들 역시도..


역설적인 일이었다. 무엇 하나 의도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들이 그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나.

마치 세계 자체가 거대한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성좌나, 악마. 천사를 비롯한 초월자들보다 더 윗줄에 있는, 신과도 같은 존재들..그것은 아직 어린 시절 탄캄에게 들었던..


"성국에 가까이 가서일까? 그렇다면 어떤 신일까? 검은 손? 이름 모를 그? 혹은 가장 높이 있는.."

"마노?"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길버트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생각이 있었다는 건 알겠어. 그렇다면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 역시 있을 테지. 당신이 마리를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리도 없고 말이야"

"..이해력이 깊군"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사람을 살았거든"


불합리함과 부조리로 가득한 삶. 우리에 갇힌 듯 평생을 갇힌 채 살아가고, 고귀하기에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핏줄을 원망해야만 했던 불운한 황자.


마노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제국에 대한 원한은 마노에게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그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저 웃음 탓인가?


그의 삶에 가득한 모든 불운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길버트는 분명 강한 사람이었다. 세계 최강의 나라를 집어삼킨 거대한 가문과,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 싸움. 그리고 수많은 음모들..


제 아무리 오러마스터라 한들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만큼 강한 적들이니까.

검 하나로 맞설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허나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길버트의 저 찬란하기까지 한 웃음에는 한 점의 흐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속이거나, 감추는 것 없이 반짝이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절망 속에 잠긴 채 살아왔던 마노였기에, 모든 것을 원망하고 발버둥 치던 그였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그 마음의 원인은 그것에 있는 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군"


마노는 그저 넘길 수밖에 없었다. 마이크가, 아니 지금은 룽겔인 그가 그렇게 회피하듯..그 역시도 피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길버트는 속도 없이 밝게 웃었다. 유라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보는 사람이 맥이 빠지는 얼굴이었다.


"걱정 마 유라. 룽겔도 그리 약하지는 않잖아? 그는 제국 군인이고, 마검까지 가지고 있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물론 길버트는 자신이 말이 실시간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아, 아티펙트라니?"


잭은 경악을 참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메리는 스스로의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두려움을 이겨내려 애썼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묘한 행동을 했다가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메리 스스로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듣자하니 최근들어 은화나 금화만을 빼내는 소매치기가 있다고 하더군. 희한한 이야기지. 주머니는 그대로 두고, 반짝거리는 것만을 훔쳐가는 도둑이라니.."


하녹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메리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래, 모른 척 넘기려 했었지만 사실 그것은 메리가 언제나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에 의심을 갖는 이들이 꼭 룽겔 하나뿐이었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꼭 성검과 마검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아티펙트에 대한 전설 역시 민간에서는 제법 유명한 편이었으니 발상 자체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꼭 동화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종종 아티펙트를 가진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어떻게 자신들과 연결지은 거지? 어디서 꼬리를 잡힌 거지?


"그래서 나는 실험을 해보기로 했지. 부하들에게 내가 표식을 남긴 은화를 주고 일부러 도시 안을 돌아다니게 했었어. 지금 내 손에 들린 은화가 바로 그것이지"

"그, 그건.."


그 흔적이 은화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일들을 모조리 들켜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그건 언제부터였지? 지금부터라도 사죄해야만 하나? 룽겔에 대한 것을 밝혀야만 하나?

하녹의 말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잭은 하마터면 스스로 모든 것을 실토할 뻔 했다. 자신의 무릎을 두드리는 메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잭은 곁눈질로 메리의 표정을 보았다. 어딘가 겁이 먹은 표정이었지만 아무리 눈치 없는 잭이라도 그녀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뭐지? 무엇을 알리려는 거지?


"그건..제가 주웠던 거에요"

"주워?"


하녹은 흥미롭다는 듯 메리를 살피고 있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실된 감탄이었다.

그가 항상 생각해왔던 것이었지만, 이 아이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굳이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랑자들 사이에서 나올 법한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좋은 토양에서야 무엇이든 자랄 수 있다지만, 이런 썩은 흙에서는 제아무리 좋은 씨앗이라 한들 제대로 자랄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타고난 천품이 있다면야 잔꾀 정도는 제법 부릴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통찰력만큼은 아니었다.


이 아이는 무언가가 달랐다. 무언가가.


"훔친 것이 아니라 이건가?"

"네. 땅에 버려져 있더라구요. 마치 누군가 일부러 버린 것처럼"


하녹의 미소가 짙어졌다. 잭은 그제야 무언가를 떠올린 듯 했다.

자신이 돈을 훔쳐오면 메리가 늘 자신의 몫으로 받아가던 은화들에 대한 것이었다. 입막음용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늘 선심 쓰듯 주던 것들이었지만 혹시?


그저 금전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 그렇다면 왜 전부 다 가져가지 않고 일부만 남겨둔 거지? 발견하지 못했나?


"..후"


하녹은 맥이 빠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탕이군. 돌아가라"


건물을 둘러싸던 이들은 소리없이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잭은 그 모든 것이 시험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에게 겁을 주고, 상황을 주도하기 위한 행동들이었던 것이다.


"일단은 사과해두마"


일단은..이라.


메리는 자신들이 온전히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들은 원래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고, 한 번 가진 의심을 놓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의심이 의심으로 끝난다는 것은, 신뢰나 다를 바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너희 말고도 다른 소매치기들도 같은 은화를 들고 오더군. 그들 모두가 너희처럼 길에서 그 은화를 주웠다고 했었다. 분명 내가 남긴 표식을 상대방에게 들킨 것이겠지"

"어떤 표식을 남기셨길래.."

"그건 말해줄 수가 없어.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잡을 수 있을 지가 의문이군. 상대방이 조금 멍청하다면 의심을 벗어나겠다며 은화를 갖고 다니지 않을 테지만.."


잭은 그제야 모든 표식된 은화를 버린다는 것이 오히려 멍청한 행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의심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을 사는 행동이라는 것일 테지.


하지만..


'그럼 메리는 지금껏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건가? 내가 선심 쓰듯 주었던 그 모든 은화들을, 표식된 은화들을 눈치채고 숨겼단 말이야?'


잭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돌봐주고 있다 생각했던 아이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지극히 어린아이다운 분노를 느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노였다.


그 뒤를 잇는 것은 그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으니까.


그 누구에게도 저런 종류의 도움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로서의, 부랑자로서의 경험이 알려준 양심이었다.

무엇하나 쉽게 얻어본 적 없는 그에게는, 무조건에 가까운 호의와 선의가 낯설고 무거웠다.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람이 또 있었다.

다름 아닌 룽겔과 마리,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지금,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활한 작자군'


룽겔은 지금 하녹이 여전히 저 아이들을 의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도 통상적인 의심이 아닌,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었다.

메리는 스스로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틀렸다.


룽겔의 눈에는 그 통제권이 누구에게 쥐어져 있는 지가 보이고 있었으니까.

룽겔은, 그리고 마리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녹이 처음에 던졌던 말들을.


'잭의 아티펙트라고 했던가? 메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 말이지?'


그는 분명 확신하고 있었다.

메리가 아니라 잭이, 아티펙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그저 확인하려 했을 뿐이다. 여전히 그가 아티펙트를 갖고 있는 지를.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이 사실인지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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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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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성국 21.07.12 33 0 9쪽
70 인어 21.07.11 21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7 0 11쪽
66 선동 21.07.07 27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31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9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7 0 14쪽
»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6 2 12쪽
51 하녹 21.06.22 23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7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2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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