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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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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0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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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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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4쪽

115. 파罷했음

DUMMY

*


“이건······.”


너무 많은데.


아이젠은 생각했다. 고기와 재료를 가져다달라고 하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그걸 맡긴 인간의 솜씨가 지나치게 좋았던 모양이다. 사르삿 시의 외곽지역. 물자들을 옮기는 창고로도 쓰이는 큰 광장, 혹은 벌판 따위가 있었다. 동문 근처에 있는 상업 지구의 한 자리였고, 동문쪽에서 들어오는 행상들이 이곳에 잠시 머무르는 일이 많다.

물건을 받기로 한 자들은 대개 여기서 만나 각자의 것들을 받아가고는 한다. 그 양이 어지간하면 일일이 납품자가 돌아다니면서 가게에 상품을 전달해 주겠지만, 아주 대량이거나 거대한 화물을 취급할 때는 동문 화물 광장을 이용한다.


슬슬 날이 어두워지는 저녁이었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고, 혹은 집 안에서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아이젠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약속한 장소에서 제냐를 만났다.

제냐와 함께 온 자는 테이머인 것 같았고, 그는 신비로운 스킬을 사용해 거체를 옮겨 왔다.


흰뿔 큰사슴의 부위 고기는 본 적이 많이 있었고, 책으로도 찾아봤으니 알고는 있었다만 그 온전한 전신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냐가 거대한 고기를 옮기기 위해 고용한 테이머가 다시 여러 마리의 괴수들을 조종해 시신을 끌고 왔고, 동문 광장의 한쪽 구석에 흰뿔 큰사슴의 시신 두 체와 거대 딱정벌레의 시신 하나가 누워 있었다.


시신들을 끌고 오는데 사용한 것은 거대한 마차였다. 지붕이 없는 거대한 판때기. 프레임과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넓은 판만이 있는 이상한 형태의 차였다. 수레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사람이 혼자서 끄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크기의 수레.


탈착식으로 만들어져서 분리 보관이 가능한 철목 형태의 수레였는데, 제냐가 공업소에 들러서 문의를 하고 빌린 것이었다. 안드레 역시 많은 물량을 취급하는 상업 지구의 NPC나 플레이어들이 그것을 쓴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실제로 그가 다루는 것은 이번 퀘스트에서 처음이었지만.


어둠숲의 어귀에 여러 개로 쪼개져서 있던 것을, 수풀 바깥에서 원상태로 만들고 그 위에 시신을 올렸다. 프레임에는 철목이 쓰였기에, 막대한 하중을 견딜 수 있었다. 바퀴 역시 철목으로 휠이 만들어졌고 거기에 고무 따위의 포장이 덧씌워져 원시적인 형태의 타이어가 있었다.

흰뿔 큰사슴의 시신도 어마어마한 무게였고, 거대 딱정벌레 역시 똑같았다.


수레가 총 세 개였고, 그것들을 이끄는 적마가 다섯 마리 씩에 레드 오크가 열 마리 씩이 붙었다.

동문 어귀에서 안드레가 다루는 몬스터들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용병 길드와 모험가 길드에 등록되어 있는 테이머이기도 했고, 또 테이머 길드가 있어 소속된 협회원이기도 했다.

거기에 테이머들이 다루는 조종 상태의 괴수들은 특수한 SP파장을 나타내기에, 기초적인 검사로 지금 제대로 길들여진 안전한 상태인지 알아볼 수 있다.

검사에는 다회용으로 만들어진 저렴한 아티팩트, 혹은 기초적인 스킬이 사용된다.


아무튼 동문 화물 광장의 한구석, 몬스터와 시신, 제냐와 안드레, 그리고 아이젠까지 모여 있는 광경이었다.


아이젠은 제냐가 이끌어 온 수레에 실린 세 덩이를 본다. 두 개에는 흰뿔 큰사슴. 한 쪽에는 말도 안되게 거대한 딱정벌레의 모습.

셋 모두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고, 특히 사슴쪽은 피가 다 빠져나가 살아 움직일 때와는 조금 다른 외형이었다. 살아 움직일 당시보다는 다소 홀쭉한 꼴이다.

어둠숲에서 황야를 지나 사르삿에 올 때까지도 그 혈흔이 이어지다가, 중간 길목에서 더 이상 출혈이 없이 운반이 이어졌다.


거기에 오크 몇 마리가 등짐처럼 지고 있는 포대기에는 아마 고사리가 담겼으리라 생각된다. 한 마리씩을 부탁했는데 큰사슴을 하나 더 가져왔고, 생각한 것보다도 조금 더 컸다. 다 소화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물량이다.

그러나 아이젠은 제냐에게 왜 거래 내용과 상관없이 더 많은 양을 가져왔냐고 따질 생각까지는 없었다. 한 마리 이상은 계약이 아니었으니 굳이 사들일 필요가 없기는 하지만.


“······감사합니다.”


무게를 달아서 정확히 돈을 건네주어야 한다. 화물 광장 근처에 도축 공장이 있었다. 공장이라고 하지만 완벽히 기계식은 아니었고,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초적인 형태의 기계적 도구들과 수많은 장인들이 한 데 모여 작업을 하는 작업소였다.

이런 류의 대도시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직종의 전문가들이 수십 수백 이상이 모여서 거대한 일처리를 하고는 하는 것 말이다.


아이젠은 감사 인사를 일단 먼저 건넸다. 제냐는 허허, 웃었고 안드레는 그 옆으로 조금 빠져서 먼 곳만 바라보고 있다.

어차피 그가 얻어냈던 퀘스트도 아니기도 하고. 아이젠과 제냐와의 관계 사이에 끼어들 일이 없었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정확하게 인간 관계를 구현한다. NPC라고 불리지만,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과 똑같이 대해도 될 정도, 가끔 생각하다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정밀함을 만들어낸 게 이 게임인 것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굳이 끼어들어 알짱거리는 것보다는 빠져 있는게 차라리 좋으리라.


아이젠은 턱매를 쓰다듬었다. 대강의 견적을 눈대중으로 내고 있는 것이다. 제냐를 본다. 청년은 허허, 하면서 실없는 웃음을 보이고 있다.

자신만만한 것 같기는 했는데, 상처 하나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거기다가 의뢰를 맡긴 지 채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이런저런 채비를 마치고 떠났을 것을 생각하면 정작 이 사냥감들을 잡아오는 데는 하루 정도가 걸렸으리라 생각된다.

고수, 인 모양이었다. 이런 대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무력을 가진 수준의 용병 말이다.


용병이나 모험가들은 떠돌이였고, 길드에 소속되어 협회가 보장하지만 그래도 어딘지 신용이 없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계급이 높아지는 데는 시험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길드에 가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른다.

정예한 고수들보다는 어중이떠중이가 훨씬 많았고, 보통 초인들 중에서도 완벽한 솜씨를 자랑하는 어느 귀족가의 실력자들보다는 늘 몇 수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용병, 모험가들 중에서도 드물게 기사들과 견주고 도리어 그들을 이기기도 하는 작자들이 있었다.


금강급, 다이아몬드 급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는데, 대도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자들이었다. 제냐라는 친구의 용병 급수가 어떻게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실력은 그만한 최상위권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그, ······일단 사슴 한 마리랑 딱정벌레 한 마리 값은 치르겠습니다. 고사리도요. 남은 한 마리는”


아이젠, 곱슬머리를 하고 있는 투실한 체격의 사내는 말을 살짝 멈추고 손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왼손을 들어 엄지로 왼쪽 방면을 꺾어 가리킨다. 그쪽은 도축 공장이 있는 방향이었다.


“일단 가공을 해놓고, 차후에 사업 가능성을 좀 보고 대금을 치르던가 하겠습니다. 혹시 불만은···.”


제냐는 고갤 가로 저었다. 딱히 없었다. 한 마리를 더 잡아온 건 그냥 그의 개인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어차피 사냥을 간 셈이었으니 부족한 것 보다는 많은 게 낫겠다 싶어서 말이다. 제냐로서는 별로 어려운 난이도의 사냥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좀··· 공장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가능하시겠습니까?”


아이젠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기웃거려, 옆에 있던 안드레를 슬쩍 보았다. 아이젠의 눈에는 둘 다 세시앙 인이다. 콘란드 대륙은 거대한 하나의 땅덩이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지에서 문명이 발생했지만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언어 자체도 통일된 공용어를 대륙어로 사용하고 있다.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대륙의 각 지방별로 조금씩 특색이 있는 대륙어라, 그것을 또 나누어서 중부 대륙어, 서부 대륙어, 그런 이름들로 부르고는 한다.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한 언어라서, 플레이어들의 경우에는 익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대륙어에 능통한 NPC들은 다른 지역에 가도 말과 문자를 쉽게 배운다.


인류가 다수 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자와 언어는 폭넓게 보아서 한 개 였고, 그 세부적인 특색을 따져서 여러 갈래로 나누면 수 갈래에서 수십, 수백 갈래로도 나누어진다. 사투리가 조금 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해가 쉬우리라.


그러나 이 콘란드 대륙에서도 다른 문명권과 교류를 거부하듯 자기들만의 문화를 일궈오며 만들어진 문명들이 간혹 있었다.

흔히 ‘이종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엘프나 드워프들이다. 이들 역시 인류의 일종이었고, 종적 특색으로 다소 다른 모습이나 성향, 문화를 갖고는 있지만 크게 보았을 때 인간으로 친다.

이 세계에는 인간 외에는, 짐승이 있을 뿐이었다. 짐승들 중에서 다소 흉악한 생김새나 특이성을 자랑하는 온갖 괴수들, 그리고 악마종들이 조금 두드러지는 꼴로 활보하고 있었고.


이족 보행을 하는 악마종들, 오크나 고블린, 그런 것들은 분명히 인류가 아닌 몬스터였다. 그것들에게는 이지와 영혼이 없었으니까. 교활함이라고 표현될만한 능력들과 도구를 다루는 재주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보통의 동물군에서 벗어나 엇갈린 길을 걷고 있는 종들이었다.

그래서 ‘악마종’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부르기도 한다.

이질적인 것들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그 연원을 깊이 살펴 들어가자면, 이 콘란드 대륙의 창조 신화와 거기에서 갈라진 어느 악마의 이야기를 길게 풀어나가야 한다.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아는 이들도 별로 없고, 관심이 있는 사람도 그다지 없는 세부 설정이었다.

심지어 NPC들도 그렇게까지 깊이 역사를 아는 자들은 많지 않았고.


어쨌든, 아이젠이 머뭇거리며 떨어진 자리에 있는 안드레를 봤던 건 그의 특색이 다소 이국적이었기 때문이다. 세시앙인 자체도 산슈카 국내에 없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토착민들 중 소수파였고, 그가 하고 있는 행색이나 행동거지도 어딘지 이방인의 향취가 풍겼으니까.

먼 지방에서 온 인간이라면 지극히 극심한 사투리 때문에 간혹,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마저 몇 개월 정도, 아무리 둔한 자라도 년 단위가 되면 완벽하게 익힌다.

아이젠은 이 지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먼 타지의 사람인가, 싶어서 말을 줄인 것이다.


NPC들간의 언어와 각 지방의 관계는 그러했지만, 플레이어들은 이제 고작 게임이 서비스 된 지 1, 2년이 넘은 시점에서 그만한 시간을 들여 타국의 언어를 배우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배움의 근거가 되는 대륙어조차 그들이 아는 지식이 아니었고.

정말 괴짜들은 인터페이스 설정창 따위에서 기본 번역을 꺼버리고 대륙 공용어 그대로의 원문이나 발음을 들으면서 게임 내의 언어를 공부하고 파기까지 하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의 연구자적 기질을 가진 인간들의 일이었다.

맨 땅에 부딪혀서 말을 익히는 자들은 없었으나, 유저들에게는 늘 그렇듯 게임을 잘 즐기도록 시스템이 혜택을 베푼다. 다른 모든 종류의 스킬들이 행위의 반복과 경험에서 열리거나 하듯이, 말 또한 그 지방 언저리에 맴돌면서 말을 자주 듣고 대화를 많이 시도하다보면 해당 지역의 언어나 문자 스킬이 초보 수준부터 열리기 시작하고, 습득할 수 있었다.


거기에 오래도록 지방에 머물며 NPC들과 상호 교류를 많이 할수록 능통해지는 것이었고.

그 외에 아예 이 콘란드 대륙 내에 스킬로 존재하는 ‘번역’, ‘통역’ 뭐 그런 스킬이나 스킬이 담긴 아티팩트 역시 존재하기는 했다.

일정한 언어 배열의 논리구조를 토대로 암호문을 푸는 소프트 웨어 메커니즘이 들어가 있는 스킬과 아티팩트들이었다. 제법 가격이 비싸지만, 수준 높은 플레이어들이 구하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어서 의외로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대륙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스케일의 퀘스트 플레이를 하다 보면 이것저것 신경 쓸 구석들이 생기는 것이다.

아예 불가능한 정도의 고생보다는, 그냥 신경을 좀 써야 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정도에서 그친 것이 게임을 즐기게끔 만든 개발자와 시스템 AI의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예에.”


아이젠이 신경쓴 안드레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답을 길게 늘려 말하면서 손짓한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는대로 몬스터들이 움직였다. 한 번 테이밍 된 몹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유지하는 데는 그렇게 큰 MP가 소모되지 않는다.


‘몹’들은 자체적인 행동 프로세스를 가진 기계, 패트롤Patrol을 도는 AI와 비슷한 물건이었다. 자연계의 생물들을 비슷하게 본따 만들었으나, 인류형의 NPC들과는 다르게 그것들에게는 자율성과 한계를 깰 수 있는 가능성 부분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대로 만물박사라는 초AI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수 천, 수 만 년 이후로 돌린다고 하더라도 몬스터들이 새로운 문명을 발생시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테였다.

어쨌든, 그런식으로 움직이는 몬스터들은 각 종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건 강아지의 지능이 종별로 조금씩 다른 것과 비슷했다. 똑똑한 놈들은 말귀를 잘 알아듣고, 덩치가 큰 놈은 빨리 달리고 사냥개로서의 일을 할 수 있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 식으로, 레드 오크를 테이밍해서 부리고 있다면 일반적으로 레드 오크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을 시키거나 단순히 대기시킬 때 MP가 그다지 소모되지 않는다.

MP포션을 마시고, 또 그것이 소화되고 새로운 양을 마시는 것을 생각하면 소모가 제로라고 할 수 있으며 그냥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 다른 모든 변수들을 제한다면.


그러나 거기서 레드 오크가 일반적으로 하기 힘든 정도의 고난이도의 행동 따위를 시킨다면, 그 때는 이제 테이머의 역량이 들어가게 된다. 마치 마리오네트marionette에서의 인형을 인형사가 조종하듯이, MP라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실로 연결해 일일이 조작하는 것이다. 능숙한 자라면 그 행위를 보다 빠르게, 적은 MP 손실로, 여러 개체를 동시에 할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스킬들이 능숙해지면 별다른 외부 제스쳐 없이 MP를 조작하는 것만으로 대개 발현할 수 있게 되기는 하지만, 보조의 개념으로 손짓 발짓이나 말하는 게 들어간다. 안드레가 손을 휘젓자 그 방향에 따라 오크들이 움직였다.

무형의 실, SP로 이루어진 투명한 끈은 여러 마리의 짐승들에게 닿아 있었고, 안드레로부터 뻗어나간 끈에 그의 의지가 담겨 테이밍 스킬이 움직였다.


오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복잡한 행위를 하려면 아무래도 이족 보행에, 두 팔이 자유로운 악마종들이 편리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들이 주변의 행로를 지켜보고, 그에 맞추어 마차의 방향을 바꾼다. 워낙 거대한 운반이라 움직일 때는 늘 밑준비가 필요했다.


“크륵.”


레드 오크들이 숨을 거칠게 쉬면서 거대한 통나무 배처럼 생긴 마차의 판자 모서리 즈음으로 다가간다. 거기에는 손잡이처럼 홈이 패여 있었는데, 거기에 굵은 줄을 몇 개나 매듭지어서 달아두었다.

제각기 그 줄들에 달라붙어 낑낑대며 힘을 쓰고, 또 마차의 앞 방향에 선 채 대기하던 적마, 붉은 당나귀들이 타이밍에 맞게 마차를 끌었다. 배가 선회를 하듯 마차의 방향이 바뀐다.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는 마차의 프레임이다. 사실 움직이는 널빤지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외형이기는 하다만. 거기에 더욱이 거대한 시신이 올려져 있어서 제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하고.

아무튼 그것이 버거운 소리를 내며 돌았다.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철에 버금가는 강도를 가졌다고 하는 철목을 장인들이 잘 가다듬어 만든 마차이기에 쉽게 부서지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는, 콘란드 대륙에는 현실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다양한 소재들이 있었다. 물론 그만큼 현실의 과학 기술은 시대상에 따라 발전해 있기 때문에, 판타지적 소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합금 따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는 하지만.

여기는 과학적 발전은 늦되 그런 소재들의 특별함 덕분에 다양한 방면에서 기술 공업 등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술적 발전은 늘 전쟁의 양상을 화려하게 만든다.

인간이라는 건 늘 도구를 가지고 서로 싸울 생각밖에 못하는 것인가, 씁쓸해지는 말이기도 하다만.


어쨌든 어느 시대에든 혼란을 즐기고 약탈을 좋아하는 부류들은 있을 수 있으니, 지키기 위한 전쟁은 온 힘을 다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이 맞으리라.


광장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도시라지만 이런 화물 광장이 한 군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4방위에 위치한 동서남북 문 근처에 화물 대광장이 있었고, 비슷한 용도로 써먹을 너른 공간이 인근에 몇 개씩 더 있었다. 각 문 근처에 있는 화물 광장을 대광장이라고 불렀고, 별다른 이름 없이 쓰는 공터들을 소광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이 장소에 가득 찰 때도 있었고 또 별다른 일이 있을 때 공간을 사용해 다른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현재 사르삿은 오래간만에 귀족제가 열린 상태라 사람들이 들떠 있으나, 물자들은 미리 들어와 있었고 추가적으로 오는 행상들이 잠시 쉬는 틈인 모양이다.

인파는 대개 중심 지구 근처로 몰려 있었고, 일반 지구에서도 외곽지인 성문 근처의 광장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평소보다 조금 더 뜸한 편이었다.


시간이 다소 늦기도 하고. 어둑해진 밤하늘. 그래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안드레가 애써 몬스터들을 조작했고, 거친 조작음을 내면서 마차가 돌아가고 시신의 대가리나 꼬리의 방향이 움직인다. 왼쪽, 굳이 따지자면 남쪽 방향으로 마차가 돈다.


오크들이 잠시간 애를 쓰자 일이 끝난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안드레가 손짓을 하면서 먼저 앞서 이동을 했고, 테이밍된 몹들은 안드레의 뒤를 마치 어미새를 따르는 마냥 졸졸 따르기 시작한다.


철목으로 이루어진 바퀴의 골조가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게를 받고, 가속도를 얻기까지가 늘 조금 힘든 법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안드레는 느리게 탄력을 받아가는 마차, 혹은 수레의 바퀴를 보면서 그런 실없는 생각을 뜬금없이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감상적이 되어가는 것도 같다. 중장년기를 지나 노년이 되면 여성 호르몬이 차라리 더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평생 입 꾹 다물고 거칠게만 살아왔던 남정네들은 어느 시기를 지나서 조금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음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일지 모른다. 무슨 일이든 밸런스가 중요하다. 너무 단단하기만 하면 부러질 때가 있고, 너무 휘기만 하면 신념을 지켜야 할 때조차 힘을 제대로 받지 못할 지 모른다.

이럴 때가 있고 저럴 때가 있는 게 세상사이고 인간사이다. 그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의미이고 지혜이지 않을까··· 까지 생각했을 때 잡념이 끝났다.


안드레보다도 앞장서는 걸음이 아이젠과 제냐였다. 그들의 인도에 따라, 안드레는 시신들을 도축 장소로 옮겼다.


*


51만 젠.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보다는 적은 양이었는데, 아이젠이 조금 더 반올림을 해서 통크게 주었다.

한국 원의 감각으로 환전하면 15억 즈음 된다.

단순한 수렵 의뢰, 그리고 또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데다가 난이도가 높지 않아 게임 오버의 위험률조차 없다는 걸 생각하면 파격 이상의 의뢰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안드레는 제냐의 수준을 정확히 몰랐으니까, 일반적인 용병이라고 생각하고 난이도를 가늠해 금액을 책정한 것이기는 하다.


사슴 한 마리와 딱정벌레 한 마리. 그리고 가져온 보랏빛 고사리들을 모두 매입했다. 도축 작업을 하고, 뼈와 써먹을 수 없는 내장 부위나 피 따위를 조금 더 빼고. 그런 식으로 정육으로 만들어 남기니 그것만으로도 톤 단위가 넘는 고기가 나왔다.

사슴의 이야기였다.

딱정벌레의 경우에는 내부 물질만을 생체에서 바로 빼 낼 기술이 없었고, 거대한 가마솥의 역할을 하는 작업장에 넣어버린 뒤 쪄버렸다.

그 뒤에 급속 냉동을 시키고 단단하게 언 것을 작업장의 도축자들, 그리고 기술자들이 달라붙어 해체를 해냈다.


냉동 시스템은 현대에도 잘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지구의 현대 말고, 이 곳 콘란드 대륙의 현대에도 말이다.

스킬 따위가 존재하는 세상이었고, 스킬을 머금은 스크롤이나 아티팩트 따위도 있으며, 그 에너지를 공학적으로 사용하는 기계류들 역시 민간에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시대이니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위로 작업을 할 수 있는 건, 아이젠 하우드라는 인간이 그간 중심 지구에서 쌓았던 인맥이나 돈, 뭐 그런 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아이젠이 들러서 일 처리를 하는 이런 공장들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복잡한 작업을 잘 해주진 않을 것이다. 전문적인 고객들에 한해서 일을 하는 것이겠지.

도축자들은 하나같이 완력이 강한 사내들이었다. 전문적으로 무도를 수련하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의 몸체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그런 작자들로도 부족해서 늘상 용병 길드 따위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자들을 고용해서 일을 돕게끔한다.


스탯이 마치 무한한 것처럼 확장되어 갈 수 있는 콘란드 대륙이었다. 일반적인 올림픽 경기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한계 정도는 가뿐하게 넘어가는 스탯의 능력과 퍼포먼스들이 난립하는 시대였다.

일류의 기사가 되지 못하는 실력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신체 능력이 있다면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아주 많았다. 이런 류의 육체 노동은 의외로 인기가 좋다.

플레이어들도 그렇지만, NPC들 역시 목숨이 소중하니까 말이다. 모두가 필드에 나가서 괴물들과 싸우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리스크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누구라도 참여하고 싶을 테였고, 그런 자들 중에서 기술을 가졌거나 적극적인 자들이 늘 고용되어서 이런 거대 작업소에서 아직 기계가 다 채우지 못하는 부분들을 사람의 손으로 해내는 것이다.


십 미터가 넘어 보이는 거대한 톱을 가지고 서커스를 하듯이 시신의 위에 올라가 해체 작업을 펼치는 광경은 기이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제냐 역시 하자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었지만, 상상력의 문제다. 그런 일이 이 콘란드 대륙에서 필요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할 일이 없었으니까.

약간이나마 기력술 역시 사용 가능한 용병이었던 것 같았고, 두 사내가 거대한 톱의 양 극단에 매달리듯 서서 사슴과 딱정벌레의 요리된 체구를 토막냈다.


사슴의 가죽은 성한 부분은 또 다른 곳에 팔아먹을 수 있었다. 흰뿔 큰사슴의 가죽은 가죽 갑옷, 방어구를 만드는 인기 좋은 재료 중 하나였다.

면적이 넓고 또 탄성과 강성 등 성질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안정적으로 다양한 파츠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급의 소재인 것이다.

물론 흰뿔 큰사슴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서, 수준 낮은 용병들의 경우라면 목숨을 걸거나 적어도 애를 많이 먹어야 하는 사냥감이기는 하지만.

제냐는 아이젠과의 우호를 위해서, 그 부속물들로 나온 것들에 대한 소유권은 전혀 주장하지 않았다. 본디 계약 내용은 사슴이나 딱정벌레의 고기 부위에 대한 것만이었으므로, 정당한 수렵자인 제냐는 그 소재들에 대해서 이권을 주장해도 할 말은 없었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젠의 일이 잘 되어서 정기적인 거래 대상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기도 하고. 아이젠이 먼저 고기에 대한 후한 값을 쳐주고, 또 제냐에게 적당한 일거리를 준 것이 일의 발단이어기도 해서였다.


제냐의 입장에서는 거의 버리듯 처리하는 가격에 고기를 넘겨야 했을 텐데, 그 값을 얻게 된 것만 하더라도 이미 상당한 이득이다.

판매자의 입장에서 흰뿔 큰사슴의 고기는 그다지 큰 값을 받지 못할 물건이었다. 일부러 들고 오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고. 보통은 거대한 크기의 사슴이다 보니 즉석으로 포를 떠서 가죽 따위의 부위만 옮길 수 있는 만큼 가져와 파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였다.


흰뿔 큰사슴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굳이 수많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시신 전부를 대도시까지 옮겨 처리할 일이 없으니 물량이 적다.

아이젠의 입장에선 흰뿔 큰사슴의 고기를 구하고 싶어도 매물 자체가 없으니 오래된 것을 비싼 돈에 구입해야 하거나 하는 상황이 된다. 그마저도 별로 없거나, 너무 오래되어 식재로서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물건들이다.


아무튼 새로운 사업로를 만들어 준 아이젠에 대한 호의로 전부 넘겼다.


15억,


곧 50여 만 젠이라는 돈 중에서 안드레에게는 5만 젠을 추가로 주었다. 일을 잘 도와준 값이었다.

안드레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거한 값이었는지, 반응이 깨나 좋았다. 박영식 씨는 NPC따위는 아니었지만, 플레이어간에도 사이가 좋아져서 별로 나쁠 것은 없었다. 어차피 돕고 사는 사회 아니겠는가. 비록 가상의 게임 세계라고 할 지라도.

같이 일을 하는 형편에 신뢰가 쌓여간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돈으로 신뢰는 살 수 없지만, 적어도 신뢰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있었다, 때로는 말이다.


돈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그래도 분명히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 무언가였으니. 돈으로 욕심을 부릴 때 그것에 가치가 극대화되는 게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고 더 큰 것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때에야 돈이라는 놈의 가치가 그나마 극대화되는 것이다.

가치를 극대화하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우습다는 듯 사회에서 건실한 가치들은 점점 더 0에 수렴되어 가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삶 역시 점점 팍팍해져 간다.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살만한 짓거리들을 많이 해나가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구성원이 직접 밭을 갈아야 땅이 제대로 경작지로 바뀌어가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발을 딛고 사는 사회는, 다 같이 개간해야 하는 거대한 야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일을 해야만, 그것은 그나마 써먹을 만한 무언가가 된다.

함께 써먹을 자리에 일은 하지 않고 망칠 생각 밖에 없는 양반들이 많아지면, 공동체는 돈좌하기 마련이고.


거창한 이상이나 사명을 가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안드레와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안드레 역시 그렇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 고마울 따름이다. 제냐는 아이젠에게서 돈을 현금으로 받았고, 곧바로 그에게 건네준 뒤 자신의 몫은 은행에 예금으로 맡겼다.


당장은 쓸 일이 없다.

지금 그는 ‘준비’ 기간이었다. 다음에 다가올 파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기간 말이다. 로멜리아 가와 엮였던 퀘스트는 아직도 퀘스트 리스트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마저 있었고. 그 암살자가 퀘스트로 인한 여파인진 모르나 달리 다른 게 떠오르 지도 않는다. 어쨌든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씬이 진행이 된다면, 그 때 전력의 재정비를 위해서 목돈을 써야 하고 지금은 모으는 게 중요했다.


산슈카 왕국은 사르삿부터 시작해, 귀족제라는 거대한 축제로 한껏 들떠 있었다. 언제나 평소와 다른 일상의 변화가 일어날 무렵은 사건이 벌어지기 좋은 때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 없으니까.

언제나와 같은 일상에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경계를 곤두세우고 있을 수 있는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평소와 다른 조금 이상한 일이 생겨도, 모든 게 그저 축제 탓인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돌아가고 있는 사르삿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그런 식으로 지켜보던 누군가의 눈길이 흐려지기 시작하면 일 꾸미기 좋아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해내고 말 것이다.

별다른 단서도 없는 망상에 불과했지만, 제냐는 귀족제의 거리를 걸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제냐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옆에 있던 사내였다.


“고맙네.”


함께 거리를 걸으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려던 안드레가 이야기했다. 제냐는 고개를 돌려보며 아저씨의 면상을 흘끗 본다. 다분히 사내다운 사내였다. 선이 굵었고. 투박하게 생겼으며 눈빛이 강하다. 무슨 일을 하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영업직에는 어울리지 않을··· 아니, 도리어 잘 써먹으면 신뢰감을 주는 인상으로 바뀔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일을 하던 강단이 있어 보였다. 사장같은 직위에 있고 자영업을 하는 양반이 아닐까.

제냐는 흰소리같은 생각을 순식간에 해내면서 안드레에게 물었다.


“어, 네. 뭐가요.”

“그냥, 두둑이 챙겨준 것 말야. 한 일에 비해서 너무 과한 성과가 아닌가 싶을 정도야.”

“아유, 뭘 그런 걸 가지고.”


제냐는 대수롭잖게 이야기했다.


시간이 늦었다. 도축장에서 당일 바로 해체 작업을 실시했고, 놀랍게도 그 거대한 시신이 처리되는 데 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뚝딱 일이 끝났다.

말했듯, 아이젠 하우드라는 인물의 저력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의 일이 우선순위가 높다는 듯, 장인들 중 많은 사람들과 또 최정예 일꾼들이 달라붙어 일처리를 해냈다.


그의 이야기에서는 다 알 수 없었지만, ‘아이젠스 키친’이라는 식당의 유명세는 생각 이상인 모양이었다. 중심 지구의 외곽에 있는 그저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토박이들에게 유명하고 또 많은 가치를 지닌 가게였던 듯하다.


아이젠은 두둑이 챙겨왔던 꾸러미에서 금화로 제냐에게 주었었고, 제냐가 그것을 안드레와 넘겼다. 금화는 한국 원화로 환전하면 2,000여 만 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그런 것을 수십 개 받고 또 나누었었다.

꾸러미 하나에 들어갈 정도였지만 제법 묵직하고, 그만한 돈을 들고 다닌다는 게 알려지면 강도를 조심해야 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아이젠은 그 체구나 생김새에 맞게 제법 담력이 센 사내 였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대개의 일이 끝나고 각자 볼 일도 보고, 잡아둔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방향이 닿아 있어 같이 걷던 찰나다.


한국의 시간으로 보자면 이제 잘 시간이었다. 제냐도 여관으로 돌아가 바로 로그아웃을 할 셈이다. 눈치로 보면 안드레 역시 그래 보였고.


“아무튼 쉽게 일을 한 느낌이야. 석연찮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좋은 유저를 만난 셈을 치면 될 것 같네.”

“허허.”


슬슬 가도 근처에 있는 작은 길이었다. 왕궁으로부터 시작되는 가도는 여러 번 방향을 바꿔가면서, 몇 갈래로 나뉘어져 도시의 구획들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중심 지구와 일반 지구를 가르는 원형의 지역 경계선이 있었고, 그 원들을 통과해 성문까지 닿는 길들이었다.


가도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는 골목들과 보다 작은 보조 도로들. 가도에 가까이 갈수록 인파도 늘어난다. 사람들은 밤이 되니 더욱 활기가 솟구친다는 듯 웃음기를 띄고,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웃거나 음료잔 따위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마저 있다.

그들을 슬슬 피하면서 걷는 안드레와 제냐였다.


안드레의 이야기는 제냐 또한 이해했다. 세상은 영 살기가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공짜로 얻는 건, 손쉽게 얻는 이익이 있다면 경계해볼만 하다. 그렇게 얻어낸 것이 잠깐 시간이 지나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덫으로 작용하는 게 세상사의 일반 법칙인 점이다.

왜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에 대해서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그게 경험이라는 것이고.

안드레는 그런 말을 하는 거다. 누군가에게 이해되지 않는 이익을 떠안겨주는 사람은, 어떤 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속 없는 호인, 그도 아니라면 다른 음흉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사기꾼일 것이다.

박영식은 고작 게임 내에서의 호의였지만 그것을 베풀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구는 제냐에 대해서 그래도 괜찮은 놈이라고, 인식을 하고 말을 하는 셈이었고.


제냐는 고갤 끄덕거린다. 그냥 습관적인 흔들거림이었다. 깊이 자기 속에서 생각을 할 때 나오는 제스쳐이기도 하고.


밤거리에는 주광빛의 가로등, 가게들의 조명빛, 그리고 축제라고 건물 위나 가게의 높은 지점 따위를 이용해 걸어둔 줄줄이 등이 흔들거린다. 깃발 따위도 있었는데 불에 타지 않도록 위치나 재질의 처리를 잘 했겠지 싶었다.

바람은 그리 나쁘지 않게,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늘 사르삿의 도심 지역 안쪽을 거닐면서 사람들의 볼따귀를 쓰다듬고 간다.

살기 나쁘지 않은 기후였다. 도시를 벗어나면 광야였으나, 마냥 그런 것도 아니었고. 초원이나 산림 지역 역시 풍요롭게 존재하기도 한다. 여러 지리적 특색이 섞여 있는 지방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슬 들어가고, 로그아웃 해야지. 앞으로도 자주 봤으면 좋겠군. 고생하게.”


툭, 던지듯이 안드레가 말을 뱉었다. 붉은 색의 브릿지를 흔들거리는 단발에 넣어놓은 중년의 사내였다. 단발이라는 게 여성의 그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고, 흔히 야성적인 미를 자랑하는 남정네들이 길게 머리를 길러 투박하게 늘어놓고 다니는 느낌이다.

현실에서도 저러고 다니는 아저씨일 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게임 내에서만 저런 스타일일 테다.

최태현 역시, 직장 생활을 하고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스트레스라도 받는 지, 게임 내에서는 눈에 띌 정도의 긴 장발을 하고 있는 꼴이었고.


으하하.


지나다니는 인파들의 웃음 소리, 취객들의 고함에 가까운 소리가 웅웅대며 여기저기서 들린다.

작은 길이 끝나고 슬 가도에 다다른다. 제냐는 “예입.” 하고 고갤 끄덕이며 인사하곤 각자 갈 길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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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 파罷했음 23.10.25 22 3 34쪽
115 114. 돌아갑시다. 23.10.25 19 3 29쪽
114 113. 동행 23.10.23 22 2 32쪽
113 112. 박영식, 안드레 박 23.10.22 22 3 34쪽
112 111. 사슴의 고기 23.10.20 28 3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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