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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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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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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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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
글자수 :
308,562

작성
24.05.1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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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백리세가 (1)

DUMMY



남은 여정동안 우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은 채 속도를 높였다.


팽도혁은 포로에서 협력자로 위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수레 안에 포목들과 함께 파묻혀 숨어 있었다. 흉수들이 언제 그를 노릴지 모르는 이상, 포목들에 둘러쌓인 곳이 제일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나저나, 고향 떠난지 며칠이나 됬다고 이렇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냐···’


산적들에, 적기방에, 백리담을 향한 암살시도와 적기방 무인들의 참극까지. 중원에 떨어진 뒤로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며칠 사이에 몰아서 경험하고 있는 셈이었다. 촌구석 고향 마을을 떠날 때 내가 다짐했던 것과는 그야말로 정 반대의 행보.


‘...이게 다 이 녀석들 때문이다’


나는 백리세가 남매가 타고 있는 마차를 힐끔 돌아보았다. 산적들을 만난 것이야 우리가 자초한 일이라고 해도, 나머지 일은 모두 백리연 남매와 엮이면서 생긴 일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역시 무림인들과 엮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야. 백리세가에 도착하는 대로 금자 열 냥을 챙겨내 갈 길을 가야겠다’


마음 속으로 굳게 의지를 다지는 사이, 어느새 마차는 백리세가에 성큼 가까워 지고 있었다. 세가의 영역에 들어갔음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차에 탄 백리세가 남매의 얼굴이 흘깃 스쳐보이는 것만으로도, 지나가는 사람 중 둘에 한명은 반드시 그들을 알아보는 듯 했다.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잦아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땅바닥이 두두두 울리며 일련의 무리들이 말을 몰아 달려왔다. 백리담 또래 정도로 보이는 무리였는데, 하나같이 훤칠한 외모에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의복, 화려한 검집을 옆구리에 차고 있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들은 백리담이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그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며 속도를 높였다.


“형님!”


“임강,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반가워하는 것은 백리담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청의 사내가 활짝 웃어보이며 마차 옆에 말을 세웠다. 말을 다루는 날렵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그저 유약한 서생으로나 오해할 정도로 소년같이 앳된 얼굴을 지닌 귀공자였다.


“어찌된 일이냐? 너희들이 어떻게 다들 모여 있었어?”


“백리율 가주님께서 주변 무가들과 동맹을 모두 불러모으셨습니다. 오랜만에 형님을 볼 생각에 서둘러 달려왔는데, 막상 도착하니 형님과 연이가 출타 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 아버님께서 소집을···?”


백리담이 백리연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때마침 형님께서 돌아오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은 어떻게 하시고 이런 마차를 타고 계십니까?”


“아, 그럴만한 사정이 좀 있었다”


나는 임강이라 불리운 청년이 백리담, 그리고 백리연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힐끔 힐끔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는 공손하면서도 명랑했고, 보는 사람을 저절로 기분좋게 만드는 청량감 있는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임강 뿐이 아니라 다른 청년들도 모두 백리세가 동맹 세력의 자제들인 모양이었다. 젊고 잘생긴 - 그리고 돈도 많을 것이 틀림없는 청년들이 여러명 모여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자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백리담과 떠들썩하게 안부를 교환하는 사이, 뒤쪽에 쳐져 있던 한 사내가 사근사근 눈웃음을 치며 백리연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눈부시게 하얀 피부에 얇고 짙은 눈썹, 붉은 입술을 지닌 청년이었는데, 보아하니 여자깨나 울리게 생긴 기생오라비 같은 관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시선은 줄곧 백리연에게 고정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연 누이, 별일은 없으셨소?”


“조승지 오라버니,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무탈하게 돌아왔네요”


백리연이 상냥한 미소를 띈 채 그의 인사를 받았다.


기생오라비같은 청년과 백리연을 번갈아보며 바라보던 대식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도련님, 큰일입니다. 아무래도 연적(戀敵)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연적은 무슨 연적이란 말이야? 조용히 좀 하거라”


“이렇게 방심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일단 외모 면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습니까?!”


“내가 매일 수수하게 다녀서 그렇지, 옷도 잘 차려입고 머리도 매만지면··· 아니, 연적같은 소리 그만하라니까?”


속삭이며 투닥거리던 우리를 힐끗 바라본 기생오라비가 마차를 한바퀴 돌며 하하 웃었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네요. 이런 더럽고 초라한 마차에 타고 계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형님과 연 누이에게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군요!”


‘이 새끼가···’


한번 신경에 거슬리는 녀석은 계속 거슬리게 되는 법이다. 제딴에는 백리세가 남매들을 추켜세우기 위해 해주는 말인지는 몰라도, 마차 주인인 나로서는 참으로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백리담이 하하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어휴, 너희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게 얼마나 비싼 마차인지···”


“비싼 마차라구요?”


기생 오라비같이 생겨먹은 청년, 조승지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리담이 내 쪽을 바라보고 실실 웃으며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 순간 청의무복을 입은 청년, 임강이 끼어들었다.


“형님, 이 말에 타시죠! 모두들 형님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 너는?”


“저야 뭐 다른 이와 같이 타면 됩니다!”


임강이 앞장서서 말에서 내리자, 백리담이 사양하지 않고 그의 말에 대뜸 올라탔다. 내내 그를 괴롭히던 내상에서도 어느 정도 회복했는지 몸놀림이 사뭇 가벼웠다.


워낙 간결하고 소박한 차림을 하고 있는 탓에 잊고있던 사실이지만, 백리담이 늠름하고 잘생긴 말에 올라타고 나자 그 미모가 빛을 발했다. 온갖 화려한 옷과 장식들로 치장한 청년들 사이에서도 군계일학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딱 한가지 사실만 빼면 말이지.


“어? 형님. 옆머리가···?”


‘제길!’


얄미운 기생오라비 녀석의 지적에 백리담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옆머리를 어루만졌다. 나는 뜨끔하여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응? 왜?”


동전만한 구멍이 나 있는 탓에 꽤나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아무래도 손 끝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옆머리를 본 일행들이 입을 씰룩거리며 야릇한 표정을 짓는 사이, 백리연이 일행들에게 재빠르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일을 마치고 오는 와중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어요”


그녀의 신호를 눈치 챈 임강이 와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일행의 입을 막았다.


“상처까지 입으셨다니, 또 뭔가 재밌는 일을 겪고 오신 모양이로군요. 자, 얼른 세가로 돌아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임강이 백리담에게 말을 양보하는 것을 본 조승지가 그 또한 흰색 말에서 내려 백리연에게 고삐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이 분에게 계산해 드려야 할 것도 있으니 먼저 가고 계세요. 전 마차를 타고 뒤따라 가겠습니다”


“여비가 떨어졌었나요? 내가 대신 계산해주도록 하죠. 얼마입니까?”


조승지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지만, 백리연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완곡하게 선을 그었다. 조가 녀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나며 괜시리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사이 백리연이 백리담에게 말했다.


“저는 신경쓰지마시고 먼저 가세요. 아버지께서 동맹 무가의 사람들을 모두 모으셨다고 하니, 오라버니께서 얼른 가서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하지만 너도 지금 함께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계산이야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인 것을···”


백리연이 고개를 가로지으며 그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백리담이 허리를 숙여 귀를 가까이 대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은 먼저 가세요. 그리고 수레에 타고 있는 자에 대한 일은 일단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아버님을 따로 모시고 후원 집무실로 와주시면, 저는 그곳에서 허총관과 함께 아버지를 뵙는 걸로 하죠”


백리담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서 동생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느낄 수가 있었다.


“네 말대로 하마. 이따 보자꾸나”


허리를 곧추세운 백리담이 나와 대식, 그리고 수레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곧 말머리를 돌린 그가 자신을 기다리는 청년들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연이는 말보다 마차가 더 편해진 모양이야. 이제야 그 왈가닥 성격을 버리고 얌전히 지내려나보지?”


청년들이 와하하 요란스런 웃음을 터뜨리고, 백리연이 아무 말 없이 싱긋 미소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기생오라비 녀석의 눈이 초승달처럼 변했다.


“가자!”


백리담이 탄 말이 히힝- 앞발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이내 바람같이 질주해 나아갔다. 그 뒤를 따라 청년들이 우르르 달려나갔다. 기생오라비 녀석은 못내 아쉬운 듯 백리연 쪽을 돌아보며 아련한 눈빛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 누이, 그럼 잠시 뒤에 또 뵙겠소”


으···.소름!


대식과 나는 닭살이 우두두 돋아난 팔을 연신 쓸어내렸다. 사내로서 도저히 봐줄만한 광경은 아니지만, 백리연에게는 그래도 그게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요조숙녀마냥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화답했다.


“네, 오라버니. 이따 또 이야기해요”


녀석의 표정이 확 밝아지더니, 고삐를 돌려잡고 박차를 가했다. 히힝— 흰색 말이 우렁차게 울더니 바람같이 달려 앞선 일행을 금새 따라잡았다. 그들의 모습은 곧 모퉁이를 돌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묘한 표정으로 백리연을 돌아보다가, 방정맞은 입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고 조승지 녀석의 달콤한 목소리를 흉내내었다.


“연 누이, 그럼 잠시 뒤에 또—”


“...닥치고 출발하세요”


푸하하 밝은 웃음과 함께 다시 마차가 구르기 시작했다.


하늘이 맑고 청명했다.



***



“그는 조가장의 장자에요. 백리세가의 가장 큰 우방세력 중 하나이죠”


아무 것도 물어본 적이 없건만 백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적에 멋대로 정해놓은 저의 정혼자이기도 하지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에요”


기생오라비와 그녀 사이에 엮인, 나로서는 궁금하지도 않은 사연을 왜 그리 미주알 고주알 설명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혼자라는 말에 대식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 녀석은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감사하게도 아버지께서는 최대한 저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하시지만, 지금 세가의 상황이 상황인 이상 조가장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냥 그렇다구요”


그 때, 포목더미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숨 죽이고 있던 팽도혁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누구랑 정혼 관계라고? 설마 저 조가장 녀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


뒤를 돌아본 백리연이 한 차례 긴 숨을 내쉬었다.


“팽도혁. 당신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에요”


“저 녀석은 얼굴만 번드르르 하지 세상 재수없는 놈이야. 하지만 저 놈보다 조가장 자체가 더 문제지. 백리세가의 후광으로 정파의 껍데기만 쓰고 있을 뿐, 하는 짓은 우리같은 사파보다 더 할 지경이라고. 그런 가문과 정혼 관계였다니 아주 대단하고 축하할 만한 일이군”


난데없는 팽도혁의 악담. 기운을 좀 차리는가 싶더니 원래의 그 못되먹은 말버릇이 그대로 살아난 모양이었다. 백리연의 표정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팽도혁. 내내 그대 사정을 봐주고 있었는데, 또 턱이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죠?”


팽도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는 대식이 크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자고로 사내가 저렇게 곱상하게 생기면 실속이 없다고 했습니다. 쓸데없이 이런 저런 여자들만 많이 꼬여서 속을 타게 만들지요”


“그런가요?”


“그럼요! 비록 아둔하고 모자라 보이더라도, 일편단심 한 명만을 봐주는 남자가 최고 아니겠습니까?”


어이없게도 백리연은 대식의 말에 깔깔거리며 웃어주었다. 대식 녀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눈을 찡긋해댄다.


아둔하고 모자라보인다니. 그게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란 말인가? 설마 나를 밀어주겠다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한번만 더 눈을 찡긋하면 턱을 돌려놓을 생각으로 주먹을 험악하게 들이밀자, 그제서야 대식 녀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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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노인 (2) +1 24.05.31 1,273 28 13쪽
25 노인 (1) +1 24.05.30 1,317 23 12쪽
24 조가장 (5) +1 24.05.29 1,325 27 13쪽
23 조가장 (4) +1 24.05.28 1,307 25 12쪽
22 조가장 (3) +1 24.05.27 1,317 29 12쪽
21 조가장 (2) +1 24.05.26 1,360 27 12쪽
20 조가장 (1) +1 24.05.25 1,457 24 11쪽
19 금자 열 냥 (4) +1 24.05.24 1,507 28 12쪽
18 금자 열 냥 (3) +1 24.05.23 1,465 30 12쪽
17 금자 열 냥 (2) +1 24.05.22 1,478 32 12쪽
16 금자 열 냥 (1) +1 24.05.21 1,504 29 12쪽
15 백리세가 (2) +1 24.05.20 1,570 29 13쪽
» 백리세가 (1) +3 24.05.19 1,630 31 13쪽
13 음모 +1 24.05.18 1,660 32 13쪽
12 암살 +2 24.05.17 1,660 30 12쪽
11 적기방 (2) +1 24.05.16 1,716 30 12쪽
10 적기방 (1) +1 24.05.15 1,782 33 12쪽
9 암습 +1 24.05.14 1,823 38 12쪽
8 바가지 +2 24.05.13 1,902 37 13쪽
7 백리연 +2 24.05.12 2,016 39 13쪽
6 와장창! +1 24.05.11 2,046 40 11쪽
5 첫 거래. +3 24.05.10 2,132 41 12쪽
4 인연은 그 앞날을 알 수 없다. +2 24.05.09 2,191 47 11쪽
3 사해가 동도. +3 24.05.08 2,390 50 11쪽
2 일대종사 (一代宗師) +2 24.05.08 2,878 39 12쪽
1 +3 24.05.08 3,634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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