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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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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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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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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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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76. 암살자

DUMMY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그러나 제법 빠른 속도로 감지 류의 스킬이 인도하는 길을 숲에서 걸었다. 복잡하게 형성된 숲 내부는 길이 없다고 해도 좋았다. 어둠숲처럼 보통 플레이어들이 사냥터로 인식하는 공간들 말이다.

인류가 아직 개척하지 않은 곳들이라, 사람의 발자취가 별로 없다. 그런 곳들을 항상 플레이어들이 들쑤시면서 정복을 한다. 몬스터들은 끊임없이 튀어나오지만, 일정 비율 이하로 몬스터의 개체 수가 떨어진다면 플레이어가 속한 인류 측에 ‘정복’ 이벤트가 일어난다. 몬스터 사냥터로 구분되었던 맵이 조금 더 안전한 지역이 되고, 몬스터의 리젠률이 떨어지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시스템에 의해서 생성되는 맵 내의 몬스터 숫자가 줄어들고, 그 주기 역시 길어진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한 개의 사냥터는 곧 평범한 마을로 전환 가능한 안전 지역이 되는 것이다. 평화로운 그런 장소는 인근 국가나 도시 등에서 인원을 차출 받아서 개척하기가 쉽다. 이런 이벤트 달성을 목표로 하고 그 위주로 플레이 하는 자들도 있었다.


‘마왕’이라는 특수한 이벤트가 콘란드 대륙 전역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을 일으켜 인류를 절멸시키는 것이라면, 그 반대의 ‘용사’라는 이벤트는 콘란드 대륙의 몬스터 분포도를 낮추는 것이었다.

정복과 맵을 평화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은 분명 ‘용사’ 류의 퀘스트를 위한 플레이이리라. 플레이어들이 꼭 그런 메인 스토리 급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플레이 하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게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들이라면 타고 올라가다 보면 그런 식의 계열 정리가 가능했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숲에서 흔적을 따라 걷는다. 숲의 지면은 굴곡이 심했다. 나무 뿌리 따위가 아니라 지면 자체가 울퉁불퉁하게 생긴 듯, 높낮이가 있었다. 숲 내부에 작은 언덕이나 분지 지형 역시 있었다. 산림이라고 부를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제냐는 걷는다. 끊임없이 걷는다. 어느새 청명했던 하늘과 태양빛, 상쾌한 바람은 조금 습기차고 어둔 분위기에 걸맞는 냄새로 바뀌었다.


거치른 어둔 갈색의 나무 표면을 쓰다듬기도 하고, 손 안에서 놀고 있는 대거로 껍질을 거칠게 가르기도 했다.


파칵, 하고 나무 껍질이 패이듯 깎여나갔다. 대거의 날은 날카롭게 서 있었다. 거기에 기력술을 담거나, 썬더 인챈트, 혹은 파이어 볼의 응용인 파이어 인챈트를 사용한다면 훨씬 강력한 데미지를 무엇에게든 줄 수 있으리라.


한참 걸은 것 같았다. 인터페이스를 띄워 시간을 확인해보면, 약 십여 분 정도 헤맨 것 같았다. 붉은 가상의 점선을 따라 걷다가 목표물을 마주했다. 저 멀리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키가 작은 수풀에 숨어서 멀리 있는 호랑이의 모습을 먼저 찾았고, 바라본다. 한 수십 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었다. 흠, 제냐는 잠시 고민을 했고 금세 결정을 했다. 먼저 한 마리 정도는 잡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테다.


부스럭.


제냐가 손을 앞으로 벌렸다.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화살도 좋지만, 썬더 볼트 역시 유용한 대응법이다. MP가 조금 소모되기는 하지만, 수십 번 정도는 푸른 물약 없이 여유롭게 써먹을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에 담기는 소모량을 줄이고 교묘하게 운용한다면 훨씬 많은 발사 횟수를 갖는다.


파직, 하고 그의 앞에 푸른 전깃불이 튀었다. 그가 썬더볼트를 완성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신형이 있다. 제냐는 기감을 활성화시키지는 않았다. 온전히 캐릭터의 오감으로 주변을 파악하고 있다. 귓가에 낮게 울리는 발소리, 사람의 기척이 들려왔다. 신경이 쓰였지만 곧바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눈 앞에, 저 멀리 그르렁거리며 쉬고 있는 대호 한 마리를 잡는 게 우선이다.


그리 레벨이 높은 놈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동물과 거의 같은 형상이라면 아무리 게임 내 보정을 받아 괴물같은 몬스터로 변했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몇 개의 주의할만한 특수 몬스터 종류가 아니라면 호랑이는, 강해져봐야 호랑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몇 종류의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전투 전문의 초능력자인 상태였고.


순식간에 생겨난 번개가 그의 앞에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뻗어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파즈즈, 하고 방전하는 푸른 번개는 곧이어 하나의 구형으로 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강력한 테두리 내부에 갇힌 번개가 발광한다. 호랑이는 고개를 돌린 상태였고,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번개에 냄새는 없었고, 그것이 내고 있는 소리 또한 미약한 것이었으니까.


길게 끌지 않고, 제냐는 스킬을 발동하며 자연스럽게 나타난 투척 류 스킬의 보정 궤적을 따라서, 썬더 볼트를 날렸다. 손을 떠나보낸 번개의 구가 빠르게 날아갔고, 화살처럼 길게 뻗으며 날아가는 타원형의 번개는 휘는 궤적을 갖고 나무 사이를 지나 호랑이에게 금새 가 닿았다.


“저기.”


부스럭, 하고 소리를 내던 인기척의 주인이 말을 걸었다. 제냐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공격이라도 걸어 왔으면 곧바로 반응을 했을 것이다. 상대의 기척이 자신의 주변에서 느껴졌으나,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있는 게 느껴져서 가만히 있던 제냐다.


그가 공격을 하자 들리는 말소리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기자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불쑥, 솟아난 것처럼 생긴 여인이 한 명 있었다.


파지지지! 하고 강렬하며 연출된 소리를 내는 썬더 볼트가 호랑이의 등허리에 틀어박혔다. 번개의 칼날은 그대로 두꺼운 털과 가죽을 뚫고 그 척추를 지져버렸다. 내부의 장기까지 불태워버린 그것은 충분한 공격력이었고, 호랑이는 번개에 감전된 듯, 아니 실제로 감전되어 부들부들 떨면서 제 자리에 앉은 채 발광을 하다가 추욱 늘어졌다.


레벨로 따져도 제냐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몬스터인 모양이었다. 일견 제냐가 바라보고 있는 각도에서 특별함이 없었는데, 역시 그랬던 듯하다. 단번에 게임 오버된 호랑이의 시체가 바닥에 누워 서서히 빛을 뿜으며 사라진다.


말을 건 인물을 제냐는 보았다.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다. 나이대는 제냐보다 조금 어린 정도일까. 정확하게 가늠되지는 않는다. 동안이면서, 또 중동 계열의 인종이었다. 게임 내에서 인종은 그다지 상관이 없다. 어차피 대개는 번역 되기에.

플레이어이거나, 혹은 제냐가 이미 스킬로 갖고 있는 중부 대륙어를 사용하는 NPC일 것이다.


한국에서 쉽게 보기는 어려운 외형이었지만 미인형의 얼굴을 한 그녀를 보면서 제냐는 눈짓을 했다. ‘뭔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가벼운 경장으로 숲을 탐색하기에 적당한 복장의 그녀다. 레인저, 나 뭐 그런 류의 클래스가 어울려 보이는 모습이다.


만일 싸우게 된다면 거리를 벌리면서 원거리 공격을 퍼붓거나, 혹은 가까이에서 민첩함을 장기로 삼아서 탐색전을 벌이게 될 것 같은 유형이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몇 종류의 숏 소드들이 단정하게 꽂혀 있었다. 길이가 제각기 다른 것으로,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에 맞추어 절그럭거린다.

저런 복장을 하고 제냐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끔 어떻게 다가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은신 계열의 특수한 스킬이라도 갖고 있는지 몰랐다.


아무리 기력 감지 스킬을 켜놓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제냐의 감각은 평범 그 이상으로 예민할텐데.


숲의 어귀에서 소란스런 소리와 발작과 함께 죽은 호랑이의 시신을 뒤로 하고, 그는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녀, 아르망디 베샤민이 말했다.


“그,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파티플을 하시겠어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제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내용인지 들어보고요.”

“예?”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 아닙니까? 갑자기 같이 플레이를 하자니.”

“아, 예, 맞아요······.”


그녀가 고개를 어색하게 끄덕거렸다. 아르망디, 는 게임 속의 닉네임이었다. 그녀는 아랍 계의 프랑스 인이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가풍과 언어 속의 흔적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대대로 살아온 기간이 길어 인종적 특징과 달리 그저 유럽인이라고 봐야 좋으리라.


“무슨 일입니까, 어려운 퀘스트라도 맡았나요?”

“어······ 예.”


그녀는 고갤 끄덕인다. 제냐는 빤히 처다보았다. 흑색의 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다. 피부는 약간 까무잡잡했고. 큰 눈망울이 두서없이 이곳저곳을 보았다가 말았다가 한다.

그녀는 말을 망설이고 있었고, 제냐는 충분한 인내심이 있었다. 헛소리를 한다면, 바로 공격을 할 의사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건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형성된 평범한 플레이 스타일이다.

격상의 상대를 손쉽게 처리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리라.


제냐는 의도를 숨긴 채, 쥐고 있는 발톱 대거를 슬쩍 뒤로 치운다. 공격을 미룬다기보다, 그녀의 시선에서 무기를 가리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의 공격이 더 효과적일 테니까 말이다.


아르망디는 제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멎은 채 가만히 있다가, 이야기를 터놓았다.


“음······.


에.


성미에 안 맞네요. 퀘스트를 받았어요. 저는 퀘스트를 하러 온 셈이고, 당신이 딱 눈 앞에 보였죠.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처리하는 일인데···. 마침 움직이는 기색을 보자니 저랑 잘 맞을 것 같네요.


어떻게, 좀 도와주시겠어요?”


“······.”


제냐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르망디의 말투가 조금 빠른 것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에는 툭툭, 던지는 투로도 보인다. 연기를 아주 잘 하는 인간인 것 같았다. 처음에 망설이거나 어색하게 쭈뼛대던 모습이 그녀의 실제 모습이 아닌 것처럼도 보인다. 원래 이런 사람인가?

제냐가 생각할 때, 그녀가 스릉, 하고 자신의 허벅지 춤에 걸려 있는 숏소드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두 자루를 꺼내들며 칼집에 칼끝이 걸리는 소리가, 마치 한 개처럼 들렸다.


그만큼 많이 반복한 동작이라는 뜻도 되었다. 아르망디와 무언가 해본 적은 없지만 검술을 수준 높게 익힌 플레이어라고 알 수 있었다. “뭔······.”


제냐는 황망한 소리를 내면서 발톱 대거를 앞으로 세웠다. 지금이 만전의 전투 태세는 아니었다. 비스트 슬레이어와 초상 스킬, 혹은 복합궁과 대거, 충분한 화력이 발휘 가능한 상태가 그의 전투 태세이리라.


갑자기 칼을 꺼내드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 역시 급하게 칼을 들어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르망디가 설명을 덧붙였다.


“음······. 네. 친절하게 설명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요. 아무튼 뭐, PK라는 뜻입니다. 제 퀘스트는 적당한 인간을 잡아 죽이는 거고, 당신이 상성 상 괜찮아 보였어요. 어둠 숲은 어차피 솔플을 하는 인간들이 많으니까 개중에서 고른 거고요. 각자 방식이 있는 거니까. 이해 하죠?”


이해 하죠?


라고 말하면서 아르망디가 타닷, 하고 발을 박찼다. 숲의 축축한 바닥이 그녀의 발자국으로 패이면서 흙이 튀었다. 나뭇잎이 튀어 올랐다 힘없이 떨어진다. 그것이 채 떨어지기 전에, 아르망디의 신형은 빠르게 움직여서 제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제냐는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하고 있었다.

당황과 별개로 반응은 아주 빠르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것이다. PK라니. 뭐 도시 지역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었다. 어둠숲은 깨나 유명한 지형이었고, 사르삿 근처는 사람이 많은 곳이다. 사냥터를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언제나 선 성향의 인간이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런데 아예 대놓고, PK(Player killing)을 목적으로 하는 유저가 있던 모양이다. 아르망디는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눈빛에 날을 세우며 잔인하게 달려들었다. 숏소드가 위협적으로 춤을 춘다. 제냐는 말도 없이 손을 뻗었다. 뒤로 뺀 발톱 대거에서 불이 튀었다.


순식간에 기름에 붙은 횃대에 불이 차오르듯이 발톱 대거의 칼날이 횃불처럼 빛났다. 실제로 불꽃에 감싸였다. 그보다 더 빨랐던 것은, 앞으로 먼저 뻗은 왼 손이다. 그 앞에 다시금 전깃불이 파지직 거리며 형성되었다. 푸른 번개는 여기저기 튀어대면서 불꽃처럼 퍼진다. 곧이어 한 가운데로 모이며 원형이 되었고,


아르망디가 거의 다가올 무렵 제냐는 썬더 볼트를 먼저 날렸다.


파짓, 하고 번개가 튀는 듯한 소리를 낸 구체가 날았다. 화살보다 빠른 속도였다. 앞으로 자신이 다가오면서 마주했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으리라. 놀랍게도 아르망디는 뛰어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반사 신경과 동체 시력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임 내에서만 그런 건지, 현실에서도 그런 건지.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슬쩍 고개를 비틀면서 상체를 옆으로 숙였다. 이미 계산된 춤의 한 동작인 양 관성을 거스르지 않고 무게 중심을 이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제냐의 썬더볼트가 그 옆으로 빗겨 나갔고, 그건 먼 궤적을 따라가다가 한참 앞에 있는 나무의 몸통을 직격했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목질이 터져나갔고, 나무가 거대한 철퇴에 맞은 것처럼 터져나갔다. 그 주변으로 그슬린 자국이 남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기가 피어오르기 이전에, 아르망디는 제냐에게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제냐는 그대로 아르망디의 동작을 바라보면서, 오른 손에 들고있던 불의 검을 휘둘렀다. 발톱 대거는 꾸준하게 인챈트를 해왔다.


스킬을 덧입히는 과정이라고 봐도 좋은 인챈트는, 특수한 재료를 대가로 한 가지 아이템을 강화시키는 방식이었다. 인챈트 스킬이 필요했고, 일정한 스킬 효과를 아이템에 부여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해당하는 스킬 역시 익히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제냐는 ‘화’속성의 소재들을 여기저기서 긁어 모았다. 상당한 양의 재물을, 로멜리아 가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받았다. 로멜리아 가문은 남작 가문이었고, 세가 기울었으며, 또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서 도와준 이들에게 많은 금전적 보상을 할 수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트 작힘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상당한 배상액이 그들 앞으로 나왔다. 헤슈나는 미안했는지 그것들 중 일부를 자신을 도와준 조력자들에게 나누어 베풀었고, 가장 먼저 퀘스트를 받았던 제냐는 상당한 액수를 얻을 수 있었다.


릿샤와 호아킨의 경우에는, 주어지는 보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도중에 그들을 암살하기 위해 덮쳤다가 합류했다는 이유로, 돈까지 받기에는 염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세심한 행동들은 초AI가 시스템AI로 운영하고 있는 이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또 다른 결과를 야기한다.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의 NPC들은 사람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착각하게 될 정도로 세밀한 반응과 고도의 사고 구현이 가능했고, 그런 씀씀이에 호감도가 아마 많이 올랐을 것이다.


이후에 연계 퀘스트가 이어지고, 다시금 그들이 참여했을 때 보상이 더욱 커질 확률이 높았다. 단기적인 재물보다, 유니크 연계 퀘스트에서 차후 더 많은 보상품을 노린다는 계산이 제법 적절했다.


상리에 맞았고 시나리오 온라인은 상리에 따른다.


어쨌든 제냐는 얻어낸 돈으로 방어구를 바꾼다거나, 무기에 인챈트를 더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전투력 증강을 꾀했다. 소비용의 아이템들 역시 새롭게 구비해서 인벤토리에 채워놓았다. 적절한 때에 잘 쓴다면 소규모 교전에서는 전황을 뒤바꿀 수 있는 것들이 그런 류의 아이템들이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초상 스킬은 결국 한정적이기에, ‘스크롤Scroll'을 구입하기도 했다. 두루마리라는 뜻의 그건, 양피지인지 뭔지 알기 어려운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문서이다. 문서의 내부에는 초상술의 술식이 적혀 있었고, 아티팩트와 다른 점이라면 종이에 특수한 촉매가 발려 MP를 담고 있고 술식 발현이 가능하지만 한 번 사용하면 스크롤은 타들어가듯 소멸하고 만다는 점이었다.


1회용의 아티팩트라 할 수 있는 스크롤에 다양한 스킬이 담기며, 그것들은 플레이어를 비롯해서 돈이 있는 모험가들에게 등급에 따라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리기도 한다.


어쨌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본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변화를 꾀할 수 없을 때는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제냐는 불꽃의 대거에 기세를 일으킨다. 아이템 희귀도 역시 한 급수 더 올라간 발톱 대거이다. 불길은 기력술을 닮아 있었다. MP의 구조를 살펴보자면 기력술의 그것보다는 결합이 약하며 밀도가 낮을 것이다. 덜 촘촘한, 성긴 그물과도 같은 구조이겠지만 제냐는 만만찮은 MP를 투입한다.


MP란 그대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에너지였고, 그 에너지는 열과 빛, 그리고 폭발력 따위로 치환된다. 검기로 만들어 내세우는 칼날보다 밀집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보다 큰 범위에 화상과 폭발상을 입힐 수 있는 힘이다.


대거는 그대로 앞으로 뻗는다. 제냐가 쭉 팔을 뻗듯 움직였다. 뒤로 젖혀져 있던 손은 그대로 탄력을 받아 궤도를 그린다. 궤도 안에 걸리도록 노리는 것은 당연히 아르망디의 목덜미이다.


PK는 상당히 살벌하다. 이 게임이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그러하다. 마치 실제 전투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감각을 선사하게 되어 있다. 현대에 전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그리고 아주 제한된 현장에 발을 딛고 선 인간들 뿐이었다.


실제 고대에서 벌어졌던 냉병기로의 전투를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발톱 대거가 적절한 타이밍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본디 제냐의 손 한, 두 뼘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있던 대거지만 불꽃이 치솟아 오르면서 그 칼날이 닿는 범위가 더 늘어났다.


실제 금속으로 조직된 검날이 베는 것보다는 훨씬 무르겠지만, 열상 또한 만만히 볼 것은 아니었다. MP로 이루어진 초상 스킬로서의 불꽃이었으니. 그것이 마치 의지를 지닌 듯 가 닿은 생물의 가죽을 태우며 그 내부까지 침투하려고 할 것이다.


아르망디는 자신의 호흡과 발걸음을 조절했다. 춤을 추듯이 궤도를 바꿔 최초의 썬더 볼트를 피했던 것처럼, 유연하게 움직인다. 제냐의 조금 앞에서 갑자기 멈췄다. 그 모습이 마치 마술과도 같다. 관성이 없는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으로, 비현실적인 현상은 분명 스킬이 관여하고 있는 움직임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의 세계, 콘란드 대륙에도 또한 현실성과 물리성이 있었다. 다만 ’MP‘라고 부르는 가상의 에너지가 대부분의 초현실적 상황에 대한 근거로 제시될 뿐이다.

말도 안되는 현상이 벌어졌다면, MP, 즉 SP가 들어가 있는지 아닌지부터 봐야 할 테였다.


그녀가 다가오다 멈추자 궤적에 걸리는 타이밍이 변한다. 제냐도 속도를 늦추든, 방향을 바꿔야 한다. 상대가 뒤에 있다면 간단은 하다. 그는 자세도 밸런스도 살아 있으므로 변형이 가능했다. 온 힘을 다해 빠르게 베어 들어가는 팔이었지만 앞으로 넘어지듯 몇 걸음 가는 것 정도는 된다.


그가 발을 떼면서 찼다. 낙엽이 튀며 제냐는 앞에 있는 아르망디에게 검끝을 닿게 하려 애를 썼고, 그럴수록 불길은 더욱 크게 타올랐다.


넘실거리는 불꽃은 마치 이빨과도 같이 그녀를 노린다. 숏소드를 양 손에 든 그녀는 이도류다. 거리가 잡히자 더 이상 뛰지는 않았고, 간단하게 두 검을 앞으로 내세우며 대거를 막아들었다. 카득, 카캉! 하는 요란스런 고음이 터져 나왔다. 불꽃은 물리력과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불꽃의 형상이지만 MP가 쌓여 만들어진, 파이어볼 같은 물리적 형체라 그렇다.


고수들의 전매특허이자 기력술의 고급 단계인 검기劍氣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검세를 흐트러뜨릴 정도는 되었다. 긁듯이 치고 지나가는 대거의 검날과 불꽃에 그녀는 11자로 세우며 막았던 검이 눕듯이 팔이 틀어졌다.


제냐는 한 손에 든 대거 뿐이다. 더 이상 공격 수단이 없다. 자세가 무너졌고, 상대의 밸런스가 살아 있다면 무의미하게 노출되는 것이다. 크게 휘둘러 그대로 쓰러지듯 옆으로 가는 제냐는 그대로 땅을 짚었다. 검을 든 상대가 앞에 있었지만 기세의 싸움이다. 그대로 칼로 정밀하게 찔러 들어온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빠르게 움직이면 상대가 공격하기도 애매할 테다.

그런 생각으로 제냐는 아예 회전력의 방향대로 몸을 굴렸고, 카포에라의 킥처럼 상대방을 노린다.


’무술‘에 관련된 스킬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검술과 박투술 등을 익힌 것은 당연하고, ‘아크로바틱Acrobatic’같은 스킬도 익혔다. 몸의 유연성을 붙여 주고 사용자가 머릿속에서 상상한 기묘한 움직임이 최대한 현실에 적용 가능하도록 신체 근육을 조작해서 유도한다.


그 조작과 유도는 순간의 선택으로 사용자가 따를 수도 있었고, 보정만 받으면서 다른 식으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제냐는 따르는 편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턱, 하고 처음 기세 그대로 땅에 손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무너뜨렸고, 허리를 뒤틀어 하체로 킥을 날렸다. 정강이에는 마침 각반이 있다. 상대의 숏소드가 일순 무너졌으나 생각보다 침착한 검사라면 그대로 갑옷이 없는 부위를 노릴 우려 정도가 있다.


제냐는 MP를 활성화시킨다. 그의 몸체에 기력술이 발동된다. 철을 더욱 더 파괴력 있는 무기로 바꾸는 기력술은 신체를 철과 같은 강도로 바꾸고, 예리한 검으로 바꾸기도 한다. 적당한 도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신체 전 부위를 MP로 감싸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상대가 노림직한 부위들만을 가리고, 발차기의 타격 부위가 되는 정강이와 발등까지를 주로 MP로 강화했다. 상대가 그대로 검을 들어 발차기를 막으려 한다면 제냐의 입장에서 가장 좋으리라.


휫,


하고 아르망디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자세가 살아 있었고, 무게감 있는 동작으로 묵직하게 밀고 들어온 제냐의 발차기를 맞아주지 않았다. 순간의 틈을 노린다면 일격에 상대를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중수 이상이라면 기력술을 쓰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녀의 기감에도 MP의 유동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잘못 골라서 상대가 기력술로 이미 보호한 공간을 친다면 쓸 데 없이 힘의 소모만 될 뿐이었다. 자신의 공격력이 상대의 방어력을 월등히 상회한다면 또 모르지만, 지금 이런저런 액티브 스킬들을 먹이기에는 자세나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나고 다시 거리와 호흡을 잡는 게 좋으리라.


공격적으로 들어간 제냐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맞는 길이 되었고, 제냐의 발차기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다만 뒤로 여유롭게, 마치 백조나 뭐 그런 것을 형상화하듯 부드럽게 점프를 하는 아르망디의 옷자락에 그 발끝이 걸렸다. 팩, 혹은 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가죽옷의 끄트머리가 채이면서 베였다.


제냐의 킥에 걸린 것이었지만 정련된 MP가 기氣로 변해 날아간 곳이었다. 제냐 정도 되는 레벨과 전투력, 그리고 기력술의 수준이라면 슬슬 반 무기나 다름 없다. 초인적인 근력, 순발력 등의 힘과 신체 내구성, 그리고 거기에 초상적인 에너지가 더해지자 본디 손발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위력이 나오는 것이다.


고수들이 만들어내는 기력술의 기검은, 혹은 검기는 실제 칼날보다도 아득하게 날카롭다. 일반적으로 베지 못하는 것조차 베고, 뚫지 못하는 것조차 뚫어내는 MP무술의 극치이니까.


제냐의 몸은 그대로 회전해서 옆으로 지나갔다. 카포에라의 킥과 비슷한 동작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각도를 비스듬히 했을 뿐 혼자 옆돌기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그대로 원심력을 잃지 않고 돌아 옆자리에 다시 서기까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르망디는 뒤로 빠졌다가, 손 안에서 숏소드의 검병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작은 나뭇가지라도 다루는 것처럼 철검이 그녀의 손 안에서 논다. “아카드.” 그녀가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시동어는 보통 콘란드 대륙어에서 발상한 것도 있었고, 혹은 유저의 경우라면 자신의 입에 익숙한 아무 고유 명사나 지껄여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단어와 연상되는 뇌 내의 이미지 기억이었다. 강렬한 이미지, 심상은 결국 MP를 발현하는 데 중요한 동작 버튼으로 사용된다.


뇌 내의 정신력, 집중력 따위를 다루고 반응하는 시나리오 온라인의 시스템이다. MP를 다루기 위해서 뇌파가 쓰이고, 그것은 놀랍게도 그 스스로가 내면적으로 생각하는 상상의 형상과 일치하는 모습으로 발현된다.


MP를 다루는 감각은, 가상의 손이 당신에게 주어져 그것을 움직이고, 그 손의 감각으로 가상의 찰흙을 만져 조물하는 것과 비슷하다. 전부 가상의 것이지만 어쨌든 분명한 촉감 등이 주어진다. 촉감과 손의 일이라면, 손끝을 예민하게 만들어서 디테일한 구석을 잡아가는 장인과 같은 솜씨가 필요하다.


물리적인 손이 아닐 뿐, 결국 근원적으로 캐릭터의 신체를 다루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였다. 물리 스텟을 높이고 캐릭터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나 정신력 스텟을 높여 MP를 다루는 일이나 반복 연습으로 수준이 올라갈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 모든 유저가 사용하고 있는 캐릭터 신체 역시 가상의 것이며 게임 시스템이 제공하는, 신경과 연결된 무엇일 뿐이었다.


MP나 물리 스텟에 근거하는 신체 동작이나 같은 것이라고 봐도 좋으리라.


그녀는 민첩한, 초상 검술사였다. 근력보다는 순발력에 많은 투자를 했고, 물리 스텟과 동시에 정신력 계열을 높였다. 결국 제냐와도 비슷한 궤를 걷고 있다고 봐도 좋았는데, 제냐와 달리 특정한 스킬에 자신의 역량을 집중했으며 파이팅 스타일 역시 제한적이다.


제한적이라는 건, 한 분야에 집중했다는 뜻으로, 만일 그녀가 괜찮은 수준의 집중력과 재능을 갖고 있다면 그만큼 스페셜리스트라는 뜻도 되었다. 아르망디의 약점을 파고든다면 쉬운 싸움이 되겠지만, 그녀가 선호하는 전장에서 싸워준다면 본래 그녀의 수준보다도 더 혹독한 전투를 벌여야 하는 것이다.


퉷.


아르망디는 침을 뱉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냐는 일단 가볍게 불타는 대거로 침을 쳤다. 아래로 가볍게 내리 그은 검날과, 그 이전에 타오르는 불꽃의 장갑이 그 침을 쳐서 땅바닥에 붙였다.

침은 빠르고, 액체였지만 쉽게 흩어지지 않은 채 고체처럼 낙엽 위에 떨어진다. 그대로 치이이, 하는 음산한 소리가 나며 바닥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산성독 따위가 물질에 닿았을 때 나타나는 효과처럼 보였다. 제냐는 등줄기가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인간은 뭔가, 하는 마음이다. 깨나 지독한 스타일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고작해야 게임에 불과한데. 이렇게까지 각잡고 컨셉 플레이를 하는가, 싶은 마음이다. 침을 독으로까지 사용하는 스킬류는 분명 콘란드 대륙에 있었지만 완벽한 암살자의 기술이었고, 미관상 흉흉해 보이니 플레이어들이 그다지 선택하지 않는 스킬류이리라.


마이너한 기술들은 마이너한 성향의 시나리오로 가는 패널티, 인지 어드밴티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유도성이 있었다. 암살자의 기술을 배우려면 암살자의 생을 살아야 하고, 관련한 퀘스트와 시나리오에 얽혀 들어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만들어진 이곳에서 어느 정도는 감정 이입이 되게 마련이고, 아무래도 메이저하고 보편적인 쪽으로 가는 것이 대다수 플레이어들의 행로일 테다.


여자는 아마 자신의 선악 수치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플레이하는 부류인 것 같았다. 저런 류의 플레이 역시 가능은 했고, 도시, 그리고 제대로 된 행정 체계가 있는 나라의 정부가 있는 곳에서 많은 제약이 생긴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불편하고, 또 그런 마이너한 플레이 스타일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소수의 플레이어들이 선택할만한 선택지이다.


제냐가 직접적으로 P.K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아카드, 라고 제냐의 귀에도 희미하게 들릴 정도의 음량으로 중얼거린 여자의 숏소드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붉은 색의 빛이었는데, 제냐가 들고 있는 대거의 불꽃과는 달리 마치 유리처럼 외곽선이 일정하고 반듯한 형상이었다. 광선검과도 얼추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검기’는 아니다. 다른 계통의 기력술인 모양이다.


그녀가 검기를 사용하는 수준의 고수라고 한다면 제냐가 여기서 살아나갈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또한, 애초에 그 정도의 플레이어였다면 스텟에서부터 압도했을 것이기도 하고.


숏소드는 그녀의 팔보다 조금 더 짧았다. 단검이나 대거 종류보다는 길고, 폭도 어느 정도 있어서 근거리에서 힘을 담아 휘두른다면 무게감에서 오는 강력함도 있을 듯하다. 그녀는 그것을 짧고 가볍게 여러 번 긋는 것으로 공격을 대신한다.


탓. 아르망디는 앞으로 한 스텝 나아갔다. 빛나는 검은 양 손에 든 채다. 다가오는 아르망디를 향해 제냐는 고민했다. 거리를 벌려야 할까. 그녀가 숏소드에 걸어둔 인챈트가 얼마나 강력한 지 모른다. 거기다 지금 자신은 지룡의 발톱 대거를 들었을 뿐이다. 근접전 무장이라고 한다면 비스트 슬레이어나, 적어도 파괴력이 있고 리치가 있는 냉병기를 꺼내들어야 했다.


인벤토리 안에 들어 있고 전투 중에 꺼낼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드는데 얼마 시간이 들지 않긴 한데, 근접전 중간에 밖으로 낼만큼 그의 손이나 인터페이스 조작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고민하던 제냐는 아르망디가 침을 뱉었던 것처럼, 뒤로 훌쩍 물러나며 손을 앞으로 뻗는다.


‘썬더 볼트’라고 중얼거리며 그의 손 앞에 푸른 불빛이 튄다. 번개가 다시 형성되려는 것이었고, 아르망디는 그가 초상 스킬을 쓴다고 생각해 곧장 앞으로 마저 뛰었다. 한 걸음은 가볍게 뛰었으나 뒤이어 따르는 도약은 재빠르고 힘있었다. 제냐 역시, 곧이 맞아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썬더 볼트는 채 제대로 형상이 생겨나기도 전에 발사되었다. 제냐가 툭, 가상의 끈을 놓듯이 원형을 구성하기 전의 썬더 볼트를 날린다. 이리저리 튀어대며 방전하는 전류. 불꽃처럼, 어둠 숲의 어두운 허공에 뇌전으로 이루어진 꽃 한 송이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손바닥 바로 앞 허공에 고정되어 있던 번개는 제냐의 의식이 그러길 원하자마자 총알이 쏘아지듯 난다.


제대로 형상도 갖추지 않고 날아오는 번개는 궤도가 튄다. 곧장 일직선이 아니라 방해물에 맞은 구슬처럼 난잡하게 꺾어대며 다가오는 것이 피하기도 조금 어려웠다.


아르망디는 그것을 양 손에 든 숏소드로 그대로 교차해 베었다. 중심부를 가르는 X자 베기다. 번개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MP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녀의 검날도 기력술의 일종이니 결국 같은 위상을 가진 에너지였고, 부술 수 있었다. 그녀가 원했듯 붉고 밝게 타오르는 검날이 번개의 형상을 갈랐다.

총알처럼 날아갔다, 고 표현했지만 실제 그 정도 속도는 아닌 투사체였다. 순식간에 제냐가 만들어 날린 것이지만 MP를 과량 투입했다. 세세하게 MP를 운용할 새는 없었지만, 적당히 강력한 전류를 갖도록 만들었다.


검날이 베었으나 전기는 튀었고, 그 자락에 맞은 아르망디는 잠깐 몸을 떨면서 감전을 버티기 위해 애썼다. 순간 정도의 경직이었지만 가까운 거리였고, 제냐와 아르망디 정도로 움직이고 있는 빠르기의 초인이라면 그 정도의 경직으로 생사가 갈릴 수 있었다.


제냐는 뒤로 튀며 번개를 뿌렸고, 아르망디가 검으로 그것을 베는 순간에 다시 발을 디뎌 앞으로 뛰었다. 관성 탓에 조금 느려졌으나 그녀가 번개로 움찔하느라 버린 시간과 결국 비슷했다.


아르망디가 정신을 차리며 근육이 올바로 움직일 땐, 제냐가 코 앞에 있었다. 제냐는 황야 지룡의 발톱 대거를 가지고 MP를 마음껏 흩뿌렸다. 불꽃이 커진다. 단검, 대거였지만 곧 아르망디가 가진 숏소드보다도 더 길어진 검날이었다. 아르망디의 기력술처럼 안정적인 형상을 갖지는 않는다.


‘불’이라는 원소에 특화되어 MP소모량 대비 강력한 위력을 갖지만, 그대신 형체가 불안정하고 불꽃의 성질로 고정되는, 발톱 대거 전용의 기력술이라 할 수 있다. 뱀의 혀처럼 구는 불꽃의 칼날을 이리저리 그어댔고, 아르망디는 그것을 쌍검으로 막아냈다. 쾅, 쾅! 하고 쌍검을 두드리는 대거의 무게감이 제법이다. 제냐는 검술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또 높은 경험치를 갖고 있었다.


다양한 검술류 스킬의 수련자이기도 했고, 플레이어로서 제냐 킴이 검술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았다. 이런 식으로 스킬을 통해 기술을 익힌 뒤, 로그 아웃하고 난다면 검도에 대한 적성이 조금 늘 지도 모른다.

운동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거나, 혹은 휴식 시간에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마인드 트레이닝을 한다는 식으로 여가를 보내는 운동 선수들도 종종 있는 판국이다.


제냐의 검이 아르망디의 자세를 무너뜨린다. 그녀는 휘어진 검을 그 방향대로 손 안에서 돌리면서 팔을 뒤로 뺐다. 그대로 반 바퀴 돌리면서 다시금 원을 그리면서 제냐를 베어나간다. 한 개의 속도는 제냐의 것보다 느리지만 쌍검이다. 그녀는 한 손처럼 양 손의 검을 다룰 수 있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상대가 가장 부담과 압박감을 느끼는 횟수로 때릴 수 있는 것이다.


제냐는 아르망디의 기색을 읽었다. ‘검도가의 감각’은 다양한 검술 류를 시연할 때 순발력 보정과 약간의 근력 보정이 붙는다. 검을 들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자신이 해내 보이려는 검로가 이상적인 검로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시스템 AI가 도와준다.

전투 중에 보이는 희끄무레한 검의 궤적들이 있는 것이다. 푸르스름한 선들은 불투명해서 시야를 가리지는 않으며, 최적 공격로를 미리 알린다.


물론 검도가의 감각 스킬이 랭크가 올라갈수록 더 정확하며 통찰력 있는 판단을 시스템 AI, 스킬 쪽을 관장하는 스킬 시스템 AI가 알려주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검로만이 아니라, 상대가 근접 전투가라면 그 공격 궤적 또한 어느 정도 읽는다. 검이 가장 정확하고, 검과 유사한 무기를 든 전투 스타일의 적일수록 또한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제냐 스스로가 인지하는 운동 신경과 동체 시력, 거기에 검도가의 감각 등 보정 스킬들이 걸리자 고속으로 움직이고 있는 근접 전투 중에 상대의 다음 행동이 머리에 읽혀 들어오는 것이다.

그는 아르망디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둔다면 까다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 차례 크게 상대의 칼을 쳐내며 그녀의 자세가 슬쩍 무너진 틈을 타서 차라리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갔다.


그녀 쪽으로 발을 강하게 딛으면서 체중을 실어 어깨를 가져다 댄다. 날을 세우듯이 뼈의 가장 단단한 부분을 그녀 쪽으로 들이밀면서, MP또한 추가해 가격한다. 그대로 몸통 박치기를 하듯 들어가자 도리어 쉽게 베지 못했다. 품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면 검으로도 베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양 팔이 열린 틈을 타서 치는 중이었다.


제냐가 조금 더 빨랐다. 아주 다행히도 말이다.


아르망디가 변칙적인 스킬류를 갖고 있었지만, 물리 스텟에 있어서 제냐가 약간 높은 모양이었다. 전력 대시를 하듯 강하게 뒷 발을 차며 날렸고, 그대로 제냐의 어깨가 아르망디의 갑옷 위, 명치 부근을 때리며 그녀를 뒤로 쳐낸다.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사람과 사람이 박은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다 각자 단단한 갑옷부위가 부딪힌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한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폭발력 있게 치고 들어간 몸통 박치기가 강력하다. 황소가 들이박은 것처럼, 그녀는 그대로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으면서 뒤로 날았다.


“컥.”


낮고 둔탁한 소리가 성대에서 갈리듯이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폐호흡이 멈추는 기분이다. 아르망디는 허점을 찔렸다. 쿵, 하는 충격이 오는가 싶더니 두 발이 땅에서 떴다. 그녀는 세상이 느려진다고 잠깐 생각했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두부를 낙엽이 쌓인 땅바닥에 한 번 처박고, 그대로 몇 바퀴 굴러 나무 둥치까지 날아갔다.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나무에 물구나무 서기를 하듯 뒤집혀 제 몸을 들이밀었다. 단단한 침엽수의 몸통이 그녀를 멈추었다. 잠깐 짧은 틈이 나자 제냐는 호재라고 생각했다. 깔끔하게 쳐날렸기에, 도리어 제냐는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온 몸의 무게와 힘을 실어 던진 박치기의 충격을 아르망디가 온전히 받았기에 말이다. 제냐는 금세 자리를 다시 잡고 서서, 왼 손을 그녀 쪽으로 향했다.


“썬더 볼트.”


제냐는 급하게 중얼거린다. 파즈즈, 하고 푸른 번개가 튄다. 1, 2초 정도가 지나기 전에 강렬한 빛이 그의 앞에 모였고, 그대로 날렸다. 크기로 치자면 그 중심의 구형체는 테니스 공 정도의 크기였다. 크기가 파괴력을 말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밀도를 갖추지 못한 MP의 투사체는 그만큼 폭발력이 떨어지리라.


대신 그 주변으로 흩어지고 있는 번개의 불꽃들이 강렬했다. 짧은 시간이라 깔끔한 모습으로 만들어 날리진 못했으나 들어간 MP 자체는 일반적인 썬더 볼트에 비해 그리 적지 않은 양이다. 화살과 비슷한 속도로 날았고, 아르망디를 향해서 이리저리 제 몸을 뒤틀며 가는 복잡한 궤적으로 썬더 볼트가 도착했다.


쾅, 하는 폭발성과 함께 아르망디가 피하지 못하고 썬더 볼트에 맞았다. “깍.” 하고 새된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어질거리는 정신이 차마 눈 앞의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 아찔한 전류가 그녀의 캐릭터를 감전시켰고, 부들거리면서 그것에 저항한다.


초월 방어력이 높다면 초상 스킬류에 막강한 반탄력, 저항력을 가진다. 아르망디 역시 영 없지는 않은듯, 그것만으로 치명상을 입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격을 연이어 받는 만큼 회복이 늦어졌고, 또 그만큼 제냐가 스킬을 쏘아댔다.


“썬더 볼트.”


또다시, 아르망디의 입장에서는 지겹고도 공포스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제냐의 손바닥 앞에 전류가 흘렀다. 이번에는 몇 호흡이 지나 조금 더 커진 것이었고, 연이어 날아가 아르망디의 발치를 맞추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더듬거리며 위치를 벗어나려고 한 탓이었는데, 썬더 볼트의 좋은 점은 신체 일부만 맞더라도 그 뇌전의 기운이 온 몸을 휘돌면서 감전시킨다는 점이다.


“끼야악.”


아르망디는 이번에는 조금 더 정신이 있는 듯, 정상적인 비명을 지르면서 땅바닥을 제 손으로 짚었다. 이미 단정한 옷매무새나 꼴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숲의 흙바닥에 닿고, 낙엽과 동식물들이 만들어낸 여러 잔해가 묻어 엉망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움직여 옆으로 튀었다. 벌레가 튀듯한 빠르기와 탄력으로 잠깐 회복의 틈이 나자마자 제 몸을 날렸고, 앞 구르기처럼 균형을 잃은 채 날아가 사라지는 그녀의 뒤를 다시금 다른 썬더 볼트가 쫓았으나 맞히지 못했다. 제냐는 그 틈에 “IV.”라고 중얼거리면서, 비스트 슬레이어를 꺼내들었다.


생각보다 싸워 볼만한 상대이기는 했다. 상성이 좋은 건지, 상대가 방심한 건지, 혹은 제냐에 비해서 단순히 전투력 수준이 낮은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행이었다. 혼자 있는, 솔로 플레이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운이 나쁠 경우 순순히 게임 오버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솔로 플레이어들은 준수한 상황 대처 능력과, 강력한 전투 능력을 동시에 갖춰야 했다.

강적에 맞서 싸워 이길 정도면 가장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스스로 도망갈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길러야만 험난한 콘란드 대륙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플레이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


제냐는 눈 앞에 뜬 인벤토리 창에서, 상부에 있던 비스트 슬레이어를 스크롤을 내릴 필요도 없이 바로 손가락으로 긁어 꺼냈다. 허공에서 검이 생성되듯이 튀어나왔다. 가로로 누워 튀어나오는 검이다. 그대로 대거를 왼 손으로 바꿔 들었고, 비는 오른 손으로 비스트 슬레이어의 검병을 잡으며 바로 세웠다.


왼손에 대거, 오른손에 푸르스름한 칼날을 가진 비스트 슬레이어. 두 종류 다 로멜리아 가의 퀘스트가 일단락 되고 남은 재산을 퍼부어서 강화시켰다. 아이템 희귀도가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사용자인 제냐로서는 체감이 될 정도의 변화였다.


더욱 짙은 청색의 날빛을 가지게 된 비스트 슬레이어다. 여전히 도끼와 같은 날의 묵직함이 인상적인 도刀다. 기력술을 잘 받아들이도록 소재의 특성이 강화된 상태였다. 제냐는 칼을 쥐자 마자 MP를 운용했고, 그대로 칼날의 빛을 닮은 푸르스름한 빛이 생겨난다.


한 번 아이템 류에 형성된 기력은 초상 스킬로 만들어진 다른 현상보다 조금 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지속력이 특징인 초상 스킬이 아니라면 대개 휘발적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결속이 풀리는 것이 술사들이 다루는 MP의 특징이었는데, 기력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강했고, 단단했으며 직접 무언가를 때리며 소모하지 않는다면 전투 내내 유지가 가능하다.


제냐는 나무 뒤에 숨은 아르망디를 주시했다. 그리고 기력술 역시 발동한다. 시간이 그녀가 아무런 기척이 없기에, 인벤토리에서 푸른 물약을 하나 꺼내들어, 뚜껑을 이빨로 돌려 까고 내용물을 마셨다. 벌컥거리며 그리 많지 않은 양을 마실 때까지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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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뭐, 아르망디는 긴 생머리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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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106. 소란 23.10.10 23 3 16쪽
106 105. 귀족제 23.10.10 24 3 17쪽
105 104. 리액션 23.10.08 26 3 34쪽
104 103. 마무리, 재회 23.10.06 28 3 23쪽
103 102. 게임 오버 23.10.06 25 3 17쪽
102 101. 4대1 23.10.05 21 2 24쪽
101 100. 1대1 23.10.05 23 3 19쪽
100 99. 3대1(3) 23.10.04 26 3 24쪽
99 98. 3대1(2) 23.10.02 27 3 26쪽
98 97. 3대1 23.10.01 26 3 17쪽
97 96. 습격 23.09.28 31 3 15쪽
96 95. 이모저모 23.09.27 27 3 27쪽
95 94. 수습 23.09.27 24 3 17쪽
94 93. 연전連戰 23.09.26 27 3 15쪽
93 92. 파이어 볼, 궁술 23.09.26 25 3 24쪽
92 91. 김세인 23.09.25 31 3 29쪽
91 90. 각자의 싸움 23.09.24 30 3 24쪽
90 89. 틈새 23.09.24 26 3 34쪽
89 88. 포격 23.09.24 23 3 25쪽
88 87. 레드 오크 부락 23.09.22 26 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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