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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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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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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08,562

작성
24.05.2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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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글자
13쪽

백리세가 (2)

DUMMY



사전에 백리담에게 이야기해놓은 덕분인지, 백리세가에 가까워졌음에도 아무도 그녀를 마중나오는 이가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조용하게 돌담길을 따라 백리세가의 후원 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높은 돌담길을 보니, 역시 백리세가의 세력이 대단하긴 하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세가 규모만으로도 고향 현의 사람을 모두 합치고도 남을 듯 했다.


수레를 멈추고 조그마한 문을 통과하니 널찍하고 고요한 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한 가풍과 고급스러운 취향이 잘 드러나는 아름답고도 은밀한 곳이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한 백발노인과 몇몇 무인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 모두와 마치 한 가족인 것 마냥 반갑게 인사를 나눈 백리연이 노인에게 우리를 소개했다.


“허 총관, 이 분들은 이번에 저희를 크게 도와주신 분들이에요. 이 곳에 있는 동안에는 절대 소홀히 대접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아가씨의 말씀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꼬부랑 허리에 주름살이 잔뜩 진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인사해보였다. 사람 좋아보이는 넉넉한 인상을 갖추었지만 눈매는 날카롭고 귓볼이 두툼했다.


‘이 자가 바로 백리세가의 전체 부(富)를 관장한다던 허총관이구나!’


큰 돈을 굴리는 사람 답게 역시 범상치 않은 인상이었다. 나는 존경심을 가득 담아 허총관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평소보다 곱절은 더 예의바른 나의 모습을 보던 백리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인정산 너머 오방현이라는 곳에서 왔는데, 상인 쪽으로 큰 꿈을 키우고 계신 분입니다. 나중에 허총관께서 여유가 된다면 우리 세가의 표국이나 상점 관리의 묘(妙)에 대해서 좀 설명해주시면 좋겠네요.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에요”


백리연이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할 줄이야! 나는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어보였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무림인들을 만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소중하고 보람찬 순간이었다.


“전설과도 같은 분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다면 커다란 영광이겠습니다!”


“영광은 무슨··· 저 또한 일개 집사일 뿐입니다. 늙은 몸을 핑계로 뒷방에 앉아 있는 지 오래된 터라, 중원을 돌아다니며 꿈을 키우는 젊은이를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허총관이 자신을 낮추며 이야기했지만, 백리연이나 대식에게 전해들은 그의 위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백리세가 산하에 있는 그 수많은 상단들과 표국들이 그의 손짓 한번,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던가.


존경어린 눈빛으로 노인네를 바라보는데, 그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 또한 심상치 않았다. 주름기 자글자글한 눈으로 꼼꼼히 나를 관찰하던 허총관이 호오- 감탄사를 내뱉었다.


“참으로 재미있군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내가 되물었으나, 허총관은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백리연이 눈을 반짝이며 박수를 쳤다.


“맞다! 허총관께서는 관상을 잘 보시죠. 이 소협은 어떤가요? 우리 세가와 연(緣)이 있어 보이나요?”


“아가씨, 그러한 것은 관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미 세가 가장 깊숙한 곳에 발을 디뎠는데, 연이 없다면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허총관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딱히 원했던 대답은 아닌 듯, 백리연이 뾰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빙그레 웃던 허총관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가씨 말씀대로 부끄럽지만 제가 작은 재주를 하나 가지고 있긴 하지요. 아가씨의 일에 큰 도움을 주셨다고 하니, 혹 꺼리는 마음이 없다면 이 노인네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예예···”


누군가 관상을 봐주는 일은 전생에서도 이곳에서도 그야말로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 미신 따위는 전혀 믿어본 적이 없지만, 묘하게 긴장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저 위엄있는 노인네가 봐주는 관상이니 더더욱.


“관상은 그저 형(形)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니 너무 마음쓰지말고 편하게 들으십시오”


편하게 들으라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허총관이 말을 이었다.


“그대는 스스로 원치 않더라도 온갖 풍파를 몰고 다니는 상이니, 솔직히 상인으로서 적합한 관상은 아닙니다”


“컥!!!”


예상 밖의 충격을 받고 비틀거리는 나를 황급히 대식이 부축했다. 내상이라도 입은 듯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 돌팔이 할아범같으니라고. 뚫린 입이라고 아무말이나 지껄여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진 허총관의 말은 다시 나를 펄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역경을 가뿐히 이겨낼 수 있는 커다란 운과 맞물려 있는 상이기도 합니다. 그 여정이 길 수도 짧을 수도 있겠으나, 종국에는 커다란 부(富)와 명예에 연이 닿아 있어보이는군요”


커다란 부와 명예!

이거다. 이 말이 듣고 싶었다. 이 노인네야말로 중원 제일, 아니 세계 최고의 예언가가 아닐까!


감동받은 내가 한껏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고, 대식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 옷깃을 꽉 붙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떻게든 부자만 되면 됩니다!”


우렁차게 외치자 존경하는 허총관님께서 백리연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허허, 이렇게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솔직한 청년은 근래에 보기 어렵습니다”


“이 소협이 보기 드문 사람인 것은 확실하죠. 아무쪼록 그가 가진 운과 실력이 우리 세가에도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백리연의 얼굴에 어두운 기운이 깃들었다. 관상같은 것을 이야기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작금의 사태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백리연에게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허총관이 표정을 굳혔다.


“사파들의 움직임, 암살 시도, 살육극··· 이 모든 것들이 한 줄기로 연결되어 있음이 틀림없어 보이는군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큰 일을 해내셨군요”


그의 지시를 받은 무인들이 후원 밖에 세워져있던 수레의 포목을 걷어내자, 잔뜩 긴장한 표정의 팽도혁이 눈알을 굴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백리세가의 심장부에 들어왔음을 실감이라도 한 듯, 늘 거칠었던 입은 꾹 닫은 채였다.


팽도혁이 후원에 들어서자 누가 볼새라 문이 재빠르게 닫혔다. 때마침 날래게 몸을 날려 달려온 한 무인이, 백리세가의 가주 백리율이 백리담과 함께 이미 별관 집무실로 들어섰다는 소식을 전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구나! 이 소협,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백리연이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를 제외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데, 사실 나는 그들이 논의할 은밀한 무림 정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저, 일단 약속된 대금을 ···”


손가락을 비비며 눈썹을 찡긋거려 보이자 백리연이 피식 웃음지었다. 아무 대답없이 고개를 휙 돌린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 수하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으니,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 소협에게 한 푼도 내어주지 마세요!”


그녀의 말을 듣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자 허총관이 나를 돌아보며 슬쩍 웃음짓고, 심지어 팽도혁마저 나를 돌아보며 낄낄 웃어보였다.


나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리연. 저 요망한 친구 같으니라고.



***



잠시면 될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기다림은 길어져만 갔다. 하긴 사안이 사안인 만큼 어떤 이야기가 되었든 쉽게 끝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후원 한켠에 마련된 정자에서 매우 향긋하고 비싸보이는 차를 대접받으며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도련님, 꿈만 같습니다”


대식이 속삭였다.


“항상 말로만 듣던 백리세가에서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다니요.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백리세가의 가세가 정말 대단하구나. 백리담이나 백리연이나 수수하게 입고 다녀서 은근 무시했는데, 알고보니 진짜 알짜 집안이였군!”


우아하고 고즈넉한 후원과 정자, 고급스러운 찻잔과 가구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과연 금자 열 냥도 쉽게 쉽게 이야기하더라니,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이들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풍요로움이었다.


“진짜 부자는 티내지 않는 법이라니까요? 제 말이 맞지요?”


“부러워하지만 말고 잘 봐둬. 훗날 우리의 세가, 우리만의 장원을 만드는 날에는, 이것보다 더 으리으리하고 고급스럽게 만들어야하니까”


“아무럼요. 아무럼요!”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던 대식이 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내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도련님. 어떻습니까? 백리연 소저께서도, 허총관님도 도련님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던데, 이 인연을 쭉 잘 이어나가서···”


이 녀석은 혹시 전생에 중매쟁이였던 것이 아닐까. 틈만 나면 어떻게든 나와 백리연을 엮지 못해 안달이다.


“쓸데없는 소리. 며칠간 그 고생을 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무림인들에게 엮이면 피 볼 일 밖에 없다니깐? 게다가 정혼자도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백리세가가 어떤 가문인데 큰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얼굴만 허연 녀석보다는 도련님이 백배 낫지요!”


“그건 그렇지- 아니, 아무튼 저 남매 성격을 좀 봐라. 감당이 되겠는가. 허총관의 가르침이고 뭐고, 금자만 받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것이야”


단호한 목소리로 잘라말하자, 대식의 입이 쭉 튀어나왔다. 도련님 성격도 딱히 좋은 편은 아니라는 등등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곧 월병이랑 연과자도 나온다고 했는데?”


“측간에 잠깐 다녀올테니, 꼼짝말고 기다려라. 혼자 다 먹으면 죽을 줄 알아!”


“장담은 못합니다!”


소피 눌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마침 측간으로 안내해 줄 이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후원 어디선가 해결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왠지 이 고즈넉하고 위엄넘치는 곳을 훼손하면 안될 것만 같아 결국 황급히 밖으로 향했다.


이리저리 헤메다가 담벼락에 붙여놨던 수레에 슬쩍 몸을 숨기고 황급히 허리띠를 끄르니, 콸콸콸— 폭포수가 흘러내렸다.


‘천하의 백리세가 담벼락에 노상방뇨라···. 캬!’


문득 어린 시절 보았던 뉴스가 떠올랐다. 부자집 담벼락에 오줌을 누면 부자가 된다는 미신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통에, 사람들이 밤만 되면 줄을 서서 문제의 그 담벼락에 노상방뇨를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애먼 경찰들이 밤새 그것을 단속하느라 애를 먹었다나.


당시의 나는 노상방뇨를 하고 싶어도 부자라는 사람들이 당췌 어디에 살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미신이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기회가 찾아온 것 아니겠는가. 그것만으로도 이전의 삶에 비해 괄목할 만한 발전과 기회가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져 콸콸 흐르는 폭포수의 박자에 맞춰 껄껄 웃었다.


“좋구나!!!”


그때였다.


“좋긴 뭐가 좋아?!”


뜨끔하여 뒤를 돌아보니, 한 무리의 청년들이 저 멀찍이서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노상방뇨의 현행범으로 딱 걸리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 기름기 흐르는 얼굴들. 어디서 봤더라.


“이 녀석, 아까 형님을 모시고 왔던 그 놈 아닌가?”


“그렇네, 그 더럽고 냄새나는 수레?”


아뿔싸. 백리담을 마중나왔던 동맹 세력의 자제들이었다. 다들 잘나가는 집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화려한 옷차림을 보니 저절로 허리가 굽혀졌다.


“선생님들, 안녕하십니까? 이곳에서 또 뵙는군요!”


하지만 나의 공손한 인사에도 그들의 인상은 펴지지가 않았다. 청년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대뜸 삿대질을 했다.


“감히 백리세가의 담벼락을 더럽히다니 간도 크구나. 실성한 것이냐?”


사내답지 않게 하얗고 곱상한 얼굴, 새빨간 입술을 보니 이름까지 확실히 기억이 났다.


백리연의 정혼자라던 조승지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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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 24.06.02 1,318 27 13쪽
27 노인 (3) +1 24.06.01 1,307 26 13쪽
26 노인 (2) +1 24.05.31 1,273 28 13쪽
25 노인 (1) +1 24.05.30 1,317 23 12쪽
24 조가장 (5) +1 24.05.29 1,325 27 13쪽
23 조가장 (4) +1 24.05.28 1,307 25 12쪽
22 조가장 (3) +1 24.05.27 1,317 29 12쪽
21 조가장 (2) +1 24.05.26 1,360 27 12쪽
20 조가장 (1) +1 24.05.25 1,456 24 11쪽
19 금자 열 냥 (4) +1 24.05.24 1,506 28 12쪽
18 금자 열 냥 (3) +1 24.05.23 1,465 30 12쪽
17 금자 열 냥 (2) +1 24.05.22 1,478 32 12쪽
16 금자 열 냥 (1) +1 24.05.21 1,504 29 12쪽
» 백리세가 (2) +1 24.05.20 1,570 29 13쪽
14 백리세가 (1) +3 24.05.19 1,629 31 13쪽
13 음모 +1 24.05.18 1,660 32 13쪽
12 암살 +2 24.05.17 1,658 30 12쪽
11 적기방 (2) +1 24.05.16 1,715 30 12쪽
10 적기방 (1) +1 24.05.15 1,781 33 12쪽
9 암습 +1 24.05.14 1,823 38 12쪽
8 바가지 +2 24.05.13 1,902 37 13쪽
7 백리연 +2 24.05.12 2,016 39 13쪽
6 와장창! +1 24.05.11 2,045 40 11쪽
5 첫 거래. +3 24.05.10 2,132 41 12쪽
4 인연은 그 앞날을 알 수 없다. +2 24.05.09 2,190 47 11쪽
3 사해가 동도. +3 24.05.08 2,390 50 11쪽
2 일대종사 (一代宗師) +2 24.05.08 2,877 39 12쪽
1 +3 24.05.08 3,633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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