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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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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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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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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8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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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104. 리액션

DUMMY

*


퍽.


호아킨은 무언가를 때리고 있었다.


거대한 샌드백같은 것이었다. 그 안에는 철가루들이 잔뜩 들어 있었고, 겉은 질긴 천과 가죽, 그리고 아주 얇은 사슬을 엮은 면을 여러겹 겹쳐서 마감했다. 주먹으로는 보통 때려서 상하게 하는 일이 힘들다. 일반적으로는 주먹이 상하지.

그러나 적당한 글러브를 끼고 호아킨은 계속해서 주먹질을 한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연이어서 두 번의 타격. 퍽, 퍽, 퍼퍽.

가죽으로 만들어진 글러브였다. 손가락이 없고, 펼쳤다가 주먹을 쥐는 것 정도만 가능하다. 꽉 주먹을 쥐고 나면 내부에 솜이나 천, 충격을 완화시키는 그런 재질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주먹의 크기가 몇 배로 불어난다. 짙은 갈색에 굵은 실로 마감을 한 장갑이었다. 그것으로 검은 색의 샌드백을 계속해서 때린다. 야외 테라스나 비슷한 공간에서였다.


그가 머무르고 있는 건물의 1층 홀 바깥 부분이었고, 위로 천장이 있고 야외와 맞닿아 있지만 바닥은 질좋은 암석을 타일로 만들어 깔아두었다. 전등이 있으나 지금은 켜지 않아 조금 어둡고 그늘이 져있다.

햇볕이 쬐고 있는 바깥이라 아주 캄캄하지는 않다. 그런 그늘 한구석, 천장에 샌드백처럼 생긴 타격 도구를 두고 호아킨은 혼자 계속 춤을 춘다. 쾅, 퍽. 혹은 퍼퍽. 다양한 박자로 끊어서 가격했고, 그러면서 신체적 밸런스를 잡고 있다. 어느 정도 운동도 된다. 지금 호아킨은 몇 종류의 트레이닝 도구를 끼고 있었으니까.


‘둔광석’이라 불리는 철은, 아주 튼튼하고 더럽게 무거운 광물이었다. 이것으로 칼 따위를 만들었다간 제대로 다루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무게에 비례할만큼 튼튼한 것도 아니라서, 그리 유용한 광물은 아니었다.

다만 무게추로써의 기능은 쓸만했고, 아주 못써먹게 약한 광물도 아니었기에 여러 종류의 산업 현장이나 특수한 기기를 만들 때는 사용되곤 한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고. 호아킨은 거구의 몸에 둔광석으로 만든 조끼를 걸치고, 완갑, 각반 따위를 찬 뒤에 움직이는 중이다. 평소에 맨 몸을 드러낸 뒤에 가죽 갑옷 하나만 대강 걸치고 다니는 모습이었으니, 연습 중인 지금이 차라리 더 잘 껴입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시커먼 색깔에,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둔석 갑옷이 시끄럽게 소음을 냈다.

그러나 그런 소음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팡, 팡, 거리면서 철가루로 속이 채워진 샌드백을 계속해서 때려댄다.


한 번 집중을 하면 끝을 보는 게 편하다. 호아킨은 그런 편이었다. 무게로 따진다면 톤 단위의 물건을 몸에 지고서, 호아킨은 계속 팔을 뻗고 몸을 움직였다. 둔석 또한 밀도가 높고 무거우나 한계가 있어 부피 역시 어지간히 커진 상태였다. 두께가 10여 cm는 되는 갑옷들을 차고 호아킨이 춤을 춘다.

멀리서 보면 다소 우스꽝스럽게도 보이지만, 샌드백에서 나는 타격음을 듣다 보면 왠지 웃음이 사그라드는 꼴이었다. 저벅거리면서, 그 광경을 보고 다가오는 한 명이 있었다. 가죽 신발의 밑창이 암석 타일에 닿아 또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천천히 다가온 그녀는 호아킨에게 소리를 쳤다.


“호아킨!”


붉은 머리를 찰랑거리는 그녀다. 일반적인 성인 여성, 특히 백인 여성 중에서는 체구가 조금 작은 편이다. 인형처럼도 보이는 외모였지만 그런 아름다운 미모가 살면서 그녀에게 늘 도움이 되지만은 않았다.

쓸데없이 아름다운 미모는, 그것만을 보고 달려드는 벌들을 만들어낸다. 벌이 늘 꽃에게 이롭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자연계의 벌 말고. 침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못난 남자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녀가 어딘지 심통맞은 표정을 자주 하며, 툭툭 쏘아대는 말투의 성격이 된 건 그런 후천적인 영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릿샤 에드윈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본 호아킨의 생각으로는, 후천적인 것만큼이나 선천적인 부분도 큰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녀가 새된 고성으로 호아킨의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다가와서 소리를 치는데도 듣지 못하자, 다시 한 번 그녀가 소리를 높였다. “호아킨!”


이번에는 MP를 다루기까지 했다. 그의 귀가 멀었어도, MP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까지 멀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력술사던 초상술사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계속해서 훈련을 하다보면, 오래 자석에 붙어 있던 것에 자성이 생겨나듯 기본적으로 기력에 관한 감각이 활성화되고 늘 미약한 기력이 체내외에 흐르게 된다. 기력술사라면 기력이 그럴 것이고, 초상술사의 부류라면 MP가 그럴 것이다.


그녀가 소리를 치면서 MP를 움직이자, 무엇 때문에 알아들은 건지는 몰라도 호아킨이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실내 쪽, 왼편으로 고개와 몸을 돌리니 릿샤가 몇 발짝 뒤에 서 있었다. “오.”하고,


호아킨은 감탄사로 반가움을 표시하며 슬쩍 팔을 들어올려 보였다. 생각보다 아주 무거웠다. 이미 한참동안 이 짓을 반복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상완과 하박, 팔꿈치만 빼고 두터운 가죽 아대로 감싸여 있다. 한 팔에만 거진 수백 킬로그램의 무게였다. 입은 것을 다 합치면 1. 몇 톤일 것이다. 세세하게 세면서 다는 편은 아니었다. 수치보다도 체감이 정확하니까. 자신의 훈련 페이스에 따라서 더 큰 부하가 필요하다 싶으면 추가하는 식이다.

나중에, 그러니까 레벨이 100이 한참 넘고 고수급에서도 중견이 되다보면 이런 식의 물리적인 하중 훈련은 더 이상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둔석보다도 더 무겁고 부피가 작은 물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건 훈련용으로 대량을 구하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비싸고.

그럴 바에는 초상술사나 스킬 페이지, 혹은 한 가지 용도로 만들어진 저품질의 아티팩트를 구해서 ‘둔화’나 ‘증량’같은 디버프 스킬을 이용하는 편이 차라리 나아진다. 물론, 둔석 따위의 기구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스킬을 거는 것이다.

이런 류의 디버프 스킬들은 배수로 들어가게 되어 있으니. 애초에 걸리기 시작하는 지점의 무게가 더 늘어난다면 낮은 수준의 스킬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2, 4, 8, 16, 그리고 32. 각각 스텟이 10단위로 성장할 때마다 플레이어가 얻게되는 힘의 증가치이다. 아주 건장한, 운동을 깨나 한 장정의 힘과 최상급의 건강함을 유지한 신체 능력을 기준으로 삼아서 20이 되면 2배가 되고, 30이 되면 4배가 된다. 10배 아래까지는 그래도 희미하게 인간의 범주 어딘가에 들어갈 법도 했지만, 스텟이 50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슬슬 히어로 무비에 나오는 초인들과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저히 인간같지 않은 힘들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호아킨의 스텟은 모두 40대 후반이다. 가장 높은 근력 수치는 49.99를 찍고 있었고. 거의 50이라고 봐도 좋은 수치였다. 낮은 것들도 크게 낮지 않았고, 고루 균형 잡힌 스텟으로 곧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기에 좋은 모습이었다.

그는 단순한 근력 전사가 아니라, 변신술을 활용하는 초상술 계열의 멀티 클래스 플레이어라 그렇다. 동 레벨의 다른 이들에 비해서도, 정신력 계열 스텟이 조금 높은 편이었다. 그와 비슷한 위치를 파티에서 맡는 다른 전사들은 보통 그보다는 정신력 스텟들에 소홀한 게 보통이다.


릿샤는 정신력, 집중력, 초월방어력이 모두 50을 넘었다. 호아킨보다도 성장세가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물리적 스텟까지 합친다면 평균이 호아킨보다 낮기야 했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그녀의 성장세는, 단순한 트레이닝 이상의 경험을 이유로 들 수 있었다.

릿샤 에드윈, 그녀는 현실에서도 뛰어난 정신력과 집중력을 발휘하는 여성이었으니까. 현실의 피지컬이 전기 신호로 바뀌어 시스템 내에서도 영향을 발휘하는 정밀한 게임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현실의 기술은 분명히 도움이 되었고, 그건 그녀가 초상 스킬들을 사용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신적인 뇌파의 수치들도 어느 정도 피지컬처럼 유형화해서 분류하고, 또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현대 의학과 정밀 기기들이 발전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시대이기도 했고. 정밀 검사를 해본 적은 없었지만, 살아오면서 받았던 몇 종의 약식 검사에서도 그녀는 늘 지능적, 정신력적으로 상위 10퍼센트 바깥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릿샤가 호아킨을 보고, 뚱하니 표정을 짓는다.

호아킨은 그 모습을 보고 또 뭐가 문제냐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차오른 숨 때문에 그냥 넘어간 듯도 하다. 로그인을 한 뒤로 잠깐 캐릭터를 체크한 뒤 계속 이 짓만 반복하고 있던 탓이다. 휴식도 없이 두어 시간 계속해서 움직이며 샌드백을 쳤다. 가죽 글러브를 끼고 쳤다고 하지만, 호아킨의 강격에도 용케 버티어 낸 샌드백이었다. 천장에 공업용의 거대한 쇠못으로 끼워 넣은 물건이었다.


이 세계, 콘란드의 현대는 정치나 문화, 사회 경제같은 부분은 중세의 그것을 따르고 있고 또 골자가 거기에서 기인하지만 이따금씩 현실의 르네상스 시기나 혹은 근대와 같은 산물들이 부분부분 있기도 했다. 아마 ‘초상력’과 그것을 이용한 다양한 공학에서 오는 차이일 테였다.

웃기거나, 혹은 아이러니한 부분은 현대에 와서 그런 초상력학과 초상공학들이 많이 발전했고 또 집대성된 것이 사실이지만 고대에 부흥했던 여러 문명들의 흔적은 현대에 와서도 제대로 해석이 안되고 구현이 불가능한 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올곧이 발전일로만 걸은 것이 아니라, 문명과 기술력이 이따금씩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역사가 이어져왔음을 뜻했다.


결국 그건 ‘기술력’이라는 게 바르게 대륙 전체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소수의 것으로 독점되었다가 고립된 문명이 멸망하면서 유실되었다는 뜻이다.

이전의 세계에서는 훨씬 더 전쟁이 잦았고, 또 거대했다고 한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의 사회이니 야만적인 도덕률과 사회상을 갖고 있었을 테고, 그런 상황에서 과학력을 대신할 초상력이 있었으니 얼마나 빈번하게 거대한 파괴가 일어났겠는가.

역사서로도 다 적지 못한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을 테였고, 그 지난 아픔들이 희미해져갈 시기 즈음이 다시 지금이었다.


군데군데 빈 곳이 있었지만 콘란드 대륙 곳곳에 자생하며 명맥을 이어 온 단체들의 역사는 아주 깊고 오래된 것들이다. 수 천 년동안 이름을 보존한 것들이, 현실의 지구에는 몇 종 없지만 여기에는 훨씬 많다. 당장 그들에게 익숙한 ‘산슈카’국 또한 그런 이름 중에 하나였고.


그들은 사르삿에서 다소 떨어진 지역에 있었다. 세슈칸에서 데슈칸 산맥으로 이동을 하고, 다시 반대편으로 넘어가 가다 보면 나오는 도시였다. 도시의 이름은 ‘레드밀’. 그럭저럭 지내기 괜찮은 곳이었다. NPC들의 인심이나 분위기, 치안도 좋았고. 큰 사건은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세슈칸에서처럼 운트 작힘 백작과 같은 괴팍한 인사가 있어서 다짜고짜 연계 퀘스트에 휘말릴만한 건수도 별로 없다.

플레이어로서는, 그리 좋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 그들은 안정과 평안을 원했다. 그들이 해야할 건 준비였으니까. 하나의 퀘스트 진행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에 다른 것을 시작해버리면 죽도 밥도 안될 수가 있었다.

릿샤와 호아킨도 이곳에서 지내며 훈련과 연습, 개인 기량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일들을 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행동 양태는 대강 비슷하다. 어차피 비슷한 시대감을 가진 나라에서, 모험가니 용병이니 하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자들이니까. 전투 클래스를 갖고 있는 이들이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전투를 해야 한다.

필드에 나가 거대한 괴물들과 싸우고, 대련 연습 따위로 실전 감각을 더욱 더 곤두세운다. 릿샤와 호아킨은 그런 점에서 서로 좋은 파트너였다.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노련한 솜씨와 실전 감각을 갖고 있는 전투 클래스 플레이어들이었고, 서로에게 대중없이 전투력을 보여도 쉽게 게임 오버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지간한 자들에게 대련을 요청했다가, 삐끗해서 지나친 공격을 한다면 연습 중에 게임 오버라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들보다 강한 플레이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호아킨과 릿샤가 서 있는 지점은 고수와 아닌 자들을 구분하는 그 즈음이었다. 둘의 레벨은 어느새 모두 92와 89다. 릿샤가 호아킨을 앞서고 있었고, 호아킨이 다소 늦다.

그러나 보여지는 레벨과 스텟, 또 실제 전투력이 늘 같은 것은 아니기에 큰 의미가 없는 수치였다. 상대의 능력을 가늠할 길이 없는 상태에서, 전투력이 대략적이나마 지표가 되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NPC들의 강함을 표현하는 척도로 ‘레벨’을 적당히 쓰고 있기도 했고.


평균적으로 그 레벨 대의 전투 클래스 유저들이 갖는 강함을 의미하는 척도였다.


둘은 제법 규모가 큰 숙소를 장기 임대해서 쓰고 있었다. 그들 말고도 투숙객은 있었으나, 그리 많지 않다. 6층 정도 되는 거대한 석조 건물이었는데, 나름대로 돈 좀 있는 자들을 위해서 지어진 휴양 시설이었다.

레드밀은 부호들이 휴가 때 가끔 들르기도 하는 곳이었다. 도시 내의 풍광이 좋았고,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주 아름다운 호수와 야트막한 언덕 따위가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물론 전투직 플레이어들이 만족할만한 사냥 필드 역시 다른 방면에는 존재했지만.


넓은 숙소 내부에 여러 고용인들과, 몇몇 NPC들. 그리고 데면데면하게 가끔 마주치는 플레이어들. 그들 속에서 릿샤와 호아킨이 지내고 있다. 플레이 타임이 길어지고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 마치 정말 휴양지 호텔에 온 것마냥 호텔 조리사가 만들어낸 음식들로 식사를 하며 시간을 떼우기도 한다.

마침 일 때문에 이렇다 할 휴가도 가지 못한 둘이라, 게임 내에서 유사한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게 좋기도 하고, 어떤 면으론 씁쓸하기도 한 현실이었다.

릿샤는 몇 개의 연구 프로젝트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었고, 자문이나 보조 연구원 정도로 들어가 있는 것이라 아주 힘들지는 않았지만 또 시간이 마냥 많이 남지도 않았다.

호아킨은 늘 평이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고.


같이 시간을 맞춰 들어올 때도 있고, 아닐 때는 각자 알아서 스펙업을 위해 퀘스트를 발굴하거나, 사냥을 하거나, 한다.


지금은 마침 시간이 서로 맞아 함께 들어온 때였다.


“텍스트 메세지 봤어?”

“아.”


호아킨은 그제서야 인터페이스를 조작했다. 오른쪽 엄지로 자신의 왼쪽 눈썹을 꾸욱 눌렀다. 1, 2초 정도 그러자 그의 눈 앞에 불투명한 푸른 창이 떠올랐다. 텍스트 메세지. 아는 유저, 지인, 친구의 메세지를 수신하고 또 회신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한 번에 문자 수의 제한이 있었고, 연속해서 보낼 수 없다. 한 번 보내고 나면 회신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여러 명과 연락을 할 수는 있었다.


호아킨은 눈 앞의 문자 수신함에 텍스트 메세지가 와 있는 것을 알았다. 알림은 들은 것 같긴 한데, 훈련에 몰두하느라 깜빡하고 넘어갔다. 시선을 집중해 초점을 맞추자 해당칸이 불룩하니 튀어나왔고, 거기서 한 번 깜빡거리자 클릭으로 간주하며 텍스트 내용이 떴다.


[안녕하십니까······]


단출한 인삿말로 시작한 것은 개멋진나 최, 라는 웃기는 닉네임의 유저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었다. 정리하건데, 이전에 함께 진행했던 연계 퀘스트의 키 플레이어인 제냐가 습격을 당했다는 말이다. 습격자, 암살자들의 정체는 불명이나 NPC기사로 추정되는 이들과, 플레이어 암살자로 추정되는 이가 함께 공격했다고 한다.

사르삿에서 쭉 머물고 있는 제냐였고, 그간 느낌이 쎄하기는 했지만 넘어갔었는데, 기어코 여러 명이 합심을 해서 덤벼들었다고.

결국 제냐가 더 강했고, 전투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던 차였기에 살아남기는 했지만 고전했다는 내용이다. NPC기사, 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단원일 확률이 높았다.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의 전투법을 구사한다면 제대로 훈련과 교육을 받으면서 오랜 시간 실력을 다졌을 확률이 높으니까.


그리고 이 시대, 세계에서 그만한 단체를 떠올리라면 아무래도 개개의 귀족 가문들이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그들의 사병은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거나 혹은 않는 병력들이었고, 중앙의 눈을 피해 기사단을 신설하고 자기 마음대로 유용하고자 해도 중앙 정부에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말이다.


일정 작위 이상의 거대 영지를 가진 귀족들은 자신들 소유의 기사단이나 사병들을 국가 안위를 위해서 지원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평시에 반란이나 국가 내외적인 재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국가의 상비군은 직접적으로 왕가에 종속된 이들과, 또 그렇게 각지에서 모인 병력들을 아무렇게나 혼합시켜서 만들고 또 유지된다.

각 가문에서 온 이들은 귀족가의 이름 아래 단합되지 못하도록 모두 다른 곳에서 생활을 하게끔 주둔지를 섞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치를 채운 고위 귀족 중에서 추가로 기사단이나 사병대를 증설한다고 해도 막을만한 법적 근거는 달리 없었고, 중앙 정부에 대한 위협이 느껴질 경우에 은근한 압박이 가해지는 정도였다.


만일 그것에서도 자유로운 특수한 상황의 고위 권력자, 뭐 그런 일종이라면 기사단을 암살자로 사용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운트 작힘 백작은 특수한 경우였다. 대영지를 소유한 백작이라면 분명 자기 소유의 사병이나 기사, 특수 전력들을 중앙에 차출당해야 하지만 세슈칸이라는 거대 자유 도시의 안정을 위해서 해당 영지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 받은 것이었으니.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운트 작힘 백작은 따로 몰래 기사단을 하나 창설해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운용했으리라.


산슈카의 중앙 정부는 절대적이진 않지만 어느 정도의 통솔력은 갖고 있었다. 그 내부에도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 있기는 하다만.


“······.”


호아킨은 내용을 쭉 살펴보곤 창을 닫았다. 켤 때와 똑같은 제스쳐 인터페이스를 이용해도 되고, 혹은 네모난 칸의 모서리 즈음을 바라보면 튀어나오는 X표를 이용해도 좋다.


“알 수 없음, 이라는 군.”

“그래도 기사처럼 보이는 이들이 습격했다는데. 아무래도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낫지. 사르삿으로 이동해야 할까?”


릿샤가 말을 받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참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말을 언제나 툭툭, 내뱉는 그녀다.

둘 모두 로멜리아 가의 퀘스트에 얽혀 있는 처지였다. 그들에게도 퀘스트 목록에 관련한 이름이 떠 있었다. 키 플레이어가 아니었기에, 제냐와는 이름이 다르다거나 내용이 다르다거나, 혹은 관련한 진행 사항을 늦게 확인하게 될 수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유니크 급의 연계 퀘스트는 이 시나리오 온라인을 플레이하고 클리어하기 위해서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다. 결국 시나리오라는 이름처럼, 정밀한 NPC AI와 맞닥뜨리고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면서 각자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이 게임의 의의였으니까.

이렇듯 자연스럽게 세계관 내의 이야기에 스며들면서, 왕국 따위의 단체에서 눈도장을 찍기도 하고 명예 점수가 높아지고, 여러 보상들을 받으면서 콘란드 세계의 핵심으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수 억 명의 플레이어들이 각기 경쟁을 하듯 퀘스트를 깨나가다 보면, 조금 더 좁고 높은 자리에서 특이한 플레이들을 해 온 서로들을 만날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


릿샤와 호아킨은 일단 퀘스트를 완료하고싶어 한다. 유니크 퀘스트는 적당한 우연과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시작하기조차 어려운 게 사실이었으니까. 마을급 퀘스트라고는 하지만 연계 퀘스트였고, 퀘스트 씬Scene이 점차 진행되면서 일이 커지다보면 퀘스트 규모 역시 높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한 왕국의 도시, 그 도시에 속한 어느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종래에는 왕국의 핵심층들과도 엮이는 서사시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릿샤와 호아킨 모두 나름대로 승부욕이 있는 자들이었고,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 클리어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나리오 온라인에는 새로운 유저들이 계속해서 등록을 하고 있었고, 또 많은 수가 게임 오버가 되기도 한다.


그들 중에서 누가 클리어의 영광을 차지할 것인가, 의 문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이들 중 가장 먼저 게임을 시작한 그룹이 그럴지도 모르고, 혹은 이제 막 참여를 한 비기너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서바이벌 게임에, 우리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듯 다양한 상황을 제공하는 게임이었으니.

고로, 릿샤와 호아킨이 가장 먼저 시작한 자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클리어에 대한 가능성은 있었다. 이왕이면 시작한 게임에서 끝을 보고싶어 하는 성격들이었으므로, 둘은 제냐가 물어왔으며 그들이 엮인 퀘스트에 열성적이었다.


“글쎄. 그래야 할 지도. 일단 제냐와 개멋진나에게 한 번 물어보고.”


‘개멋진나’는 호아킨과 릿샤에게는 Super awesome me, 라는 식으로 번역이 되고 있었다. 읽을 때마다 헛웃음이 나는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얼굴을 마주보고 그 이름을 거론하면서 대화를 하기가 힘들었다.


“자세한 상황 말야?”

“음. 그게 좋겠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아마 제냐가 가장 먼저 알 테고, 가장 확실하게 알겠지. 사르삿이라··· 준비는 하고 기다리는 게 좋겠지.”

“그래··· 그러자고. 일단 받아놓은 퀘스트들은 마저 하고, 그럼.”

“그럼.”


호아킨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릿샤는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턱 근처를 툭툭, 쳤다. 생각을 할 때 그런 식으로 손 끝으로 어딘가를 건드리는 습관이 있었다. 신체 감각을 일깨우면 생각의 막힌 부분이 조금 뚫리는 기분 때문이었다.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그렇다.


둘 역시 이전보다 강해졌다. 그러나 로멜리아 가와 관련된 적들을 상대할 때, 여유가 많지도 않았다. 앞으로 상대해야 하는 퀘스트 상의 적군들이 훨씬 강력한 이들이라면 대비를 조금 더 한다고 나쁠 게 없으리라.

퀘스트는 대부분 근처에 있는 사냥 필드로 가서 괴수들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희소한 소재를 몸에 품고 있는 괴물, 혹은 어느 사연 있는 의뢰인에게 피해를 준 괴물 따위를 죽이는 일이다.

릿샤와 호아킨에게는 아주 쉽고, 또 익숙한 일들이다.

금방 채비를 갖추고 퀘스트를 위해 사냥터로 떠나기로 한 둘이다. 호아킨은 아쉽다는 듯 철가루가 담긴 특제의 샌드백을 퍼펑, 하고 쳐대고는 가죽 글로브를 벗었다. 끼고 있는 둔석의 무게추들도 빼내야 한다.


릿샤는 사냥터로 떠날 준비를 위해 다시 방으로 일단 돌아갔다.


*


톡톡.


나뭇결이 살아있는 책상을 두드리는, 주름진 손가락이 있었다. 희고 긴 것이었고 그 주인은 팔을 늘어뜨린 채 책상 위에 올리고, 그 몸은 옆으로 빙글 돌린 의자에 깊이 몸을 누인 사내였다.

푸르스름한 곱슬 머리를 늘어뜨린 장년인. 나이답지 않게 심퉁맞은 표정을 짓고 멍하니 천장 즈음을 바라다보는 인간이다.


그는 늘 그렇듯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정보들이 그에게 와서 나열된다. 곳곳에 뿌려둔 정보망이 있었고, 팔과 다리처럼 일하는 수하들은 국내 이곳저곳과 혹은 국외까지도 뻗어나가 그의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온다.

물론 모든 수하들이 명령을 완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고, 알사드 공작, 세르게이 알사드는 나름대로 자비로운 편인 인간이었다. 물론 그의 기준에서였다. 사활이 달린 문제에서 실패했을 때, 한 두 번 정도는 살려주니까.

선악을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 일을 저지르며 사는 인간이라기엔, 나름대로 관대한 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봐준다는 지점에서는.


그러나 세르게이 알사드는 조직의 이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끔찍하게 권태롭게 느끼고 또 싫어하는 이 나라가 그렇게 돌아가듯이, 알사드 공작가와 그 파벌을 이루고 있는 수하들도 한 번의 실패만으로 모두 목을 칠 수는 없었다. 가끔 책임을 져야 할 때들은 있기는 하다만.

그런 식으로 쉽게 처형을 해버리고 나면 아마 나중에는 써먹을 만한 자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모두를 죽여버리고 홀로 남는 삶에 대해서 세르게이 알사드는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몸이 거의 커가던 10대 중후반에 한 번. 그리고 공작위를 물려받아 산슈카의 대공으로서 삶을 시작한 30대 중후반에 한 번. 그리고 근 십 여 년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말이다.


권태롭다.

그것이 그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미 이 국가 안에서 그가 얻을 수 있을만한 것들은 모두 손아귀에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과 타협점 사이에서 늘 방황한다. 삶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허무주의에 휩싸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물리적 육신의 생명을 이어나가야지 않는가, 하는 본능을 긍정하기도 한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었고, 선善함을 부르짖는 자들조차 따분하게 느끼고 있었다. 세르게이는 타인을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에 무관심하지만, 그보다도 조금 더.


그저 어릴 적부터 교육받은 탁월한 지도와 훈련, 주입된 정보로 그렇게 굴어선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산슈카라는 왕국의 운명이 그려진다. 그가 대공이었다. 그러니까, 알사드 공작가라는 대가문의 가주이자 영지의 영주요, 대문관을 겸임하고 있는 인물이 세르게이 알사드 본인이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산슈카의 희망찬 장래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간이다. 정의나, 법적 사회적 행정적 절차와 그 운영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는다.

이런 인간이 가장 위에 서 있다는 걸 감안해 볼 때, 산슈카 왕국의 미래가 보다 손쉽게 그려진다.

그가 느끼고 또 수집한 정보들, 현대의 정세는 다소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나름대로 평화를 유지한 시기가 길었다. 중부 대륙의 자유 연맹은 공고했고, 오랜 세월 적이었던 적국들과도 우호적인 관계성을 확립했다.


초상력학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다. 아직도 다 해석하지 못한 여러 유물과 거대한 건축물들이 산슈카에 남아 있다. 주변국들은, 연맹의 기치 아래서 자신들의 야욕을 감추고 있지만 그것들이 또 그렇게 견고한 제어 장치는 아니었다.

세르게이와 비슷한 정도로, 세상을 단순히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권력자들이 각국에 하나 씩만 있다고 하더라도 거대한 소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충분히.

전쟁을 할만한 여력들은 모든 나라들이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의 삶은 이전 초상력학이 발전했던 시대처럼 일부만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풍요로워지는 길로 발전하고 있었고.


지금은 큰 이변이 없지만, 이 상태로 한 두 세대 정도가 더 지나가면 어떻게 될까. 프린스 알사드, 곧 세르게이는 보다 진보한 정치 체계와 문화, 사회 체제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중세 시대의 감각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아직까지 전쟁은 이 세계에서 실존하는 것이었고, 또 너무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 두 세대 정도가 더 지나서, 풍요로운 시대가 만들어지고, 또 그 과도기를 지나다보면 분명 어느 하나가 들고 일어설 것이다.

야욕을 품은 망아지들이 이 시대와 세계에 아주 많은 것을 세르게이는 안다. 자신또한 분류하자면 그런 자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돈을 원하는 자,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 헛된 명예에 홀린 자, 그리고 세르게이처럼 아무런 열망도 없이 타인의 파멸을 바라보는 자.

제대로 된 사상과 그릇을 쥐지 못한 이들이 높은 자리에 선다면, 곧 시간이 지나 그 실체는 권역 내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드러나고 만다. 썩 좋지 않은 꼴로 드러나게 마련인 실체였다.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


세르게이는 다른 놈들의 꿍꿍이를 잘 안다. 자신 역시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게 익숙한 인간이었으니까. 타인의 안위와 평화에 무감한 자들은 얼마든지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다른 건, 다른 놈들은 명확하게 바라는 이상과 계획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소란을 일으키고, 판을 뒤집어 자신들이 독재자가 되고 권력이나 명예, 돈을 차지하길 원한다. 세르게이는 딱히 그것이 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보다 한 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한 수라고 하기엔··· 따지자면 아무리 빨라도 10, 20년은 뒤에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니 한참이나 빠른 것이긴 하다만.

다른 놈들의 예상을 벗어나고 뒤통수를 치기엔 그 정도가 딱 좋았다.


다른 자들은 기술과 문화, 사회와 경제 체계라는 ‘부富’의 파이가 더 커지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테다. 그 때 차지해야 자신들의 몫에 돌아가는 것이 많겠지.

세르게이는 그것에 딱히 관심 없다. 그저 지루함을 덜어내기 위해서, 역사서에 제멋대로의 필적을 남기고 싶은 것 뿐이었다. 그 지루함이 타인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 단지 최악일 뿐이다.

그런 자가 고국古國 산슈카의 대공 자리에 올라 앉아 있다는 사실또한.


산슈카는 오래된 나라였고, 유서 깊은 집단이었다. 이제는 제국기의 명성이 허울뿐인 역사서 속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타국과의 연결고리 정도는 남아 있었다. 허울만으로도 한 두 번 정도의 이야기 자리는 만들어 볼 수 있는 셈이다.

몰락했으나 그렇기에 산슈카에 남은 제국기의 유물들을 노리는 자들은 조금 더 군침을 흘릴 수도 있을 테고.

세르게이 알사드는 자신이 대공위에 앉은 이후로 십 수년 정도는 들여서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다. 자유 연맹이라는 게 말은 좋지만, 거기에 각국의 강녕함을 전혀 고려치 않는 망나니들이 끼어있다면 악행을 공모하기에는 참 적절한 체제이기도 했고.


산슈카의 주변국, 빈드 왕국과 체키쉬 연합국은 확실히 세르게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놈들이 있었다. 도저히 구제 불능의 머저리들.


톡, 톡.


세르게이는 다시 탁상을 두드렸다. 아침 햇빛이 긴 서재의 창으로부터 그에게 다가왔다. 한가로운 오전이다. 그리 좋지 않은 보고를 받고 난 다음이었지만 말이다.


검은 늑대단의 알렌, 숀, 페이트가 살아 돌아왔다. 거기까진 괜찮았지만, 상대를 죽이지 못하고 살아 돌아왔다. 따로 고용을 했다고 하는 솜씨 좋은 암살가는 현장에서 사망. ‘제냐 킴’이라는 이름이 뇌리 한켠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나이가 어린 용병이자, 모험가였다. 그 신원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으나, 아마 중부 대륙 출생인 것으로 짐작된다. 두각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세 명의 기사단원을 상대로 살아남다니.

거기다 단순히 살아남은 수준이 아니라, 세 명을 거의 반 불구로 만들어놓았다. 한 명은 사지 중 하나가 없어지기도 했고. 가문의 치료사들은 아주 수준이 높았고, 알사드 공작가에서 어지간하면 목숨을 부지해서 돌아온 요원들은 다시금 건강을 되찾는다.

그러나 그 시간동안 쓸만한 병력을 쓰지 못하게 되고, 또 비용이 드는 것이 문제다. 그리 큰 방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간단한 지시로 넘겼던 부분이었는데.


사대고가의 한 축으로서, 세르게이는 분명 다른 고류 가문들이 방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통이라는 건 기억하는 쪽이 없는 게 더 좋았으니까. 이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한 그로서는.

올바른 정신과 명맥이 사라져가고 단순한 이기심과 욕망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돼지나 늑대들이 많아지는 게 일을 벌이기가 좋다.

로멜리아 가문이 사라지는 건 그런 계획의 첫 시작이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어느 초보자가 굴러 들어와서 계속해서 일을 늦추고 있다.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체력과 정기가 멀쩡할 때 모든 일의 결과를 보고 싶은 것이 세르게이의 심산이었다.


거지같은 세상에서, 자신이 죽기 전에 화려한 불꽃을 만들어 다 터뜨려버리고 싶다. 세르게이의 단상을 정리하자면 대강 그 정도가 되리라.

여러가지 인생의 사연이 있었고, 간략하게 말하고 나면 어린아이의 미친 망상처럼 들리는 문장이지만 그 일을 꾸미는 자가 ‘프린스’라는 직함을 가진 그라면 사태의 심각성이 조금 달라진다.

그는 진지하게 허무주의에 빠져 주변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저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니, 자신의 파멸에 주위 모두를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무료한 삶과 어두움 속에서 그나마 빛처럼 보이는 순간은,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때 뿐이었으니까.


세르게이는 다시금 부관을 불러 방에 들였다.


“예, 예.”


어딘지 잔뜩 긴장을 한 듯한 청년 하나가 들어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금발의 청년이었고,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주인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세르게이는 괘념치 않는다. 세 명으로 안된다면 그 이상을 쓰면 될 뿐이다.

다만 조금 더 영리한 놈을 하나 붙여야겠다.

그러고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무시하고 다른 일을 처리한다. 어차피 대사를 치르는 데 주요한 흐름을 미꾸라지 하나가 바꿀 수는 없었다. 청년 하나가 거슬린다고 해도, 고작해야 신원도 불분명한 평민 용병 한 명일 뿐이었으니까.


오전, 이른 아침에 공작의 집무실에 불려 들어와 잔뜩 굳은 채 명령을 받은 청년은 잠시 공작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곤 조심스레 방에서 빠져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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