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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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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26
추천수 :
1,447
글자수 :
308,562

작성
24.05.10 17:05
조회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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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글자
12쪽

첫 거래.

DUMMY


백리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과 헤어지고 몇시진 뒤.


산적들이나 무인들을 만났을 때보다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는 더 긴장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의 대답을 기다린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무 관심없는 듯 등을 돌리고 있던 노인네가 들릴 듯 말 듯 말을 툭 던졌다.


“뭐, 은자 스무 냥에 팔려면 두고 가던가”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나는 팔짱을 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꿀꺽. 대식의 목젖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참이 지나도 나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노인네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게슴츠레 떠진 상대방의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았다.


“스물 두 냥”


“스무 냥. 이 이상은 절대 못 쳐줘”


“스물 두 냥”


“은자 스무 냥에 동으로 오십 얹어주지. 이 가격에도 거래 안할거면 그냥 다 도로 가져 가시게”


“스물 두 냥”


“...이봐 젊은이. 협상은 그런 식으로 하는게 아냐”


“스물 두 냥”


“앵무새야?”


“앵무새야?”


“이거 뭐 말이 안통하는 친구구만···”


말은 안 통할지 몰라도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보니 마음은 통한 것 같았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느릿하게 꿈벅이더니, 끝내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나는 쾌재의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대식아! 짐 싹 다 내려서 창고에 넣어드려라!”


“예!”


신이 난 대식이 훌쩍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약재들을 묶은 끈을 끌렀다. 나는 손을 내밀어 노인네의 쪼글쪼글한 손을 덥썩 마주잡으며 씨익 웃었다.


“후회 안하실 겁니다. 정말 좋은 물건들이에요”


나에게서 더 양보를 받아내는 데에 실패했으면서도, 노인네는 쪼글쪼글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었다. 그의 표정이 마냥 밝은 것이 무척이나 불길했다.


“어째 이리 저렴한가?”


‘제길! 더 부를 수도 있었구나!’


표정관리에 실패한 내가 일순간 말을 잃자, 노인네가 숭숭 빠진 이빨을 훤히 드러내어 웃었다.


“이미 합의한 것이니 무르기는 없네”


“.....”


“그래도 초면에 이정도면 많이 쳐준거야! 다른 데서는 이만한 양을 소화할 수 있는 곳도 없었을텐데? 솔직히 내가 아니었으면 남은 물건들 다 처리 못했을 걸세”


“...그건 그렇죠”


순순히 그의 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노인네가 운영하는 커다란 약방에 도착하기 전, 이곳 저곳을 정말 많이도 돌아다녔다.


온 동네를 하루종일 헤집었지만, 낯선 청년이 산더미 같이 싣고 온 약재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관심을 보인 이들도 기껏해야 몇 근 정도 덜어가는 수준.


해질 무렵 마지막 희망을 안고 들린 이곳에서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면, 절반 이상 남은 약재들을 끌어안고 다음 마을까지 또 넘어가야 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한다는 것이 원래 그렇게 어려운 걸세. 그래도 이번에 한번 돌면서 안면을 튼 셈이니, 다음 번에는 훨씬 수월해질 거야. 그런데 어디서 물건을 떼어 온 겐가?”


“삼방현에서 가져왔죠”


“그곳 물건 값이 싸긴 싸지. 먼길 돌아왔을텐데, 이렇게 싸게 팔아서 남는게 있나?”


“나흘이면 오던데요?”


노인이 눈을 흘기며 농담하지 말라는 듯 손사레를 쳤다.


“예끼! 어떻게 거기서 여기까지 나흘만에 와? 산을 넘지 않고서야···”


“넘었는데요”


“뭐? 감망산을 넘었어?”


노인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만큼 휘둥그레 뜨여졌다.


“허! 대단하구만. 산길이 보통이 아니었을텐데, 이 큰 수레를 끌고 어떻게 산을 넘었나? 게다가 그쪽은 흉악한 산적들까지 기승이라 다들 기피하는 길인데 말이지”


“하하하··· 제가 따로 개척한 길이 있죠”


산적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수레를 밀어준 덕에 산길을 넘어왔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않있다. 그들에게 삥뜯듯이 일부 약재를 팔아 넘긴 사실도.


노인네가 건네준 은전과 동전들을 소중히 갈무리 한 뒤 연거푸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예상보다 싸게 넘긴 것은 논외로 치고, 절반 가까이 남아있던 재고를 한번에 처리해줬으니 은인이 따로 없었다.


수염을 쓸어내리던 노인이 가늘게 눈을 뜨며 나와 수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보게. 자네가 다음에도 이정도 약재를 가져올 수 있다면 가격을 근당 이 할 정도 더 쳐주지. 세번 이상 거래가 지속되면 더 쳐줄 수도 있고“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고정거래를 트자는 걸세. 기존에 거래하던 녀석과의 관계를 깨야하니 나로서도 쉬운 결정이 아니라고! 우리 서로의 주머니를 채우기에는 매우 좋은 일이겠지만 말이야”


약재 한번 사고 팔았을 뿐인데 고정거래 제안이라니. 이 정도면 정말 꽤나 성공적인 것이 아닌가! 아직은 미래일을 알 수 없다며 확답하지 않고 마부석에 올라타자, 노인네가 못내 아쉬운 듯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럼 그 개척했다는 길이라도 알려주던가!”


“영업기밀이요!”



***



수레가 텅텅 비워지고나니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대식과 나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목청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어쨌든 다 팔았다!!!”


“만세! 만세! 만세!”


약재를 구입할 때 쓴 원가를 생각하면, 최종적으로 남겨먹은 돈은 은자 다섯 여섯 냥 수준에 불과하다. 기대했던 것보다 적은 것은 둘째 치고, 산적들에게 삥뜯은 돈이나 무림인들을 도와주고 받은 돈에 비하면 지극히 초라해보일 정도의 수익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어디인가. 어찌되었든 상품을 사서 팔아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묵직해진 전낭을 손에서 이리저리 돌리며 히죽 히죽 웃고 있는데, 대식은 뭔가 아쉬운 점이 있는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도련님. 개봉에는 꼭 가셔야 합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아까 그 약방 노인이 제안한 대로, 계속 삼방현만 왔다갔다하더라도 돈을 꽤나 벌지 않을까 싶어서요”


“평생 약재만 나르고 싶어? 그리고 이런 푼돈에 만족할 정도였으면 고향을 떠나지도 않았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큰 꿈을 가져야지”


대식의 얼굴에 또 불안감이 서렸다. 눈앞에 보이는 쉬운 길을 마다하고 멀고 험한 길을 떠나려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언덕길을 어떻게 다시 오갈 생각이야? 다음번에도 산적들이 얌전히 도와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깊은 산 속에 꽁꽁 숨어버리거나 기필코 우릴 죽이겠다고 떼거지로 달려들겠지. 놈들 쪽수가 너무 많아지면 그땐 나도 너 못 도와준다”


“....!”


자신이 꿈꾸던 장미빛 미래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그제야 깨달은 대식이 입을 쩍 벌렸다. 녀석의 멍청한 표정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나만 믿고 따라오라니까.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의심하기만 할거냐? 자, 일단 오늘은 돈을 벌었으니, 밥 배불리 먹고 꿈도 배부르게 키워보자”


“헉. 회식입니까!”


신이 난 대식이 당나귀들을 채근하여 속도를 높였다.


수레가 가벼워진 탓인지 녀석들의 발걸음도 타닥 타닥 가볍기만 했다.



***



해가 지기 전에 꽤나 그럴싸한 객잔을 찾을 수 있었다. 마차와 수레를 맡기고, 말들을 든든히 먹여주라고 점소이에게 동전도 하나 찔러 넣어주었다.


객잔에서 제일 크고 좋은 방으로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니 대식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짐을 풀고 자리 잡은 내가 백육, 탕초리척, 포자, 만두, 두부, 우육, 전 등 각종 요리만 열 종류에 술도 세가지 종류를 시켜대자 대식의 눈이 쫙 찢어졌다.


“잠깐···잠깐만 기다려주시오!”


마찬가지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점소이를 대식이 황급히 붙잡아 놓았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도련님.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뭘 과해? 회식인데 이정도는 먹어야지!”


“돈을 그렇게 고생해서 벌었는데 남기는게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고작 한번 기분낸다고 주머니가 거덜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둘의 첫 회식 아니냐?!”


촌티나는 두 놈이 들어와 음식은 지나칠 정도로 시켜댄 마당에, 자기를 세워놓고 속닥거리고 있으려니 점소이가 불안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두 분, 돈은 있으신 것 맞지요?”


“어허! 걱정말고 음식이나 제대로 내오게”


눈을 부라리며 묵직한 전낭을 툭툭 건드리자 절그럭 절그럭 믿음직스러운 소리가 난다. 그제서야 점소이는 환한 자본주의적 미소를 지으며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요리들이 우리 탁자를 가득 메웠다. 둘이서는 도저히 먹을 수도 없을만큼 대단한 양에 놀란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기꺼운 마음에 짝짝짝 박수를 쳤다. 고향 마을에서는 아버지와 스승의 눈치를 보느라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라고나 할까.


잔에 가득 술을 따라 그 향기를 폐에 가득 채운 다음,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있는 대식의 잔에 짠- 마주쳤다.


“자, 나의 동업자, 나의 심복! 한잔 드시게!”


놀란 대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을 조심스레 들이킨 그가 잔을 내려놓더니 뜨거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남자에게 받기에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동업자는 과한 것 같고, 심복··· 심복이라! 그 표현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제 이 넓은 천하를 떠돌며 우리 둘이 서로를 의지해야하는데, 주인이며 하인이며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네가 나를 잘 보필해서 승승장구하면 심복이 되는 거고···”


“도련님···”


“그렇지 못해서 쫄딱 망하면 그땐 남남이 되는거지. 진주목걸이니, 금가락지니 하는 것들은 다음 생에서나 이루게 되는 것이다”


“걱정마십쇼!”


대식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고향을 떠나온 이래 가장 힘차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사업은 사업이고, 도련님이 이렇게 호방하게 돈을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술잔을 연거푸 비운 내가 캬- 탄성을 내질렀다. 돈을 쓰지 못했던 것은 단지 고향마을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이전 삶에서는 단순히 돈이 없어서, 또는 지독하게 저축하느라 단 한 푼 마음놓고 쓴 적이 없었다.


“자고로 돈을 벌려면 돈을 써야하는 법이다. 조금 전만 해도 보아라. 복장이 추레하니까 점소이마저도 우리를 우습게 보잖아? 이런 복장과 씀씀이로 어떻게 중원의 거부들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그래요? 그냥 돈을 펑펑 쓰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


“아무튼 다음에는 이런 회식은 없는 겁니다. 물이 새는 독을 어떻게 가득 채운단 말입니까?”


“하여간 내 돈 내가 쓴다는데 이자식이···”


“방금 전엔 동업자라면서요?!”


미운 정 고운 정으로 계속 데리고 다녔더니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녀석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음식 시키는 것을 만류할 때는 언제고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리던 대식이 쩝쩝거려대며 또 한번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말입니다. 저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도련님도 참, 쑥맥도 그런 쑥맥이 없더군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아까 우리가 숨겨드린 여자분 말입니다. 그런 미모의 여성이 먼저 통성명을 하자고 제안한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도련님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거기서 떠돌이 장사치이니, 다시 보지는 말자느니 뭐니··· 그런 소리를 도대체 왜 한단 말입니까?”


“그 백···백···백 머시기?”


“백리연이요! 그새 이름도 까먹으셨습니까?”


입에서 더럽게 음식물을 튀겨가며 열을 올리던 대식이 갑자기 헉!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이 고개를 낮추며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아까 그 분이 정말 백리세가의 그 분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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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 24.06.02 1,318 27 13쪽
27 노인 (3) +1 24.06.01 1,307 26 13쪽
26 노인 (2) +1 24.05.31 1,273 28 13쪽
25 노인 (1) +1 24.05.30 1,317 23 12쪽
24 조가장 (5) +1 24.05.29 1,325 27 13쪽
23 조가장 (4) +1 24.05.28 1,307 25 12쪽
22 조가장 (3) +1 24.05.27 1,317 29 12쪽
21 조가장 (2) +1 24.05.26 1,359 27 12쪽
20 조가장 (1) +1 24.05.25 1,456 24 11쪽
19 금자 열 냥 (4) +1 24.05.24 1,506 28 12쪽
18 금자 열 냥 (3) +1 24.05.23 1,465 30 12쪽
17 금자 열 냥 (2) +1 24.05.22 1,478 32 12쪽
16 금자 열 냥 (1) +1 24.05.21 1,504 29 12쪽
15 백리세가 (2) +1 24.05.20 1,569 29 13쪽
14 백리세가 (1) +3 24.05.19 1,629 31 13쪽
13 음모 +1 24.05.18 1,660 32 13쪽
12 암살 +2 24.05.17 1,658 30 12쪽
11 적기방 (2) +1 24.05.16 1,715 30 12쪽
10 적기방 (1) +1 24.05.15 1,781 33 12쪽
9 암습 +1 24.05.14 1,823 38 12쪽
8 바가지 +2 24.05.13 1,902 37 13쪽
7 백리연 +2 24.05.12 2,016 39 13쪽
6 와장창! +1 24.05.11 2,045 40 11쪽
» 첫 거래. +3 24.05.10 2,132 41 12쪽
4 인연은 그 앞날을 알 수 없다. +2 24.05.09 2,190 47 11쪽
3 사해가 동도. +3 24.05.08 2,390 50 11쪽
2 일대종사 (一代宗師) +2 24.05.08 2,877 39 12쪽
1 +3 24.05.08 3,632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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