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73,468
추천수 :
1,448
글자수 :
308,562

작성
24.05.18 03:50
조회
1,660
추천
32
글자
13쪽

음모

DUMMY



“자결이로군”


팽도혁이 말했다. 그냥 보내주려고까지 생각했던 인물이 이렇게 죽어버리자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살아날 길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쉽게 사람이 죽어도 되는 것일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전문 살수다. 임무 실패가 곧 죽음으로 연결되는 녀석들이지”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며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자, 팽도혁이 그런 나를 보며 놀리듯이 말했다.


“네 녀석. 무공은 꽤나 하는 것 같은데, 하는 짓거리는 강호에 처음 나오는 애송이 티가 팍팍 나는군. 으– 젖비린내가 나!”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나는 강호에 발을 디딘 적도, 디딜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나에게 목숨을 빚진 녀석이 뻔뻔하게 할 만한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본래 얼굴을 가로지르던 흉터 외에 또 다른 긴 상처가 생겨버린 그를 보자 화를 낼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치 살수를 여러 번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팽씨,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요? 당신의 문제요? 아니면 적기방의 문제요?”


“우리 적기방은 비록 사파이긴 하지만 방주님의 품이 넓어 적이 많지 않았다. 나도 이런 전문 살수를 보는 것은 처음이야”


“그렇다면 살수가 당신을 노리는 이유는 뭔데?”


“···그거야 알 수 없지”


문득 살수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적기방 무인들을 언급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위장 신분이었으니 그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자가 적기방에게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이 두 사건간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적기방 사람들은 무사한 걸까?”


그리고 백리세가 남매들은 무사한 것일까?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친 지 오래이다. 상황이 정리됬다면 다시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이 불안했다.


“이보게. 나를 어서 풀어주게. 얼른 수하들이 무사한지 확인해봐야겠네”


팽도혁이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보챌 때, 어둠 저 편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적기방원들이 따라오던 바로 그 방향으로부터였다. 재빨리 마차 위에 올라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살피니, 희끄무레한 유령같은 신형 둘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백리세가 남매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런 내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져 속으로 슬쩍 웃었다.


‘강호인들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내가 받아야 할 금자 열 냥을 걱정하는 거야’


쏜살같이 달려오던 백리담과 백리연이 나와 나머지 일행들을 확인하고는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우리가 무사함을 확인한 그들의 표정에 일종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오셨습니까!”


대식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하고,


“내 수하들은, 적기방원들은 아무 일 없더냐?”


팽도혁이 다급히 질문했다.


안도의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실로 오랜 시간만에 돌아온 백리담과 백리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고 몹시 지쳐 있었다. 땅바닥에 널부러진 정체모를 사내의 사체를 보고도 살짝 흠칫 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에게서 아무 대답이 없자 팽도혁이 다시 한번 그들을 채근했다. 그의 말투에는 불안감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백리연이 마차에 몸을 기댄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어요. 전부 다”


“···..!”


“···한명도 남김없이 끔찍하게 도륙당해 있었어요”


곧 팽도혁의 비명같은 울음, 울음같은 비명이 밤의 평원에 울려퍼졌다.



***



당나귀들이 이끄는 수레가 적기방 무인들의 시체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사방에 널부러진 시체와 지독한 혈향에 모두가 말을 잊었다. 고삐를 놓고 마차 뒤로 황급히 달려간 대식이 속을 게워냈다.


팽도혁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아있는 수하가 없는지를 애타게 찾았다. 백리세가 남매가 지난 밤에 몇번이고 철저히 확인했음을 말해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분명 한 명뿐이었어요”


백리연이 말했다.


“진작에 모두를 죽일 수 있는 고수였으면서도 시간을 끈 거에요. 이미 상처입고 저항할 기운이 없는 이들을 상대로 가지고 논 거죠.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라지더군요”


“내상만 아니었어도 반드시 추격하여 잡아냈을 것이다. 싸움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이런 잔혹한 짓을 벌이다니···”


백리담이 굳은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백리연이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냉정히 얘기하자면 우리 둘이 함께 달려들었어도 어려웠을 거에요. 아무리 적기방원들에게 부상자가 많았다고 한들, 그들 모두를 이렇게 가지고 놀듯이 살육할 수 있는 자는 절대 흔치 않아요”


그때였다. 사방을 헤집던 팽도혁이 정신줄을 놓은 듯 눈을 까뒤집은 채 마구잡이로 백리담에게 달려들었다.


“네놈들 짓이다. 네놈들 짓이야!”


두고 볼 수 없어 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그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그가 나를 떼어내려 팔 다리를 휘둘러 댔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진정하시오. 이들이 벌인 일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사실 잘 알고 있지 않소?”


“이 녀석들이 벌인 일이나 마찬가지야. 이놈들이 우리 방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를 억지로 포로 삼지 않았다면!”


팽도혁이 눈을 붉히며 목청을 돋궜다.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의 수혈을 짚었다. 축 늘어진 팽도혁의 모습을 보며 백리연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우리를 의심하고 원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이 소협, 잘 아시겠지만 정말 우리가 벌인 일은 아니에요”


간 밤의 일을 겪은 내가 어찌 그들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백리세가 남매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팽도혁을 노리고 찾아왔던 살수, 살육극을 벌인 정체 모를 고수가 시간을 끌다가 사라졌다는 점··· 이 일에는 이상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적기방에 깊은 원한이 있는 문파의 소행일까요? 저희를 찾아왔던 살수도 오직 팽도혁을 죽이는 것이 목표인 듯 했습니다”


“글쎄요. 광상길 방주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만큼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는 유형도 아니었고, 비교적 깔끔하게 자기 구역을 관리하던 문파인지라···”


“팽도혁도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여러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을 이리저리 이어가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던 백리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흉수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 백리세가일지도 몰라요. 이 참사의 책임을 우리에게 덮어 씌우려는 거죠”


백리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런 살육극을 우리에게 덮어씌운다고? 터무니없는 소리!”


“적기방주는 오라버니와의 비무 뒤에 갑작스레 죽은데다, 우리가 객잔에서 그들과 한바탕 치열하게 싸운 것을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갑작스레 적기방원들이 참혹하게 살해된 것이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저희가 벌인 일이라 생각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백리세가야. 사람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의심하겠느냐?”


“보통 상황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여러모로 구실만 찾고 있던 세력들에게 좋은 빌미와 명분을 제공하게 되겠죠. 우리가 떨어진 사이 팽도혁까지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만약 우리들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이가 없다면··· 어쩌면 주변 우방세력까지도 우리에게 등을 돌릴지도 몰라요”


가까스로 속을 다스린 대식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백리세가의 결백을 증명할 이가 왜 없겠습니까?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그대들은···”


백리연이 말 끝을 흐렸다.


나는 그녀가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대식과 나같이 아무런 배경도 신분도 없는 장사꾼들의 말을 세상사람들이 과연 믿어주겠는가? 게다가 우리들은 팽도혁 일행과 객잔에서 시비가 붙었던 데다, 백리세가 남매들과 금전적으로도 엮여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백리연이 우려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했을 때 우리의 증언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백리담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계획한 이는 참으로 교활하고 사악한 놈들임에 틀림없다. 단지 우리 세가를 몰아붙이기 위해 이 많은 이들을 조롱하듯 잔인하게 죽여버리다니···”


피로 가득한 평원을 바라보던 백리연이 하나 둘 엉망으로 널부러져 있던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곧 그녀에게 백리담이 가세하니, 나와 대식도 차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팽도혁의 의식이 돌아왔다. 나는 또 그가 발작하지 않을까 싶어 걱정되었지만, 그는 한참동안 우두커니 앉아 우리들이 시체를 수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말없이 터덜터덜 걸어온 그가 우리와 함께 수하들의 시체를 마른 땅에 묻었다.

평야에 적기방원들의 무덤이 동글게 솟아났다.



***



“너희들의 말을 듣고보니 한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


팽도혁이 수하들의 무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몇 달 전부터 다른 패거리의 우두머리들이 우리 방주님을 여러 번 찾아왔었지. 큰 도약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나··· 하지만 우리 방주님은 그들을 믿지 않았어. 하나를 내주면 둘을 내달라 할 것이고, 둘을 내주면 곧 모든 것을 달라고 할 이들이라며 냉정히 그들을 돌려보냈지”


이야기를 듣던 백리연이 백리담을 살짝 노려보자, 백리담이 먼 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몇 번을 두들겨도 방주님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얼마 뒤에는 어떤 낯선 이들이 방주님을 방문했다. 방주님과 그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나는 모른다. 다만 그들이 가고난 뒤 방주님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이런 말을 하더군.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게되든 이제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피를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호기롭게 답했지. 하하, 강호인이라면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무엇이든 말씀만 내려주십쇼. 그러자 방주님이 말했지”


팽도혁이 호흡을 고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정말 많은··· 많은 피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오늘의 일은 광상길 방주의 예언이 현실로 되어버린 것이라고 해야할까. 백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광상길 방주를 압박하던 세력이 아마도 최근의 사태와 연관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적기방이 자신들에게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니, 오히려 저희 백리세가를 귀퉁이로 몰아갈 수 있는 패로 써버린 거에요”


“우리 적기방 무인들은 옆구리에 칼을 찬 순간부터 누구나 죽음을 각오하지.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다. 이런 방식은 아니야. 이런 끔찍한 살육극을 벌이는 놈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둘 수는 없지. 반드시 살아남아서 제대로 엿먹여 줄테다”


팽도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자, 백리세가로. 증언을 하라면 증언을 하고, 함께 싸우라면 함께 싸우마. 다만 우리 방의 나머지 수하들과 식솔들을 보호한다고 약속해줘야 한다”


백리담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어렵지 않지. 세가에 돌아가는 대로 아버님께 말씀드려 가장 빠르게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


이렇게 되고 나니, 어제 밤의 참사가 살아남은 이들끼리 뭉치게 만든 셈이었다. 팽도혁이 갑자기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밤에는 따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군. 네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수하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을거야. 그랬다면 적기방의 남은 식솔들도 길을 잃게 되었을테지. 고맙다”


어라. 애꾸눈 팽씨가 왠일로···


내내 욕짓거리에 툴툴거리만 하던 사내가 갑자기 고맙단 말을 하자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나를 항상 차갑게 노려보던 백리담의 눈빛도 뭔가 달라진 듯하고, 백리연은 또 다시 눈을 반짝였다.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 훈훈한 분위기.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답했다.


“너무 고마워 할 것 없소. 금자 두 냥으로 갚으면 되니까”


“......”


“도대체 너란 놈은···.”


백리담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변하고, 팽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너무 높게 부른 것인가 싶어 황급히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너무 비싼 것 같으면 한 냥 정도 에누리도 가능하오”


백리연마저 아무 말 없이 마차에 몸을 싣자, 대식이 다가와 속삭였다.


“도련님. 제발 눈치라는 것을 좀···”


“내가 뭘?”


“...아닙니다”


우리는 적기방원들의 무덤을 뒤로 한 채 서둘러 백리세가로 향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1) +1 24.06.03 1,278 27 11쪽
28 +2 24.06.02 1,320 27 13쪽
27 노인 (3) +1 24.06.01 1,308 26 13쪽
26 노인 (2) +1 24.05.31 1,274 28 13쪽
25 노인 (1) +1 24.05.30 1,317 23 12쪽
24 조가장 (5) +1 24.05.29 1,325 27 13쪽
23 조가장 (4) +1 24.05.28 1,308 25 12쪽
22 조가장 (3) +1 24.05.27 1,317 29 12쪽
21 조가장 (2) +1 24.05.26 1,361 27 12쪽
20 조가장 (1) +1 24.05.25 1,458 24 11쪽
19 금자 열 냥 (4) +1 24.05.24 1,507 28 12쪽
18 금자 열 냥 (3) +1 24.05.23 1,465 30 12쪽
17 금자 열 냥 (2) +1 24.05.22 1,478 32 12쪽
16 금자 열 냥 (1) +1 24.05.21 1,504 29 12쪽
15 백리세가 (2) +1 24.05.20 1,570 29 13쪽
14 백리세가 (1) +3 24.05.19 1,630 31 13쪽
» 음모 +1 24.05.18 1,661 32 13쪽
12 암살 +2 24.05.17 1,660 30 12쪽
11 적기방 (2) +1 24.05.16 1,716 30 12쪽
10 적기방 (1) +1 24.05.15 1,782 33 12쪽
9 암습 +1 24.05.14 1,823 38 12쪽
8 바가지 +2 24.05.13 1,902 37 13쪽
7 백리연 +2 24.05.12 2,016 39 13쪽
6 와장창! +1 24.05.11 2,046 40 11쪽
5 첫 거래. +3 24.05.10 2,132 41 12쪽
4 인연은 그 앞날을 알 수 없다. +2 24.05.09 2,191 47 11쪽
3 사해가 동도. +3 24.05.08 2,391 50 11쪽
2 일대종사 (一代宗師) +2 24.05.08 2,878 39 12쪽
1 +3 24.05.08 3,634 4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