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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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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0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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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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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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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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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34쪽

112. 박영식, 안드레 박

DUMMY

*


“끼이이아아아아아!”


숲노루는 괴상한 괴성을 질렀다.


숲이 울린다.

그래도 이 정도의 거대한 개체들은 자신만의 영역이 있는 편이었다.

거대 투구벌레의 경우에는, 끔찍하게도 여러 마리가 집단 생활을 하고 있지만. 흰뿔 큰 숲노루는 한 마리를 잡을 때 별로 방해를 받을 일이 없었다.


제냐는 사슴의 요동치는 등 위에 있었다. 침엽수의 거대한 나무의 중턱 정도가 시야였다. 아프리카 코끼리의 등에 올라탄 것과 비슷하다. 혹은 더 높다. 날뛰듯이 움직이는 그 등은 사슴의 각력에 따라 한참 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했었으니까.

사슴이 등을 구부리며 용수철처럼 뛰어 오를 때는 순식간에 1.5배, 2배 이상은 갑자기 고도가 더 높아졌다. 이만한 덩치에서 나오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민첩함과 점프력이다.

놀랍지만, 제냐는 어쨌든 사냥을 해야 했다. 그는 침착하게 비스트 슬레이어를 그립 근처까지 사슴의 등줄기에 박아넣은 채로, 다른 손으로는 이빨 대거를 치켜 들었다.


허벅지 근처의 홀더에 채워 놓았던 황야 지룡의 이빨 대거이다. 이미 몇 번의 인챈트와 강화를 더해서, 검붉은 검기를 그 칼날에서 흩뿌린다. ‘검기’ 스킬로써의 검기는 아니었지만, 은은한 빛깔과 함께 흉악한 기운이 검신 근처에서 나타나 넘실거린다.

실제적으로 흉악한 위력이었다. 가만히 가져다 대기만 하더라도 스며들어 있는 독기로 약간의 감염이 될 수 있었다. 거기에 흑사를 잡았을 때 나온 부속물들을 사용해 강화를 더해서, 보다 독성이 강해졌다.

얕게라도 찔린다면 어지간한 생물들은 그것만으로도 몇날 며칠을 앓을 것이다. 거기에 기력술을 더하면 위력이 조금 더 강해진다. 어지간한 생물들 그 이상의 강력한 생명력을 갖는 몬스터들에게도 충분한 치명상으로 작용할만큼 말이다.


독성에, 붉게 달아오르는 검신은 또 불의 기운을 갖고 있었다. 파이어 볼을 다루다 익힌 파이어 인챈트를 더한다면 흰뿔 큰사슴의 가죽 정도는 충분히 갈라내고도 남는다. 비스트 슬레이어의 칼자루를 꽉 쥐고, 사슴의 가죽에 붙여놓은 양 발바닥에는 수직 보행 스킬로 인한 접지력을 최대로 한다.

그는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순식간에 경사가 평지에서 90도 가깝게도 바뀌는 사슴에 등 위에서 버틴다. 공격은, 왼손으로 꺼내든 지룡의 발톱 대거로 한다.


푸욱! 하고 기력술을 사용해 그 검신의 범위를 몇 센티는 더 늘린 것으로 찍었다. 그대로 가죽이 찢겨 나가며 들어가는 것 자체가 여상한 위력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흰뿔 큰사슴의 가죽은 평범한 짐승의 가죽처럼 보이지만 철금속에 가까운 단단함과 강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파이어 인챈트의 기운을 돋군다.

불꽃의 칼날이 훨씬 깊숙한 데까지 뻗어나가면서 내부를 태웠다.

사슴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지만, 안타깝게도 멈춰 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사슴이 상대하기 쉬운 크기를 하고 있는 괴물이었다면 단박에 끝냈을 테다. 제냐로서도 고통을 많이 주어야 한다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발톱 대거는 그대로 계속해서 사슴의 등을 헤집었다. 암석을 깎아내듯 구덩이를 만들었고, 내부 장기들은 보이지 않는다. 제냐는 플레이어였으므로, 게임 내에서 생물의 신체 내부 따위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반짝이는 빛의 입자로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서 나온다. 그러나 그런 빛의 입자야말로, 제대로 상대에세 타격을 주었구나 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냐는 그대로 그립을 빙글 돌려 대거를 역수로 쥐었다. 칼날이 아니라 쥐고 있는 주먹의 바닥을 사슴의 등가죽 쪽으로 향했다.


대거로 찍어대며 갈라낸 건 땅을 판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대거의 위에서 타오르던 불길은 이미 사그라들었다. 제냐의 MP는 이제 다른 쪽으로 쓰이고 있었다.


움켜쥐고 있는 주먹의 조금 앞쪽에, 번갯불이 튄다. 파지직, 하면서 스파크가 만들어졌고 허공에 불빛이 나타난다. 제냐는 흔들리는 사슴의 위에서 정신을 가다듬으며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 크지 않은 원형으로 번개의 구체가 만들어진다. 대거로 파낸 홈은 제법 깊고 또 커다랗다.

사슴에게는 참 미안한 이야기다.

사슴의 거죽과 손바닥 사이의 공간은 그리 넓지 앉았다.

제냐는 크기를 제한하면서도 MP의 투입량을 계속해서 늘렸다. 밀도가 높아진다. 밀도가 높아질수록 정확성이 올라가고 폭발력을 부여했을 때 더욱 세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자신이 의지력으로 제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이야기였다. 일정 한도를 넘어가면 그런 이점들은 모조리 사라진다.

지휘관의 통솔력을 벗어나는, 통제되지 않는 대군을 다루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손바닥 아래서 번갯불이 번뜩였고, 제냐의 얼굴이 아래에서 비추는 푸른 빛에 색이 변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둠숲은 다소 어둡다.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고, 마치 안개가 낀듯한 우울한 숲의 내부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멀리, 나무에 기대어 제냐가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는 안드레에게도 그가 손에서 만들어내는 번개의 불빛이 똑똑히 보였다.


사슴에게는 미안하지만,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제냐는 충분한 에너지가 모였을 때 갈라낸 가죽의 틈 사이로 그것을 보냈다.

제냐의 의지에 따라서, 의지력이 발현되어 MP가 움직인다. 손에 닿아 있지는 않아도 제냐가 다루는 개인의 MP는 마치 수족처럼 움직였다.

번개의 불빛이 빛의 입자들로 모자이크가 된 곳에 들어갔다.

얼마간 들어가더니, 이내 내부 장기에 부딪혔고, 곧 폭발이 일어났다.


강력한 열량과 전류, 폭발력을 세팅해 둔 썬더 볼트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천 단위의 MP가 들어갔다.

제냐는 그대로 몸을 조금 옆으로 움직이며, 사슴의 등가죽 위에 바짝 엎드렸다. 양 손에는 비스트 슬레이어와 지룡의 발톱 대거가 들려 있었지만 그마저 이용해, 손과 발 네 부분에 접착력을 만들어 안정적으로 붙은 채였다.


곧이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사슴의 등가죽에 달라붙은 제냐도 느낄만치 진동이 다가왔다.

그 등 위에 붙은 제냐에게도 그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자신의 등가죽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난 사슴은 끔찍한 감각이었으리라.

잔인하게 잡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괴물을 없애려면 별다른 수가 없다.


순간 얼마 되지 않는 사이에 대거로 틈을 깊이 파낸 참이었고, 안쪽으로 뻗어 나가며 폭발한 썬더 볼트는 척추를 비롯해 주요 장기들 따위에도 타격을 주었다.

더군다나 몸의 내부에서 일어난 강력한 전기의 흐름은 사슴의 움직임을 멎게 만들었다.

잠시간, 강력한 고통과 전압에 흰뿔 큰사슴은 블랙 아웃이 되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제냐의 몸이 떨렸다. 다른 건 아니었다. 사슴이 순간 앞다리를 접고 무릎으로 땅바닥을 찍은 것이다.

좋은 징조였다. 제냐는 다시금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면서, 제 2격, 3격을 준비하며 손아귀에서 번개나 화염의 구체를 만들어 터뜨리기 시작했다.


*


쿵.


얼마 지나지 않아 사슴은 완전히 목숨을 잃었다.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민첩성으로 날뛰며, 또 코끼리보다도 강력한 몸체로 여기저기를 처박아대던 녀석이었다. 외부는 철가죽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강도를 가진 가죽으로 보호하고 있었고.

검으로 베어내며 단박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게 어렵다고 생각되자 제냐가 내부에 충격을 주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몇 발의 썬더 볼트와 파이어 볼트를 맞고서, 사슴의 힘이 다한 것이다.


높은 체고를 자랑하던 녀석이 길쭉한 다리를 접으면서, 그 몸뚱이를 완전히 숲의 바닥에 뉘였다. 쿵, 하는 건 그러며 나는 소리였다. 코끼리 같은 것이, 또 길다란 다리를 가지고 있다가 넘어지니 지축이 잠시 들썩거리는 느낌이었다.


침엽수림의 윗쪽에서, 나무에 머물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아직까지도 떠나지 않던 담력이 큰 놈들은 마침내 흰뿔 큰사슴의 대가리가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제냐는 입을 다문 채였다.

그는 사슴의 위에서 끊임없이 초상 스킬들을 발현해서 그 내부에 폭발을 일으키다가, 그 등줄기를 밟고 위로 멀리 뛰었다.


근처에 있던 거대한 나무의 몸통을 타고, 발바닥을 그 표면에 붙여 가속도를 없앤 뒤 바닥에 내려선 참이다.


넘어진 흰뿔 큰사슴의 꼴은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코끼리보다도 조금 더 길쭉한 면이 있어서, 도리어 더 커보인다. 각도에 따라서는 말이다. 그나저나,


“······쓰읍, 이거.”


제냐는 혀를 찼다. 잡을 때는 당장 잡는 일에만 주력하다보니 크게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막상 죽이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등줄기에 구멍을 내고 번개나 화염의 폭탄을 마구잡이로 쏴댔으니, 그 내부 장기랑 살덩이들이 과연 온전한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척추를 타고 내려가 주요 장기들을 전부 날려먹었는데, 고기가 제대로 남아 있을까?

“······.”


애초에 이 일을 하는 게 고기를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는 걸 잠시 잊었다. 전투에 매몰되다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있을 수 없을런가···.

멀리서 떨어져 전투하는 장면을 구경만 하던 안드레 박이, 자신이 테이밍한 몇 마리의 적마들과 함께 다가왔다.

푸르릉거리면서 그 뒤를 따르는 적마들은 온순하게 보이지만 원래는 타고난 성정이 지독한 녀석들이었다. 사람의 손길로 그 방향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놈들이다.

안드레 역시 나름의 수준을 갖춘 테이머이기에, 초상 스킬의 한 종류인 테이밍 스킬을 써서 길들이고 있는 것이지, MP라는 초현실적인 에너지가 콘란드 대륙에 없었다면 다룰 수 없었을 놈들이다.


테이밍 스킬은 일반적인 다른 류의 스킬들이 그러하듯, 초기에는 MP를 잡아먹지 않는 방식으로 쓰이기도 했다. 초상 스킬류를 처음에 익힌 술사라면 처음부터 MP를 써야만 했겠지만은. 그저 몸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것처럼, 초상超常적인 힘을 제하고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테이밍 스킬의 처음이 시작된다.

평범하게 어떤 짐승이나 몬스터의 습성을 파악하고, 그것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가져다주고, 시간을 들여 유대감을 형성해서 길들이는 식이다.

조금 거친 녀석들이라면 그저 고운 손길로 다가가 쓰다듬는 것만이 아니라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하는, 밧줄 따위를 사용하는 방식이 이용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길들일 수 있는 종류는 일반적인 짐승류와, 몬스터, 괴수, 괴물로 불리는 것들 중에서 아주 일부의 종 뿐이었다.

적마, 붉은 색의 피부를 가진 거대한 당나귀들은 짐승이라기보단 괴물의 일종이었고, 일반적인 몬스터의 상리를 따르는 종들이기에 사람의 손을 본능적으로 거절한다.


물론 지금은, 안드레의 MP와 스킬로 제압당해서 완벽하게 유순해진 상태였다. 어느 정도 신경 조작에 가까운 방식이기도 하다. 테이밍은 말이다.

다만 이러한 테이밍은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길들이는 일은 어디까지나 짐승, 몬스터 따위에 국한되는 스킬인 법이다.

콘란드 대륙에서는 그걸 ‘영혼의 방패막’ 같은 표현으로 말하곤 했다. 지성이 있고, 말이 통하는, 곧 인류라고 불리워야 할 자들은 기본적으로 그 정신과 영혼에 선천적인 방패막이 있어 정신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스킬들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물론 초상 스킬들 중에는 정신 계열의 스킬들이 있기는 하지만, 테이밍을 하듯이 완벽히 그들을 종으로 삼을 수는 없다.

일순간 신경 계통을 흐트러뜨리거나, 혹은 약물 따위로 사람의 정신이 망가지듯이 데미지를 줄 수는 있지만 말이다.

부서질지언정 굴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건 말이다. 그건 사실 어떤 동물에게나 마찬가지였지만, 이 세계에서만 있는 특별한 일이었다. 테이밍 스킬이라는 것도 말이다.

현실에서는 짐승이라 할 지라도 이처럼 손길 한 번만으로 완벽하게 조작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


푸르르르르.


적마, 붉은 당나귀 중 가장 앞서 온 놈이 성대를 긁으며 호흡을 토해냈다.


제냐는 안드레가 근처에 오자 말을 걸었다. 손으로는 쓰러져 있는 흰뿔 큰사슴의 시신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다.


“이거, 옮길 수 있겠습니까?”

“으으음······.”


머릿속으로 잠깐 계산을 해보았다, 안드레는. 고개를 힐끔 돌려 뒤에 있는 당나귀 세 마리를 처다본다. 일반적인 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 덩치를 가진 녀석들이다. 말보다도 고개와 등선이 높았고, 덩치는 황소보다도 두터운 느낌이 있었다.

다리가 굵고 굽이 크다. 대가리 역시 일반적인 말에 비해서 크다. 짐을 옮기는 데는 탁월한 힘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종으로서 가지고 있는 전투력과, 사냥의 난이도에 비해 이동용의 동물로 쓰이기 적합한 성질을 갖고 있는 놈들.

그렇기에 많은 물품을 운반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늘 안드레가 테이밍을 하곤 하는 녀석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마리로 저 녀석을?


안드레는 다시 코끼리보다 큰 덩치를 한 채 죽은 사슴의 시신을 본다. 위압감이 대단하다. 제냐의 뒤로 쓰러져 있었는데, 그 쓰러진 키만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람의 키보다 더 커보인다. 과장을 많이 더해서 산처럼도 보인다. 흰 입자들이 제냐가 입힌 상처들 주변으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아마 칼을 대어 적절한 도축 조치를 하면 반영구적으로 시신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저대로 긴 시간을 놔두면, 플레이어들이 죽인 몬스터의 시신은 흰 입자로 전신이 변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데이터의 원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애초에 부자연스러운 시스템의 개입에 의해 콘란드 대륙에 생겨난 개체들이었으니까. 지금 콘란드 대륙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플레이어들이 이방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반대급부로 무수한 수의 몬스터들이 더 생겨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들이 풀려나서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기 보다는, 이렇듯 원래 마경이라고 불리우는 필드들에 밀집도가 높아지는 식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어떤 것을 해도 좋았지만, 일단 전투직 플레이어라면 이런 몬스터들을 잡고 마경을 다시 인간들이 살만한 영토로 바꾸어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게, 게임이 인도하는 플레이의 방향성이기도 했다.


미정복지들을 정복하고, 더욱 살만한 땅으로 만들어 내라, 는 게 시스템의 말이었고 곧 개발자가 유저들에게 전달하는 클리어 과제였다.


거대한 대륙은 한 명의 인간이 서 있다면 그야말로 먼지보다도 작은 거대함이었지만, 수 억의 유저들이 협동을 하고 또 초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부여받은 캐릭터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키워낸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안드레는 도축 스킬을 갖고 있었다. 제냐도 마찬가지였고. 저 거대한 몸뚱이에서 일단 피만 좀 빼더라도 무게가 줄기는 할 것이다. 무게를 줄이는 것이, 제냐의 말에 따르면 그 키로Kg 수만큼 돈을 받는다고 하니 과연 옳은 선택인가 싶기는 하지만. 양심적으로 가공을 하고 가져가는 게 나을 것이다.

아마 제냐는 이번 한 번의 사냥에서 한 마리로 만족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고, 닥치는 대로 잡고 가능한 최대의 무게를 싣고 갈 생각인 모양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한다면···


안드레가 테이머 특유의 스킬로 적마들을 한계 이상으로 강화시킨다 하더라도 무리였다. 적마처럼 힘을 잘 쓰고 무언가를 끌고 갈 수 있을만한 놈들이 여러 마리 더 필요했다. 안드레는 고개를 슬 저었다.


“이것 한 마리라면 어찌어찌 가능할 지 모르겠는데··· 안정적으로 옮기려면 짐승들이 더 필요하겠어. 적마 세 마리로는 도저히 깜냥이 안 되는구만. 근력 강화나 광폭화 스킬을 테이밍 된 적마한테 걸어준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렇긴 하겠죠.”


제냐는 고갤 끄덕거렸다. 확실히 자신은 큰사슴 한 마리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안드레는 나름대로 MP량이 많은 수준급의 플레이어였고, 전투 능력은 어떨지 몰라도 테이머로서의 역량은 상당한 사내였다.

게임 내에서 만난 사이였지만, 자연스럽게 제냐가 존대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한국인이기도 했고. 나이에 따른 존대가 익숙한 게 김서원이었다.

시나리오 온라인은 외견을 크게 바꾸는 게 어려운 게임이었다. 일정 비율 이상 외관을 바꿀 수 없었고, 약간의 성형 정도는 가능했지만 거진 모습 그대로가 현실에서의 사람의 외형이었다.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문자나 음성 따위로 교류를 하는 것보다도 더 압도적인 현실감이 있었다. 현실에서 실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로 말이다.

실제 인격을 앞에 두고 있다면 반말을 하는 게 차라리 더 어렵다. 모든 어미와 단어가 바뀔 정도로 존대와 반말에 차이가 큰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이라면 더 그렇고.

서원은 애초에 NPC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상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게 하고 있었다. 줄리앙에게 그러했듯이, 혹은 단테스 도노반에게 그러했듯이.


노인을 만나면 노인으로 대우하는 것이 더 편한 법이다.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간혹 그런 양심이나 순리를 지키지 않는 자들도 있기는 했는데, 별다른 철학이나 신념, 이유가 있어서 하는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단순히 예의가 없는 자들은 시뮬레이션 게임이기도 한 이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관계성에 불이익을 얻게 되어 있었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쉽고 빠른 방법이었다.


“그럼 인근을 돌면서 몬스터 테이밍을 조금 더 합니까?”


제냐가 물었다.


안드레 박, 박영식이라는 장년의 사내는 말했듯 솜씨가 좋은 테이머였다. 세 마리를 안정적으로 다루고 있고, 사실 어둠숲의 외곽 지대에도 따로 대기시켜 놓은 짐승들이 몇 마리 더 있었다. 숲 내부로 마차를 끌고 들어오기가 길이 불편해서, 어귀에 잘 안보이는 곳에 운반용의 마차와 함께 몇 마리 몬스터들을 시켜 경계 대기를 시켜 두었다.


지속적인 유대감(굳이 표현하자면)을 형성해서 장기적인 엘리트 몹을 다루는 게 아니라 단기간에 소모적 군대를 만들어 사용하는 유형 치고는 훌륭한 컨트롤 솜씨와 장악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대감이 강하고, 테이머에게 강하게 묶여 있는 몹들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도 능숙하게 통제에 따르고, 또 복잡한 명령이라 할 지라도 잘 이해하는 면이 있었다.

MP를 다루는 일과도 같았다. 어떤 능력이든 장단이 있었고, 발전상에 따라서 유형이 달라지게 된다.

거기에 수준을 높여가며 다음 발자국을 걷다 보면, 단점들이 보완되고 장점이 강화되고 하는 것이다. 안드레는 그리 높지 않은 레벨이었는데, 어디까지나 제냐의 기준에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좋았다.


그는 제법 긴 명령을 먼 거리에서도 능숙하게 내렸고, 그러고도 한참이나 다룰 수 있는 몹Mob(RPG게임 등에서 적이 되는 몬스터 캐릭터 따위를 일컫는 말)의 숫자가 남아 있었다.

안드레는 고갤 끄덕거린다.


“어, 뭐. 그래얄 것 같은데······.”


그가 뒷말을 조금 흐린다. 아무래도 그가 계약의 갑이 아니라 을인 입장이었기에. 어쨌거나 사냥 건은 제냐가 주도하는 것이었고, 어둠숲에서의 운신에 관한 결정도 제냐가 한다. 안드레는 제냐에게 보호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어둠숲의 몬스터들이 그에게 무조건적인 게임 오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맞닥뜨리면 힘든 게 사실이다.

어둠숲의 몬스터들이 강하다보니, 그것들을 잡으러 온 플레이어들과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힘에 부치는 것이 사실이고.

그가 움직이고자 하는대로 제냐를 멋대로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뒷말을 흐리는 건 내 생각은 그런데, 어때 움직여 줄래, 라는 권유문을 포함한 의미였다.


“그럼 잠깐 돌아다녀야겠네요. 적마들이 이 놈을 일단 끌 수는 있겠습니까? 시신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시체 청소부들이 와서 먹어 치울 것 같은데.”


어둠숲에도 생태계가 있었다. 현재 흰뿔 큰사슴의 시신은 제냐가 잡은 몬스터의 그것으로 시스템 상 정해져 있어서, 제냐와 파티 관계가 아닌 안드레를 제외하고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게임 상에 방해가 되는 이유로 그것을 무정물처럼 본 뒤 공격을 할 수는 있겠다만, 아이템을 얻기 위한 행위들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길목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 잘 두어야 했다. 거기다 플레이어들이 아닌 NPC들, 그리고 특히 몬스터 캐릭터들은 얼마든지 시신을 훼손할 수 있었다. 그럴 동기도 충분한 녀석들이고. NPC 주민들은 다른 플레이어가 잡은 시신에서 얼마든지 전리품을 얻어갈 수 있었다.

물론, 웬만하면 그렇게 하지 않도록 은연 중에 행동 패턴이 짜여져 있기는 하다. 정말 어지간한 유인이나 퀘스트 상의 시나리오 흐름이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럴 만하다면, 벌어질 수 있다.

거기에 몬스터들은 단순히 죽은 흰뿔 큰사슴의 시신을 맛있는 먹이로 보고 달려들 수도 있었고.


지금 이 고기를 옮기기 위해 모든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기왕 잡은 전리품을 잃어버려선 본말전도이다.


안드레가 답했다.


“어. 그··· 움직이는 동선 따라 옮기다가 적당한 자리를 보면 잠깐 놔둬야겠구만.”

“좋습니다.”


제냐는 안드레에게 제법 많은 의뢰금을 주었다.


5,000젠을 선수금으로 이미 주었고 일당 3,000젠을 추가로 주기로 했다. 거기에 고기가 팔리면 인센티브를 더 주기로 했고.

그리고 그럴만큼 안드레는 다용도의 스킬을 가진 재주꾼이다.

숲 외곽, 들어오는 어귀 근처에 고기를 보관해두고 다른 이들이 함부로 가져가지 못하게 경계 병력을 세워둘 수도 있었고, 여러 마리의 몬스터들을 수족처럼 부리니 다른 일손 몇 명을 고용할 값을 안드레 혼자서 다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안드레가 휘이히,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가볍게 분 소리에 적마들이 반응했다. 히이잉, 하는 높은 소리를 내면서 뒤에 서 있던 세 마리가 앞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영식, 안드레는 손을 앞으로 저었다. 단순한 손짓이었으나 적마는 제스쳐에 담긴 뜻을 알아듣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 큰사슴의 시체에 다가섰다. 손짓만으로 지시하고 있는 건 아니었고, 보이지 않으나 MP를 활용하며 테이머 스킬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드레는 인벤토리를 열어 줄 뭉치를 꺼내들었다. 작업용의 여러 아이템들을 챙겨왔다. 운반이라고 한다면 그로서도 일가견이 있는 분야였다. 짐꾼으로서 여러번 고용을 당한 전력이 있고,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돈이 많이 벌리면, 질 좋은 아이템으로 자신의 장비를 도배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단순히 아이템은 착용하는 것만으로 확 전투력 스펙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물론 장비가 없을 때와 비교한다면 확연한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실제 아이템의 성능을 전부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플레이어의 역량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도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각기 MP 따위를 상당량 품고 있는 아티팩트 류라면 더욱 그러하다. 스킬을 하나 새롭게 익히는 것보다는 조금 쉽겠지만, 그것과도 비견할 수 있을만한 노력과 신경씀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작정 많은 아이템들로 자신의 몸뚱이를 도배한다고 전투에서 막강한 화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MP를 다루는 전투를 하는 이상 본질은 플레이어의 감각과, 의지력이었다. MP를 다루는 힘의 총체를 가리키는 말인 의지력이 날카롭게 갈고 닦아져 있어야, 저장고에 있는 MP의 양이 늘어난다고 해도 적재적소에 쏟아 부으며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지휘관이 있을 때 물자와 병력이 제 기능을 하듯이.

비련의 시나리오는 컨트롤 실력이 의외로 상당 부분, 혹은 그 이상을 차지하는 게임이었다. 뇌내 신경과 링크되어 움직이는 캐릭터이기에 느낄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유저 개인의 역량이 아주 중요하며 현실의 피지컬이 게임 내의 전투력이나 실력으로 바뀌는 면이 많다.

배 이상의 MP를 가지고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질 수 있었다.


안드레가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것은 은사銀絲였다. 안드레 역시 제냐가 그러하듯,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니 눈 앞에 반투명한 푸른 창이 떠오른다. 그의 경우에는 오른쪽 귓불을 꾸욱 눌러 꼬집는 것이다. 아플 정도는 아니어도 되고, 둔하게 면적을 잡고 넓직하게 누르면 된다. 2초 가량 누르자 약속된 인터페이스 제스쳐에 따라 창이 떴고, 거기서 손가락으로 긁듯 은사를 꺼낸 것이다.


안드레의 것은 대용량 더플백 한 5개 분량 정도는 되었다. 500L는 확실히 안되지만, 400은 넘는 정도의 양이었다.

그만한 부피에 들어갈 수 있는 양이라면 무엇이든 넣을 수 있었다. 인벤토리에는. 플레이를 하면서 인벤토리 용량을 늘리는 스킬 류를 익혀왔고, 또 관련된 칭호를 얻었기에 조금 늘어난 상태였다. 제냐에 비한다면 1.5배 정도는 많은 셈이었다.

인벤토리에 넣은 것은 수납과 정리가 편리하고, 외부 환경에 차단되어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었고, 또 무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면이 있었다.

물건을 옮겨야 하는 류의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다면 필수적으로 써먹어야만 하는 게임 상의 기능이었다.

게임 내에서 인벤토리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것을 찾고자 하면, 공간 계열의 초상 스킬이 적용된 수납 주머니, 백팩, 뭐 그런 류가 있었다.

상당히 비싼 편이었고, 고급으로 갈수록 희귀하며 구하기도 어려웠다. 적어도 초보자들이 구할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은 초기에 상업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아 캐릭터를 키울 때 인벤토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다른 NPC 행상들이 여러가지 조건들 때문에 취급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완벽하게 밀폐된 다른 공간의 수납장을 사용해 손쉽게 옮기는 것이다. 깨질 염려도 없고, 상할 염려도 없다.


제냐 역시 초기에 비하면 인벤토리 용량이 다소 늘어난 상황이었다. 인벤토리는,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최대 용량으로 자주 사용하고 사용자의 레벨이나 스텟이 상승하면 성장한다. 성장이라는 말은, 용량의 한계가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게 눈에 보일 정도의 변화는 아니었다. 아주 천천한 것이라서, 차라리 정말 생물이 생장하는 속도에 비견해도 좋을 정도였다.

며칠만에 쑥쑥 자라는 그런 류의 성장 말고, 아주 천천히 커나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 말이다.


유아기나 성장기의 포유류 짐승보다는 확실히 적은 속도였다. 거기에 지속적이지도 않았고. 또 그 외에도 여러 칭호들, 스킬들 따위에 숨겨진 효과로 인벤토리 용량의 증가가 들어 있었다. ‘사냥꾼’이라는 태그를 달고 있다거나, ‘용맹한 전사’ 따위의 수식어가 붙어 있는 류의 스킬이나 칭호들도 소폭 인벤토리 용량을 증가시켰다.

사냥꾼이라 하면 왜인지 준비성이 철저하고, 베테랑일수록 다양한 장비를 다룬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게 넣어 두었는 지도 모른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왜인지 그럴싸한 느낌, 직감 따위가 많이 영향을 미치는 세계였다.

의외로 그런 직감이라는 건, 단번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때론 본질에 닿아 있고 연유가 과학적으로 있는 결론일 때가 있었으니까.


개발자들의 직관과 거대한 용량의 데이터를 다루는 만물박사의 처리 기능은 그런 조화를 이루어낸다.


숨겨진 칭호나 스킬들도 있었고, 대놓고 인벤토리 용량을 늘리는 스킬과 육성 방향도 존재했다. 물건을 많이 옮겨야만 하는 직업인 행상 류의 삶을 살며 플레이를 하고자 하는 이들은 인벤토리 용량이 적극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마저도 일정 수준 이상 늘리기가 힘든 게 사실이었으나, 어느 집요한 고수들은 기어코 대폭 늘려서 초보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의 인벤토리를 보유하기도 한다.

그런 자들은 전투에 있어서도 상대의 허를 찌르기 쉬웠다. 일단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고 관여할 수 없는 거대한, 미지의 공간이라는 건 무엇이 튀어나올 지 모르는 것이었으니 정말로.

플레이어의 아이디어에 따라 천차만별의 전략이 나올 수 있는 구석인 것이다.


아무튼 안드레는 자신의 인벤토리를 꽉꽉 채워서 왔다. 어차피 어둠숲에서 발생하는 전리품들을 인벤토리로 다 옮길 수는 없었으니까. 거대 몬스터의 시신을 옮겨야 한다면, 옮기기 위한 준비물 만으로 인벤토리를 채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은사는 그런 노력의 흔적이다.


아주 질기고, 끝이 없어 보일정도로 긴 은사의 뭉치였다. 또한 언뜻 보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색이 옅고 가느다랗다. 그런 것을 거진 축구공과 농구공의 중간 크기 정도의 뭉치로 갖고 있었다.

안드레는 실을 풀었고, 그 끄트머리를 적마들의 꼬리에 다가가 묶었다. 히이잉, 하는 군소리를 내었지만 반항은 하지 않았다. 실이 묶인 한 마리가 신나게 뛰쳐나가며, 흰뿔 큰사슴의 시신을 묶기 시작했다.


안드레는 감각 스킬을 사용했다. 기력을 이용한 감지계 스킬이다. 순간적으로 그가 있는, 반경 십 수 미터 정도의 공간을 위에서 바라보는 시야로 인식했다. 그의 한 쪽 눈에는 그런 풍경이 보이고, 다른 눈에는 일반적인 시야의 화면이 켜져있다. 그는 초점을 조감도 쪽에 맞추면서, 시신을 잘 묶었다.


붉은 색의 피부를 가진 거대한 당나귀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다른 두 마리가 도와서, 시신의 눌린 부분을 들어올리면서 실을 묶은 당나귀가 그 아래로 지나가게끔 하기도 했다. 다리나 고개 따위를 움직이는 것이다.


세 마리의 당나귀를 동시에 조율하면서 안드레는 자신도 움직였다. 당나귀에 대한 지휘는 조감도를 바라보고, 또 머릿속에 그려지는 계획대로 MP를 부려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허벅지의 홀더에서 길다란 나이프 하나를 꺼내든다. 숏소드와 대거 사이의 길이에 있는 것이었다. 날이 두꺼웠고, 근접 무기로서 충분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끝의 날이 묵직하게 휘어져 있는 검이다.

이국적인 풍취마저 내는 검이었고, 안드레는 그것에 기력술을 부과해 날에 빛을 내기 시작하며 시신에 다가간다.

도축 스킬의 솜씨를 발휘하기 위해서였다.


묶는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라 까다롭기는 하지만, 시간을 아낄 수 있다면야. 어차피 당나귀들이 묶는 움직임도 그가 조종하고 있는 것이라 조절할 수 있었다.


도축과 관련된 패시브 스킬들이 그가 의지를 보이자 반응했고, 시스템이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 초심자라고 하더라도 능숙한 숙련자처럼 움직일 수 있게끔 도와주는 컨닝 페이퍼였다.

스킬을 통한 시스템의 유도를 느끼면서, 안드레는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에서도 이런 컨닝 페이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턱없는 소리라는 반대 의견이 머릿속에서 다시 올라오곤 한다.

효율적인 것은 언제나 찾고 갈구해야 하는 법이었으나. 쉽게 가려고만 해서는 결국 넘어지게 되어있는 법이었다.

나이가 적지 않았으니, 싫더라도 알 수 밖에 없는 인생의 법칙들이었다.


안드레는 붉은 색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흰뿔 큰사슴의 적당한 부위들을 갈라냈다. 대동맥이 있는 부위들이다. 사슴의 시신을 뒤로 주욱 끌어내고, 당나귀를 사용해 고개를 멀찌감치 빼내어 바닥에 딱 붙인다.

누워 있으나 그 시신에 약간의 경사가 생기고, 안드레는 다가가며 가죽 부츠의 단단한 밑창으로 숲의 무른 흙바닥을 파내어 약간의 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홈에 이어지는 윗부분 즈음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찾아, 나이프로 그었다.


사슴의 목덜미에 구멍이 났고, 그대로 흰 입자들이 그 속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들의 시야에 보이는 모자이크는 아주 익숙하다. 그는 장기를 볼 수 없었으나 정확히 대동맥을 그었고, 그 칼자국을 정확하게 만들어 흘러내리는 빛의 입자들이 사슴의 목줄기를 따라 아래 방향으로 떨어지게끔 했다.

강줄기가 흐르듯, 무지갯 빛이나 혹은 각도에 따라 흰 빛으로 보이는 입자들이 쏟아져나왔다. 지금은 도축을 하고 있는 과정이었으므로, 전투 시에 플레이어가 사냥감을 처리할 때보다 더욱 흰 빛이 피와 닮게 흘러나온다.

마치 액체처럼 사슴의 신체선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묘하게 점성도 있고, 양도 많으며 더 오래 남아 있는다.


그건 피를 획득하기 위한 도축 과정일 때를 위해서, 시간을 조금 더 주는 것이었다. 다만 안드레는 피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전부 버리기로 하는 중이다. 그가 신발로 대강 파둔 홈을 따라서 흰 빛의 입자들이 흘러내리다가, 조금의 시간이 지나 멀리까지 퍼져나가지 못한 채 슬슬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슴의 시신은 그가 도축 스킬로 건드렸으니, 아마 한참 동안 변함이 없으리라. 다른 플레이어나 NPC가 와서 일부러 해치지 않는 이상 이제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만큼 잘 지키기도 해야겠고.


안드레는 그렇게 사슴의 피를 빼면서, 동시에 당나귀들을 움직여 그 시신의 다리나 모가지 따위를 요리조리 돌려 은사로 잘 묶었다.

피가 빠지면서 그만큼 더 깊게 잘 묶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내부 밀도가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까. 무게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여러 군데로 돌아서 잘 휘감은 뒤에, 적마들을 사용해 옮기면 되리라.


안드레의 솜씨는 익숙했고, 제냐는 그것을 바라보며 감지 스킬을 발휘해 주변을 조금씩 훑고 있었다.

색적 스킬의 보유자이기도 했고, 또 기력 감지술 스킬 역시 진일보 해서 조금 떨어진 거리까지 능숙하게 살필 수 있었다.

감지 계열의 스킬로 먹고 사는 감지술사들만치 광범위한 곳을 한 번에 볼 수는 없었지만, 작은 카메라로 넓은 범위를 바라보듯 일부분씩 계속해서 살피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보다가 적당한 몬스터의 흔적이 발견되면 이제 색적 스킬을 이용해서 그 뒤를 시야로 좇는 것이다.


반경 수십 미터, 혹은 백 여 미터까지도 능숙하게 그렇게 색적을 이어나갔다.


제냐가 테이밍을 해서 짐꾼으로 쓰기 적당해 보이는 몬스터의 흔적을 찾았을 때, 안드레의 작업도 마무리되었다.


*

virginia-long-Yh2HnPoGbPw-unsplash.jpg


작가의말

킁.

계약 제안 메일이 하나 왔는데.

엄.............................................

뭐 그렇습니다.

별 일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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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113. 동행 23.10.23 23 2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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