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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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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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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수 :
44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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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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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묵은 진실

DUMMY

"으, 으아아악!"


이른 새벽을 여는 것은 비명이었다. 날카롭게 벼려 진 목소리가 아직 덜 깬 잠을 몰아낸다. 창문이 열리고, 불빛이 켜진다. 어스름을 몰아내며 문이 열린다.

허나 빛 아래로 드러난 진실이 꼭 아름다우리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 나오지 마!"


뛰쳐나온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난도질당한, 불에 타버린 시체들이었다. 그대로 얼어버린 사람들이 발길을 돌린다.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밀어낸다.

하지만 여러모로 이미 늦어버렸다.


"아, 아빠? 저, 저건.."


한 아이가 잔뜩 겁에 질린 채 입을 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한발 늦게 아이의 눈을 가렸다. 허나 아무리 눈을 가려본들, 이미 뇌리에 각인된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코를 찌르는 냄새 역시도..


"전 시민들에게 알립니다!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병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시민들의 마음에는 이미 불안과 불신이 자라나고 있었다.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



"묻지 않을 수 없군. 대체 무슨 생각인가?"


반이 찾아간 것은 다름 아닌 시청이었다. 이곳에 오는 순간, 가장 먼저 방문하여 봉쇄령을 요청하였던 바로 그곳.

그의 앞에는 이 도시, 아르바의 시장이 있었다. 묘할 정도로 침착해 보이는 표정의 시장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반은 그와의 독대가 가능했다는 것에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범인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제국으로부터의 병력이 늦군요"


몬테소 하겐트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내려두었다. 이미 오래 전에 바닥난 찻물에 빈 잔이 달그락거렸다. 반은 그가 무척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표정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놈의 정치적 유능함 때문이겠지. 이 판국에도 무언가를 숨기려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여유가 없기 때문에 평소의 버릇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군?"

"의도라.."


하겐트 남작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도시의 주인이 저인 것 같습니까?"

"..적어도 이 나라는 그렇게 보증하고 있지 않던가. 틀렸나?"

"물론, 그렇지요. 그리고 이 나라의 주인은 힘이 없고 말이에요"

"..뭐?"


무심코 반문해버린 반이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았을 뿐.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저들의 뒤에는 버나르가 있습니다. 그것도 위대한 황후께서 말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은 주위를 살폈다. 하겐트 남작은 안심하라는 듯 손짓했다.


"안심하시죠. 누군가에게 들려줄 말이 아니라는 것은 저 역시도 알고 있으니까요"

"..설명하게"


하겐트 남작은 떨리는 손으로 주전자를 들었다. 허나 차가 나오 질 않았다. 진작에 소진해버린 까닭이다. 주전자의 차를 모조리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목이 탔다. 입이 마른다.


"황태자께서 서거하셨을 때부터, 저의 입장은 무척이나 위태로워졌습니다"


시녀를 불러도 될 이야기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포기한 듯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계시겠죠? 황태자께서 무슨 짓을 하고 계셨는지"

"..밀수를 말하는거로군?"

"네, 맞습니다. 아마 몇 년 되지 않은 이야기였죠. 마그나의 결계가 단숨에 약화된 것은 말입니다"

"..피로 맺은 맹약. 마그나의 피를 이은 자가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결계"

"그리고 마그나의 피를 이은 자는 나갈 수 없는 결계죠. 그렇기에 마그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온갖 괴물들과 유령이 가득한 산맥을 지나가는 수밖에 없죠"

"그런 결계가 약화되었다는 건가? 아크 메이지들을 모조리 모아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던 그것이?"

"저희 역시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군요.."


하겐트 남작은 잠시 생각을 이어가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책상에 있는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꺼내든 것은 낡은 장부. 그리고 브랜디였다.


"..이건?"


반이 브랜디를 따르기 시작한 하겐트 남작을 보며 물었다. 몇십 년은 되었을 법한 장부였다.


"최초의 탈출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디에서의?"

"물론, 마그나죠"


하겐트 남작은 단숨에 브랜디를 들이켰다.


"짙은 회색 머리칼과 짙은 녹색의 눈동자의 소년이었죠. 지금으로부터 대략 20여년 전의 일입니다. 정확히는 19년이군요. 열 살을 갓 넘은 소년이 국경에 나타났습니다"

"..계속하게"


반은 그가 말하는 특징으로부터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으나, 우선은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병사들이 그를 잡았죠. 그때는 밀수꾼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오고 가는 것 자체가 수가 불가능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오고 갈 수 없는 곳을 지키는 병사들은 무력하고 부패했습니다"

"그래서..사람을 팔았다는거군"

"아무나 팔지는 않았죠. 하지만 그 아이는 근처 마을이나 도시의 아이가 아니었어요"

"이상하다 여기지는 않았나?"

"그들은 그저 그날의 술값 만을 원했을 뿐이었습니다"


반은 또 다시 브랜디를 따르려는 그의 술잔을 빼앗았다. 술에 취해 하는 증언 따위를 신뢰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에게 있어 지금 그가 하는 말들은 모든 것이 커다란 단서가 되고 있었다.

허나 하겐트 남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브랜디를 병 채로 들이켰다.


술 없이는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훗날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들조차 나름의 걱정하는 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만약 이 아이를 내륙에 팔았다가 부모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자신들의 죄가 밝혀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 아이는 무척이나 귀족답게 생겼었거든요. 태도도 그랬고, 손도 깨끗했죠"

"마치 본 적이 있다는 듯한 발언이군"

"물론, 보았습니다. 국내에 팔지 못할 아이를 어디로 보냈겠습니까?"

"..그렇군"


반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양빛에 찬란히 빛나는 바다가, 오늘 따라 끔찍해 보였다.


"물론, 팔려온 것은 그 아이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죠"

"..다른 아이들도 팔았던가?"

"아이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신도 보셨을 테죠"


그 말에 반이 떠올린 것은 간밤의 웨어울프들이었다.


"제정신인가?"

"저는 다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때의 저는 아무런 힘도 없었죠. 마치 지금처럼요"

"..당신도 젊었을 적이 있었을 테지"

"누구에게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이들을 팔 수 있었던가?"


하겐트 남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쓰게 웃었을 뿐이다. 브랜디로도 취하지 않는 마음이, 그에게도 있었다. 적어도 젊었던 시절에는 말이다.

사람들이 양심이라 부르는 그것. 허나 그것이 마모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정체를 알았지?"

"..달랐거든요"

"무엇이?"

"그 아이 안에 잠들어 있는 힘이요"


반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래, 분명 강하긴 했었지. 그 이름 모를 남자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단련의 결과로서 생겨난 힘이었다. 그것을 단숨에 알아볼 사람이 어디에 있지?


"..마법인가?"


생각 끝에 반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알아보았다면, 그만큼 특징적이었다는 뜻일 테니까.


"아크 메이지의 재능이었죠. 암흑가의 사람들이 발견했습니다"

"그럴 리가"


하지만 반은 부정했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메이지였다면, 왜 산맥에서는 그 힘을 쓰지 않았지?

숨기고 있었나? 그 절박한 상황에서? 아니면 혹시..


'잃어버렸나?'


아니, 그럴 리가.


반은 스스로의 생각을 일축했다. 아크 메이지의 힘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히 떼었다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마치 본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덩달아 하겐트 남작 역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본 적도 없는 그가 어찌 재능의 여부를 안단 말인가?

허나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하겐트 남작은 헛기침을 하며 브랜디 병을 내려놓았다. 반 이상 비워 진 병 때문에 속이 쓰렸다.

하지만 묘하게도 정신은 멀쩡했다.


"그 아이를 심문했을 때,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죠. 바로 그 아이가 마그나의 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계에 생겨난 이상에 대하여"


하겐트 남작은 그대로 반의 손에서 장부를 빼앗았다. 그리고 거칠게 페이지를 뒤적거리다 어느 한 부분을 펼쳐 보였다. 그곳에는 묘한 형태의 그림이 있었다.

아니, 사실 그림이라기보다는 낙서에 가까운..유리가 깨어진 것만 같은 형태의 선들이었다.


"버나르 가에서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균열과도 같은 것을 발견했죠. 버나르 가는 기뻐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숙원이었으니까요. 그들이 골렘을, 결계를, 마법을, 연금술을! 극한까지 연구하고 추구하면서까지 해내고 싶었던 원념이었으니까요"

"그것이 수백 년이나 이어질 수 있는 감정인가?"

"그것이 가능했기에 위대한 가문이라는 겁니다"


반은 우선은 수긍하는 척 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그들의 집착은 기이했다. 그 어떤 역사에서도 저런 것이 가능했던 가문은 없었으니까.

사백 년은 커녕, 때로는 수 시간조차 지속되기 힘든 것이 인간의 감정 아니던가.


"하지만 그들은 이내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균열이 다시 재생되고 있었거든요. 다시 벌려보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버렸죠"

"그리고?"

"우리는 소년에게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미 한계까지 고문해서 더 이상 털어놓을 것은 없어보였지만, 그 소년이 한 번 결계를 뚫은 이상..두 번도 가능하리라 생각했죠"

"그리고 놓쳤군"


하겐트 남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을 보았다. 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안단 말인가? 그것은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하여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비사일 터인데.


"계속하게"


허나 반은 철저하게 질문자로 남을 뿐이었다. 하겐트 남작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아이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일이었죠"

"흔적은?"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 도시가 버나르 가의 단순한 자금줄이 아니라 다른 역할을 부여 받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때 유입되었던 사병들이 그대로 이곳에 눌러앉아 암흑가를 창설하게 되었고, 이 도시는 완벽하게 그들의 손에 들어갔죠"


또 다시 그놈의 숨은 칼인가. 반은 혀를 찼다.


반은 버나르 가문이 그토록 집착하는 위장술에 대해 이제는 감탄스러운 마음마저 드는 것 같았다. 그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밝히려 드는 법이 없었다.

기묘하게도, 수백 년이나 계속해서 말이다.


"자작님. 당신께서는 의아해하셨겠죠. 왜 병사들이 개입하지 않는 지. 정말로 제가 그들과 결탁한 것인지를"

"..그렇네"


그리고 그 의심의 연원은 엠버의 감각이었다. 묘할 정도로 잘 맞는 그녀의 감. 하지만 그것은 이번에도 적중하였던가?


"저는 다만 명령 받은 대로 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봉쇄령을 내리지 말라 하였고, 지금은 내리라 하였죠. 그 이유를, 이제는 아시겠지요?"

"..그래. 그렇군"


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역시 다르다고.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네"

"얼마든지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지?"


반은 처음 이곳에 찾아온 날, 엠버와 함께 그를 찾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허나 하겐트 남작은 마치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는 듯,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아마, 3년 전이었던 것 같군요"


까득.


반의 이가 거칠게 갈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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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레모리 21.07.17 32 0 12쪽
75 아가사와 파라크 21.07.16 21 0 10쪽
74 간파 21.07.15 20 1 14쪽
73 샤트라 21.07.14 19 1 12쪽
72 포교와 이단 21.07.13 35 0 10쪽
71 성국 21.07.12 33 0 9쪽
70 인어 21.07.11 21 0 10쪽
69 거짓과 위선 21.07.10 29 0 11쪽
68 암살 21.07.09 19 0 11쪽
67 예언 21.07.08 27 0 11쪽
66 선동 21.07.07 27 0 11쪽
» 묵은 진실 21.07.06 21 0 12쪽
64 맹약 21.07.05 31 0 12쪽
63 혈통 21.07.04 26 0 10쪽
62 노블 텐 21.07.03 24 0 12쪽
61 깨달음 21.07.02 27 0 13쪽
60 보리스 21.07.01 26 1 13쪽
59 수사망 21.06.30 26 0 12쪽
58 엠버 21.06.29 33 0 11쪽
57 쌓여가는 불만 21.06.28 21 0 12쪽
56 캐트 시 21.06.27 29 0 13쪽
55 부랑자들 21.06.26 19 0 11쪽
54 단서 21.06.25 27 0 14쪽
53 잭과 메리 21.06.24 23 0 13쪽
52 만연한 음모 21.06.23 26 2 12쪽
51 하녹 21.06.22 23 1 13쪽
50 작은 거래 21.06.21 38 1 12쪽
49 부랑자들의 거리 21.06.20 17 1 12쪽
48 소매치기 21.06.19 22 1 11쪽
47 항구도시 21.06.18 3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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