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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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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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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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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7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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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95. 이모저모

DUMMY

*


피잉, 하는 고성을 내며 철시 하나가 날았다.


제냐의 손끝에서 떠난 철시는 목표물을 향해 자유롭게 난다. 활공을 하듯 그대로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철시의 궤적에 타고 남은 움막의 폐허니, 하는 것들이 다소 걸렸지만 조금도 꺾어짐 없이 그대로 꿰뚫고 지나간다.

기력을 실은 화살이 푸른 색의 아이템 박스 하나를 건드렸다. 철시의 촉은 그대로 박스를 꿰뚫듯 관통했다. 박스가 부서지는 건 아니었다. 그건 게임 내에서 비물질에 가까운 무엇이다.


건드리는 순간, 소유주에게 귀속되며 그 껍질은 사라진다. 안에 담겨져 있을 어떤 아이템만이 정당한 분배권을 가진 이에게 돌아간다.


절벽 위에서 화살을 발사했던 제냐의 인벤토리에 무언가 들어왔다. 아직 빈 공간이 꽤나 있어서 그대로 들어가버린 모양이다. 하긴 소모품 류를 거의 다 비워냈으니. 철시와 전통들만 하더라도 깨나 많은 부피를 차지한다.


체인도 그 옆에서 스킬샷으로 거들었다. 썬더 볼트를 작게 만들어서 정밀하게 날려보낸다. 퉁, 하고 제냐가 화살을 쏘는 것과 동시에 썬더 볼트의 구체가 날았다. 그녀 역시 사격에는 일가견이 있는듯 아이템 박스 하나를 맞추었다.


썬더 볼트의 투사체는 아이템 박스의 귀속권을 얻어낼 수 있는 ‘무언가’였지만, 썬더 볼트가 착탄해 터지면서 생기는 여파들은 아니었다. 썬더 볼트는 무언가 가로막혀 있다면 폭발을 하면서 같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아직 MP의 물질화, 형상 고정을 완벽하게 다루는 게 아니기에 가장 적절한 아이템 회수 방법은 철시를 쏘아내는 것이었다. 퉁, 퉁 거리면서 제냐가 다시 무심하게 화살을 쏘았다.


분지의 입구 근처에서는 세 명의 플레이어, 아르망디-페인-애니가 부지런히 아이템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분지의 입구는 좁았고, 플레이어들의 사냥 방법은 지독했다. 제냐와 체인은 좁은 절벽길을 더욱 좁게 만들고, 온갖 스킬과 화살을 쏘아대며 레드 오크들의 탈출을 방해했다.

화마와 번개, 화살, 쏟아지는 절벽의 돌무더기. 뒤엉킨 동족들의 몸부림 속에서 레드 오크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댔다.

거진, 결국 반 이상은 분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대부분의 아이템 박스들은 그 자리에 떨어져 있었으므로, 찾고 옮기는데 도움이 되었다.


애니, 페인, 아르망디의 인벤토리 용량에 따라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수가 제한적이었다. 남은 것들은 적당히 철시를 쏘던, 체인이 초상 스킬을 잘 조작해서 건드리던, 했다. 절벽 뒤쪽으로 돌아가다 죽은 놈들이나, 움막의 잔해 따위에 파묻힌 채 죽은 놈들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찾는 게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린 일이었다.


전투와 비슷한 시간이 걸려서 수습이 끝났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모아 온 언덕 위 한 장소에 다 늘어놓았고, 오분의 일로 나눠 가지기로 한다.

나온 것들 중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 것들은 이와 같다.


[레드 오크의 어금니, 롱소드, 상체 갑옷, 하체 갑옷, 레드 오크의 심장, 레드 오크의 가죽, 레드 오크의 피, 대거, 철퇴, 워해머, 할버드, 카타나, 오크 고기]


무기류의 것들은 일반적인 아이템들이었다. 상점에 가서 어렵잖게 살 수 있는 품질 정도의. 지금 플레이어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들보다는 당연히 질이 모두 떨어졌고, 한데 모아 팔아버린 뒤 그 금액을 나눠 갖기로 했다. 양이 제법 되어서, 그것만 하더라도 포션 값은 나올 듯했다.

적당한 게임성의 이치에 따라 나오는 아이템들이 오크들이 갖고 있던 바로 그 무기가 되지는 않았다. 반짝거리며 내구성도 하나 닳지 않은 새 무기들이었고, 대장간에 가져가 판다거나 하면 제법 값을 쳐줄만한 모양새였다.

무엇보다도 오크들이 들고 휘두르던 것처럼 거대한 크기를 가진 장병들이 많았다.


오크의 신체적 부속품, 이라 할 수 있는 고기니 피니 하는 것들은 여기 있는 이들에게는 역시 큰 가치가 없었다. 해당하는 특수한 스킬이라도 익히고 있는 이들에겐 수집거리가 될 지 모르겠지만. 이중에는 없다.


시장에 내다 팔고, 마찬가지로 돈을 나눈다.


파티 플레이의 끝은 거기까지였다. 전리품을 제대로 처리해서 나누는 데까지 말이다.


거기에 쉽게 나누기 어려운 몇 종의, 소위 말하는 희귀 아이템들도 나오기는 했다.


[오크 도살자 - 투박한 외형의 검. 한 손으로 다루기에는 폭이 넓고 두 손으로 다루기에는 그립과 검신이 다소 짧다. 대단한 완력을 가진 이가 도끼처럼 쓰기에 좋다. 아무리 두터운 가죽이라도 한 번에 베고 들어가는 파괴력과 예리함을 동시에 가진 브로드 소드. 마치 녹이라도 슨듯 붉은 톤의 검신이 기묘한 매력을 뽐낸다. 7급


오크의 어금니 목걸이 - 오크종의 클래스 중 간혹 특이한 것들은 초상술과 비슷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런 특수한 오크가 사용하는 악세사리 중 하나. 오크의 어금니를 뽑아 줄에 꿰었다. 지저분해 보이지만, 오크들의 MP가 가득 들어있고 오랜 세월이 지나 소재 자체가 변화를 일으켰다. 초상술의 보조 도구로써 훌륭한 기능을 가진다. 6급


레드 오브 - 오크들의 신체를 재료로 하는 오브. 개중에서도 레드 오크의 내장 중 MP가 가장 많이 담겨있는 것들을 모아 만들어냈다. 강력한 MP증폭 효과가 있고, 내부 저장 기능이 있어 초상술사의 주력 도구가 되기에 충분하다. 6급


거검巨劍 - 오크들 중 가장 거대한 개체가 휘둘러도 모자를 듯한 거대한 검. 사람의 키를 넘는 길이와 두터운 폭을 동시에 가진 검신이 인상적이다. 새하얀 검날은 무엇을 담아도 쉽게 물들 것 같고, 어떤 것을 베어도 쉽게 물들 듯하다. 5급


오크의 비명 - 어느 괴짜 과학자가 오크들의 소리를 연구하기 위해 음성 녹음 장치를 만든 뒤, 오크들을 학살했다. 개중에서 레드 오크 개체들의 비명이 들어 있는 장치. 다양한 종류의 소리들이 들어있으나 일반인은 구분하지 못하고, 구분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악마종 연구자들에게 가져가면 어떤 가치를 느낄지 모른다. 4급]


마침 사람 수에 딱 맞게, 레어 아이템은 다섯 종이 나왔다. 아이템의 급수를 따지는 희귀도는 꼭 그 물건의 성능에 비례하지는 않았다. 사실 희귀도보다는 희소도, 라는 이름에 더 어울릴 지 모른다.

똑같은 물건을 누군가 만들어낼 수 있느냐, 세계에 몇 개가 존재할 수 있느냐, 라는 물음에 따라 정해지는 숫자였으니까.


가장 높은 단계의 급수를 가진 것이 박스 형의, 마치 오래된 기계처럼 생긴 네모난 물건이었는데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온다. 레드 오크들이 지르는 비명, 괴성, 혹은 기침 소리 따위가 담겨져 있었으나 어떤 실용성도 느끼지 못했다.

보통 이런 특수한 아이템들은 사연을 담고 있고, 간혹 유니크 퀘스트 따위의 키Key 아이템이 되기도 하지만 아닌 것들도 많았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개발진들은, 맥거핀(히치콕이 만든 영화적 개념, 장치. 아무 의미 없는 장면, 사물 따위를 연출적으로 배치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예상을 빗나가게 하고, 혹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한다)을 사랑하는 인간들인지 기껏 설정해놓은 아이템들이 무수하게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거대한 연산이 가능한 초인공지능이 있기에 가능한 방식이다. 플레이어들은 무수한 키 아이템을 갖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갖기도 한다. 거기에 키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그대로 사장되는 경우도 아주 많았고. 결국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거대한 콘란드 대륙과 그보다 더 거대한 비련의 시나리오의 설계도 속 세상에서 아이템 하나만으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우연이 기적적으로 반복되어야 한다.


저 중에서 아마 가장 현물 가치가, 게임 내에서 떨어지는 걸 꼽으라면 단연 마지막에 나온 음성 녹음 장치일 테다.


제냐는 굳이 많은 말을 하기가 번거로워서, 마지막 것을 골랐다.


다른 레어 아이템들의 경우에는 다소 고민을 하다가, 레드 오브가 체인에게, 어금니 목걸이가 아르망디에게, 도살자가 페인에게, 그리고 거검이 애니에게 돌아갔다.


아르망디는 나름대로 암살자로서 다양한 스킬들을 발휘했으므로, 초상 스킬 비슷한 것을 전법으로 구사할 때도 있었다. 침을 독으로 만들어서 암기처럼 뱉어내던 수법도 사실 초상 스킬 류에 들어가기는 했고.


레드 오브는 보조 도구들로 초상술을 발휘하며 두 손을 자유롭게 놔두었던 체인이 조금 더 전략적 변화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테였다. 초상술 계통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무구나 장비 아이템들을 다룰 수 있는 손이었지만, 지금처럼 계속 훌륭한 전위들이 마음껏 후위에서 포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다면 저런 오브가 필요하긴 할 테다.


도살자는 따져보면 비스트 슬레이어와 비슷한 느낌의 무기였는데, 한 손으로 터프하게 다룰 수 있는 참격용의 무기이지만 둔기로도 쓰임직한 것이었다. 무언가를 까부수는 데도 쓸만했고, 기력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를 묻는 무기와도 같았다. 기력술 역시 MP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성질 변화가 고급 단계로 갈수록 가능했고, 예리함을 늘리든 혹은 닿은 것을 밀어내거나 부수는 저지력을 늘리든 변용이 가능하다.


다양한 상황에서 알맞게 써먹기 좋은 아이템이다. 비스트 슬레이어가 이미 있지만, 쌍수로 다룰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페인에게 양보했다. 다른 것들 중 그가 가질만한 물건이 없기도 했고.

페인은 이미 거대한 롱소드를 양 손으로 쥐고 휘두르지만, 꼭 그것을 쓸 때가 아니라 조금 작은 사이즈의 한손검을 쓸 때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험이 전제되는 콘란드 대륙에서의 플레이는, 어떤 상황이 닥치게 될 지 모르니까 말이다.


다양한 사이즈의 아이템, 무기들을 갖고 있는 건 장거리 여행을 준비하는 모험가, 용병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거검’이라고 이름 지어진 아이템은 애니에게 갔는데, 롱소드를 이미 다루고 있는 페인이 쓰기에도 컸다. 롱소드에 비견되는, 조금 더 긴듯도 보이는 길이감에 넓은 폭을 가진 그야말로 거검이었다.

아주 긴 롱소드를 다루며 오크들의 목을 베어내던 페인이지만, 그의 본질을 따지자면 근력보다는 순발력에 치중하고, 다양한 동작 변화를 통해서 강격 위주의 검보다는 변화 무쌍한 검술을 쓰는 그였다. 그에게 롱소드보다 더 커진 무기는 알맞지 않았다.

자연스레 근력 위주의 전사, 힘전사라는 분류로 불리기도 하는 애니가 쓰게 되었다.


할버드가 있지만 거검 역시 나쁜 무기가 아니었다. 들고 다니면서 다양하게 사용을 하던, 혹은 어딘가에 팔아먹던, 혹은 인챈트를 통해 강화를 시키고 할버드 대신 주력 무기로 사용을 하건. 써먹을만한 곳이 많다.

거병을 다루는 건 애니의 장기였으므로 그녀가 가져가게 되었다.


각자의 무기를 챙겼고, 인벤토리에 다 들어가지 않는 막대한 물량의 아이템들이 언덕 위에 쌓였다. 페일과 애니, 체인은 이런 상황을 미리 대비한 듯 얇고 튼튼한 천과 와이어를 인벤토리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꺼냈다.

각 물건들이 서로 상하지 않게 차곡차곡 펼쳐 놓은 천에 넣은 뒤 쌓았고, 그대로 보자기를 묶듯 윗둥을 묶는다. 나머지는 근처에 자생하는 침엽수를 몇 그루인가 잘라서 가져오더니, 그대로 롱소드 따위로 토막을 쳐서 페인이 간이 썰매 따위를 만들었다. 와이어를 이용해 앞에서 질질 끄는 용이었고, 또 뒤에서 밀면 편리하다.


이곳에서 어느덧 꽤 오래 사냥을 해 온 페인 일행은 숲의 길을 잘 알았고, 썰매를 끌며 몬스터들과 조우하지 않은 채 숲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제냐는 아르망디나, 혹은 혹시 모를 몬스터의 습격, 혹은 아르망디가 아니더라도 눈이 돌아서 다가올 지 모르는 어느 P.K 유저를 경계하며 동행했다.

아르망디도 영 틈을 찾지 못했는지, 마지막까지 별다른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왔을 때보다 짐이 늘고 같이 움직이기에, 꽤 시간이 흘러 늦은 오후, 저녁 즈음이 되어서야 사르삿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걸음이라면 말이 되지 않지만, 제각기 상당한 각력을 갖고 있는 초인들이었기에 가능했던 행군이다.


왕도에 도착해 물품들을 팔고, 그것을 대륙 주화로 바꾸어 나누어 가졌다. 중부 대륙에서는 아무래도 가장 흔하게 쓰이는 돈이기는 했다. 다른 주화들도 딱히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중부 대륙 지역의 상인들은 대륙 주화를 좋아하는 느낌이 든다.


일정을 마치고, 돈을 나눠갖고. 왕도 사르삿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며 헤어질 때까지도 아르망디는 별다른 낌새가 없었다. 제냐는 페인과만 아는 유저 등록을 했고, 혹시 마주칠 일이 있다거나 이따금 이렇게 좋은 파티 사냥의 건수가 있다면 함께 하기로 이야기했다.


제각기 일행들이 흩어졌다.


*


퉁.


화살을 날린다. 그건 지루한 반복 작업이었지만 제냐로서는 아주 익숙하다.


모습을 감추고 거대한 나무 위에 숨어 저격을 하는 일은 제법 재미있기까지 했다. 보고 있기에 지루한 것이지, 사냥의 상황, 조건 따위에 따라서 만 가지로 변하는 사격이었으니 제냐 그 자신은 즐거웠다.


어둠숲에 서식하고 있는 그리즐리 베어의 목이 저 멀리서 꿰이는 것을 본다. 확장된 시야, 감지술 스킬의 효과로 보고 있는 분활 화면에서 거대한 곰이 드러눕는 것이 보인다. 회색의, 일반적인 곰보다 두 세 배는 커 보이는 덩치의 괴물이 쓰러져 죽기까지 몇 발의 화살이 필요했다.


어둠숲의 괴물 곰은 깨나 강했고, 대형종 몬스터답게 터프한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파워샷 스킬로 이미 치명상을 입혀둔 뒤 마지막으로 노린 것이 목덜미였다.


근처에 다가올만한 다른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제냐가 나무 아래로 훅 몸을 던졌다. 그대로 수직으로 떨어진다. 중간 즈음에 왔을 때 몸을 빙글 돌리며 신발이 나무의 몸통에 닿게끔 했다. 그대로 얼굴과 배가 지면과 닿을 자세로 떨어지려다가, 신발이 나무 껍질에 닿자 훅, 하고 멈추어섰다.


수직 보행 스킬이었다. 기력술은 순간적으로 강한 접착력을 발휘했다. 물론, 어지간한 근육과 운동 신경이 없으면 멈춰서는 순간 그대로 몸이 꺾이듯 접혀 지면이 아닌 나무에 코를 처박을 수도 있었다. 접지력이 발생해 멈춤과 동시에 버티어 서는 중심 근육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 번 멈춰 서고, 제냐는 마치 지면을 뛰듯 훌쩍 몇 걸음 뛰어서 바닥 근처에 닿았다.


2, 3m즈음 남은 시점에서는 나무에서 발을 떼고 가뿐하게 몸을 돌려 내려앉았다. 탁, 하는 착지음과 함께 흙바닥의 감촉을 느낀다. 곧바로 달리기 선수라도 된마냥 일어서면서 동시에 대시Dash한다. 땅바닥을 박차는 각력이 예사롭지 않고, 묵직한 몸을 그대로 밀어내면서 단박에 수 미터씩 쑥숙 전진한다.


충분한 가속력을 얻은 맹수가 질주를 하듯이 날듯 뛰어 저 멀리, 그리즐리 베어가 쓰러졌던 자리에 도착했다. 제냐는 이미 반쯤 사라지고 있는 곰의 시신을 발견했다. 빛으로 휩싸이면서 천천히 흩어진다. 몬스터들의 마지막은 이렇다. 플레이어들이 죽였을 때 유난히 빨리 사라진다. NPC들만이 있는 장소에서는 평범하게 썩어 들어가는 과정이 발생하고.


사라진 곰의 시신 근처에는 절그럭, 거리는 철시들이 나뒹굴었다. 서너발 정도를 쏘았고, 제냐는 그것을 그대로 전통에 챙겼다. 활은 인벤토리에 이미 다시 넣은 상태였다. 아이템 박스가 하나 나와 건드리자, ‘웅담’이 나왔다. 웅담을 귀한 소재로 취급하는 문화는 어디로부터일까. 동양권 전체인지, 혹은 우리나라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개발자들은 그 핵심 인력들이 한국의 과학자, 개발자들인 걸로 알고 있다.

이런 데서 그 모습이 엿보일지 모른다.


철시와 웅담을 챙기고서 다시금 어둠숲의 나무 사이를 걷는다. 가벼운 몸풀기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검은 비검의 성능도 완벽하게 익혀두어야 했고. 제냐는 지금 단테스 상점에서 얻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어둠숲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닐 때 쓸만했다. 어두워보이는 분위기의 시야가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려보아도 이어지는 장소다.

망토의 후드까지 덮어쓰고 은엄폐 기술을 사용하며 걸으면 시야로 멀리 있는 자가 그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진다. 짐승들이야 바람에 따라 냄새 따위로 미리 알아보기도 하지만.


그 역시 기력 감지술을 써서 여러 짐승들을 먼저 알아채고 있는 상황이었고.

제냐는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


최태현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 집에 들어왔다. 잔업이 많은 때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비 기사, 설치 기사 쪽의 일이었다. 주로 그의 회사에서 가상 현실 게임 기계와 관련된 장비들을 다루고 있었고, 최태현은 외부 사의 기계를 고객 집에 설치해주거나, 보수해주는 일을 한다. 그게 주 업무는 아니었고, 보통은 기업 따위에 구비되어 있는 다양한 시뮬레이션 기계들을 유지보수 하는 것이었지만.

이따금씩 관련 기계의 정비 기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어서 가정집도 많이 방문을 한다.


기계를 다루는 일이고, 고객을 상대하는 것이다보니 그의 회사 쪽에서, 최태현의 이름으로 설치를 해둔 것들에 오류가 생기면 일이 늘어난다.

그 외에도 정기적인 업데이트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도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었고. 자체적으로 장비를 설계하고 생산하는 회사는 아니라서 여러 업체와 제휴를 맺고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영업과 설치, 정비, 보수 모두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기계의 라인업이 뜬다거나 하면 일이 조금 바빠질 때가 있었다.


늘 외근에 외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설치된 기계를 만지거나 혹은 제휴사의 생산 설비를 둘러보고 의견을 나누거나 하는 나날들이었다.


거기에 잔업이 몰릴 때도 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바쁜 때가 지나가고 있었고, 고로 비련의 시나리오를 할 짬도 나고 있다.


그는 강원도 원주 시 외곽 지역에 살고 있었고, 서울과 가까운 곳이었다. 이전에 도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면 상당한 거리였겠지만, 서울 시내 쪽으로 통근을 하는데 2, 30여 분 정도면 충분했다. 편도로.

고속 부상 열차가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공중차 종류의 탈것을 타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보통은 자기 부상 열차를 타고 서울 시내로 출근한 뒤 시내에서 짧은 도보를 걷거나 대여 바이크 따위를 이용한다.


외근이 있을 때는 회사 명의의 차를 사용해 다니는 편이었고. 자가용이 오피스텔 주차장에 있기는 하지만, 휴일 등에 어딘가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려고 쓰는 편이지 평소에는 모셔두고만 있었다.

지방에 부모님 댁에 들른다고 하더라도, 발달된 기차 등 교통망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고 또 빨랐다.

기차역 등에는 1, 2인용의 대여 바이크가 언제나 구비되어 있었고, 안전 장비를 잘 착용하고 약속 장소까지 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여 바이크, 차, 뭐 그런 종류의 물건들은 시간 단위 대여도 가능하고 일 단위 대여도 가능했다.


볼 일이 길어질땐 며칠 정도 단위로 사용해도 좋다. 보통은 태양열, 전기, 화석 연료 모두로 충전이 가능하며 대여 시간이 종료될 때 즈음 자동 운행으로 설정한 뒤 대여 서비스를 종료하면 알아서 탈것은 대여소까지 운행해서 돌아간다.


아직까지 교통 서비스와 완전 자율화는 지양하는 사회 분위기이기에, 기계만으로 장거리 운행을 시도하는 곳이 많지는 않다. 대여 서비스를 마친 탈 것들도 가장 근처의 대여소로 자동 복귀하게 되어있고, 정리가 필요할 땐 사람이 선도 차량으로 자율 주행 바이크 따위를 몰며 긴 길을 따라간다.


자율 주행 기술 자체는 완벽하게 상용화된 지가 한참이었으나, 아직까지 AI의 안전 점검 기능과 사람이 육안으로 보는 것은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 공기관 따위에서는 늘 물류 유통 따위의 업무를 볼 때 기사를 차량 내부에 배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민간 기업 등에서는 알게 모르게, 그냥 차량과 물건만 확인하고 지방에서 지방으로 운행을 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당장 최태현 역시 업계에서 일을 하며 그런 경우를 자주 보기는 하고.

만일 사고가 났을 때 따로 운전자가 없는 차량임이 밝혀지만 과실이 조금 더 크게 책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며 데이터 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되어있기에 민간에서는 미리 주행의 완전 자율화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었고.


최태현도 가끔 직접 수동 조작을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자율 주행에 맡기고 그저 주변 상황만 살피면서 앉아 있는 경우가 잦았다. 장거리 운행 시에는 상당한 장점이었다.


어쨌든 그는, 그 날 하루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업무를 마치고 자신의 집에 돌아왔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를 해 둔 쓰리 룸의 집이었고, 본인의 취향에 맞춘 밝은 분위기의 인테리어였다.


집에 돌아오면 그를 반기는 여러 장치들이 있다. 그의 집만 그런 건 아니고, 보통 현대식 오피스텔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개 그러하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윙윙대며 돌아가던 청소기가 멈춘다. 주인이 없을 때 바닥 청소를 하도록 설정해둔 것이라 그렇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늦은 저녁을 적당히 챙겨 먹고. 요리를 해서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최태현은. 아무래도 직접 손을 쓰면서 자기 입맛을 챙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런 식으로 손재주를 키워볼 수도 있었고.

삶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좋은 취미였다, 요리와 식도락은.


몇 가지 집안일, 물건 정리 따위를 하고 식사 후의 정리까지 마친 그는 자연스럽게 시뮬레이션 기계를 꺼냈다. 그의 침실, 침대 아래 쪽에 들어 있는 수납 공간이 있다. 버튼을 누르면 달칵, 하고 튀어 나오는 손잡이를 쑥 잡아 빼면 그대로 간이 침대가 하나 더 생기는데, 거기에 비련의 시나리오 시뮬레이터를 달아두었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구동에 필요한 컴퓨터까지 같이 들어있는 일체형, 침대형 기기였다. 본인이 직접 제조사에 연락을 해서 스펙을 맞추고 내장까지 손을 본 물건이다. 벨벳의 감촉으로 되어 있는 내부였고, 편안하게 누워있기 좋다. 오래 누워 있어도 등이 잘 배기지 않는 듯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침대 내부에 누워, 고글이 붙은 헬멧을 쓴다. 단말기였고, 전선들이 뒤로 연결되어 있어 내부 컴퓨터의 복잡한 소프트 웨어들을 실행시켜주고, 사용자에게 색다른 감각을 선사한다.


최태현은 몇 번 뒤척이면서 오래도록 누워있기 좋은 적당한 자세를 찾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소프트웨어가 가동되며 그의 정신이 통째로 게임 내부의 가상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우우웅,


하는 실내 가전 제품의 구동 소리만이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울렸다. 이따금씩, 아무리 기술력이 발달해도 저런 소리는 들리곤 했다. 기계의 오작동이나 뭐 그런 걸 체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라도 한 지 말이다.


*


[요, 잘 하고 있습니까.]


최태현은 텍스트 메세지를 띄우면서 제냐에게 말을 보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게임 내에서 그가 있는 곳은 중부 대륙, 산슈카 왕국, 개중에서 왕도 사르삿의 어느 허름한 여관이었다.


이런저런 퀘스트들을 연달아 깨면서 얻은 다양한 물질적 보상을 돈으로 바꾸었으니, 사실 고급스런 호텔에서 투숙을 해도 좋았지만. 굳이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하는 건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게 비록 게임 속이라 할 지라도, 그냥 습관이어서 그렇다.


어차피 눈을 붙이고 로그 오프를 할 때 침소의 컨디션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어지니 말이다. 사르삿은 치안이 좋은 곳이었고, 여관 방에 들어와 쉴 때 그다지 안위를 신경써야 하는 일이 없으니 그걸로 족하다.

또 사르삿 동부 외곽지에 있는 작은 여관이었으나, 주인장의 요리 솜씨가 제법 마음에 들어 계속 묵고 있었다. 장기 투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여관의 같은 단골들이나, 혹은 주인장과 면이 트이게 된다.


점차 콘란드 대륙에서의 삶에 녹아들면서 다양한 NPC와의 관계를 체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얼마나 정교하게 AI가 구현되어 있는지 느끼는 재미도 있었고, 이 게임은 꼭 알 수 없는 지점에서 특이하게 퀘스트를 건네주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걸 기대하는 맛도 있었다.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기에 게임 속의 시계가 점심이 지난 애매한 오후 무렵을 가리키고 있었다. 허름한 여관방의 2층에서 1층 식당으로, 걸어 내려간다.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보이는 곳에 없는 것이다. 카운터는 휑하게 비어 있었고, 식당을 이용하는 고객도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새로운 손님도 없다.

그러나 카운터 옆의 직원 통로로 향하는 문 근처에 귀를 기울이면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집중하고 있으면 이따금씩 쨍그랑, 하는 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안쪽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있다가 찾아올 저녁 장사의 밑준비도 하고, 점심 장사를 끝마쳤으니 직원 식단도 만들고, 또 여관에 묵고 있는 이들이 주문을 하면 그 요리도 조금 하고.


최태현은 허름한 나무문 근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주인장의 목소리가 그의 예민한 청각에 들리자 퉁퉁, 나무문을 거칠게 노크했다. 그 소리가 주방까지 간신히 닿은 모양이었다.

“뭐야!”

새된 고성이 들렸다. 주인장, 아크론의 목소리다. 50대의 아저씨였고, 결혼도 하지 않은 양반이 몇 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여관을 이끌고 있었다. 구석탱이에 숨어있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인간이었지만, 요리 솜씨는 참 마음에 든다. 최태현은 나무문 너머 주방 안쪽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쳤다.


“개멋진나 최입니다! 야영용 건식이랑 밀meal 패키지 5인분 씩이요!”


주인장, 아크론은 식당 내부에서 시끄럽게 조리 기구와 불을 다루면서도 최태현의 이야기를 용케 듣는다.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마냥 제대로 내용이 전달된 모양이다. 안쪽에서 그가,


“오케이!”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최태현은 그대로 여관의 1층, 창가 근처 자리에 앉아 발을 쭉 뻗어 테이블 위에 대강 올려놓고, 늘어지게 등받이에 기댄채 천천히 기다렸다.


구두는 실내에 들어올 때마다 매번 닦는다. 로그인을 하고서 나갈 때까지는, 신발 밑창에 별로 더러운 것은 없었다. 물론 이러고 나서 테이블 위를 한 번 더 헝겊으로 닦기도 한다. 뒤로 깎지를 끼며 머리를 받치고, 의자의 중심을 잡으면서 흔들흔들, 거린다.


최태현은 잠시 그렇게 여유를 즐겼다.


*

raphael-maksian-PH5KOS9kUaE-unsplash.jpg


작가의말

최태현이 기다리는 음식입니다. 저런 볶음밥이니, 하는 먹기 간편한 한 그릇짜리 요리를 용기에 포장해서 담아주고는 합니다. 아크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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