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오늘은 오는거죠!?"
"아~ 제발 좀 불러줘요~ 우리가 잘못 했따구요~!"
정진하와 하다훈의 우는 소리에 표정을 굳히는 유준석,
"그래! 결심했쒀!"
휴대폰을 꺼내 곧장 전화 연결을 시도한다.
"네~ 선배님!"
"그래 우리 석진이~ 어떻게 고민 좀 해봤니~"
"......"
한동안 수화기 너머로 아무말도 들려오지 않음에 멤버들 모두가 숨죽여 절규하던 그때,
"저 찾으셨어요!?"
스튜디오 뒤로 등장하는 석진을 보자 무한직업 멤버들 전원이 소리쳤다.
"상무님 오셨다아!! 만세에!!"
먼저 뛰쳐나간 정진하가 목마를 태워주자,
"크흡! 거기는!! 아흑!"
꽉낀 스키니 진을 입은 석진의 가랑이가 올라갔고, 통증이 은밀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어어~~!야이 자식아! 어디! 우리 상무님 옥체에 손을 대!"
지난 번보다 더 과한 반응들을 보니 그동안 제작진을 포함한 멤버들이 시청자들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만했다. 그래서 김태우 PD역시 이번에는 기획에 칼을 갈았다.
"저희가 지난 번 방송 이후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는데요. 기왕 모신김에 이번 가요제 대표 심사위원을 좀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제...제가요??"
괴물 신인으로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
하지만 작곡가로써도 아니고 심사위원이라니...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혹시 참가자분이 어떤분 인지..."
누가 나오던지 무조건 석진보다는 선배 또는 대선배일 것이 분명한 상황,
"아~ 그건 저희가 차차 맞춰갈테니 일단 자리에 착석 부탁드리겠습니다."
세트장으로 들어서니 마치 슈퍼스타싱어 심사위원석을 연상케하는 자리, 8석이 마련되어있었다. 그리고 뒤에 큰 글씨로,
[무한직업 - 블라인드 무도회]
*
"자 그럼! 첫 번째 참가자! 고음과 저음을 넘나드는 경의로운 목소리의 주인공 입니다. 다들 뜨거운 박수로 환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곡을 하는 파트너를 맞추는 짧은 코너, 유준석의 소개로 첫번째 참가자의 노래가 시작 되었다.
-불빛만이 가득한 이 봐암~~
그대와 단 둘이 앉아숴~
그대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네 오~ 워우어워워어~~
'설마... 아니겠지?'
블라인드 처진 커텐 뒤에서 노래를 부르는 참가자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던 석진, 옆에 앉아있던 정한돈이 옆구리를 찔렀다.
"누군데?"
"아..그게..저..."
난감해하는 석진, 그러나 곧이어 그의 정체가 탄로났다.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또 다시 헤어져야 하는데
아무런 말없이 이대로
그댈 떠나보내야만 하나
아무리 목을 긁어보아도, 숨길 수 없는 독보적인 보이스의 정체,
"공기가 너무 많이 들어갔어요! 공기 좀 빼주세요!"
"춤춰줘요~~"
노래가 끝이나자 멤버들이 돌아가며 약올리기 시작했다.
"혹시 다음 참가자가 이송만 대표님이세요?"
-푸하하핫!!
이미 정체가 탄로난 상태나 다름없는 첫 번째 참가자의 커텐이 열리고,
"환영합니다 JTP! 박준택씨입니다!"
이 타이밍에 가장 난감한 사람,
바로 회사 대표를 심사해야하는 석진에게로 관심이 쏠렸다.
"타임타임타임~"
양손으로 T자를 만들어 정한돈 특유의 타임요청을 하는 석진이 자연스럽게 세트장 밖을 벗어나려고하자,
"석진씨 어디가요! 잡아잡아!"
멤버들에 의해 다시 질질 끌려왔다.
"박준택씨 회사 직원에게 심사를 받아야하는데 심정이 어떤가요?"
"(으아아아~~ 싫어요~ 집에 갈꺼야~~!!)"
땡깡을 부리는 석진과는 다르게 의젓한 자세로 서있는 박준택이 대답했다.
"석진이는..."
"에헤이 JTP! 심사위원님에게 어디서 함부로 반말을!"
-옳소!옳소!
멤버들 핀잔에 정정했다.
"끙...석진 심사위원님은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구요.
실제로 회사에서도 이미 많은 조언을 구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좋습니다! 박준택씨는 게스트 자리로 가주시면 되시구요~ 다음 무대 보시겠습니다~"
다음 무대는 이번 가요제의 유일한 홍일점!
연륜이 묻어나는 깊은 음색 대한민국 1세대 여자 아이돌 바로 SNS의 파도였다.
그 뒤로도 에픽뮤직,스윗솔로,장기환,싸인,진드래곤까지 등장했다.
'역시..'
예상대로 전부가 선배 또는 대선배, 이제 막 데뷔한 석진은 커튼이 내려올때마다 두손 공손하게 모아 인사할 수 밖에 없다.
"이래가지고 심사 볼 수 있겠어요!?"
"아..그냥 저도 저기 참가자로 들어가면 안될까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제작진을 쳐다봤지만 크게 X자를 만드는 김태우 PD가 오늘따라 유난히 얄밉다.
"자 그러면 파트너 선정을 위해서 이거..."
아직도 울상인 석진에게 유준석이 진행대본을 넘기며
"아 저도 파트너 골라야해서.."
-우와 MC킴이다!!
'지엔장.. 속았어!'
이번에는 어려울것 없이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와도 된다고 했었던 무한직업 제작진, 하지만 프로젝트를 위해 그들이 갈고 닦았다던 그 칼날의 끝은 바로 석진이었다.
"후우.. 하는 수 없죠 크흠!"
깡생수 한병 원샷때린 석진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 그럼 우선 참가자가 나오시고 멤버들이 뒤에가서 서주시면 됩니다. 혹시라도 파트너가 결정된 후에도 이의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참가자분들은 다시한번 선택의 기회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잘한다아~
"첫번째 파트너 선택은 바로 밴드 장기환입니다!"
-와아아~~
"기환씨가 먼저 한 마디 해주시죠~"
그래도 심사위원으로써 앉아있는 것보다야 진행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석진, 주어진 대본대로 차분하게 진행을 이어나갔다.
"아..우선 저희 장기환 밴드는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어떤 장르던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맞춤형으로 할 생각입니다."
"아~ 그럼 혹시 댄스곡도 가능하다는 소리입니까?"
"아..예 뭐 기타치다가 춤출수도 있고 노래부르다가도.."
어물쩡 넘어가려는 장기환에게 모두가 엄지 손가락을 내리며,
-우우우~~
"예 뭐 까짓꺼 이번 기회에 신나게 놀다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파트너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출발해주세요~"
생각보다 매끄러운 진행에 유준석은 내심 뿌듯한 마음이었지만 진행의 흐름을 깨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석진의 서포트를 도와 첫번째 가요제 만남은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이야~ 새벽부터 고생 많았다. 피곤했을텐데.."
"아닙니다. 저 때문에 촬영시간이 이렇게 된건데요. 제가 다 죄송하네요. 혹시 태우 PD님 저 따로 촬영해야할거 있으시면 계속 하셔도 괜찮으니까 말씀해주세요."
뜻밖에 제안에 화색이된 김태우PD, 하지만 유준석의 눈치로 점심까지만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
-빰빰빰빠바바~빰빰빰빠바바~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작업실, 그러나 팔짱을 낀 유준석의 표정은 어두웠다.
"어때..?"
"좋아! 근데 형 앨범에 실었으면 좋을 것 같아"
"왜에!?"
"약간 좀 들(?)신나 BPM(음악속도)좀 더 빨랐으면 좋겠어"
"지금 122인데.."
떨떠름한 듯 박준택이 반박을 해봤지만,
"형 130정도로.. 밤밤밤밤밤~~이 정도는 돼야 여름철에.."
벌써 5곡째 퇴짜를 맞고있는 JTP대표 이사 기여코 SOS를 부르고야 말았다.
-똑똑똑
"이게 누구야!? 우리 김작곡가님 아니신가~!?"
반갑게 맞이하는 유준석과 살려달라는 박준택, 원하는 목적은 달라도 석진을 누구보다 반가워하는 마음은 두사람 다 같았다.
"아 크크큭 아직도 작업중이신 거에요?"
"석진아 너 혹시 짱 박아 놓은 노래 없니? BPM130짜리로다가"
어지간히 힘든 모양인지 석진에게까지 기대는 박준택,
사실 석진도 무한직업 본방사수를 계속 해왔었기 때문에 유준석과 박준택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고있었다.
"대표님 잠시만 이리로.."
애타는 얼굴로 쫄래쫄래 석진을 따라가는 박준택,
"생각을 바꿔서.. 너무 준석이형 취향에 집중하지말고 차라리 착청을 일으키는 건 어떠세요?"
"착청?.....아! 그래 쪼개란 말이지!?"
"바로 그거죠!"
같은 곡 작업을 5번 이상 뒤집게 되면 작곡가 본인에게 보이지않는 문제점이 제 3자입장에서는 그대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사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했었더라면 박준택도 충분히 생각할 수있었을 해답이었지만, 무한직업 가요제라는 특별한 조건이 걸려있다보니 시야가 좁아져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좋았어! 그럼 지금 당장에라도..!"
해답을 알아낸 박준택의 집중력은 어마어마했다.
*
"자 이건 어때! 나 정말 이것도 안되면 더 이상 만들어낼 자신이 없어.. 마음에 안들면 쟤한테 부탁해 그냥"
하얗게 불태웠다는 듯 축 처진 박준택의 어깨, 그러나 우는소리와는 다르게 멋들어진 인트로가 나오자 유준석 특유의 흥이 대폭발했다.
"형 잠깐잠깐! 끊어봐"
노래를 대신 꺼주는 석진이 의아한 얼굴로 유준석을 보자,
"어우 시작이 너무 마음에 들어!"
"왔어!?"
"그래 이런거야! 계속 가보자!"
-제티피! 제이에쓰와이~ 컬롸보뤠이션~ 레츠고!
"아~ 됐어~이거야!!"
결과는 대만족! 박준택이 몇날 몇일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가 사이다처럼 뻥 터지는 순간이었다.
"거봐 난 형이 해낼줄 알았어! 이제 안무 하러 가야지!"
"아..난 지쳤어.. 석진아 이건 네가 좀.."
갑자기 바톤을 넘기는 박준택,
"저도 지금 노래 처음들었는데요..?"
"형! 이건 반칙이지!"
"반칙이라도 어쩔수 없어 나 진짜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자서 안무 짤 힘이 도저히 없어 이건 좀 봐줘라~"
실제로 박준택의 몰골은 참담할정도였기에, 제작진도 이에 동의하며 결국 석진과 유준석 둘은 연습실로 향했다.
"아니 작곡가한테 안무를 맡긴다는 게 말이돼? 석진아 너도 뭐라고 좀 말해봐"
잠시 뜸을 들이는 석진이 연습실 문앞에서 살짝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아..근데요..저 춤 좀 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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