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경기가 끝나면, 정말로.'
가문의 존귀한 사명.
여태까지 그것 하나만을 위해 그녀는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화를 내도, 불평해도 소용없다. 이것은 자신의 운명이고, 몸에 흐르는 피는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정말로 존귀했을까.
어쩌면, 이전 자신이 이겨왔던 경기에서...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때 가문은 트레이너를 내쫓고 싶어 혈안이 되어있지 않았던가. 조작까지 해가면서 그녀가 바라는 일을 이루어줄 턱이 없다.
그때는 단순히 그럴 필요를 못 느꼈던 것뿐이라면?
...추측에 불과하다. 그저 레이스에 대한 조언일 뿐일 수도 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늘 하던 대로, 메지로 가문의 자랑답게...
"맥퀸, 안색이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으세요?"
"네, 네?"
그녀의 상념을 깨트린 것은 종종 이야기하고 지내던 메지로 도베르였다.
"스위츠도 잘 안 드시던데, 당이 떨어진 게 아닐까요?"
"라이언 씨, 겨우 그런 문제일리가..."
"...괜찮아요. 다이어트를 오래 해서 현기증이 온 거 같아요. 오늘은, 치팅 데이로 할까요? 제가 살 테니 두 분도 같이 가시죠."
맥퀸은 라이언의 장단에 재빨리 맞추었다. 그녀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애써 평소의 모습을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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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그렇게 안 봤는데 다 가식이었네."
"맥퀸은 상관없잖아."
우마무스메의 청력은 인간보다 밝다. 트레센 학원의 건물에는 평균 이상의 방음 대책이 적용되어있으나, 완벽하지는 않다.
화장실 앞을 지나가던 맥퀸 일행이, 안에서 새어 나오는 수다 소리를 듣는 것 역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야, 그러면 지금 메지로 가문이 라이스한테 하는 짓을 맥퀸이 모른다는 소리야? 아무 관계 없는 우리도 아는데?"
"그 아무래도 중요한 경기에 져서 상심도 클 테고, 관심도 없으면..."
"누군 경기에 져본 적 없어? 그리고 라이벌이라면 다음에 어떻게든 이기겠다고 자세히 조사하는 게 보통 아니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맥퀸과 일면식도 없는, 그저 같은 학교에 다닐 뿐인 두 우마무스메의 대화. 그것은 인기인에 대한 흔해빠진 뒷담, 소문에 불과한 것이다.
친한 상대도 아니고, 배신감을 느낀다든가 할 여지는 없다.
그래도 면전에서 뒷담을 들은 두 사람은 아연실색하여 맥퀸을 급히 달랬다.
"맥퀸 씨,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나쁜 사람들이네요...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맞아요. 라이스 씨의 일은 안타깝지만, 저희 가문 일은 아닐 거예요. 할머님이 그러실 리가..."
"죄송합니다. 먼저 갈게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가면이 벗겨지기 전에 간신히 그리 내뱉고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다.
""맥퀸 씨!""
애타는 두 사람의 부름을 뒤로 하고.
무엇이 존귀한가, 무엇이 사명인가.
거짓, 위선, 속임수, 무책임. 이 단어들 사이에 존귀함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남을 부당하게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 가문의 사명인가?
역겹다. 끔찍하다.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녀를 평생 속박해온 메지로 가문이, 반항할 생각 한번 못 하고 굴종해온 맥퀸 자신이.
당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트레이너와의 관계도 인정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바보였어..."
트레이너는 맥퀸이 메지로 가의 영애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의식하던 순간이 있다면, 그녀의 짐을 함께 들어주기 위해서였지.
처음부터, 하다못해 트레이너가 쫓겨날 때, 호적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항해야 했다.
나중에 바로잡겠다는 것은 의미 없는 변명이었고, 언제나 도망쳤을 뿐이다. 오늘을 타협하며 사는 사람은, 내일도 타협하기 마련이니까.
자신은 무엇을 위해서,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의 손을, 놓아버렸던 걸까.
"죄송해요, 죄송해요..."
가문은 틀렸다.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오늘의 고통은, 수많은 부조리에 맞서지 않았던 그녀에게 주어진 벌이겠지.
무엇을 모른다고 말해왔던 걸까.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
그것은 분명 부정에 대한 암시였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영혼 한 조각마저 더럽힐 추악함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까. 자신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가문에 맞선단 말인가.
트레이너가 있었더라면 분명히 도와주었을 텐데.
'정말로 가문마저 잃어버리고 나면, 무엇이 저에게 남는 걸까요...?'
맥퀸은 이미 그를 잃어버렸다.
그 잔혹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혼자서 걸어간다는 것은, 이렇게도 힘든 일이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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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펼쳐 온 공작들이 연달아 실패로 돌아가면서 메지로 가문 역시 이미지에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은 건재했다. 입에 발린 비난으로 무너트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닌 데다가, 비이성적인 믿음은 이성적인 논리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모든 일들이 메지로 가문의 소행이라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타카라즈카 기념의 결과는 이전 경기의 부정을 판별하는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최상위권 사이의 실력 차는 하위 리그에서만큼 극단적이지 않을뿐더러, 승패에는 그날의 컨디션이나 마군의 움직임 같은 운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작용한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므로, 일단 분위기는 확실하게 뒤집혔다.
광신도는 전체 지지자 중 일부에 불과하기 마련이라서, 메지로 가문이 주도하던 마녀사냥은 이제 동력을 상실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라도 들고 오지 않는 한, 3번이나 같은 수법으로 선동을 시도해봐야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장은 반격을 위해 메지로 가문의 치부를 밝혀내는 일에 트레센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라이스와 트레이너에게 쏟아지던 날 선 비난의 목소리는 응원과 위로에 묻힐 정도로 작아졌다.
폭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구름이 언제까지고 햇빛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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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 좀 더 자고 싶어.
그래도... 꼭, 이겨야 하니까. 지금은 참아야 해.
트레이너실의 문을 열었을 때,
"어서 와, 라이스."
오라버니가 웃으며 맞이해주는 일이 이렇게나 기쁜 일이었을까.
혼자서 준비하고, 트랙에 나가서 달리는 일이, 몇 달 동안 익숙해져서.
이제는 지난 일이지만.
"아침부터 라이스 때문에 고생이 많네."
"에이, 원래 트레이너 일은 다 이런 거야. 신경 쓰지 마."
오라버니를 보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어제도 라이스를 바래다줬으니까, 더 늦게 잠들었을텐데...
"참, 좋은 소식이 있어."
요즘 좋은 소식이란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책상 아래를 뒤적이던 오라버니가 상자를 꺼냈어. 편지가... 잔뜩 든..?
"에?"
무심결에 지난달의 일이 떠올라서 움츠러들었더니, 오라버니는 쓰게 웃고는.
"이번에는 달라."
산더미처럼 쌓인 편지 봉투들은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했어. 저런 걸 처음 본건 아니야. 하지만, 분명히...
"설마 팬레터...? 라이스에게?"
"전부, 네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아.
"라이스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게 아닐까 생각해."
그런 라이스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오라버니는 편지를 몇 개 골라내서 읽기 시작했어.
"나쁜 소문은 신경 쓰지 말아요. 저도, 다른 팬들도 라이스 씨를 믿고 있어요."
"맥퀸을 앞지르는 순간은 정말 대단했어! 타카라즈카 기념에서도 라이스의 실력을 보여줘."
"...라이스 씨에게서 에러 코드 [슬픔]을 감지. 디버깅 오퍼레이션 [편지 작성]을 시작합니다..."
웃음이 나서,
"부르봉 씨... 편지는 로봇 같지만... 정말 기뻐."
기뻐서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데,
"말했잖아, 할 수 있다고. 라이스가 행복을 전해준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어. 물론 나도 그렇고..."
왜 오라버니 말을 들으니까 눈물이 나는 걸까.
다신 울지 않으려 했는데, 왜 이런 행복한 순간에 눈물이 날까.
갑자기 그렇게 터진 눈물을 오라버니가 닦아주었어. 그 품 안에서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포기했던 꿈을 되찾아서, 다시 이루자고 다짐했어.
국화상이 끝났을 때보다 더 맛있는 케이크를 먹으러 가자. 졸리면 오라버니한테 무릎베개를 해달라고 하자.
이번 경기가 끝나면, 정말로 마음껏 데이트도 하고 싶어.
조금만 더 참아, 얼마 안 남았어.
- 작가의말
이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애인과 결혼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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