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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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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39
추천수 :
1,448
글자수 :
308,562

작성
24.05.1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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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
12쪽

적기방 (2)

DUMMY



그날 저녁, 다음 마을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는 꼼짝없이 너른 평야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대식과 나야 어떤 곳에서 뒹굴어도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나름 귀한 신분인 백리세가 남매 또한 노숙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모닥불을 피운 뒤 대식이 정성스레 죽을 끓였는데 간도 잘 맞고 맛이 꽤나 좋았다. 단 둘이 다닐 때와는 달리 뭔가 혼신의 힘을 다하는 녀석의 모습이 낯설었다. 백리연이 연신 칭찬하자 대식이 헤헤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었다. 백리담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진 않았지만 몇그릇씩이나 비우고 만족한 표정으로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수레에 실려있는 팽도혁까지 알뜰살뜰 챙겨주려던 대식이 그릇을 그대로 든 채 오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왜? 안먹겠대?”


“...저희가 주는 더러운 죽은 안먹겠다는군요. 하루 넘게 쫄딱 굶은 셈인데 괜찮을까요?”


“내버려 둬요. 제깟놈에겐 과분하지. 배고프면 천쪼가리라도 알아서 뜯어먹을거에요”


싸늘한 말을 내뱉는 백리연에게 조심스레 적기방과의 사연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팽도혁의 말만 들어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꽤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호오, 장사하는 분께서 이제 무림의 일에도 관심이 생기셨나보죠?”


“그냥 정세파악입니다, 정세파악. 장사라는 것도 결국 다 주변 상황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백리연은 훗 웃더니 고개를 돌려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기조식을 하는 줄로만 알았던 백리담이 어느새 코를 드르렁하며 잠들어 있었다. 이래저래 요란한 일을 겪었음에도 대단히 태평한 성격이기도 하다.


“백리세가는 지금껏 받지 못한 도전에 직면해 있어요”


다시 고개를 돌린 그녀가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사파 세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우리 세가가 관리하고 있는 영역에서 크고 작은 분란들을 일으키고 있죠.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진두지휘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아직까지는 최대한 전면 충돌을 피하며 가까스로 조율을 해나가고 있지만, 점점 더 상황은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지고 있었죠.”


대식이 입이 마르도록 설명했던 위대한 백리세가에게 그러한 사정이 있었단 말인가. 촌구석에서 기체조를 하며 살아가던 나에게는 정말 생경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오라버니와 제가 단 둘이 은밀하게 적기방을 방문한 것은 이런 정세를 풀어보려는 시도 중의 하나였어요. 적기방은 이 지역 사파 사이에서 꽤나 존재감이 클 뿐만 아니라, 방주인 광상길도 그나마 말이 통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하필 우리의 방문 이후에 그가 급사해버렸으니···”


백리연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분과 비무를 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팽도혁이라는 친구는 오라버니 분 탓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던데요”


“서로 의견조율이 좀처럼 되지 않는 탓에 격분해서 몇 수가 오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비무의 영역이었어요. 결코 누군가 죽거나 다칠만한 일은 아니었단 말이죠”


“그거야 모르죠. 혹시 성격이 불같은 오라버니께서 정말 살수를 쓰신 것은 아닌지···”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일부러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백리연은 나에게 살짝 눈을 흘기긴 했지만 발끈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라버니가 사파나 흑도 세력들을 혐오하는 것은 맞지만 사리분별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가 깊은 내상을 입은 것도, 광상길을 해치지 않기 위해 급하게 힘을 거두어 들인 탓이란 말이죠. 그런데 며칠 뒤 팽도혁이 눈이 뒤집혀서는 앞뒤 재지 않고 우리를 공격해오더군요”


우리가 백리세가 남매를 만난 것은 팽도혁 일행에게서 가까스로 탈출한 그들이 도망치고 있을 때의 일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아까 있었던 암습은 다른 사파 세력들의 짓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저희의 목숨을 노리는 일은 지금껏 없었던 일이에요. 어떻게든 잘 풀어보려고 했는데 상황은 점점 더 안좋아지기만 하는군요”


그녀의 표정이 착 가라 앉는 것을 보니 아차 싶었다. 여러 상황에 워낙 의연하게 대처하기에 항상 겪는 일인 줄로만 알았을 뿐,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무거워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때, 우리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대식이 불쑥 끼어들었다.


“걱정마십시오! 별 일 없을 겁니다. 저희 도련님이 있지 않습니까?”


“.....?”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백리연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며 녀석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제가 이 소협의 무공에 대해서 계속 묻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저희와 엮이게 된 것이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아서에요. 혹시 위장이 아닌가했지만 그것은 확실히 아닌 것 같고··· 이 위기의 순간 만나게 된 것을 보니, 백리세가를 위해 나타난 귀인(貴人)인 것 같기도 하구요”


귀인. 그것은 내가 감망산 산적들에게 한 말이 아니던가? 그 산적들이 어떻게 되었더라. 나에게 주머니를 탈탈 털리고 한 줌의 약초를 받아갔지. 나는 그 처연한 산적 신세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는 그런 무림의 일이라면 질색입니다. 소저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오싹오싹거리고 머리가 어지럽군요. 고향 생각도 나구요”


“그대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밝게 웃었다.


“함께 싸워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저의 친구가 되어줄 수는 있지 않나요?”


친구?


참으로 묘한 어감이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것이 성립한다는 이야기는 현대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대식이 또 다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이 녀석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녀석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더니, 녀석이 어흑- 신음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땅바닥을 굴렀다.


우리가 못나게 투닥거리는 사이 백리연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춤추는 모닥불 너머 그녀의 웃는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 마차 안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길고도 기묘했던 하루였다.



***



잠에서 깨어 번쩍 눈을 떴을 때, 까만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다.


모닥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 타닥 타닥 타오르고 있었고, 옆에서는 대식이 세상 모르고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자 자기 차례의 불침번을 서던 백리연이 마차 위에 올라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어느 한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으셨나요?”


“적기방 쪽입니까?”


“...그런 것 같네요”


나는 마차 옆으로 다가가 저 멀리 지평선 쪽을 주시했다. 당연히 보이는 것은 없지만,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소리, 처절한 비명소리가 어렴풋이 바람을 타고 들려오고 있었다. 그 쪽이라면 분명 팽도혁을 따르는 적기방 무리들이 따라오던 방향이다.


“무슨 일이냐?”


뒤늦게 잠에서 깬 백리담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적기방 녀석들 쪽이에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군요”


“마적떼라도 나타났나?”


“설마요. 마적들 정도에 쉽게 당할 녀석들도 아니고··· 다른 문파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것일까요?”


“습격이라고?!”


팽도혁이 수레 쪽에서 크게 외치자, 그제서야 대식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나를 풀어다오. 수하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온 몸이 꽁꽁 묶인 팽도혁이 수레에서 몸부림을 쳤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처절한 비명과 병장기 소리 사이 누군가의 기이한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는데, 그저 웃음소리가 이 먼 곳까지 들린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가보자”


백리담이 고민하는 기색 없이 튀어나갔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백리연 또한 깜짝 놀란 듯, 황급히 따라붙으며 그를 만류했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이야기에요?”


“적기방이 우리의 적은 아니지 않느냐. 만약 곤경에 처한 것이라면 마땅히 도와줘야지”


어제만 해도 말 안통하는 사파는 목을 베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이 누구였더라. 서로 곧 죽일 듯이 치고 박고 할 때는 언제고, 난데없이 정의감을 발휘하는 백리담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당연히 백리연이 그를 말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내 그녀도 그를 따라 훌쩍 마차에서 뛰어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팽도혁이 지칠 줄 모르고 수레 이곳 저곳을 구르며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나! 나를 데려가라! 이익—! 이걸 풀어달라고!”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팽도혁에게 쏘아붙인 백리연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소협,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돌아올테니, 이곳에서 팽도혁을 잘 지키고 있어주세요”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식이 입을 헤 벌린 채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는 뭔가 다르긴 다르군요. 이 얼마나 정의감 넘치는 모습이란 말입니까?”


대식이 감탄하건 말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곳이 얼마나 먼 곳인 줄 알고 무작정 몸을 날린단 말인가. 도착했을 때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백리연 남매의 몸상태 또한 정상과는 거리가 먼 상황. 그러니까 그들의 행동은 무림인의 쓸데없는 오지랍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임마, 애송이! 재수없는 새꺄! 너 이리 와서 나를 좀 풀어다오! 내 수하들이 위험하단 말이다!”


“거 좀 조용히 하쇼. 그런 식으로 싸가지 없이 이야기하면 풀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소?”


“존경하는 선생님, 저를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아무튼 안됩니다. 그대를 잘 지키라고 했소”


팽도혁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끝도 없이 퍼부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입에 천쪼가리를 우겨 넣었다. 수레바닥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을 때마다 수레가 부서지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여서, 아예 포목으로 그의 몸을 덮어 옴짝달짝 못하게 해놓았다.


캄캄한 어둠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비명소리들과 어렴풋이 들려오던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생각하자, 대책없이 떠나간 백리세가 남매들이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가 볼 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무림의 일에 이렇게 계속 끼어드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고향을 떠나올 때만 하더라도 돈만 열심히 벌어보자고 단단히 마음먹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백리세가와 엮인 이후로는 이상한 일이 끝도 없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더이상 비명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백리세가 남매가 도착한 것일까? 그들이 도착한 뒤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만약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면 백리세가 남매가 무언가 신호를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방은 조용할 뿐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기나긴 기다림.


모닥불을 뒤적이던 대식이 다시 쿨쿨 잠이 들고, 간간히 몸부림을 치던 팽도혁조차 더이상 움직임이 없어질 쯤이었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아침 해도, 백리세가 남매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낯선 누군가가 우리의 수레로 접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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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노인 (2) +1 24.05.31 1,273 28 13쪽
25 노인 (1) +1 24.05.30 1,317 23 12쪽
24 조가장 (5) +1 24.05.29 1,325 27 13쪽
23 조가장 (4) +1 24.05.28 1,307 25 12쪽
22 조가장 (3) +1 24.05.27 1,317 29 12쪽
21 조가장 (2) +1 24.05.26 1,360 27 12쪽
20 조가장 (1) +1 24.05.25 1,457 24 11쪽
19 금자 열 냥 (4) +1 24.05.24 1,507 28 12쪽
18 금자 열 냥 (3) +1 24.05.23 1,465 30 12쪽
17 금자 열 냥 (2) +1 24.05.22 1,478 32 12쪽
16 금자 열 냥 (1) +1 24.05.21 1,504 29 12쪽
15 백리세가 (2) +1 24.05.20 1,570 29 13쪽
14 백리세가 (1) +3 24.05.19 1,629 31 13쪽
13 음모 +1 24.05.18 1,660 32 13쪽
12 암살 +2 24.05.17 1,658 30 12쪽
» 적기방 (2) +1 24.05.16 1,716 30 12쪽
10 적기방 (1) +1 24.05.15 1,781 33 12쪽
9 암습 +1 24.05.14 1,823 38 12쪽
8 바가지 +2 24.05.13 1,902 37 13쪽
7 백리연 +2 24.05.12 2,016 39 13쪽
6 와장창! +1 24.05.11 2,045 40 11쪽
5 첫 거래. +3 24.05.10 2,132 41 12쪽
4 인연은 그 앞날을 알 수 없다. +2 24.05.09 2,190 47 11쪽
3 사해가 동도. +3 24.05.08 2,390 50 11쪽
2 일대종사 (一代宗師) +2 24.05.08 2,877 39 12쪽
1 +3 24.05.08 3,633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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