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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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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0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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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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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111. 사슴의 고기

DUMMY

*


아이젠 하우드, 는 제냐의 생각보다 더 거부였다.


돈을 버는 건 좋은 일이었다. 제냐한테 있어서도 말이다. 자본금은 얼마가 있든 결국은 부족하다. 이 세상에서 플레이어가 해내려 하는 일은 대륙적인 규모가 되어야 하니까. 그래야 클리어에 다가갈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정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거래 퀘스트가 생겨난다는 건 희소식이다. 경험치를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루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퀘스트들은.


돈, 은 곧 장비 아이템이나 스킬 류의 소모 아이템으로 환원된다. 포션 값도 만만치 않기도 했고.

콘란드 대륙,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전투력을 결정짓는 요소는 크게 스탯과 스킬, 그리고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칭호’와 같은 것들도 물론 들어는 간다. 엄밀히 말하면 스탯과 스킬에 나누어져 조금씩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칭호에서 오는 효과란 결국 그것들이었으니까.


물론 눈에 보이거나 수치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요소들도 존재는 한다. 플레이어 개인의 감각과 같은 것이다. 현실에서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검도의 고수가 게임 내에서 칼을 잡는다면, 그의 레벨이나 스탯과 상관없는 강력함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의 법칙만큼이나 게임 속에선 이 내부의 데이터 값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만큼 큰 요소에 영향을 줄 정도로 그 또한 만만찮게 중요한 점이라는 뜻이었다.


일전에 릿샤 애드윈이 정신력, 집중력 따위가 현실에서도 기능이 높은 편인 인간이기에 게임 내에서 어려운 초상 스킬을 성공한 예가 있지 않은가.

그만큼이나, 정의하기 어려우나 게임 내에서 그런 말할 수 없는 요소들은 분명 큰 부분이다.

그 외에, 그런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고 전투력을 잰다면 위의 세 가지를 꼽게 된다.

저것들을 총합했을 때, 유저들이 말하는 몇 레벨 대, 의 대략적인 전투력이 나오는 것이다.


돈은 질좋은 장비로 바꿀 수 있었고, 스킬 스크롤이나 소모형의 버프 포션 아이템처럼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물건들로 바뀔 수도 있었다.

전장에서 충분히 게이머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제냐도 경험치를 좇고 스킬과 스탯을 올리고, 개인적으로 게임 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플레이 역량을 기르는 데 집중하기는 하지만 돈 역시 필요하다. 결국 강해지기 위해서는 써먹어야 할 요소들이다.


이따금씩 레벨 업을 할 때마다 주어지는 가상 점수의 일부를 젠으로 환원하고 있기는 했다. 격한 게임 플레이를 지향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포션도 잘 쓰지 않고 일부러 지독하게 사냥을 하느라 돈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많다면, 확실히 장비 스펙을 업그레이드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더 많은 포션류나 소모품들을 사용해서, 보다 더 지독한 장소에 가서 험하게 굴러볼 수도 있는 것이고. 더 큰, 더 위험한 모험은 이 세계에서 여행자들에게 더 큰 성장을 제공한다.

어느 정도는, 현실도 그런 면이 있을 지 모른다.

다만 이곳은 가상의 세계이며, 목숨을 잃어도 게임 오버가 될 뿐인 유희의 세계라는 게 다른 점이다.


아무튼, 거대한 괴수의 시체를 킬로그램 단위로 환산을 해서 사주겠다는 건 어지간한 자산가가 아니면 하지 못할 말이었다.

뼈니 하는 무게들을 빼고 친다고 하더라도, 톤 단위가 나올 게 분명하다.

거기다 단발적인 일이 아니라, 일단 한 마리 씩을 요구하고 추후에 상황을 본 뒤 지속적으로 사들일 의향도 있다고 한다.


제냐로서는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 점이었지만. 과연 거대 흰뿔 숲노루랑, 거대 딱정벌레, 그리고 보랏빛 고사리를 가지고 어떤 음식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일단 숲노루는 포유류 과의 짐승이며 멀쩡한 고기가 나오는 식재라지만, 딱정벌레는 벌레인데? 곤충을 가지고 과연 그럴싸한 것을 만들 수 있는가. 그러나 그건 제냐의 상상력이었고, 아이젠은 다를 지 모른다. 어떤 분야든 고수들은 자신만의 놀라운 한 수들이 있는 법이었다.

아이젠도 제냐의 한 수를 모르듯, 제냐도 아이젠의 숨겨둔 솜씨를 다 모른다.


제냐로서는 정말 범접할 수도 없는, 전투 스킬을 그대로 환산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의 스킬 레벨을 요리 계열로 갖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었고 아이젠이.


아이젠의 머릿속 레시피가 구현 가능한 것으로 밝혀지고, 또 제냐에게 지속적으로 고기를 의뢰한다면 제냐는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게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의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한 번, 한 마리에 억 단위의 돈이었으니까.

사실 그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건 별로 품이 들지도 않는다. 그것들을 찾아 어둠숲을 헤매는 데 차라리 시간이 들지, 사냥하는 데는 차 한 잔 마실 시간보다 아득히 짧은 시간만이 필요하다.


다만 일단 옮겨야 했기에, 제냐는 사르삿에서 적당한 테이머를 일단 수소문해 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여러 NPC들을 통해서 구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단테스 무기점의 할아버지 드워프라던가. 그가 머물고 있는 여관의 주인장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여러모로 퀘스트를 해결하면서 사르삿 여기저기에 인맥을 쌓아 두었다. 평범한 사람들도 있고, 나름대로 지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시간이 없다면 차라리 적당한 금액으로 길드Guild에 의뢰 공고를 내도 좋았고.


제냐가 발품을 팔아 운반꾼과 짐승, 그리고 마차를 구하는 데 게임 시간으로 이틀 정도가 걸렸다.


*


촤악!


하는 호쾌한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은 것이다,


라고 하면 성격 파탄자의 대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다름 아니라 무기로 피륙을 가르는 소리였으니까 말이다.


어둠숲.


사르삿의 남동부로 말을 타고 몇 시간 거리를 내려가면 있는 숲은, 상당히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마경魔境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감히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근처를 들르는 일도 없이 일부러 빙 둘러 먼 거리를 두고 지나간다.

아주 숙련된 베테랑 모험가들이나 목숨을 걸고 이곳에 들어와 사냥이나 탐험, 수색 따위를 하면서 무언가를 찾는다. 이곳에 있는 건 그저 울창한 침엽수림과 이따금씩 오르락내리락 하는 지형, 그리고 이름에 걸맞게 어딜 가도 어두운 풍경들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여러 생물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마경이라는 이름답게, 괴물이라고 불릴 생물군이다.


현실의 짐승을 상상하고서 바라보면 말문이 막힐 정도의 놈들이었다. 일반적인 숲 속의 짐승들이, 거진 코끼리만한 덩치를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는 꼴을 본다면 그 위압감은 초현실적인 지경이었다.

직경 이, 삼십 키로미터 정도의 숲에 그런 덩치들이 대체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현실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감들을 뿜어낸다.


작은 놈들, 극소형부터 시작해서 대형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종류의 생물들이 숲 속에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놈들은 흉폭한 녀석들이 많았고, 자기들의 덩치에 걸맞은 먹잇감을 사냥하며 잡아 먹는다.


거대한 생물들은 일반적인 법칙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고, 이곳은 게임 내였기에 리젠Regen(eration)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며 개체 수를 유지한다. 아마 플레이어들이 날뛰면서 잡는 수만큼 보충되고 있을 것이다.

만약 플레이어들이 없었다면, 거대한 괴수들은 아주 낮은 개체 수를 종족마다 유지하며 천천히 또 길게 살아갔을 테다.

이 세계에 급진적인 모험을 즐기러 온, 전투적인 여행자들인 플레이어들에 맞추어 그만큼 이상한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 어둠숲에서, 발품을 팔아 이런저런 장비를 구하고 동료를 찾아 사냥을 온 청년이 있었다.


동양인, 게임 내에서는 세시앙 인이라 불리는 황인종에 흑발 흑안을 하고 있는 모험가는 손에 투박한 외날검을 들고 푸른 기력을 뽐내며 괴물을 베었다.

평범한 숲노루, 처럼도 보이는 짐승이었지만 그 크기가 비현실적이었다. 거진 다 큰 코끼리만한 몸집이었고, 코끼리만큼 느리지도 않았다. 이런 생물이 있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다시금 고민하면서 그 체구를 바라보게 되는 놈이었지만 청년의 칼 앞에서는 크게 맥을 못 추고 있었다.


톤 단위의 몸무게를 가지고 있을 놈이었지만, 체형이 코끼리보다 조금 더 잘 빠졌다. 코끼리 중에서도 대형종에 버금가는 체고體高이지만 살이 조금 적었고, 대신 근육이 드러나 있으며 보다 말랐다. 훨씬 빠르다는 이야기였다.

머리 위에는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흰 뿔이 있었는데, 사슴의 뿔이 마치 어지러이 자란 나뭇가지처럼 위로 뻗쳐 있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성인 남성의 몇 배나 되는 넓이와 길이였고, 그 끝이 날카롭게 갈려져 있어 불길한 예감이 드는 모양이다.

사슴의 고개를 처박고 달려들면 숲의 흙바닥이 다 갈릴 정도였고, 어지간한 짐승들은 그대로 받히고 자신의 숨통을 내어주게 된다.


청년은 사슴의 뿔에 한 번도 맞지 않았고, 그것의 시선을 이리저리 농락하다가 외날검으로 호쾌하게 한 자락을 베어낸 것이 처음에 묘사한 촤악! 이라는 의성어였다.

흰뿔 숲노루, 혹은 흰뿔 큰 사슴이라고도 불리는 놈은 일반적인 사슴이나 노루와 같은 외형을 갖고 있었다. 마치 흰 가루라도 묻은 듯이 새하얀 뿔의 기형적인 느낌 말고는 평범하다. 둥근 반점 따위가 가죽 여기저기에 있었고, 또 크기를 어마어마하게 키워놨을 뿐이다.


청년, 모험가, 칼잡이, 차갑게 내려앉은 시선으로 사슴의 옆구리를 베어 넘긴 용병은 제냐 킴이었다.

제냐는 오래 시간을 끌지 않았고, 채비를 갖추는대로 바로 어둠숲으로 떠났다. 지금 그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사슴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제냐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동양인 남성이 한 명 더 있었다. 제냐보다는 나이가 한참 많아 보인다. 적어도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인간이었고, 그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문 채 팔짱을 껴고선 제냐가 싸우는 꼴을 구경한다.


“······.”


촌스러운 붉은 브릿지를 머리칼에 넣은 남정네였다. 사내다운 얼굴이었고, 동그란 편이다. 체격은 제냐와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두꺼운 편. 그 역시 가죽 위주의 경갑옷을 착용하고 있었고, 몸 이곳저곳에는 유사시에 써먹을 수 있을만한 다양한 장비와 무기가 달려 있었다.

어둠숲에 오기에는 조금 부담스럽다, 는 것이 가만히 서서 사슴을 죽이는 제냐를 바라보는 남자의 심정이었다.

그의 레벨은 이제 61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둠숲이 아닌 다른 곳을 사냥처로 삼아야 하는 레벨이다. 레벨에 비해 확연하게 뛰어난 강함을 보유한 특수 케이스도 아니었으므로, 사내에게 어둠숲은 부담이다.

그러나 몇 가지 조건을 단 채로, 제냐와 함께 들어온 차였다.


저기,


촤악!


하고 다시금 흰뿔 큰사슴의 옆구리에 자상을 하나 더 한 청년은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확실히 강한 플레이어였다.

수 억에 달하는 플레이어가 이 콘란드 대륙에 흩뿌려져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저런 강함을 보유하고 있지는 못했다.

사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레벨 100대 이상의 ‘고수’라고 불릴만한 전투직 플레이어들은 고작해야 만 단위가 아닐까.

아직까지 이 세계에서 플레이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실정이었다. NPC들 중에서 고수들을 찾고자 한다면 그보다는 많으리라. 일단 한 나라의 최고위급 기사단만 셈하더라도 말이다.

초상술사, 온갖 종류의 전투가 가능한 기인들을 다 찾는다면 더 할 지도 모르고.


거기서 다시 200, 300으로 넘어가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그, 중년의 사내, 안드레 박은 제냐의 정확한 레벨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 제냐의 전투력은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애초에 흰뿔 큰사슴이나 거대 딱정벌레 따위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는 양반이었으니, 기본적인 전투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내용의 의뢰였다.

제냐가 ‘검기劍氣’에 가까운 검력을 쓰는 것을 보고서 안드레는 그를 따르기로 했었다.


중년의 사내, 는 테이머였다.


“끼이이이이!”


사슴이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울부짖고, 춤을 추듯 스텝을 밟는다. 제냐는 거기에 휘말리지 않고 발굽 공격들을 피해내다가, 앞다리의 관절을 타고 올라가 그대로 허벅지 즈음에 길다란 자상을 만들었다. 놀라운 묘기들이었다. 사슴은 빠르다. 그리고 거대하다. 길고도 커다란 다리와 몸집을 움직여 제냐를 잡고자 한다면 따라잡지 못 할 리가 없는 속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냐는 그 모든 공격들을 피해내고 있었다.

크게 움직임을 만들어 피하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거리, 몇 발자국 앞에서 사슴의 발굽이 땅바닥에 구덩이를 만들어내는 걸 보면서 여유롭게 피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가가야 할 때는 금세 다가가서 사슴의 몸 위를 놀이터처럼 삼고 있었고.


저건 단순히 신체 능력만으로 가능한 건 아니었다. 스텟이 50에 가까워지면, 단순 계산으로 운동에 능숙한 장정의 16배에 가까운 능력들을 갖게 된다. 정신력이나 집중력도, 일반적으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능력 중 평균치에서 가장 높은 것을 뽑아 스텟의 원점으로 삼는다.

여러가지 능력들이 열 배가 넘게 한 명의 몸뚱이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그건 열 명의 장정이 있는 것과 비교해서도 아득하게 높은 수준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힘이다.

열 명이 완벽하게 한 몸처럼 타이밍을 맞추어서 어떤 부위에 타격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많이 훈련을 한다고 해도, 결국 시간이 늦고 어려워질 것이다. 반면 그만한 힘을 한 사람의 뇌로 통제하고 있는 초인들은 10배 그 이상의 위력마저 자신의 노력으로 낼 수 있었다.


거기서 필요한 게, 이제 운동신경이라고 불리는 무언가였다. 게임 내의 일이니까 사실 말하자면 뇌파와 관계된 것이기는 하다만, 결국 이 뇌파를 이용해 현실의 육신을 움직이던 사람이 내부에 들어와 컨트롤 하는 것이기에 현실의 운동 능력과 연관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제냐는 그도 몰랐지만, 운동에는 제법 소질이 있던 모양이었다. 취미 그 이상의 수준으로 운동을 한 적은 평생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제와서 아깝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나름대로 지금껏 살아온 삶이 만족스러웠고, 자랑스러운 구석도 있었으니까.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했지만, 그런 눈에 보이는 성과만으로 누군가의 삶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개인의 마음가짐, 양심,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 뭐 그런 것들이 삶의 행복도와 만족도를 결정짓는 데 도리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올바르게 살았느냐,


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만치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쓰는 개인이 있을 뿐이다.


중년 사내의 시점에서,


잠시 제냐의 시점으로 옮겼을 때 그는 허벅다리에 자상을 내고 옆으로 돌아 달렸다. ‘사슴의 몸을 타고서’ 말이다. 제냐는 수직 보행 스킬을 갖고 있었다.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는 벽을 그대로 타고 달릴 수 있는 스킬이었고, 기력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력술의 스킬 레벨과 능력, 운용력이 올라갈수록 호응해서 스킬 레벨이 오르며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제냐는 이미 실질적으로 고수에 가까운 능력치를 갖고 있었고, 다양하게 변하는 땅바닥처럼 보이는, 움직이는 사슴의 몸뚱이를 어렵잖게 타고 달릴 정도가 되었다.


거대한 사슴의 허벅지 위쪽을 가로로 한 번 베고, 그대로 달려 옆구리 쪽으로 넘어간다. 코끼리 중에서도 덩치가 큰 놈 정도였다. 사슴의 크기 말이다. 타고 달릴 정도의 몸집이다. 그대로 몇 발짝 걷자 사슴의 옆구리여서, 제냐는 비스트 슬레이어로 호흡이 남을 때마다 길게 옆으로 베며 달린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친 가죽이 베인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뜯어내는 것과도 조금 닮았다. 스파크가 튀고 있는 푸른 비스트 슬레이어다. 이미 기력술로 칼날을 강화하고, 그 위에 다시 번개의 기운을 덧씌우는 이중 강화를 하고 있는 채다. 어둠숲의 몬스터들은 그래도 레벨이 좀 있는 녀석들이라, 손쉽게 잡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스킬들을 너무 아낄 수도 없었다.


번개로 이루어진 칼로 보일만치, 언뜻 보면 비스트 슬레이어가 그렇게 방전했다. 그런 상태의 칼날이었기에 베이는 것이지, 아니었다면 훨씬 힘들었으리라. 가죽은 확실히 코끼리의 그것보다도 두꺼웠다. 지금 비스트 슬레이어에 실린 기력은 MP로만 따져도 이 백 정도가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그것이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극소량씩 손실되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에너지와 집중력이라면 철도 베어낼 수 있다. 보기에만 짐승의 가죽이지,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은 가공하는 데만도 상당히 애를 먹어야 하리라.


사슴이 “끼이이이!” 하고 비명을 지른다. 통감은 확실히 살아 있는 모양이다. 제냐는 그대로 땅바닥과 수평이 되게, 옆으로 기운 꼴을 하고서 옆구리를 달리다 다시 한 두 발 위로 뛰어 사슴의 등허리에 탔다.

근육과 함께 사슴의 뼈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사슴은 자신의 몸 위에 위험한 생물이 올라왔다는 걸 직감하고, 괴성을 내지르며 등줄기를 솟구치게 만들었다. 퉁기듯이 몸을 이리저리 뛰어대는데, 보통이라면 이미 떨어졌겠으나 수직 보행의 요령으로 용케도 몸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조금 부족할 것 같아서 왼 손을 무릎 꿇고 짚어, 거기에도 접착력을 만들어낸 뒤 사슴의 등줄기 털에 갖다 대었다.


어지러울 정도의 속력으로, 어둠숲의 공터를 사슴이 뛰었다. 코끼리같은 놈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날렵하다. 사슴이 고양이가 등을 세우듯 한 번 크게 뛰었고, 그러고도 제냐가 떨어지지 않으니까 자신의 몸을 거목에 들이 박는다.

쿵!

살벌한 소리와 함께 무너진 건 거목이었다. 침엽수 하나가 그대로 기울었다. 확실히, 코끼리랑 이 흰뿔 큰사슴이 싸우면 이 놈이 이길 테였다. 코끼리는 강력하지만 둔하다. 이 흰뿔 큰사슴은, 코끼리보다도 강하면서 속도는 아득히 빠른 놈이었다. 확실히 ‘괴물’로 분류될만한 녀석이다.


HP만 따져도 2만에서 3만은 가볍게 넘으리라. 괴수에 준하는 HP였다. 제냐보다는 낮은 것이었으나, 이 게임 내에서 HP는 단순히 숫자만으로 다 설명되는 요소가 아니었다. 거대한 체적을 갖고 있는 사슴이라, 똑같은 HP라고 해도 사슴의 것을 닳게 하기 위해선 제냐가 훨씬 더 많은 공격을 해야 한다. HP는 비슷하거나 사슴이 낮아도, 방어력이 높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거대한 몸뚱이를 가누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슴의 체조직은 제냐의 그것보다 아득히 견고하고 강력한 구조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

이만한 몸뚱이가 고양이처럼 움직이려면, 그건 현실에서도 아득한 과학 기술력이 필요한 거대 로봇이 된다. 21세기의 말미를 바라보고 있는 현대의 과학 기술은 그런 류의 거대 로봇을 만들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군사 기밀에 대해서 그가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각국의 첨단 병력들에는 그런 과학 병기들이 존재한다고. 다만 아직까지는 지상전에 국한되며, 먼 옛날 만화 따위에서 나오는 상상들이 실현되기까진 아득히 먼 시간이 남았을 테다.


그런 각국의 첨단 로봇보다 이 거대한 사슴이 조금 나은 점은, 고작해야 일반적인 철 정도의 강성이 가죽에 담긴 방어력의 한계라는 부분이다. 거기에 미사일이나 총기가 발사 가능한 구멍들도 없었고. 그래도 그 정도면 할 만한 것 같았다. 벨 곳이 많은 깡통 로봇같은 느낌이니까.

제냐 역시 스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다행히도 이 세계엔 ‘SP(Supernatural Power)’라는 게 존재해서 초인들이 정말 한계 이상의 일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고 있었다. 몇 종의 스킬들을 칼처럼 벼려내어 높은 수준으로 사용한다면 깡통 로봇 정도를 박살내는 건 ‘가능한 일’ 수준으로 내려오게 된다.


침엽수 하나를 반대 쪽으로 기울여 쓰러뜨려버린 사슴이었다. 그 위에 매달려 있던 제냐 역시 충격이 상당했다.

다행인 점은, 그 부딪히는 순간에 제냐가 비스트 슬레이어를 등줄기 깊은 곳까지 찍어내어 버텼다는 점이었다.

사슴에게 있어 불행한 사실은, 그 녀석이 나무에 부딪히는 힘이 워낙 강하고 충격이 세서 제냐가 비스트 슬레이어를 붙잡은 채로 뒤로 조금 미끄러졌다는 것이다.

제냐의 몸에 다가오는 충격 역시 어마어마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비스트 슬레이어의 절삭력에 의해 등줄기가 갈라져버린 사슴의 고통이 조금 더 날카롭고 심각한 격통을 불러 일으켰다.


“끼아아아아아!”


고라니가 우는 소리를 한 수십 배 정도 키워놓은 느낌이었다. 귀가 먹먹하다. 물리 스텟들을 단련하면서 신체의 말단과 각 부가 단련되며, 청력을 관장하는 기관들도 강화되지 않았다면 멀었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근처에서 듣고 있는 셈이었으니.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안드레 박은 사정이 나았다.


안드레 박의 시점에서,


그는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사슴과 제냐가 드잡이질을 하는 것을 여전히 보고 있다.

강한 플레이어였다, 제냐는. 레벨도 뭣도 모르지만 사슴을 상대로 능숙하게 잡아 죽이고 있었으니까. 안드레는 테이머였고, 다양한 짐승들을 부려 전투도 가능한 사내였으나 지금 당장 저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어둠숲에 들어와 사냥을 하려면 일단 초입에서 적당한 놈들을 골라 하나씩 테이밍을 하고, 그것들을 자본금 삼아 돈을 불리듯 차차 강력한 놈들을 잡아다 다시 길들이는 지루한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고도 이렇듯 어둠숲 심처 쪽으로 들어오면 언제 잘못될 지 모르는 불안감에 안심할 수 없었고.


그가 느끼기에, 그리고 제냐가 말한 바를 정리해 계산해보면 아마 100레벨 근처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고수高手’라고 직접적으로 일컬어지는 레벨 구간이었다.

실제로 제냐가 사용하고 있는 건 정확히 검기劍氣는 아니었지만, 푸르른 도신에 기력을 덧씌워 강화시키는 그 위력이 그에 버금가고는 있었다. 고수들이 사용하는 정확한 그 스킬을 쓰지 않는다 뿐이지, 위력과 내용이 같다면 그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저러고도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고, 아마 계속해서 또 강해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안드레가 제냐의 의뢰를 수락한 이유였다.


사르삿 용병 길드에 소속된 은급 용병인 그는 어느덧 시나리오 온라인을 플레이 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사내였고, 그동안 여러 퀘스트를 겪고 여러 상황들을 겪으면서 이 게임 내에서 나름의 베테랑이라 불릴 만한 남자였다.

게임 내에서 베테랑이 되어봤자, 뭐 현실에서 좋은 일도 없기는 하다만은. 그 역시 취미로 게임을 즐기고 있기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현실에서의 일도 그다지 안 되는 것은 없었다.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이라는 게 걸리기는 하지만. 그저 사업 상의 이야기를 하자면 현실은 순탄하다.


회계, 세무 관련 업무를 보는 전문가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무소의 사장이었다, 그는. 아직 이렇게 게임을 즐기고 있을 만한 나이는 아닐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일을 아주 잘했다. 그는 이제사 직접적으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영업에 관련된 인맥들을 관리하고, 밑에 있는 사원들의 일처리의 마지막을 보고 약간의 첨언 정도만 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쁜 시기는 있다만. 지금은 물론 그런 시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연달아 있는 휴일 날 시나리오 온라인에 접속해서 사냥을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제냐는 산슈카의 마경 중 하나인 어둠숲에서도 충분히 통할만한 실력의 소유자였고, 그는 그를 믿고 이 안에 들어왔다.

‘테이머’라는 클래스를 또 몇 종류로 나누어 본다면, 로웰 드버에 가까운 성향을 갖고 있는 게 그였다.

몹들을 길들여서 자신의 수하, 수족으로 삼고 전투를 치르는 테이머들이었다. 그런 이들도 분류가 나뉘게 마련이었고, 보통은 소수의 짐승을 엘리트 몬스터로 키워내서 플레이 내내 유대감을 이어 나가는 부류가 조금 더 일반적이었다. 그는 소수파에 가까웠고, 몬스터들이 날뛰는 전장에서 즉각적으로 테이밍을 해서 여러 마리를 다루는 식으로 스킬들을 가꿔왔다.


단기간에 큰 전투력을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테이밍할 몬스터들이 계속 수급만 된다면 MP가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전투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도 강력한 점이었다.

다량의 MP가 그런 류의 테이머에게 가장 중요하게 된다. 안드레, 미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이후 주욱 한국에서 자라난 그의 이름은 박영식이었다. 게임 내에서는 성을 두고 이름만을 닉네임으로 바꿔 사용할 수 있기에 안드레라고 정한 것이었고.

어쨌든 고로 안드레 역시 여러 종류의 스탯들 중에서 정신력과 집중력에 거진 자원을 다 투자한 케이스였다. 레벨업을 해서 얻게 되는 가상 점수는 다음 레벨업 시기까지 어떤 스텟의 성장을 더 가속할 지 정할 수 있었다. 그는 약간의 명예 점수, 그리고 돈으로 환전한 것을 제외하면 전부 정신력과 집중력의 성장치 증가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거기에 장비하고 있는 몇 종의 아티팩트들 역시, MP량을 증가시켜주고 또 그 회복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맞추었다.


MP회복량이라는 건, 갖고 있는 것만으로 MP가 급속도로 차오르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만 MP포션을 복용했을 때 회복되는 MP의 양을 더 늘려준다는 뜻이었다.

그 외에 자연적인 회복량 역시 늘려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HP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다시 차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증가였다.

전장에서 유의미한 회복률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만으로.


또한 ‘오브Orb’ 종류의 아이템을 주력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둥그런 모양을 가진 구슬, 혹은 보석 류의 아이템은 막대한 양의 MP를 담아놓고 배터리처럼 초상술사들이 쓰곤 하는 아이템이었다.

초상술을 사용할 때 위력을 증폭시켜주고, 고급품들은 간혹 의지력 자체에도 추가 보정을 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지력’이란 MP를 다루는 힘을 이야기하며, 곧 더 정밀하게 적은 MP소모로 높은 위력의 스킬을 쓸 수 있도록 한다.


겉으로 보기에 영식, 안드레 박은 평범한 근접 계열의 전투 클래스 플레이어였으나 보이지 않는 안쪽으로 수많은 장신구 따위를 끼우고 있었다. 손목에도 가죽과 금속 합판이 섞인 건틀렛 속으로 팔찌가 몇 겹이나 있었고. 목걸이 따위도 옷 안으로 감추었다.

모두 보석류가 잔뜩 섞인 물품들이었고, MP의 배터리 대용으로 사용한다. 한 번 사용하면 아이템마다 충전 시간이 있어 정비를 하며 다시 채워주어야 하는 식이었다. 완충되는 데 아이템 별로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안드레가 직접 MP를 주입하면 조금 더 빨리 충전이 되는 식이었고.


안드레의 뒤쪽으로는 붉은 당나귀가 세 마리 있었다. 적마赤馬라고도 불리는 종이었고, 어둠숲 외곽에 서식하는 녀석들이다. 몸체는 어지간한 말의 1.5배에서 2배까지 큰 놈들이고, 나무에 기대어 멀리를 구경하고 있는 안드레의 키보다도 머리 한, 두 개 정도는 더 큰 녀석들이다.


푸르릉, 거리면서 얌전하게 숲바닥에 떨어진 열매나 풀 따위를 주워먹거나, 혹은 가만히 안드레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이다. 붉은 색의 피부를 가졌고 눈깔을 가만히 바라보면 조금 날카로운 야성이 느껴진다. 원래 순종적인 종은 아니었다. 도리어 사람을 보면 달려드는 맹수에 가까운 놈들이었지. 잡식성이었고,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가리지 않고 먹는다.

어둠숲이라는 동네에 사는 놈들이니만큼 평범한 말이나 당나귀와는 궤가 다른 녀석들이다. 레벨로 전투력을 따지자면 4, 50정도 선에서 잡을 수 있으나 힘이 아주 좋다. 각력이 뛰어나고 짐을 옮기기에는 최적화 되어 있었다. 코끼리만한 사슴을 옮길 수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도전을 해보고, 안 되면 주변에서 다른 몬스터 몇 마리를 더 테이밍해서 데려와야 할 판이었다.


안드레는 기력 감지술을 조용히 켰다. 팔짱을 끼고서, 침엽수 하나의 몸통에 비스듬히 옆으로 기댄 상태였다. 제냐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 외에는 지금 당장 할 일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필드는 그 자체로 위험한 곳이었기에, 이러고 있다가 어느 정신나간 플레이어나 NPC, 혹은 야생의 몬스터에게 어그로라도 끌린다면 목숨이 간당간당하다.

물론 그럴 때는 저기, 사슴과 드잡이질 하는 제냐라는 녀석이 저 몬스터를 내버려두고 나서라도 이쪽으로 달려와 그를 구해주기는 할 테다. 그 정도의 능력이 되는 녀석 같으니까, 믿고 온 것이었지.


자신의 레벨대에 맞는 권장 지역보다 위험한 곳에 오는 일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뭐, 나름대로 플레이에 대한 감각은 있는 편이니 마냥 허무하게 게임 오버를 당할 리는 없겠지만은. 그는 큰 욕심은 없었고, 안전하게 가능한 이 게임을 오래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말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중장년에 불과한 나이이기는 하다. 그러나 사업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고, 자신이 직접 발로 뛰는 것보다는 아랫 사람들을 적당히 관리하면서 그들의 불만과 요구 사항을 풀어주는 게 그가 해야 할 일이다.

첫째로는 물리적으로 휴일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유이기는 했지만, 둘째로 여러 사람들을 계속해서 관리하면서 받는 은근한 스트레스가 있는 점도 그가 혼자 게임을 즐기고 있는 원인이었다.


사업장을 근처에 두고 어디 멀리, 본격적으로 여행을 나다니기도 힘든 게 사실이었고. 잠깐 며칠 정도는 다녀올 수 있겠지만 조금만 길어지면, 사무소에 별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돌아와야 하는 게 실상이었다.

그나마 그가 즐길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의 여행이나, 휴가라고 하는 게 바람직하리라.

테이머로서 스킬을 익히고 클래스를 정한 것도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을 다룰 수 있어서, 였다. 그는 짐승들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니까.

집에서도 만약 시간이 아주 많았다면 고양이나 개 따위를 길렀으리라.

사업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패턴화 되어서 지금까지 오기에 이르렀다.


이 게임 내에서는 고양이나 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을 구경하고 또 길들이고 다룰 수 있으니 적잖은 재미 요소이다.

거기다 여러 종류의 VR 프로그램들을 경험해 본 그로서도, 입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는 게임이었다. 정말로 어느정도 먼 외국으로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사정을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는 떠돌아다니는 걸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다양한 몬스터나 짐승류의 몹들을 길들여 타고 달리거나, 혹은 날기까지 하면서 여러 지역을 돌아보았다.

아직 중부 대륙 바깥으로 벗어나 본 적은 없기는 하지만.

앞으로 레벨이 조금 더 오르고 스킬 수준도 노련해진다면 다양한 필드와 지역을 구경해 볼 심산이었다.


그런 그의 계획에 있어서, 돈은 중요한 요소였다. 콘란드 대륙에서의 돈, 젠Jen은 말이다. 제냐는 하는 일에 비해서 상당히 짭짤한 수준의 보상을 약속했고, 또 어둠숲이라는 부담에 대해서도 자신이 확실하게 지켜주겠다고 보장을 했으니.

혼자라면 오지 않았을 곳이었지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라도 하는 셈치고 이렇게 구경하는 게 또 나쁘지만은 않다.


쾅, 쾅!


하는 끔찍한 굉음과 함께 사슴이 여기저기에 제 몸을 들이박는다. 그 때마다 침엽수림을 이루고 있는 짱짱한 거목들이 흔들렸고, 그 위에 달려 있는 제냐는 더욱 더 칼을 깊이 박아넣었다.

그와 함께 사슴은 더욱 큰 비명을 지른다. “끼야아아아아아아!” 고라니의 울음 소리는 한국에 사는 그로서 익숙한 것이었다. 또 군부대를 다녀왔었으므로. 아직 개발이 다 이루어지지 않은 야지에서 근무를 섰던 경험이 있는 그는 한반도에 서식하는 여러 종의 야생 동물들을 본 경험이 있었다.

개중에 위험한 종류는 직접 실탄으로 잡기까지 했었고.

한적한 동네에서 경계 근무를 군인으로서 서고 있다 보면, 적군의 위협보다는 그런 자연물에 의한 돌발 상황이 차라리 더 잦은 편이었다.


그것도 어언 수십 년 전이기는 하다만. 그 경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지금도 한국이 빼곡하게 다 개발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몇 곳들은 그린 벨트 구역으로 지정되어서 산림 지역이 여전히 남아 있기도 했었고.

어쨌든 현실에서도 들을 수 있는 그런 류의 소리를 어마어마하게 키워 놓은 느낌이다. 거리가 깨나 떨어져 있는데도 굉음이라고 들릴 정도면, 저 몸체 위에 타고 있는 제냐로서는 거의 소리를 사용한 공격처럼 느껴지리라.

제냐를 흘끗 본다.


공터의 끄트머리, 원형의 공간에서 안드레와는 가장 먼 자리에 있는 흰뿔 큰사슴과 제냐였다. 안드레는 이곳에 들어와 나름대로 스탯을 올렸으니, 현실에서의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들을 갖고 있었다.

정신력 위주로 올렸다고는 하지만 다양한 사냥터에서 구르다보면 스탯이 오르지 않을 수도 없다. 이미 일반적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순발력 위주의 스탯들은 캐릭터 신체의 다양한 감각 기관들을 강화시킨다. 거기에 나름대로 스킬들을 익혀 놓은 그가 눈쌀을 찌푸렸다. ‘사냥꾼의 시야’는 먼 거리에 있는 사물을 망원경으로 보듯이 핀포인트로 잡아 보는 데 유용하다.

사슴의 등 위에 올라탄 채로 칼을 쥐고 있는 제냐의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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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114. 돌아갑시다. 23.10.25 20 3 29쪽
114 113. 동행 23.10.23 23 2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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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사슴의 고기 23.10.20 29 3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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