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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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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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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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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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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03. 마무리, 재회

DUMMY

*


둔탁하게 걸리는 손맛은 호러와 액션 그 사이 어디 즈음이었다. 제냐는 섬뜩한 예기를 품은 단검으로 아르망디의 목덜미를 크게 베었다. 주요 장기들까지 한꺼번에 잘려나간 그녀는 의식을 잃었고, 게임 오버였다. 콘란드 대륙을 현실이라고 비유한다면 영혼이 떠나간 셈이다.

그녀의 영혼은 플레이어로서 저 바깥에 있었고, 그 의식은 이제 이 세계에서 떠나가 돌아오지 못한다.

그렇게 지어진 세계였다. 시뮬레이션 게임이자, 롤플레잉 게임이자, 액션 게임이자, 서바이벌 게임. 한 명의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탈락했다. 아마 수 억 명 하고도 얼마쯤 되는 숫자에서 1이 줄었으리라.


제냐는 자신의 옆구리 즈음, 그나마 장기를 좀 피해 찌른 숏소드의 그립을 쥐었다. 아르망디의 한쪽 손이 그것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그 채로 잡았다. 뽑는다. 살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숏소드가 빠져나왔다. 등 뒤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진다. 숀이 다가왔다.


제냐는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며, 아르망디의 손목 째로 그 숏소드를 일단 들어올려 앞에 내세웠다. 챙! 숀의 왼손에 남아있던 손목 아래 검이 그를 노리고 다가오다 부딪혔다.

제냐는 옆으로, 또 뒤로 움직여 아르망디의 시신을 밀어버렸다. 제냐로서는 빛의 입자에 온통 휩싸여 있는 모습이고, 절단된 신체 부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숀으로서는 확실하게 보이며 끔찍한 꼴이리라. 단순히 그것으로 기사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지만, 물리적으로 방해거리는 확실히 된다. 퍽, 하고 숀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아르망디의 시신을 발로 밀어버렸다.


그 사이에 제냐는 호흡을 가다듬고, 비스트 슬레이어에 다시금 썬더 인챈트를 켰다. 번개와 기력술의 칼날. 푸른 검신 위에 덧씌워지는 것들이었고, 묵직한 도를 발차기를 막 해낸 숀의 다리를 향해 내질렀다.

촤악.

숀은 그대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그러고도 그가 의식을 잃지 않고, 남은 한 발로 뛰어 제냐에게 달려들었다. 왼손에 가지고 있는 칼날이 제냐의 목덜미를 노렸다. 한 발만으로 잽싸게, 또 높게 뛰어오르는 모습이 놀라울 지경이다. 제냐는 왼손에 든 비검으로 챙, 하면서 가볍게 쳐냈다. 숀의 손이 밀려나 옆으로 벌려졌다. 남은 건 관성으로 인해 무력하게 다가오던 숀의 몸통이다. 제냐는 반 발짝 더 뒤로 갔고, 거리가 잡히자 그대로 오른 무릎을 퍽 하니 들어올려 다가오는 숀의 턱을 갈겨버렸다.


정확한 각도와 타이밍, 그리고 힘이 합쳐지자 숀도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다. 털썩, 하고 한 차례 날았던 기사가 힘없이 땅에 떨어진다. 어둠숲에, 시신 한 구와 거의 반 시신으로 보이는 세 명의 기사들만이 남았다.

이 소란을 떠는 와중에도 다른 짐승, 몬스터, 플레이어, NPC는 근처로 오지 않았다. 어둠숲이 넓은 이유도 있고, 짐승들의 경우라면 여기서 MP를 난사하며 싸우는 이들의 기세를 느껴 멀리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혹 NPC나 플레이어가 오다가 봤더래도 얽히기 싫어 피했을 지도 모르고.


제냐는 인벤토리를 열어, HP포션을 긁어 빼냈다. 남아있던 것들중 가장 고급품을 빼서 뚜껑을 돌려 까고, 그대로 몇 모금 들이킨다. 푸후, 입가에서 방울진 것들이 뱉어졌다. 그대로 남은 양은 옆구리에 흩뿌렸다. 아직 열려 있는 인벤토리에서 몇 개를 더 꺼내서 그 짓을 반복한다. 피가 멎고, 일단 HP의 손실이 멈춘다. 목덜미에 난 작은 상처에서도 피가 흐르지 않는다.

툭, 하고 강화 유리같은 재질의 포션 몇 개를 땅바닥에 버린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 소멸되는 것이, 상점에서 파는 HP포션병에 입력된 결과값이다.


제냐는 그 외에도 얼추 외상 등에 바르는 약 등을 꺼내 옆구리의 상처에 덕지덕지 묻혀 발랐다. HP포션은 상처가 덧나는 걸 막아주고 출혈을 멎게 해주며, HP의 추가적 손실을 낫게 해주지만 그 이상의 치유 효과는 없었다. HP가 증가하게끔, 곧 돌아오게끔 만들려면 적절한 약재와 처치, 그리고 휴식이 필요하다. 외상에 바르는 연고는 그런 처치 중 한 가지였다.

방어구를 풀고 붕대를 좀 써야 할 것 같았는데, 이렇게 사방이 보이는 곳에서는 어려웠다. 그들이 싸우는 곳은 숲 속에서도 조금 트여 있는 공터같은 곳이다. 어둡기는 하지만, 차라리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나무들의 틈에 숨어 하는 게 좋으리라.


제냐는 그러고 문득 쓰러져 있는 놈들의 꼬라지를 보았다. “끄으으으으···.” 신음 소리 따위를 희미하게 흘리는 것이, 페이트였다. 복부를 뚫린 놈이 가장 터프했다. 알렌과 숀은 턱을 갈겼을 때 뇌에 데미지가 가고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그들의 기력이 충분하고, 또 반사 신경 역시 제냐의 공격에 대비할만치 뛰어나서 방어력을 거기에 집중시켰다면 모르겠지만, 그 이상의 충격으로 제냐가 갖다 박은 것이라 기사라 할지라도 기절을 피하기 어려웠다.


페이트 다음으로 숀, 그리고 알렌이 가장 중상으로 보인다. 제냐는 셋의 이름은 모르지만. 덩치 큰 놈, 작은 놈, 자신과 비슷한 놈 정도로 구분한다. 아르망디는 이미 죽었고······. 제냐는 몇 초 정도 가만히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다가간다.


인벤토리는 아직도 열려 있었다. 기력 감지술 역시 켜져 있었고. 아직 필드Field 내였으니, 언제든지 무언가 와서 그를 습격할 여지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대중 없는 게임은 도시 내 여관에서 쉬고 있을 때라도 위험이 날아올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단지 그 위험들 중 상당수가 치안대에 의해서 어느 정도 무력화되었을 뿐이지, 그들의 눈을 속이거나 그냥 무시하고 공격을 해온다면 얼마든지 습격 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퀘스트 중에는 그런 일들이 많은 편이기도 하고. 유저들의 체험담에 따른다면.

어쨌건, 도시보다 사냥터, 로 분류되는 이곳이 더 위험한 건 사실이다. 돌아가기까지 또 안정을 찾기까지 기력 감지술은 계속 켜두어야 하리라.


제냐는 반투명한, 푸른 색의 인벤토리 창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평면으로 비춰지는 가상의 창이지만, 건드리면 해당하는 아이템 목록이 불룩 튀어나오며 제대로 클릭한 것이 맞냐는 듯 물어본다. 다시 한 번 툭 건드리면 확정되고, 이제 물건을 끄집어낼 수 있다. 제냐가 건드린 것은 HP포션이었다.

붉은 색의 유리병, 마치 플라스크처럼 생긴 그것에는 돌려 따는 뚜껑이 있다. 코르크 마개 형도 있고, 여러 유형이 있지만 제냐가 쓰는 것은 이것이다. 마치 음료수의 병뚜껑을 돌려 까듯 두둑, 하고 까서 땅바닥에 버린다.

쓰레기 유기지만 어쨌든 게임인데다, 비상 사태인데다, 포션병을 이루고 있는 재질들은 사라지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이론상 기초 상점에서 무한하게 얻어낼 수 있는 아이템이라, 버그를 유도하기 원하는 게이머가 어마어마하게 사들여서 그 폐기물로 문제라도 일으킬까봐 한 개발진의 선택이었다.


제냐는 손아귀에 들어오는 포션병의 목을 꽉 쥐고, 천천히 숀에게 다가갔다. 가장 직전에 그가 처치한 적이다. 움찔거리는 것을 보면 확실히 살아는 있다. 여기저기가 베이고 얻어 맞아서 아마 정신이 돌아오지도 않고, 한동안 이렇게 있으리라.

‘기사’라고 분류되는 인종의 특이성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런 꼴로 숲에 유기된 채로 살아남을 확률도 있기는 하다. ‘초인적’이라는 말에는 신체적인 특성도 들어가고 정신적인 강인함 역시 포함되는 것이니까.

제냐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이곳 내부가 게임 세계이기에 버텨내는 것이지, 이 NPC들은 콘란드 대륙이 실제 세상이라는 가정 하에, 스텟을 그 정도로 끌어올릴만큼의 고난을 견뎌낸 용사들이다.

가정 하에 이루어진 소설 속 세상같은 곳이지만, 이 세상을 구현하는 시스템은 지독하게 정교하고 때때로 놀랄 정도의 디테일함을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런 정신적인 특이성 때문에 일어나는 기적같은 우연들도 곧잘 구현해내곤 한다.

플레이어들에게는 다소 야박한 면이 있는 확률의 장난이었다만.


제냐는 그것이 확률의 장난이라기보단, 사실 이 세상에서의 일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고 있느냐, 그 집중력의 깊이감에 따른 차이라고 체감적으로 느끼고는 있었다.


어쨌든, 살 확률이 있으나 죽을 확률도 그만치 반반으로 큰 게 현실이었다. 제냐는 숀에게 다가가 HP 포션을 뿌려주었다. 그대로 철푸덕, 엎어진 채 다리 한 쪽이 잘려버린 인간이지만 정신을 잃었으니 그의 몸에 돌고 있는 기력들도 서서히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MP는 비유컨데, 스킬의 시전자가 다루는 개인적 사병이며, 고도로 프로그래밍된 시스템 요소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관성 따위가 남아서 강렬한 의지로 사용한 스킬들은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의식을 잃었어도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기력술사의 강인한 의지에 따라 얼마간 작용할 수도 있었다. 무의식의 지경에서까지 스킬이 발현 가능한 수준으로 훈련을 한 이들에게 적용되는 사실이었다.


그에 따라, 숀의 절단 부위에서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피가 덜 흐르고는 있었다. MP로 이루어진 기력술들은 사용자의 신체를 보호하고 보강하니까. 출혈 역시 멎게 만드는 효능이 있다. 잘려나간 다리의 위에 주르륵, 그리고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을 테니까 대강 보이는 곳 그 위에 흩뿌렸다. HP포션 한 통을 다 쓰고, 다른 걸 꺼내 반 통 정도를 부어 주었다.

아마 죽지는 않겠지. 치명상을 입었으니 본거지로 돌아가기까지 아주 고생을 한 뒤에, 어떤 초인적이거나 초상적인 치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후유증이 남아 재활에 시간이 걸릴 것이고.

이들은 기사였고, 개중에서도 깨나 수준이 높은 이들처럼 보인다. 제냐의 예상처럼 어느 귀족가나 거대 집단에 속한 단원들이라면 레어, 유니크 이상의 스킬로 치유를 받을 확률이 높았다.

한 번 이 정도 수준으로 끌어 올린 병력을 허무하게 잃고 싶어하는 주인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치료를 하려 들 것이다.


당분간은 제냐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며, 그 정도 시간이라면 이미 제냐는 한 단계 위로 성장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게 NPC와 플레이어들 간의 차이라면 차이일 수 있었다. 세계의 법칙에 관한 여러 정보들이 있고, 타고난 신체를 캐릭터의 육체로 부여받은 차이. 제냐가 공략본을 일부러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플레이어로서 유저 커뮤니티 내부에서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큰 차이였다.

그는 이 콘란드 대륙에서 유저들과 소통하고, 퀘스트를 풀어내고, 교류하며 다닐 테니까.

거기에 하드한 게임 플레이와 집중력이 합쳐진다면 남들보다 좀 더 빠른 성장도 가능했다. NPC들이 제냐를 따라오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도 잃지 않고 살아남아야겠지.


게임을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하드 게이머라면, NPC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에 비해 고작 게임 오버를 걸고 있는 것이니 사선을 넘기가 더 쉽다.

이런 식으로 성장을 하다가도, 정말 최고위의 전투력을 가진 NPC들과 경쟁을 할 때는 또 한 번의 태도적 변화가 필요하기는 하다만. 그건 아직 제냐에게는 먼 이야기였다.


게임 오버가 두려워 소극적으로 플레이를 하다 보면 중수나 고수의 문턱을 넘기가 어렵다. 그리고 게임 오버에 대한 리스크를 지고 게임 시스템이 인도하는 대로, 집중력의 극에 달한다면 그 이상으로 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NPC들을 이길만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플레이어들은 그만한 잠재력이 있는 신체를 캐릭터로 부여받으니까.


거기에 고수 그 이상이 되고자 한다면, 게임을 단순한 게임 이상의 것으로 보아야한다. 고작 게임이지만, 그것을 즐기고 있는 유저 자신은 현실의 인간이었다. 아무리 작은 것에서라도,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갈구의 몸부림이 있다면 진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놀이를 하다가서라도, 하잘것 없어 보이는 일을 하다가도 마찬가지다.

고작 게임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래픽 속 세상에 불과했지만 이 내부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자신의 현실적 삶에도 영향을 미칠만한 진지함을 발견한다면, 그건 곧 이 게임 내에서 인생을 걸고 도약을 추구하는 최고위 NPC들의 자세와도 맞닿는 점이 있는 것일 테다.


방구석에 앉아, 시뮬레이터 기기에 몸을 누인 채 바라보는 세상이었지만 그 내부에서도 진지한 고찰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쓸만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게임은 도구에 불과했고 그것을 다루는 사용자의 태도에 달린 것이니.


그런 점에서, NPC들에게 이렇게 연민을 베푸는 건 나름대로 쓸만한 행위일지 모른다. 잘 만들어진 연극 속 세상이었지만, 짜여진 판대로 몰입을 해서, 무엇이 옳은가 한 번 생각을 해보는 것이니.

책을 읽을 때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거나 반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행동의 당위성이나 내용의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며 읽어보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제냐는 그게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페이트와 알렌에게도 다가가서 HP포션들을 뿌려주었다.

뭐, 아르망디는 플레이어이기도 했고, 애초에 눈빛이 좀 섬뜩한 구석이 있던 여인이라 깊이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이 NPC들은 성품적인 섬뜩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전에 로웰 드버를 비롯해서, 운트 작힘 백작의 기사단원이 그들에게 회유된 것처럼 NPC들의 움직임도 그리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행위가 언젠가 퀘스트의 진행 과정에서 크게 쓰일 지도 모르는 법이다.


제냐는 그들에게 대강 상당량의 HP포션을 흩뿌려서 외상을 치유해주고는, 그 넘어진 품 아래에 한 병씩을 더 집어넣어 주었다. 그러고 전부 죽는다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도 다친 상태였고 시간이 남아돌지는 않았으니까.

제냐는 숲 속의 곧이 선 나무들의 틈바구니 사이로 몸을 숨기며, 사라졌다.


*


“으억.”


최태현은 거진 만신창이같은 꼴이 되어 나타난 제냐를 보고 기겁을 했다.


그의 장비들이 여기저기 상해 있었다. 근접 클래스의 보호구가 엉망으로 상하려면 정말 큰 충격을 받아야 한다. 격렬한 전투를 한 것 같은 꼴이었고, 안색이 어딘지 파리한 제냐의 낯을 보자니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사르삿에 있는 어느 카페 라운지였다. 광장에 위치한 야외 카페였고, 의자와 테이블을 마련해두고 약속을 기다리거나 하는 이들이 이용하게끔 만들었다.

최태현은 나름대로 도시 이곳저곳을 누비며 오랜만의 플레이에 장비를 점검한다던가, 퀘스트를 물색한다던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도시 바깥으로 나가 필드에서 그의 수준에선 약한 몹들을 사냥하며 조작감을 확인하기도 했다. 제법 시간을 보내고 나니 제냐가 사르삿에 도착했다며, 보자고 해 만난 것이 지금이었다.


제냐는 일단 할 수 있는 응급처치들을 마치고, 도시 내 치료원에서 충분한 치료를 받고 나서 움직이는 참이었다. 몸은 일단 회복했으나 장비들은 영 그렇지 못했다. 일단 가장 큰 상처인 옆구리의 관통상은 붕대를 둘둘 감았고, 나머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약간의 타박상이니 긁혔거나 베이거나 한 상처들이다.

단테스 무기점에 가서 수리를 맡기거나, 혹은 새 것을 사야할 판이다. 방어구도 오래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 고급품을 강화해가며 쓰고 있었는데. 수리를 한다 해도 수리비가 상당히 나올 듯했다.


어쨌건 무기점에 들르기 전 최태현을 만났다. 오랜만의 얼굴이었다. 회사일 때문에 간혹 들어오지 못하는 시기들이 있었고, 또 들어온다고 해도 제냐와 시간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니까.

아마 일주일, 이주일 정도는 지난 것 같았다.


“후우.”


제냐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앞에는 라떼 한 잔이 놓여져 있었다. 따뜻한 종류다. 양이 많았고. 칼로리는 섭취할 수 있을 때 섭취해두는 편이 좋다. 쓸데없는 부분까지 현실적인 게임이라, 배가 고플 때가 많았으니까. 참으려면 참을 수 있지만 배고픔이 장기화되면 신체적으로 문제가 생기고, 전투력에도 장애가 생긴다.

게임 내에서 캐릭터가 벌이는 전투를 따지자면, ‘비만’같은 상태이상이 걸릴 리는 없으니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는 편이 옳다.

큰 머그컵에 가득 든 라떼를 조금 마시면서 제냐가 최태현을 보았다. 그가 말한다.


“뭐 어디, 단체로 습격이라도 당했어?”


최태현은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간 보낸 시간이 꽤 있기도 하고, 그가 연상이며 직장인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제냐는 적당히 섞어 사용하고 있었다.


“어······ 어.”

“······그렇구먼.”


머리를 굴려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갑자기 암살자 네 명이 다가와서 다짜고짜 전투를 벌였으니까.


“얘기는 못들었어.”

“흐음.”


최태현은 진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면서 고갤 끄덕거렸다. 아이스였다. 마찬가지로 손아귀에 가득 들어오는 커다란 유리잔에 들었다. 종이 빨대를 주기는 하지만 잘 쓰지 않는다. 입 안에 텁텁한 감이 남아서 싫어한다. 이 게임은 미세한 미각과 촉각, 향까지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실에서도 종이 빨대는 잘 안 쓴다.


“전부 다 없앤 거야? 플레이어였나?”


최태현이 묻는 건 뒷사정에 관한 것이었다. 이 게임은 수 억의 플레이어와, 그 이상의 무수한 오브젝트와 NPC들이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우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인과관계에 기인한 것들이 많다.

초보자 시절에 선악 수치를 생각치 않고 마구잡이로 했던 행동이, 중수 즈음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와 어느 NPC집단에게 습격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역학 관계라는 것이 있었고, 정치도 분명 이 콘란드 대륙에서 실존하는 컨텐츠였다. 한 쪽 귀족의 파벌로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다른 쪽의 공격을 받는 일도 잦다.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했다면, 그들의 목적과 뒷배경이 있을 것이다. 보통 플레이어들은 그 퀘스트의 전체적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케낼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 전부 없애버렸으리라. 플레이어라면 게임 오버를 당했을 것이고, NPC라면 데이터가 사라지는 일을 당했겠지.


“어··· 한 명은? 나머지는 확인도 못했는데, 아마 NPC. 한 명은··· 전에 얘기했던 그 미친 여자야.”

“아.”


최태현이 알아들었다는 둥 눈짓했다. 제냐, 김서원이 일전에 말한 바가 있었다. 암살자 클래스로 보이는 여성 플레이어가 접근한 적이 있는데 전투력 자체는 그보다 아래였지만 눈빛이 조금 무서웠다던가.

정신병력에 대한 검사는 기본적으로 하고 접속하게 되는 게임이었지만, 세상에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살아가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들도 있기는 하다. 검사 또한 간단한 것이라면 속이는 자들도 있다고도 하고.

그리고 또 뭐, 인터넷과 그와 연관된 온갖 전산 기술이 발달한 세계라지만 어느 때나 그만큼 우회로나 편법이 존재할 수도 있으리라.


“아르망디, 라고 했던 것 같은데. 파티 사냥에서도 한 번 낀 적이 있었고···. 그러고 보니 그 여자한테서도 따로 정보를 케내지 못했네. 그 여자는 일단 게임 오버당했고···.”


남의 일처럼 말하지만, 제냐의 손으로 직접 게임 오버를 시켰다. 검은 비검의 실전 성능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회수’ 스킬을 본격적으로 쓴 것은 처음이었다. 성능 테스트를 실전에서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아주 괜찮았다.

손아귀 안에 생각한대로 딱 들어오는 것 하며, 스킬의 발동 시간과 중간 과정 역시 없다고 느껴질만치 빨랐다. 만일 회수 스킬이 어느 정도 지연 시간이 걸리는 류였다면 제냐는 아르망디를 제대로 처치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숀에게 목덜미게 베였을 지도 모른다.


하루에 열 번. 여덞 자루의 비검이니 이론상 팔십 번은 투척이 가능하다. 상대로서는 끝없이 튀어나오는 암기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머지도 이름도 모르지. 눈빛들을 보면 NPC같았는데···. 셋 다 남캐(男Character)였고. 기사류의 근접 클래스고···.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이랑 비슷하던데. 싸우는 폼들이. 전엔 백작가의 기사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위의 귀족의 수하들일지도.”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원들의 수준보다는 높았다. 굳이 따지자면 그들 중에서도 솜씨가 좋았던 간부급들의 수준이다. 그런 자들이 더욱 뭉쳐서 덤벼든다면 제냐로서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나름대로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지금보다도 더 질 확률이 많은 싸움을 해야 하리라. 도망도 쉽지 않을 수 있고.


그들이 콘란드 대륙에서 벌인 짓이라면, 가장 특이한 일은 결국 로멜리아 가와 관련된 퀘스트였다. 그 퀘스트의 다음 진행을 기다리고 있는 판국이니, 그와 연관된 상황이라고 추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추측이다.


“흐음.”


최태현은 머리를 굴렸다. 정보가 부족하면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는다. 산슈카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모두 머리에 넣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일개 플레이어에 불과한 그들은 아직 그 정도의 정보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물어볼 사람이 있는가?


그들의 우군이라고 할만한 자는 로멜리아 가의 자제들이나, 그 가문의 일원들. 그리고 데슈칸 산맥에 있는 그리턴 가의 일원들이다.

중앙, 왕궁에서 일을 하는 법관들은 그들의 인맥이 아니라 그리턴 가의 인맥이었으니, 통하지 않고서는 정보를 얻기 어려우리라. 칼젝 벤더스는 같이 모험을 한 전력이 있으니 말을 들어줄 지는 모르겠다만.


그 외에도 그들보다 오래 플레이를 한, 호아킨이나 릿샤한테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지 모르겠다. 일단은 하던 일을 마저 하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이었으니, 다음을 보자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퀘스트가 다가와서 진행될 지도 모른다.

버텨낼 수 없는 어려움이 갑자기 닥친다면, 거기가 게임 오버 지점인 것이고. 이 시스템도 어느 정도 기승전결 있는 편이었으니, 말도 안되는 난이도로 오지는 않겠지. 심지어 제냐가 수행하고 있는 개인 퀘스트인데.


만일 퀘스트와 상관이 없는 외부 이벤트이고, 제냐의 수준과 관계 없이 무언가 거대한 위협이 덮친다면 어쩔 수 없으리라.


제냐와 최태현은, 각자 릿샤와 호아킨에게 메세지를 남겨 물어봐두기만 했다. 남은 것은 역시 사냥과 전투다. 둘 다 전투 클래스로 이 게임을 클리어하기로 한 인간들이었으니까, 교전을 통해 수준을 끌어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단은 제냐의 장비를 좀 손봐야 할 것 같았다.


둘은 자리에 앉아 왕도의 밤거리 속에서 각자 시킨 마실 것을 다 비워내고서 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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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137. 프린스 오브(4) 23.11.04 17 3 13쪽
137 136. 프린스 오브(3) 23.11.03 19 3 18쪽
136 135. 프린스 오브(2) 23.11.03 17 3 12쪽
135 134. 프린스 오브Prince of 23.11.03 16 3 17쪽
134 133. 유니콘 23.11.02 20 3 14쪽
133 132. 전리품들 23.11.02 18 3 14쪽
132 131. 수난 23.11.01 19 3 20쪽
131 130. 백마 23.11.01 16 2 19쪽
130 129. 헛웃음 23.11.01 18 3 11쪽
129 128. 저녁 비행 23.11.01 18 3 18쪽
128 127. 또 사냥 23.10.31 16 3 12쪽
127 126. 재접속 23.10.31 16 3 22쪽
126 125. 간밤의 습격, 그 끝 23.10.30 19 3 32쪽
125 124. 위검기僞劍氣 23.10.29 18 3 19쪽
124 123. 맥컬리 23.10.29 18 3 21쪽
123 122. 펠 파이든 23.10.29 19 3 21쪽
122 121. 골목길 23.10.29 16 3 23쪽
121 120. 미첼 카니브 23.10.28 21 3 17쪽
120 119. 튀어 23.10.28 22 3 24쪽
119 118. 오케이Okay 23.10.28 20 3 19쪽
118 117. 검기劍氣(2) 23.10.27 20 3 30쪽
117 116. 검기劍氣 23.10.25 22 3 28쪽
116 115. 파罷했음 23.10.25 22 3 34쪽
115 114. 돌아갑시다. 23.10.25 19 3 29쪽
114 113. 동행 23.10.23 23 2 32쪽
113 112. 박영식, 안드레 박 23.10.22 22 3 34쪽
112 111. 사슴의 고기 23.10.20 28 3 34쪽
111 110. 재료 수급 23.10.18 22 3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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