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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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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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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6.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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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부랑자들

DUMMY

"뭘 보고 있는 거지. 엠버?"

"..자작님"


무엇을 그리도 깊게 생각하는지 엠버는 반이 수차례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반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눈빛을 빛내는 아이가 보였다.


꾀죄죄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 누군가에게 맞기라도 했는지 퉁퉁 부은 눈두덩과 앙상한 팔다리.


소매치기로군. 그 정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한 반은 혀를 차며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반은 무분별한 동정심이 오히려 저 아이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똑같은 부랑자들처럼 보여도, 소매치기와 거지들 사이에는 의외로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으니까.

동정심에 던져준 동전 하나가, 이 구역 거지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필시 저 아이의 미래는 참혹할 테지.

아주 잠시라면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도시에 오래도록 머무르지 못하는 반으로서는 책임지지 못할 미래였다.


무엇보다 저 아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나 넘쳐나고 있지 않던가.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반이라는 사람은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일에는 손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수도나 클락 령에 있을 적에야 자선 행사나 기부 활동에도 참여했다지만, 이곳은 타지이지 않던가.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있었다.


'..미안하구나. 얘아'


하지만 순순히 자신의 무력함을 고한다는 점에서, 반은 조금이나마 순수함이 남아있는 셈이었다.

수 백 수 천의 목숨을 다루는 귀족이기에 더더욱.

설령 그것이 한 푼 어치도 되지 않을 싸구려 동정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세상에는 그런 것조차 하지 않으며 남을 욕하는 자들이 넘쳐났으니까.


'회의감이 드는군. 세상천지 나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넣어도, 세상이 좋아지진 않으니 말이야'


차라리 정계 쪽으로 나가야만 했을까?


하지만 반은 스스로 그러한 쪽의 감각이 없다는 것을, 더러움을 감내할 수 있는 인내심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꺾일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일단은 넘겨'


그는 스스로에 대한 모순을 억눌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해왔던 일들은 언제나 같았으니까.


'그리고 붙잡는다. 그 추악한 범죄자 놈들을..!'


반의 머릿속으로 그 날의 참상이 스쳐지나간다.

화염에 일그러진, 녹아내린 시민들과 동료들. 순직한 이들과 지켜내지 못했던 사람들.

자신이 하는 일들은 늘 그런 사람들의 원한을 갚는 일이었다.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을 파헤쳐, 죄의 주인에게 응분의 대가를 받게 하는 것.


"..자작이라 부르지는 말게. 이미 얼굴이 알려지긴 했다지만 굳이 언급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군요"


반은 오늘따라 엠버의 푸른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를 보좌관으로 뽑은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니였던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국민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던 모습.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끌렸던 것이리라.

지금에야 사라져버린, 적에 대한 경계심으로 치환되어버린 마음이지만 말이다.


"..이제 무엇을 하실 작정이시죠? 무작정 찾아 나서실 건가요?"

"우리는 고작 두 명일세 엠버. 그렇게 해서는 일주일이 걸려도 부족할 테지"


이 거대한 도시를 수색함에 있어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반에게 있어 일주일의 시간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그가 수도에 있을 적에는 그 어떤 사건이라 할 지라도 사흘 안에 해결하곤 했으니까.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사망과 인력이 구축되어 있는 수도에서나 가능했던 일이고, 생전 처음 와본 곳에서의 사건은 제 아무리 전설적인 수사관이라 할지라도 힘든 감이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찾아가기 보다는, 나오도록 만들어야겠지"


그렇기에 반은 그들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저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자네의 감각은 어떻지?"

"..암흑가일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엠버. 시장이 알고 있는 정보는 저들이 알아도 소용이 없고, 시민들이 아는 정보는 중구난방이지. 암흑가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만약 저들에게 진짜배기들이 있는 그곳으로 잠입할 수단이 있다면.."

"..평소와는 다르게 증거가 빈약하군요"

"어쩔 수 없지. 시간은 없고, 정보는 더더욱 없으며..이미 알고 있는 것마저 나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야"


반은 상대방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낯이 익은 혼란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미 숲에서, 샤스포 수사관을 쫒을 적에 느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숲의 마력에 사로잡혔던, 유령에 홀렸던 반이었기에 그 당시의 생각들은 기억 한 켠에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범인을 잡기는커녕 스스로의 망상에 사로잡혀 자살할 뻔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불쾌하고도 음습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인가.


생각해보면 지금만이 아니었다.


산맥에서, 메이지 아크롭스는 왜 돌연 우리를 배신했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웨어울프의 등장은 어땠지?


왜 그들에게서 익숙한 습관이, 행동들이 보였을까.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아니, 아니지. 지나친 생각이야"


추리라기보단 오히려 망상에 가까운 생각들. 하지만 반은 스스로가 그 망상에 매료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수차례 고개를 흔들며 그 모든 생각들을 털어내고자 애썼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으니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이내 포기하기로 했다.


'좋다. 어차피 지금은 묻어둬야 할 생각이니까. 무엇이 답이던 간에, 결국은 드러날 진실이야'


반은 그렇게 생각을 일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엠버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일순,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소매치기 소년에게 머물렀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머나먼 기억을 추억하는 듯한 눈빛이다.


허나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 노릇이었다.





*






잭과 메리가 밖으로 나섰을 때, 그들에게 묵직한 시선들이 꽂혀들고 있었다.

잭은 그 시선이 동화가 든 주머니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꽂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폭력적인 시선으로, 누군가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봐 잭. 다시 보는군. 안 그래?"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것은 역시나 저 남자였다.

좀도둑 하른.

좀스러운 이름과는 다르게 저 남자는 이쪽 거리에서도 유명한 실력있는 검사였다.

다만, 그 실력에 걸맞지 않는 겁쟁이 같은 성격 때문에 조잡한 범죄만을 벌일 뿐이었다.


허나 가장 문제인 것은 그 조잡한 성격만큼이나 독특한 성벽.


"..저리 꺼져"


잭이 으르렁거리며 쏘아붙였지만 하른은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 겁쟁이 같은 성격은 아무래도 상대를 가리는 모양이었다.

잭의 이빨이 거칠게 갈려나갔다.


'젠장. 돈도 못 벌고 이게 뭐야. 그 룽겔이란 놈은 지금도 우리 뒤에서 이 꼴을 지켜보고 있겠지?'


잭이 수치심에 몸을 떨었지만 지금 룽겔과 마리는 여전히 건물 안에서 하녹의 말을 훔쳐듣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잭의 분노가 사그라들지는 않겠지만..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거야? 그렇게도 할 일이 없어?"

"흐흐 아니. 반대야. 할 일이 늘어났지"


잭은 하른의 말을 듣고도 의아함 따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른은 그런 잭의 마음 따위를 헤아려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의뢰가 들어왔다. 너희가 정보원이 되어 줘야겠어"

"..의뢰라고?"


그러나 그 다음 말까지 무시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암흑가에서 받아들여 부여하는 의뢰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었으니까.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까이 가서 정보를 물어와"

"..정보라고? 대체 무슨.."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야. 설마 다 알려줄 거라 생각한 거야? 아니면 알려주길 바라는 거야? 정말로?"


잭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종류의 의뢰에 대해 너무 깊게 파고드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정보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자신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 역시도..


"우리의 안전은 누가 보장하지?"

"네가 방금 본 사람"


잭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하녹이라..그 정도면 정보 쪽에 있어서는 최고위 급의 인선이었다.

그 정도라면 설령 듣지 말하야 할 것을 들었다 할 지라도 안전할 것이고, 사실상 그다지 중요한 정보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찾지?"

"찾으려 하지 않아도 보일 거야. 무려 수도에서 온 수사관이라고 하더군"

"수사관이라고?"


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른은 그런 그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 소년이 이런 시궁창에서 뒹굴게 된 것이, 한때 그의 아버지를 잡아갔던 한 수사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수도에서 파견되어, 암흑가를 들쑤시고 다녔던 그 융통성 없는 수사관..


이름이 뭐였더라? 샤스포?


"크흐흐..원망하는 건 좋아 잭.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덤벼들진 마. 아무래도 그 사람..거물인 것 같거든"


하른은 그렇게 말하며 소년의 증오를 부추겼다. 이 자제심 없는 소년이 어떻게 하면 제 뜻대로 움직일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분명..


'그렇게 되면 그 반고양이 놈도 널 도와주진 못할거다 꼬마야. 흐흐'


하른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끔찍한 웃음이었다. 끈적거리는 시선이 달라붙는다.

그 대상은 잭의 생각과는 다르게 메리가 아닌 그에게 향해 있었다.

메리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듣지 못한 룽겔과 메리가 뒤늦게 합류했다. 그들은 영문을 모른 채, 묘한 분위기에 침을 삼킬 뿐이었다.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덜컥대며 돌아가는 톱니는 당장에라도 파국으로 치닫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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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인어 21.07.11 20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8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6 0 11쪽
66 선동 21.07.07 26 0 11쪽
65 묵은 진실 21.07.06 20 0 12쪽
64 맹약 21.07.05 29 0 12쪽
63 혈통 21.07.04 25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3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6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5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8 0 13쪽
»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6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2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5 2 12쪽
51 하녹 21.06.22 22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6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1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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