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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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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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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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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라티시아 대공의 꿈

DUMMY

우베르 왕국의 수도 플로스 외곽의 어느 한적한 장원.

이곳은 다스릴 땅도 거느릴 병력도 없는 라티시아 대공 일가가 국왕의 배려로 명맥을 이어 가는 곳이었다.

말이 배려지 사실은 라티시아 대공 가문을 마지막까지 이용하기 위해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베르의 왕은 라티시아를 탈환하기를 원하지만, 로그넘족을 물리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쟁을 계속하면 결국 망한다. 로그넘족에 의해서든 왕이 약해진 사이에 야심을 키워 온 영주들에 의해서든.

그래서 가능하면 로그넘족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우베르인들은 라티시아를 잃기 전의 영광의 시절을 잊지 못해 수복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었기에 백성들의 염원에 반해 탈환 전쟁을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은 왕으로서의 신망을 완전히 잃게 되어 그럴 수가 없었다.

우베르의 왕은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로그넘족에 대대적인 침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직접 탈환 전쟁을 주도하지 않고 라티시아 대공을 앞세우는 방법을 택했다.


우베르의 왕은 공식적으로 동원령을 내린 적이 없다.

땅을 빼앗긴 당사자 – 라티시아 대공이 도움을 호소하자 그에 호응한 우베르의 영주들이 자발적으로 병력을 지원해 싸움이 벌어진 것일 뿐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지만, 이러한 모양새를 유지함으로써 로그넘의 강렬한 적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사태를 피하려 한 것이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로그넘족은 라티시아를 차지한 뒤로 우베르 왕국 본토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문제는 라티시아 대공이었다.

허울뿐이지만 라티시아 탈환 전쟁의 주도자가 되다 보니 가문의 남자들은 당연히 참전해야 했고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하는 주인으로서의 결의를 보이기 위해 선두에서 싸워야 했다.

그리하여 로그넘의 침공 이후에도 살아남았던 라티시아 대공 가문의 남자들은 거의 다 죽고 말았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병력을 동원하고 지휘하는 우베르의 영주들은 힘이 없는 라티시아 대공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각자 군대를 이끌고 온 영주들은 대공이 있는 자리에서 저희들끼리 라티시아를 탈환한 뒤 땅을 어떻게 나눌지, 전리품을 어떻게 분배할지 의논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야말로 허수아비 취급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라티시아 대공은 왕이 의도한 대로 허수아비 역할을 잘 수행해 왔다.

왕이 무리한 명령을 해도 군말 없이 따랐으며 다른 귀족들에게 모욕을 당해도 비굴한 웃음으로 넘어갔다.

그로 인해 더욱 허수아비 취급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사람들은 라티시아 대공을 배알도 없는 사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땅바닥에 엎드려 기는 것도 서슴지 않는 비루한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티시아 대공은 결코 그 수모를 잊지 않았다.


침략자 로그넘족.

라티시아를 지켜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허수아비, 화살받이로 이용해 먹는 우베르의 왕.

깔보고 조롱하는 우베르의 귀족들.


그들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먼저 죽은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 자식, 친지, 부하, 그리고 라티시아 백성들의 혼령 앞에 다짐했다.

힘이 없었기에 그는 온갖 치욕을 참고 견디다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아들은 모두 죽고 없지만 내게는 딸이 있다. 내 딸을 우베르의 왕자와 결혼시켜 이 나라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리하여 왕이 아껴둔 군대와 영주들이 숨겨 놓은 병력을 모조리 이끌고 가 로그넘족을 쓸어버리고 라티시아를 되찾고 말겠다!’


대공의 딸은 어릴 때부터 미모가 이미 출중했지만, 그것만으로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래서 라티시아 대공은 딸을 가르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정치, 지리, 풍습, 역사, 인물.

음악, 춤, 그림.


무엇보다 언행을 가르쳤다.

말 한마디를 꺼내도 조리가 있고 재치가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나오도록.

손짓 하나, 표정 하나, 시선 처리 하나하나가 예술품이 되어 어떤 풍경 속에서도 빛나도록.

단지 미모나 기예 한두 가지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우아하고 매력이 넘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딸을 길렀다.

그리하여 라티시아 대공의 딸 카시아는 완전히 쇠락해 버린 가문과는 반대로 플로스의 사교계에서 점차 부상하게 되었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대공은 마지막까지 숨겨두었던 가문의 힘을 모두 동원하여 플로스는 물론 우베르 왕국 전역에 소문을 퍼뜨렸다.


“평범한 귀족이 카시아를 탐냈다가는 그녀의 빼어남을 감당하지 못해 가문이 망하고 말 것이다.”

“라티시아 대공의 딸에게 어울리는 신랑감은 우베르의 왕자님뿐이다.”


소문이 소문을 만들고 호기심이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런 소문이 도는 거야? 귀족 가문도 감당 못 할 정도라니?”

“단지 겉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야. 자애롭고 기품이 넘치고 매혹적이고 눈이 부시대. 그야말로 여신의 자태라더군.”


소문이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 뭇 귀족들을 라티시아 대공의 장원으로 떠밀었고 멀리서나마 카시아를 본 사람들은 소문이 오히려 실제만 못하다고 증언했다.

결국 우베르의 왕과 왕자에게도 소문이 끊임없이 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왕은 에포스 장군 대승 기념일에 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라티시아 대공 부녀를 정식으로 초대했다.

로그넘과 워낙 긴 세월을 싸웠기에 패전도 많았지만 승전도 없지는 않았다. 패전이 뼈아픈 만큼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승전 기념일을 특별히 더 신경 썼다.

많은 귀족들이 모이는 그 중요한 자리에 카시아를 불러 소문의 실체와 됨됨이를 검증하겠다는 뜻이었다.


“됐다!”


마침내 오랫동안 공들인 계획이 성공을 눈앞에 두게 되자 라티시아 대공은 기쁜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카시아를 불러 자신의 뜻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널 우베르의 왕자와 결혼시켜 이 나라를 차지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고향을 되찾고 우리를 핍박한 이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알겠느냐? 마침 대승 기념일에 왕이 너를 초대하였으니 남은 기간 동안 준비를 잘 하도록 하여라.”


카시아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정신을 잃고 말았다.

라티시아 대공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도록 키운 딸이 까무러치자 무척 놀랐지만,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딸이 꺼낸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놀라지는 않았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뭐?”


대공은 너무 놀라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히 말했다.


“그럴 수 있지. 그 나이 때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사랑한다 해도 상관없다. 첫사랑은 지나가는 법이야. 잊으렴. 왕자와의 결혼이 중요하다. 너만이 우리 가문을 살릴 수 있어.”


감정을 꾹꾹 누른 아버지의 간절한 이야기에 카시아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동안 저를 공들여 길러 주신 게 이를 위해서였군요?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사랑하지 않으려 애라도 썼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비밀이 새 나갈 수도 있고, 네가 중압감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아버지의 설명에도 카시아의 눈물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중한지는 너도 잘 알 테니, 잊고 준비 잘 하여라.”

“그럴 수 없어요.”

“뭐? 정녕 나를 실망시키고 가문을 저버리겠다는 말이냐?”


대공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그게 아니에요.”

“그럼 뭐란 말이냐?”


카시아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배 속에 아기가 있어요.”


대공은 딸의 말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이윽고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가 정녕······!”


실망과 분노, 배신감과 허무함이 해일처럼 밀려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그동안 받은 치욕을 갚아 줄 유일한 방법이 쓸모없게 돼 버렸다.

라티시아 대공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분노가 화산처럼 터져 이 계획을 망친 딸을 당장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남은 자식이 카시아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애써 냉정을 찾은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심했다.


‘아기의 아빠라는 놈과 이 일을 아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배 속의 아기를 지운다. 그러고 나서 계획을 그대로 진행한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는 몇 남지 않은 대공 가문의 기사들 가운데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사 비더만을 불러 카시아가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녀와 호위들을 모조리 죽이고 딸을 임신시켜 자신의 계획을 망가뜨린 놈을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끔찍한 처형을 조용히 마무리한 비더만은 격렬한 싸움 끝에 렉스 막심이라는 젊은이를 잡아왔다.

그는 라티시아 탈환 전쟁을 위한 병력 모집 공고를 보고 상경한 산골 지방 출신의 기사 지망생이었다.

이름 있는 가문도 아니고 행색도 변변치 않은 젊은 녀석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남은 노련한 기사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분노에 휩싸인 대공에게 그 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딸과 사귄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느냐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알아야 제거할 대상을 확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도 높게 심문하고 조사해 봐도 다행히 다른 사람에게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플로스에 연고가 없었기에 애초에 말할 대상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렉스는 손발을 묶인 채 심하게 두드려 맞고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그런데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지 알고나 맞읍시다. 짐승도 이렇게는 안 때려요. 카시아를 사랑하는 게 이리도 큰 죄입니까?”


구석에서 묵묵히 심문을 지켜보고 있던 대공이 분노하여 나섰다.


“사랑?”

“예! 사랑합니다! 그게 왜요?”

“이놈! 카시아가 누군지 아느냐?”

“압니다! 라티시아에서 탈출한 난민의 딸이죠!”


렉스의 말이 가시처럼 대공의 마음에 박혔다.

대공은 말문이 막혔다.


“허!”

“내 어머니도 라티시아 출신이에요. 로그넘 치하에서 힘들게 살다가 라티시아 탈환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를 만나 탈출해서 결혼하고 나를 낳았죠. 그래서 이번 모병 소식을 듣고 로그넘 놈들을 물리쳐 라티시아를 해방시키고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플로스에 왔다가 카시아를 만났어요. 운명이구나, 생각했죠.”

“······.”

“카시아가 누군지 아느냐고요? 지체 높은 가문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었든 지금은 실향민의 딸일 뿐인데.”


조롱하거나 깔보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으음!”

“가문이 어떻든 부모가 누구든 상관없어요. 카시아는 가끔 슬픈 표정을 짓고는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난민들을 돌보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눈부신 사람이에요. 로그넘을 물리치고 라티시아를 탈환해 카시아의 얼굴에서 그늘을 걷어 줄 겁니다!”


렉스라는 청년은 이 와중에도 당돌하고 당당했다.

열정과 진심이 느껴졌다.

대공은 카시아가 왜 이 시골뜨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어린 녀석들의 사랑 놀음에 마음이 흔들리기에는 짊어진 짐과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너무나 컸다.

크게 쓰려고 정성껏 기른 카시아를 이름도 없는 시골 청년에게 줄 수는 없었다.


“죽이게.”


대공은 기사 비더만에게 명령하고 몸을 돌렸다.

비더만이 냉정하게 검을 뽑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카시아가 경비병들을 뚫고 고문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의 위치를 가르쳐 준 적도 없고 무슨 일을 벌이는지 말해 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할지 추측하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카시아는 꽁꽁 묶인 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렉스 앞에서 비더만의 칼을 막아서더니 단검을 빼 자신의 목에 겨누며 아버지에게 단호히 말했다.


“이 사람을 죽이면 저도 죽을 거예요. 아버지의 뜻은 이뤄지지 않겠죠.”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이 사람을 살려 주세요. 그러면 아버지가 뜻한 것을 이뤄 드릴게요.”


렉스를 살려 주면 우베르의 왕자와 결혼하여 이 나라를 빼앗고 우베르의 왕과 영주들의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라티시아를 탈환하겠다.


“저 녀석은 살아 있는 것 자체로 위험하다.”

“지금 애원을 하는 게 아니에요.”


대공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카시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음을 카시아는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대공은 자신이 길러낸 똑똑하고 치명적인 무기 앞에서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카시아가 대공에게 나직이 말했다.


“일단 사람들을 물리세요.”


대공은 그제야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의 존재를 알아채고 물러가게 했다.

그런 뒤 카시아에게 말했다.


“그래,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저 녀석과 아기가 있는 한 계획은 불가능하다.”

“아기?”


처음 듣는 단어에 렉스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눈을 번쩍 떴다.

카시아는 렉스에게 대답하지 않고 대공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기는 낳을 거예요.”

“그게 말이 되느냐!”

“최근에 난민촌에 역병이 돌고 있어요.”


카시아는 라티시아 난민들을 살피러 자주 난민촌에 들렀다.


“역병에 걸려 무도회 참석이 불가능하다고 하세요. 그리고 저를 어머니의 고향으로 보내세요. 역병이 나을 때까지 격리하고 휴양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흐음······.”

“아기를 낳으면 이 사람에게 줄 거예요. 세상에 나오지 않고 먼 곳에서 조용히 살면 되겠죠. 아기를 이 사람이 무사히 데려가면 그다음부터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요. 만약 아기를 낳기 전에 이 사람이 죽거나 아기가 죽는다면 저도 죽는 거예요.”


카시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아버지를 향한 눈빛과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

대공은 카시아라는 최후의 수단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알았다. 그렇게 하마. 단! 저 녀석을 이 나라에 두는 것은 안심이 되지 않으니 이번 전쟁에 보낼 것이다. 전쟁 중에 내가 손을 쓰지는 않겠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칼이나 화살에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죽으면 그것도 저 녀석의 운명이겠지. 살아서 돌아오면 아기를 주어 떠나보내겠다. 되었느냐?”

“예.”


딸의 대답을 들은 대공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자 카시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힘 풀린 몸을 움직여 렉스를 묶은 줄을 끊고는 그를 부둥켜안았다.


“아버지의 말을 믿지 마. 전쟁터에 나가면 적군뿐 아니라 아군도 늘 조심해. 그리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해. 그래야 우리 아기랑 내가 살아.”

“정말 아기를 가졌어?”

“응!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해 내가 미안하다!”

“아니야!”


두 사람은 껴안고 펑펑 울었다.

얼마 후 카시아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떠났다.

그리고 렉스는 또다시 벌어진 라티시아 탈환전에 처음으로 참전했다.


***


우베르인들은 어릴 때부터 사악한 로그넘족을 물리치고 라티시아를 구하는 전쟁놀이를 하면서 자랐고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꿨다.

렉스 또한 그러했기에 라티시아 탈환을 위한 모병 공고를 보고 위대한 영웅, 전설적인 기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상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는 그 꿈을 꾸지 않았다.

꿈 대신 강렬한 목표만이 존재했다.


‘반드시 살아남아 아기와 카시아를 지킬 것이다!’


밤낮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칼날이 날아들었다.

단 한 번의 전투에 부대원 절반이 죽기도 했다.

결국 우베르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또다시 라티시아에서 철수했다.

그 험한 전쟁터에서 렉스는 기어이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는 카시아를 만나 아기를 받아 안았다.

카시아는 1년 사이에 흉터투성이가 된 렉스를 보고도 냉랭하게 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 돌아오면 다 죽는 거야.”

“······.”

“라티시아 대공은 워낙 한이 깊어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손녀도 죽일 사람이야. 되도록 멀리 떠나. 이 나라를 벗어나는 게 안전할 거야.”

“······.”

“이제 가.”


렉스는 차갑게 변해 버린 카시아를 원망하지 않았다.

같이 도망가자고도, 몰래 옆에서 돕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그녀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걱정거리라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렉스는 짧게 진심을 전할 수 있는 말을 온 힘을 다해 골랐다.


“아기는 네 몫까지 사랑하며 키울게. 그러니 아기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걱정만 해.”

“······.”

“널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볼게. 그때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렉스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카시아는 잘 알았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려면 로그넘족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있거나 우베르의 왕에 맞먹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렉스의 말을 듣고 잠시나마 행복했다.

애써 유지하고 있는 얼음 가면이 녹을 것 같아 카시아는 기사들에게 손짓하여 먼저 돌아섰다.

카시아가 탄 마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보고 렉스도 아기와 아기 용품이 든 바구니를 들고 길을 나섰다.

둘 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울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통곡했다.

그 소리를 들은 듯 렉스의 품에 처음으로 안긴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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