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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73,442
추천수 :
1,448
글자수 :
308,562

작성
24.05.09 17:05
조회
2,190
추천
47
글자
11쪽

인연은 그 앞날을 알 수 없다.

DUMMY


서로간에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나자마자, 여인은 사내를 조심스레 부축해 말에서 내렸다. 사내는 일이 진행되는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말에서 내릴 즈음에는 이미 정신이 혼미한 듯 끙 소리를 낼 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검을 뽑아든 여인이 말들의 엉덩이를 찌르자, 말들이 놀라 이히힝! 울며 앞으로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나는 사라져가는 준마들을 바라보며 쩝쩝 입을 다셨다.


‘말이 한 필에 얼마인데 저렇게 날려버리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잡아오고싶지만, 일단은 금자 두 냥씩이나 받은 손님을 잘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약초더미에 몸을 숨기는 것을 낑낑대며 도와준 뒤,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출발시켰다.


어떤 흉악한 놈들에게 쫓기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것은 나중 일이 아니겠는가. 난데없이 수중에 떨어진 금자를 만지작거리자니 싱글벙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금자가 한 냥이면 은자로 이십 냥··· 두 냥이면 사십 냥!!!


“내 걸음 걸음마다 재화가 와서 쌓이니, 정말 이대로라면 부자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겠구나!”


스스로에게 감탄하여 외치자, 옆에 앉은 대식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쉬쉬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도련님, 뒤에서 저분들이 듣겠습니다”


“들으면 어때서? 도움을 주는 대가로 정당하게 받은 돈인데”


“그래도 너무 속물적이어 보이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남들에게 속물적으로 비춰지는 것까지 걱정하는 하인이라니. 제법 충의가 있는 그의 모습에 감탄할 만도 하지만, 나는 흥 코웃음을 쳤다.


“그게 뭐가 문제야? 장사치가 재물을 쫓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


“허, 거 참 끝까지···”


입을 꾹 다물어버린 대식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는 모를 것이다. 이전 삶에서 재복(財福)이라고는 일절 없었던 나의 속사정을. 길가다 그 흔한 백원짜리 하나 주워본 적 없는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개무량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혹시라도 저희가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대뜸 금자를 내미는 것이 불안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저분들이 흉악범일 수도 있고, 반대라 하더라도 저들을 숨겨준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또다시 지레 겁먹은 대식이 소곤거렸다.


“워이, 불길한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옵니다!”


대식이 속삭이듯 외쳤다.


과연, 저 멀리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모래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검은 무복을 입고 빨간 세모 깃발을 등에 꽂은 이들이었는데, 그 숫자는 수십이고 기세 또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거리를 좁히며 달려오자 대식의 얼굴이 또 하얗게 질려갔다.


“히익! 너무.. 너무 많은데요!”


“좀 진정해라. 아무 일도 없을거야. 그냥 지나쳐 갈 거라니까?”


대식을 달래기 위해 짐짓 태연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두에 선 이가 어깨 위로 주먹을 들어보이자, 수십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일제히 우리 앞에 멈추어섰다. 긴장한 대식이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눈빛은 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찼다.


무인들은 모두 똑같은 흑의 무복을 차려입어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 중 한쪽 눈을 가로질러 긴 흉터가 있는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 길로 앞서 지나간 이들을 보았느냐?”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들이라면 바로 조금 전에 쏜살같이 말을 달려 저희를 스쳐 지나가버렸지요.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였습니다!”


“이 길을 따라갔다는 거지? 다른 곳으로 새지않고”


“예!”


내가 기운차게 대답하자, 흉터 사내는 마음이 급한지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가자!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떠나간다면 좋았을텐데, 사내의 눈길이 약재가 산더미같이 쌓인 수레에 머무르고 말았다. 다시 고삐를 잡아당긴 흉터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잠깐. 저기에 실린 것은 모두 약재들인가?”


“그럼요! 제가 직접 모든 상품의 품질을 일일히 확인하며 구매한 상등품들입니다. 혹시 필요하신 약재가 있으신지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약을 팔았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흥, 쓸데없는 소리. 짐을 모두 내려보아라! 한번 직접 살펴봐야겠다. 그 간교한 것들이 혹시 이 안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예!”


무인들 몇몇이 수레로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답례로 받은 금자 뿐 아니라 이것저것 많이 날아가게 생겼기에 나는 황급히 수레 앞을 가로막았다.


“나으리! 제발 사정을 봐주십시오. 이게 아무렇게나 쌓인 듯 해도, 다 나름대로의 순서와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다 파헤쳐 버리시면 저희는 어쩌란 말입니까?”


“비켜라!”


애처로운 목소리로 외쳤으나 무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내가 가리고 있는 수레의 안쪽에서 스물스물 날카로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여인이 기습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안돼! 이러다가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면···’


누가 이기든 지든 내 꿈과 희망이 담긴 상품들은 엉망이 될 것이다. 애초에 무림인의 일에 엮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하는 수 없이 수레 한구석에 처박아 놨던 검을 꺼내들었다.


“뭐···뭐냐! 검객이었나!”


갑작스레 검을 든 나를 본 무인들이 깜짝 놀라 채챙- 검을 뽑아들었다.


“검객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세상은 뒤숭숭한데 표사를 구할 돈도 없어서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닐 뿐이죠. 제가 검객이었으면 이렇게 검을 수레에 쳐박아두고 다니겠습니까?”


나는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젊은 남녀가 몸을 숨긴 약재더미 사이로 검을 푹- 찔러넣었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대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짐을 모두 내리거나 파헤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지요. 안에 누가 숨어있었으면 벌써 피가 뚝뚝이겠죠? 누구 한번 저와 함께 찔러보시겠습니까?”


수레를 빙글빙글 돌아가며 검을 이리저리 사정없이 쑤셔넣었다. 워낙 촘촘히 이곳 저곳을 쑤시고 있으려니, 무인들의 눈에 서서히 긴장이 풀려갔다.


솔직히 한두명쯤 나와서 찔러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들에게 그럴 여유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흉터사내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결국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가자!”


무인들이 다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갔다.


손까지 흔들며 그들을 배웅한 나는 차분히 마부석에 올라탔다.


혹시 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지 힐끗 확인한 뒤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하냐, 대식아. 빨리 튀어!!!”



***



당나귀도 달릴 때는 달린다.


흑의무인들이 떠나가자마자 늙은 당나귀들을 닥달해 한참동안 정신없이 달리던 우리는, 인근 마을 근처에 다다르고 나서야 으슥한 숲길에 수레를 멈춰세웠다. 우리가 목적지로 삼았던 바로 그 마을이었다.


대식은 아직까지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또 한번 예사롭지 않았다.


“도련님. 그렇게 비정하신 분인줄 몰랐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숨겨준 것을 들키느니, 그냥 살인멸구(殺人滅口) 해버리신 것 아닙니까?”


“으휴··· 쓸데없는 말 하지말고 어서 돕기나 하거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약초 꾸러미들을 차근차근 내렸다. 곧 멀쩡하게 걸어나오는 백의여인을 본 대식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뜨여졌다.


“아니, 분명히 숨어있던 곳을 사정없이 찔렀는데···”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하군요”


여인이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여유를 찾고 나서 차근히 보니 그녀의 또렷한 이목구비, 특히 빛나는 눈동자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약재와 지푸라기가 지저분하게 몸 이곳 저곳에 묻어 있었음에도 그 미모가 가려지지는 않고 묘하게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할까.


백의여인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저와 오라버니가 위치한 곳을 교묘하게 빗겨나가게 찌르실 수 있었죠?”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어디 숨어 계신지를 미리 봤으니까요. 별 것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놈들이 가까이 오면 기습할 생각으로 자세와 위치를 여러번 바뀌었단 말이죠. 그런데 그대의 검은 제가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하더군요”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미 금자도 두둑히 받았겠다, 무림인들과 더이상 엮이기 싫어 짐짓 심드렁한 태도로 대답했지만, 오히려 더 눈을 반짝거리며 캐물어오니 난감할 뿐이었다.


“운이죠, 뭐”


“...운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되물었다.


“만약 운이 없었으면요?”


“눈치가 있다면 혹시나 찔리더라도 꾹 참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나의 대답에 까르르 웃어 보였다. 대식은 입을 헤 벌린 채 그녀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말을 길게 하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기색임을 눈치챘는지, 더이상 그녀의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수레로 올라간 그녀는 오라버니라 부른 사내를 질질 끌고 나왔다. 보아하니 사내는 이미 한참 전에 의식을 잃은 듯 했다. 여인의 무공이 보통은 아니어 보이긴 하나, 만약 그대로 전투가 벌어졌다면 낭패를 보는 것은 십중팔구 그들이었을 것이다.


수상할 정도로 동작이 빨라진 대식이 그녀를 도우려 다가갔지만, 여인은 한사코 도움을 거부했다.


“저희 때문에 하마터면 큰 위험에 휘말릴 뻔 하셨는데, 염치없이 더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죠. 언제 그들이 돌아와서 수레를 뒤질지 모르니, 여기서부터의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서 갈 길 가 보세요”


아쉬워하는 대식을 잡아 끌어 마차에 앉혔다. 사내를 질질 끌며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지던 그녀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갑작스레 외쳤다.


“제 이름은 백리연이에요”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멍하니 있는데, 대식이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그제서야 그녀가 통성명하자는 말임을 눈치챈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포권을 해보였다.


“저는 떠돌이 장사치 이진평이라고 하고, 이쪽은 제 심복인 대식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아무쪼록 다음에 또···”


습관처럼 인사말을 이어가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림인들이랑 다시 엮여서 좋을 일이 뭐가 있으랴!


“...또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이상하고 어색한 나의 인사에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글쎄요. 因緣是前途未卜之事. 인연시전도부지사. 인연이란 그 앞날을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녀가 사라져가는 길을 따라 숲이 환하게 밝아졌다.


수레바퀴가 데굴데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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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 24.06.02 1,319 27 13쪽
27 노인 (3) +1 24.06.01 1,307 26 13쪽
26 노인 (2) +1 24.05.31 1,273 28 13쪽
25 노인 (1) +1 24.05.30 1,317 23 12쪽
24 조가장 (5) +1 24.05.29 1,325 27 13쪽
23 조가장 (4) +1 24.05.28 1,307 25 12쪽
22 조가장 (3) +1 24.05.27 1,317 29 12쪽
21 조가장 (2) +1 24.05.26 1,360 27 12쪽
20 조가장 (1) +1 24.05.25 1,457 24 11쪽
19 금자 열 냥 (4) +1 24.05.24 1,507 28 12쪽
18 금자 열 냥 (3) +1 24.05.23 1,465 30 12쪽
17 금자 열 냥 (2) +1 24.05.22 1,478 32 12쪽
16 금자 열 냥 (1) +1 24.05.21 1,504 29 12쪽
15 백리세가 (2) +1 24.05.20 1,570 29 13쪽
14 백리세가 (1) +3 24.05.19 1,629 31 13쪽
13 음모 +1 24.05.18 1,660 32 13쪽
12 암살 +2 24.05.17 1,659 30 12쪽
11 적기방 (2) +1 24.05.16 1,716 30 12쪽
10 적기방 (1) +1 24.05.15 1,781 33 12쪽
9 암습 +1 24.05.14 1,823 38 12쪽
8 바가지 +2 24.05.13 1,902 37 13쪽
7 백리연 +2 24.05.12 2,016 39 13쪽
6 와장창! +1 24.05.11 2,045 40 11쪽
5 첫 거래. +3 24.05.10 2,132 41 12쪽
» 인연은 그 앞날을 알 수 없다. +2 24.05.09 2,191 47 11쪽
3 사해가 동도. +3 24.05.08 2,390 50 11쪽
2 일대종사 (一代宗師) +2 24.05.08 2,877 39 12쪽
1 +3 24.05.08 3,633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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