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됐어 알아서 할게,"
2년만에 처음 만나는 거지만 여전히 무뚝뚝한 대답,
그럼에도 서운하지않은 모양인지 그녀는 씩씩하게 물었다.
"우리아빠한테 부탁하면 여기 계신 이사님 업무량이 확~! 줄어들텐데?"
이미 사내에서 조우리 아버지에 대한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져있는 사실,
돈도 돈이지만 이런 인수합병에 대해서는 전문지식이 전무했던 진현모 이사도 격하게 공감하는 눈치다.
"진심이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조우리를 보니 헛웃음이 나올정도로 귀여웠다.
예전의 핑크 헤어가 아닌 성숙미를 더한 올 블랙임에도 태생의 귀여움은 숨기지 못하는 모양,
"진 이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어차피 저도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서 작업해야하는 일이었습니다."
웬만해서는 업무적인 부분에 엄살부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진현모 이사라는 걸 잘 알기에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럼 조우리씨의 부탁이 아닌 제가 직접 아버님을 찾아뵙고 부탁드려보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필요는..."
"이건 일이야 공과사는 분명히 해야지"
여전히 딱딱한 말투의 석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진현모 이사가 안타까울지경이다.
'도대체 대표님은 왜 우리씨 앞에서만 저러는거야?'
***
서울 강남의 진정한 술꾼들만 모이는 대포집,
석진이 이곳에 발을 디딘건 이번이 2번째이다.
물론 첫 번째 왔을때도 눈 앞에 있는 남자와 함께 왔었다.
"전역했다며"
"예 아저씨.."
"그래 한잔 받아라"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여러 테이블들과는 전혀 다른 공기,
마치 이 테이블에 보이지 않는 경계라도 있는 것처럼 둘의 시선은 술잔에 고정되어있었다.
"오늘은 얼마나 버틸 작정이냐?"
"주시는대로 견뎌보겠습니다."
지긋이 눈감고 술잔을 비운다.
그렇게 1시간, 2시간, 3시간이 흐르고
눈 앞에 있는 꽁치김치찌개는 이미 데우기를 반복하다 못해 국물이 말라비틀어질때 즈음,
"용건이 뭐냐?"
만나자마자 소주만 12병씩 달리는 두 사람이 드디어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인수합병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다."
길었던 인고의 시간들에 비해 의외로 화끈한 대답,
아마 회사 사정을 빠삭하게 알고있는 조우리가 이미 대략적인 그림은 설명한 모양이다.
"이모님 여기 계란말이 주세요."
황당한 얼굴로 석진의 테이블을 보던 이모님이 주방에서 뚝딱 안주를 만들어 주셨다.
"좀 먹으면서 마시세요. 두 분다 여기 죽으러 왔어요?"
계란말이를 내려 놓으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원수 막걸리 6병 추가요."
질렸다는 얼굴로 돌아가는 이모님,
그리고 서론은 끝났으니 본론으로 넘어가보자는 조우진이 셔츠를 풀어헤치며,
"아직도 군대가기 전과 똑같은 생각이냐?"
"예 그렇습니다."
2년전 군입대를 앞두고 초등학교때 이후 다시 재회했던 두 사람.
당사자인 석진은 모르지만 딸의 심각한 석진앓이를 너무도 잘 알고있는 딸바보 조우진이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직도 내 딸과 만나볼 생각이 없나?"
"죄송합니다."
"자네 말대로 스스로 노래 만들어서 국내에서 데뷔까지 마쳤잖아?"
"조우리는 그 정도로 끝날녀석이 아닙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거절의 이유는 단순했다.
싱어송라이터로써의 성공과 동업자로써의 대등한 위치,
단순히 급이 안 맞아서 못 만나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보다 자네가 더 우리 딸 보호자 같구만..."
매사 밝은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사실 그 누구보다 소심한 성격이다.
어렸을 적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탓에 왕따도 자주 당했던 그런 아이였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때부터 였던것 같아 우리 딸이 변하기 시작한게"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친구다운 관계를 맺게 되었던 사람이 바로 당시 전교 1등을 하던 반장이 바로 김석진이었다.
"제 잘못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런걸 탓하려고 부른게 아니야"
본디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해야만 가능한 일
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내실보다는 겉모습에 더욱 몰두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 조우리는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인생을 살고있었다.
"전 조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있습니다. 녀석은 분명..."
시원하게 살얼음이 들어간 원수 막걸이를 한잔 들이킨 석진이 처음으로 씨익 웃는다.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짜증날정도로 자신보다 더 딸에게 진심인 이 남자,
세상 그 어떤놈을 데려와도 다 마음에 안 들겠지만 이제 조우진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너도 그럴 자격이 있는 놈이지"
"감사합니다. 아버님"
둘은 또 말없이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
유니버설 뮤직 그룹 대표실,
해리슨과 마주한 루이스 걸겜 대표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직진했다.
"그러니까 빌보드에 굳건하게 올라가 있는 노래들 전부 어디서 듣도보도 못했던 동양의 한 작곡가가 만든 작품이라고?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듣도보도 못한 작곡가가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작곡가일세"
"말도안되는 소리! 자네도 한물 갔구만! 아니면 자네도 벌써 그의 팬이 되었는가?"
Show Time 레이블의 진출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유니버설 뮤직의 루이스 걸겜 대표는 적의를 감추지 않으며 콜롬비아 레코드 대표 해리슨에게 따졌다.
"오래봐온 정으로 한마디만 하겠네 괜한 짓 하지마시게 EMI에도 얼른 손 떼고 말이야"
은밀하게 진행해온 EMI매수건을 알고 있는 해리슨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며 며칠 전에 받은 Show Time 레이블의 보고서를 덮었다.
"혹시 자네.. 진짜로 Show Time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자네의 노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겠어 하하"
웃으며 말하는 그를 그저 말없이 쳐다만 보는 해리슨,
동공이 커진 그가 외쳤다.
"정말 미쳤군! 자네 최면이라도 걸린건가!? 정신 차려! 그는 이제 막 젖을 뗀 애송이라고! 건방지게 빌보드를 넘보는 동양인에게 머리 숙일 참인가? 그냥 자넨 소닉 뮤직 옆에서 계속 기생하란 말이야!"
"자네야 말로 물러날 때가 된 듯 싶군 대표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있었어 물이 어깨까지 차올랐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다니 다시한번 그의 노래를 잘 들어보시게 유니버설 뮤직 그룹이 EMI를 인수 한다고 해도 그는 더욱 높이 날아갈 걸세"
황당한 얼굴의 루이스 대표를 향해 대표실의 문을 열며 해리슨이 마지막 말을 이었다.
"나도 그의 깃털이 될 것이네"
*
"이사님 EMI 뮤직 20%까지는 매수 했습니다만 유니버설 뮤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4배 이상 떨어졌던 EMI의 주식이 유니버설로 인해 다시 급등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대표님의 결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늦은 새벽 시간 한예슬 비서의 보고를 들은 진현모는 고민에 빠졌다. 현재 미국에서 Show Time 레이블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유니버설 소속 레이블 뿐만 아니라 소닉 뮤직 산하의 레이블에서도 꾸준한 러브콜을 받으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중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굳이 EMI까지 흡수해야할 필요가 있는건가....'
잠시 침대에 앉아 고민하는 진현모,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에요?"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의 주인공,
강수아가 물었다.
"문제는 무슨~ 항상 있는 일이지, 나 때문에 깼어?"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강수아가 진현모의 등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물으니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요 때마침 목도 마르고 해서요 맥주나 한잔 할래요?"
"아이는 괜찮겠어?"
"히잉..그럼 전 무알콜로 마실게요"
맥주를 들고 1층 테라스로 나오는 진현모에게 전방에 보이는 야경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여기 너무 아름답죠? 전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는데,"
"그러게 나도 이런 집에서 살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다 대표님 덕분이지"
맥주잔을 부딪치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야경을 쳐다보던 강수아가 물었다.
"대표님이 그렇게 좋아요?"
"내 딸들만큼 소중한 녀석이니까"
그의 눈에서 많은 감정을 엿볼 수 있었던 강수아가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자신이 가져온 마른 오징어를 진현모 입에 넣어주었다.
"으이그 재미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
Show Time 엔터테이먼트 최초의 두 번째 여가수 데뷔가 확정되었다. 그녀는 미래에 많은 소속사들의 러브콜을 받게 될 대한민국의 몇 없는 최정상 싱어송 라이터 이주은이었다.
"주은아 잠깐만 나와봐"
막힘없이 녹음을 진행하던 이주은이 갑작스러운 권태웅 프로듀서 호출에 당황하며 천천히 부스에서 나왔다.
"네 프로듀서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 대표님이 과연 허락 하실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권태웅을 향해 이주은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이미 결정 하셨잖아요 그만 좀 하세요"
"아는데.. 알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칼 같으신 분인거 너도 잘 알잖아"
"별수없죠 이것도 제 스타일인데 받아드릴 수 없다면 제가 나가는 수 밖에요"
"야! 얘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극단적이야! 너 지금 당장 데뷔 시켜줄 수 있는 소속사가 어딨다고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아아아아~~~아아아~~"
귀찮다는 듯 귀를 막으며 녹음실을 뛰쳐나오는 이주은과 석진의 눈이 마주쳤다.
"대..대표님.."
"뭐하냐?"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간 것인지 능글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대표님~ 저 이번 앨범에 꼭 넣었으면 하는 곡이 있는데 허락 해주시면 안되욤?"
최대한 귀엽게 애교를 떠는 녀석을 보니 대충 무슨 곡인지 느낌이 오기는 했다. 하지만 데뷔도 안 한 가수와 대표 사이가 이렇게 가벼워서야 앞으로의 버릇이 나빠질까 걱정된다.
"이주은 이 손 놔, 앨범문제는 프로듀서님과 합의를 통해서 결정하는거야 이렇게 내게 다이렉트로 부탁하는 건 예의가 아니야 처음이니까 넘어가지만 다음부터는 끽~"
엄지 손가락으로 목 긋는 시늉을 하자
"칫 그러면 녹음실로 오셔서 한번 들어나 보세요!"
새침하게 돌아서는 녀석을 따라 들어가니 권태웅이 민망한 표정으로 노래를 재생 시켰다.
-쏟아지는 빗물은 날 한 치 앞도 못 보게 해
몰아치는 바람은 단 한 걸음도 못 가게 해
'이럴 줄 알았어'
주은이는 원래 밝은 노래 위주로 선보이며 대히트를 기록하는 전형적인 국민 여동생 스타일이다. 그러나 'LOST'라는 곡은 당시 컨셉과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톤의 발라드였기에 데뷔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앨범에 넣는 건 허락할게"
"대표님!"
"앗싸!!"
생각보다 화끈한 허락에 권태웅은 당황하고 이주은이 만세를 외쳤지만 한국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
"이번 앨범 말고 다음 앨범에 넣자"
"대표님! 그러는게 어딨어요! 이번에 꼭 넣어서 부르고 싶단말이에요"
지금 말려야 한다. 이 좋은 곡이 실패 할 것을 잘 알기에,
심지어 미래에도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이 곡은 너무 어려서 불렀다. 좀 더 커서 불렀으면 좋았을걸"이라며 후회했던 기사가 아직도 선명하게 머리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말려야했다.
"노래가 좋은 건 인정해 부드러우면서도 적절한 경과음, 심지어 그 3옥타브가 넘는 고음을 가성이 아닌 진성으로 부르는 널 보니 곡 소화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그렇다면 도대체 왜요?"
"어울리지 않으니까, 굳이 꼽자면 나이 때문이라고 말해두자"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이주은이 부르기에는 너무나 성숙한 곡이였다.
"나이 때문이라구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표를 보며 고민에 빠진 그녀에게 준비해온 CD를 넣고 그녀의 3집 앨범 타이틀곡 'Good day'를 틀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점점 화색이 도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뭐"
"에이 대봐요"
-짝!
강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이주은이 여태껏 본 적 없는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표님!"
"알면 됐어"
똑똑한 아이라 그런지 데뷔를 앞둔 신인임에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할 줄 알고, 비굴하게 자신을 낮추지도 않으며 대표에게도 당당하게 자신의 재능을 과시한다. 그러면서도 실력을 기르기 위해 연습 또한 게을리 하지 않는 성실함까지 갖추고 있다. 아직은 성격이 조금 까칠하지만 그건 피튀기는 연습생 신분에 당연한 것일뿐,
"자 그러면 녹음 확인하자, 주은이 녹음이라서 30분만 시간 비우고 왔어 잘하자"
걱정 하지말라는 듯 당당하게 녹음실로 들어가는 그녀가 마이크에 대고 당돌하게 말했다.
"애드리브 내 마음대로 할 거에요 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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