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리스라고 하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왕비의 방문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그러자 카시아가 말했다.
“도서관에서는 왕족을 만나도 예를 올리지 마세요. 서로 책 읽는 시간을 방해하니까요.”
카시아의 말은 훗날 도서관에 크게 새겨졌다.
“왕비님,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그녀의 방문에 도서관 사서들 가운데 가장 자주 보았던 사서 카르타가 찾아와 물었다.
“오랜만에 책을 좀 읽고 싶어서요. 그리고 전에 부탁했던 걸 확인할 수 있는지도 알고 싶고요.”
“아! 왕비님께서 로그넘족이 서진한 이유를 지리적으로 설명한 책 혹은 설명할 수 있는 책이 있는지 하문하셨지요?”
“맞아요. 기억하고 있었군요.”
“그럼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와 관련된 책은 없었습니다. 도서관에 소장된 책뿐 아니라 왕국 차원의 기록이나 학자의 개인 연구에도 그런 주제는 없는 것 같더군요.”
“그런가요?”
카시아가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저희가 학자, 관리, 군인, 상인, 농부, 그 외에도 여러 계통 사람들의 의견과 기록을 모아 그 문제에 대해 연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사서 카르타의 말은 굉장히 뜻밖이었다.
관련 서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까지는, 책이 아무리 많다 해도, 사서들의 전문 분야이니 확인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관련된 연구가 없어서 직접 연구하기로 했다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의견과 기록을 모아 연구해 보기로 결정했다고?’
카시아는 궁금했다.
“저희가 누구죠?”
카르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왕비님.”
카시아는 순간 라티시아 대공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베르 왕가의 세 가지 숨은 힘 가운데 ‘지혜의 서’라는 것이 있고,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도서관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도서관에 드나들었던 이유도 바로 지혜의 서에 다가가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지혜의 서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
‘찾았다! 그런데 내가 찾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결혼하여 우베르 왕가 사람이 되었으니 밝혀도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구나.’
아마도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저들이 제대로 정체를 밝히지 않았으니 굳이 아는 체할 필요는 없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
“예. 괜찮으시면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를 잠시 듣고 가시겠습니까?”
“지금 말인가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죠.”
카르타가 카시아를 서가 뒤쪽 방으로 이끌었다.
호위 기사들이 따라 들어가려 하자 카르타가 막았다.
“여기서부터는 왕실 가족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귀한 분을 지근거리에서 모셔야 하오.”
호위 기사가 반발하자 카르타가 말했다.
“왕실 경호 규범을 제대로 숙지했다면 알 것입니다. 도서관은 왕실 경호 규범의 적용을 받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을. 도서관에서는 도서관의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카시아는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차음 알았다.
참으로 기이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경호 기사들도 마찬가지.
경호 규범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는지 기어이 따라 들어가겠다고 우겼다.
카르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카시아가 기사들을 나직이 질책했다.
“조용한 도서관을 소란스럽게 만들 셈인가요? 우베르 왕비의 품격을 땅에 떨어뜨릴 작정이 아니라면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요.”
기사들도 그 말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사서 카르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시아를 안내해 빈방으로 들어갔다.
카시아는 카르타를 따라 걸어가다 강렬한 이질감을 느꼈다.
문 없는 방을 몇 개 지나간 것뿐인데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떻게 된 거죠?”
카시아의 물음에 카르타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무척 예민하시군요.”
“여긴 어디죠? 도서관이 맞나요?”
“도서관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어떤 일은 이해하는 데 배경 지식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테니 일단 들어가시죠. 왕비님께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카시아는 카르타를 따라 계속 걸었다.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다른 넓은 방이 나타났는데 방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카시아는 카르타가 권하는 대로 빈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로그넘족이 서진한 이유에 대한 고찰, 중간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카르타의 사회로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발표를 시작했다.
카시아는 발표를 들으면서 무척 놀라고 말았다.
로그넘족의 연원, 계통, 역사.
50년 전에서 100년 전 사이에 벌어진 주요 사건.
족장과 주요 인물들의 특징.
주변 민족과 국가들과의 관계.
참석자들은 그동안 그녀가 읽었던 어느 책보다 내밀하고 중요한 내용들을 막힘없이 발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기후 변화와 초지, 식생의 변화에 대한 상관관계 연구라는 발표를 듣고는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다.
연평균 기온이 점점 떨어지면서 로그넘족이 살던 지역의 초지 면적이 줄어들어 새로운 초지를 차지하기 위한 로그넘족의 이동이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로그넘족의 라티시아 침공은 사악하고 잔인한 로그넘족의 만행이 아니라 자연이 등 떠민 결과라는 이야기였다.
받아들이기 어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공정하고 편견 없는 내용이라 저절로 수긍이 되었다.
“···이상으로 중간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회원들께서는 돌아가셔도 됩니다.”
참석자들이 나가고, 방 안에는 카시아와 카르타만이 남아 있었다.
카시아는 워낙 궁금한 게 많아 아무 질문도 하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이 모임을 알고 계신가요?”
“그럼요. 저희와 우베르 왕가는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거든요.”
카시아는 카르타의 대답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루케오가 생각보다 입이 무겁다는 것, 그리고 우베르 왕가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하 관계가 아니라는 것.
상하 관계라면 왕이 부인에게 언급하지도 않은 모임의 정체를 스스로 밝힐 수는 없었다.
“왜 나에게 이 모임을 보여 주는 거죠? 왕가의 식구가 되었다 해도 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외인이지 비터스 혈족도 아닌데 말이에요.”
카르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왕이 아닌 왕비님을 모임에 초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째는 신왕께서 로그넘 정벌에 힘을 보탤 수 있느냐고 하시기에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관심을 뚝 끊으시더군요. 둘째는, 왕비님께서 결혼 전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으시고, 외람됩니다만 매우 뛰어나신 분이기에 저희와 뜻이 잘 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요?”
“지혜를 사랑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수많은 수단 가운데 무력 말고 다른 평화로운 방법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저희는 바랍니다.”
“무력 말고 지혜를 활용하는 왕이 된다면 도와주고, 단지 무력을 원하면 도와주지 않는다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로그넘이 우베르를 함락시킨다 해도 돕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돕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베르가 스스로 더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되도록 도울 수는 있지요.”
“무력을 사용하는 방식은 절대 돕지 않는다?”
“예.”
“도울 능력은 있나요?”
카시아의 도발에도 카르타는 담담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카시아는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해했다.
“이제 그만 가시지요. 방이 닫힐 시간입니다.”
“······?”
카시아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진담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타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낯익은 방들을 몇 개 지나 맨 처음에 들어왔던 방에 도착했다.
카르타가 팔찌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왕비님을 한 번은 위험으로부터 구해 줄 겁니다.”
팔찌는 저절로 움직여 카시아의 손목을 채우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깜짝 놀라는 카시아에게 늙은 사서가 말했다.
“앞으로도 지혜를 사랑하는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갔다.
카시아도 얼른 따라 나갔다.
익숙한 공기와 풍경, 도서관의 모습과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카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왕비님.”
“그러죠.”
지혜의 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엄청난 존재들이 우베르 왕가 뒤에 존재하고 있음을 직접 경험하여 알게 된 카시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궁으로 돌아갔다.
‘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단지 가까이 지내자는 건가? 나를 이용하겠다면 나도 철저히 이용해 주겠어.’
보이지 않는 팔찌가 채워진 손목을 보며 카시아는 굳게 결심했다.
***
코르삭은 카드쿠스 숲으로 돌아오자마자 부발루스의 뿔과 힘줄을 잔뜩 싣고 투리스 요새로 갔다.
마침 요새로 돌아와 있던 사령관 뷔페스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환장하겠네. 이걸 정말 가져왔어? 이렇게나 빨리? 다 해서 몇 개야?”
“750세트 조금 안 됩니다. 다연발 대형 쇠뇌 500개 만들어 주세요. 그걸 싣고 다닐 마차도요.”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워낙 양이 많아서 다 만들려면 몇 년 걸리겠는데?”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형 쇠뇌 화살은 무상으로 공급해 주시는 겁니까?”
“야! 그건 곤란하지. 나는 땅 파서 화살 만드냐?”
“북서부 얻으셨잖아요?”
북서부를 차지하는 데 코르삭이 세운 공이 워낙 커서 뷔페스는 할 말이 궁했다.
“그래도 안 돼! 새로 얻은 땅을 쥐어짜면 영주들이나 백성들이 좋아하겠냐? 이렇게 하자.”
“어떻게 말입니까?”
“너 상회 가지고 있잖아?”
트베리 상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제가 가진 게 아니긴 하지만······, 상회는 왜요?”
“북서부 전역을 돌아다니면 가까이만 다니는 것보다 이익이 더 많이 남지 않겠어? 그걸로 대형 화살은 사서 써라. 어때?”
코르삭은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나 냉큼 승낙하지는 않았다.
“사령관님, 오크 잔당 소탕 완전히 끝났나요?”
“아직 안 끝났지.”
“그럼 저희보고 오크 소탕하면서 돌아다니라는 말 아닙니까?”
“오크도 잡고 돈도 벌고 겸사겸사 하는 거지 뭘······.”
“그리고 북서부 돌아다니며 장사해 봐야 얼마 안 남습니다. 깡촌 돌아다녀 봐야 거기서 거기죠, 뭐.”
“장사꾼이 안 남는다는 말은 다 거짓이라던데?”
“저는 장사꾼이 아니잖아요?”
장사꾼보다 더 지독한 머리를 쓰는 놈이지!
뷔페스는 그 말을 꾹 삼켰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북서부 안에서 돌아다녀 봐야 거기서 거기니까 지역을 넘어갈 수 있는 신분증 발급해 주십시오.
그리고 세금도 조금만 손 봐 주십시오. 북서부를 차지하셨으니 영지들 지날 때마다 내는 통행세 폐지해 주시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때만 걷는 겁니다. 거래세도 영지마다 다른데 손을 봐야 합니다.”
“야! 영주들이 가만히 있겠냐?”
“제가 잘은 모르지만, 라티시아와 우베르가 부자가 된 건 대로를 따라 먼 곳까지 가서 교역했기 때문이라면서요? 투리스라고 하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잔돈푼에 얽매이지 마시고 부자가 되어 보자니까요? 세율이 낮아도 이익이 크면 세금 수입도 훨씬 늘어나지 않겠어요?”
“대로를 따라 교역을 한다라······.”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야기였다.
우베르 왕국의 모든 상인과 귀족들이 교역에 뛰어드네, 투자를 하네, 야단일 때에도 투리스는 오크를 막는 것만 신경 쓰며 살아왔다.
남들이 부자가 될 때 피를 흘려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오지 깡촌이라고 무시만 당했다.
이제 투리스를 넘어 북서부를 장악했다지만, 우베르 전역을 놓고 보면 여전히 변두리였다.
인구도 적고 산물도 빈약했다.
다른 지방의 사정도 잘 몰랐다.
아직 오크 잔당을 완전히 소탕한 것은 아니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코르삭 말대로 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싶었다.
상인들을 세상 곳곳으로 보내 큰돈을 벌고, 투리스의 위상을 전파하며, 바깥의 소식을 빠르게 가지고 돌아온다.
“좋다! 거역하는 영주가 있으면 두들겨 패지, 뭐. 하자, 교역!”
투리스 사령관의 강력한 교역 정책 - 사실상 세금 정책 - 에 의해 우베르 북서부 지방이 들썩였다.
일부 영주들은 진지하게 반란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대형 화살 값을 벌어보려는 코르삭의 욕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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