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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73,482
추천수 :
1,448
글자수 :
308,562

작성
24.05.14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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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글자
12쪽

암습

DUMMY


마차를 백리세가 남매들에게 양보하고, 나는 대식과 함께 마부석에 앉아 함께 아름다운 중원의 자연을 만끽했다.


꽃이 없어도 꽃 내음이 나고, 비 한방울 없이도 하늘에 무지개가 펼쳐진 것만 같다. 대식과 내가 함께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절묘한 화음을 이루었다.


어느 순간 서로의 음이 고점에서 탁! 만난 순간, 서로 눈이 마주친 우리가 우헤헤! 경박한 웃음을 터뜨렸다.


혹여나 마차 안에 들릴까 싶었는지, 대식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렸다.


“도련님. 다시 봤습니다. 정말 다시 봤습니다!”


“에헴! 고작 금자 몇 냥에 호들갑 떨지 마라. 위대한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금자 뿐이겠습니까! 저 분들을 백리세가까지 모시게 된 것도 커다란 영광입니다. 혹시 그곳에서 또 어떤 기회가 찾아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대식은 우리의 마차에 타게 된 인물들의 진짜 정체를 알게된 이후로부터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에게 내내 호의적이었던 여인은 백리세가 현(現) 가주 백리율의 막내 딸 백리연이었고,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는 그녀의 오라버니가 바로 장남 백리담이었다. 그냥 단순히 백리성을 쓰는 방계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백리담은 언젠가는 정말 백리세가를 물려받아 가주가 될 인물이었으니, 그 신분의 고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문으로만 접하던 인물들을 직접 보게된 것이 신기하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신분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무림세가 사람들이고, 위험한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이 여정이 끝나고 나면 더이상 그들과 얽히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늘상 소심하고 수비적이었던 대식의 태도가 변한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 할 만 했다.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나의 심복답구나! 모름지기 사내라면 항상 크게 꿈꾸고, 멀리 봐야 하느니라”


어디선가 본 구결을 그럴싸하게 읊조리자, 대식의 눈동자에 탄복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책 한권 제대로 보신 적도 없는 분이 어찌 이렇게 주옥같은 말씀을···”


“타고난 재능이니라”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목소리가 커져 있었는지, 마차 안에서 킥- 하는 백리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나이지만, 오히려 대식이 뻔뻔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한동안 묵묵히 마차를 몰던 대식은 입이 근질거렸는지, 다시 한번 소곤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이번 물건들은 어느 마을에서 처분하실 예정이십니까?”


“자, 어디 보자···”


품에서 서책을 꺼내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원래 계획대로 문방구 등을 매입해서 산등성이 마을들 쪽으로 넘어갔으면 이문이 많이 남았을텐데, 귀중한 손님들을 모시게 되었으니 그 계획은 틀어진 셈이 되었지. 그래도 백리세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들을 순차대로 들려서 포목들을 처분한다면 아쉬운대로 은자 열댓냥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속으로 다시 한번 계산기를 돌려보는 사이, 갑작스레 마차 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책은 뭔가요?”


뒤를 돌아보니 백리연이 어느새 마차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우리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서책을 품 안에 집어넣자, 그녀는 마차에 난 조그마한 창으로 몸을 쑥 빼내더니 날렵하게 마부석에 내려섰다.


“헤헤··· 자리가 좁으니 저는 수레 쪽으로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대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고삐를 넘겼다. 녀석이 눈을 찡긋하며 허리춤 아래에서 보일 듯 말 듯 따봉을 해보이는데, 그 모습이 매우 추잡했다. 혹여나 백리연이 그 모습을 볼까 두려워 재빨리 다시 서책을 꺼내들어 그녀의 시선을 끌어야만 했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일종의 상권지도 같은 것이지요”


별 것 아닌 듯이 이야기하긴 했지만, 상권지도는 촌구석에서 힘겹게 완성시킨 나만의 보물이다. 하지만 그녀가 경쟁상대가 아닌 것은 명백하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책자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책자를 넘겨받아 휘리릭 넘겨본 그녀의 반응이 내 생각과 달랐다.


“지역별 시세표로군요. 저희 세가의 자산을 관리하는 허총관이 비슷한 책자들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


“상인들끼리는 아무리 막역한 사이여도 절대 보여주거나 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힘들게 작성하셨을텐데··· 이렇게 저에게 보여주셔도 되나요?”


“네? 아, 네, 뭐···”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거라 예상하긴 했다. 그러나 대식을 제외하고 내 상권지도를 본 첫 인물의 반응이 이렇게까지 무덤덤하자 온 몸에 맥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름 이 시대에는 획기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중원의 장사치들을 너무 얕잡아본 모양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멋쩍게 웃으며 그녀가 다시 건넨 서책을 품안에 갈무리하고 있으려니, 그녀가 눈을 빛내며 나에게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질문을 해도 될까요?”


“그러시죠”


“이 소협께서는 그렇게 고강한 무공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왜 장사꾼이 되시려는 거죠?”


굳이 내 수레를 타고 가려고 할 때부터 짐작한 일이지만, 그녀는 내 무공수준에 대하여 일종의 확신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고강한 무공이라뇨. 뭔가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설마 뭔가 보셨다 하더라도 그건 모두–”


“이번에도 모든 것이 운이었다고 얘기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어제 객잔에서도 은근슬쩍 도와준 사실을 제가 눈치 못 챘을 것 같았나요?”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따져묻는 그녀. 난감한 표정으로 이 당돌한 여인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대충 얼버무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런 산골짜기에서 맞닥드린 이가 백리세가의 인물일 줄은, 게다가 이렇게 눈치가 빠르고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터...

이런 때에는 정공법으로 간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무공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고향에서 검 쓰는 법을 조금 익히긴 했죠”


“역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아버지께서 무너져 가는 살림에도 스승에게 몇 푼씩 쥐여줘가며 억지로 저를 가르친 때문인지라···”


백리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문의 무공이 있거나, 따로 문파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네요?”


“그렇죠. 그냥 동네사람들을 모아 기(氣)체조를 가르치는 선생에게 특별 과외를 받은 정도입니다”


“기···기체조?!”


그녀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사뭇 진지한 내 눈을 보고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혹시 스승님의 존함이 어찌되시죠?”


“농담이 아니고 정말 이름도 모릅니다. 변변찮게 생겨서 다들 변노인이라고 부르는데, 어느날 저에게 재능이 있다고 하면서 가르쳐 보겠다고 저희 집으로 쳐들어 왔었죠. 제 부친께서 그 촌구석 돌팔이 노인네에게 꼴딱 속아 넘어가는 바람에 몇년간 개고생을 한 것이 제가 지닌 가슴 아픈 사연입니다”


그녀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스승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네요”


“진짜입니다. 돈이 생겼다하면 쪼르르 달려가 술과 도박으로 탕진해버리는 인생이라니까요? 그 작자에게 쓸데없이 돈을 가져다 바치지만 않았어도 제 장사 밑천이 갑절은 됬을 터인데···”


생각해보니 열받아서 씩씩대면서도, 나는 겁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살폈다. 동네 사람들과 신나게 스승 욕을 하다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변노인에게 쥐어터진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방현에서 기체조를 가르치는 변노인이라··· 세가로 돌아가게 되면 아버님께 그런 분을 혹시 알고 계시는지 여쭤봐야겠어요. 이 소협을 이렇게 가르친 것을 보면 보통 분은 아닐 듯 하네요”


그녀는 이미 머리 속에서 내 스승의 존재에 대하여 무언가 환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외모가 변변찮아서 변노인이라고 부르는 건데, 내 말을 듣기는 한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저의 무공을 궁금해 하십니까? 솔직히 제가 어제 몇가지 재주를 부린 것은 맞지만, 소저께서 관심을 가질 수준은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강호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저 안전하게, 오래, 유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일 뿐인데요”


“글쎄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뛰어나거든요”


그녀가 또다시 밝게 웃었다.


“그리고 강호와 그대의 삶을 분리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어요? 절대 그대의 희망대로는 이루어지지 않을거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무공을 안쓰면 그만이지”


“소협께서는 고향 마을을 떠난 이후로 무공을 쓰신 적이 없나요? 저희를 만나기 이전에도?”


백리연의 말에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해보니 산을 넘으며 산적들을 탈탈 털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놈들이 먼저 달려들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내가 그 점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이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죠. 이곳 저곳에서 여러 무력 세력들과 방파들이 난무하는 시대에요. 그대가 아무리 돈을 버는 것에만 뜻을 둔다고 해도, 무력이 없으면 그 뜻을 어떻게 이룰 수 있겠어요? 소협께서 무공에 자신이 없다면, 이렇게 심복과 단 둘이 물건을 가득 싣고 여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


“우리 백리세가같은 가문이나 다른 중원 문파들이 어떻게 부(富)를 축적하고 있겠어요? 다른 장원들, 표국들, 상단들 보호해주면서 돈을 버는 거죠. 지금 저 팽도혁이란 자가 속한 적기방과 우리 백리세가와 마찰이 있었던 이유도···”



그녀가 한참 열을 올려 말을 이어가고 있던 때였다.

관자놀이에 찌릿한 느낌과 함께 가슴이 서늘해졌다.

순간적으로 온 세상에 느려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디선가 발신된 강렬한 살기.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먼저 나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一線之風中托身 일선지풍중탁신. 한줄기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발을 한번 구르니 몸이 공중으로 붕 치솟았다. 허리를 튕겨 몸을 뒤집은 뒤, 단박에 마차로 넘어가 창 안쪽으로 손을 쑥 집어 넣었다.


세상 모르고 쿨쿨 잠들어있던 백리담의 머리카락을 급한 마음에 확 잡아 당기니,


퍽!!!


간발의 차이로 그의 이마가 있던 곳에 화살이 와서 박혔다.


이 모든 것이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뭐···뭐야?”


잠에서 깬 백리담이 허둥지둥 대는 사이, 또다시 여러 발의 화살이 맹렬히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리연이 검을 뽑아들고 마차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손 끝에서 피어나는 하얗고 커다란 부채. 그러자 그 어떤 화살도 그녀가 만들어 낸 검막을 통과해 내지 못했다.


정신차린 백리담이 검을 뽑아들고 마차 밖으로 나섰다. 자신을 급습한 이들을 당장이라도 도륙해버릴 듯한 기세였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마차 주변에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놈이냐, 나와라!”


백리담이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을 또 헛되이 쥐어짜며 소리를 질러댔다.


쯧쯧 혀를 차며 그를 바라보던 나는 너무 놀라 헛-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백리담의 뒤통수 한 켠, 동그랗게 머리카락이 송두리째 빠져 뻥 뚫려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볼 새라 재빨리 손을 털어내니, 손가락 사이에 가득했던 백리담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려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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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노인 (2) +1 24.05.31 1,275 28 13쪽
25 노인 (1) +1 24.05.30 1,319 23 12쪽
24 조가장 (5) +1 24.05.29 1,326 27 13쪽
23 조가장 (4) +1 24.05.28 1,309 25 12쪽
22 조가장 (3) +1 24.05.27 1,318 29 12쪽
21 조가장 (2) +1 24.05.26 1,361 27 12쪽
20 조가장 (1) +1 24.05.25 1,458 24 11쪽
19 금자 열 냥 (4) +1 24.05.24 1,507 28 12쪽
18 금자 열 냥 (3) +1 24.05.23 1,466 30 12쪽
17 금자 열 냥 (2) +1 24.05.22 1,478 32 12쪽
16 금자 열 냥 (1) +1 24.05.21 1,504 29 12쪽
15 백리세가 (2) +1 24.05.20 1,570 29 13쪽
14 백리세가 (1) +3 24.05.19 1,630 31 13쪽
13 음모 +1 24.05.18 1,661 32 13쪽
12 암살 +2 24.05.17 1,660 30 12쪽
11 적기방 (2) +1 24.05.16 1,716 30 12쪽
10 적기방 (1) +1 24.05.15 1,782 33 12쪽
» 암습 +1 24.05.14 1,824 38 12쪽
8 바가지 +2 24.05.13 1,903 37 13쪽
7 백리연 +2 24.05.12 2,016 39 13쪽
6 와장창! +1 24.05.11 2,046 40 11쪽
5 첫 거래. +3 24.05.10 2,132 41 12쪽
4 인연은 그 앞날을 알 수 없다. +2 24.05.09 2,191 47 11쪽
3 사해가 동도. +3 24.05.08 2,391 50 11쪽
2 일대종사 (一代宗師) +2 24.05.08 2,879 39 12쪽
1 +3 24.05.08 3,634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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