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목 사이
트베리 상회는 광부 조합에서 물품 종합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나왔다.
램프, 기름, 밧줄, 삽, 갱도 버팀목, 수레, 수통, 식기 등 광부들이 사용하는 물품 일체를 공급하기로 한 것이다.
“세상에!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조합에서 나온 트베리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물론 장사 경력 30년이 넘은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이런 계약은 이익률이 그리 높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예. 마음만 먹으면 투리스 요새 안에서 전부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거든요. 게다가 광부들이 이 물건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익을 붙이기가 어렵지요. 이익만 따지면 과일, 채소 장사가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일이 많고 이익이 별로 없으면 좋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기뻐하세요?”
“신용도가 확 올라가거든요.”
“예?”
“조합과 종합 공급 계약을 맺을 정도로 안정적인 거래가 가능한 상인, 믿을 만한 상인으로 거듭나는 것이죠.”
“······?”
“어지간하면 외상도 가능하고, 자금이 부족하면 어느 정도 대출도 가능하고, 트베리 상회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아지는 겁니다. 믿을 만한 상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제 혼자 장사하는 상인이 아니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진정한 상회를 꾸릴 수 있게 된 것이죠.”
장사를 시작한 지 30년이 넘어서야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에서 신용을 기반으로 한 상인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물론 종합 공급 계약을 잘 수행해야겠지요.”
트베리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는 30여 년 동안 큰 사고 없이 장사로 생계를 꾸려 왔기에 자신이 꾸준함, 안정감이라는 평판은 이미 얻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더 큰 상인이 되기에는 이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오늘 광부 조합장이 자신과 종합 공급 계약을 체결한 데는 코르삭의 말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욕심이라는 말을 그렇게 매력적으로 하는 사람을 트베리는 처음 보았다.
“아기를 키워야 하는 아빠라 욕심을 낸다.”
이 말을 듣고 호감을 갖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아기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아기를 키워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말 한마디로 용기, 결단, 믿음을 느끼게 하고 돕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트베리는 어쩌다 코르삭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지 놀랍기만 했다.
“할 일이 많아졌으니 서둘러야겠네요.”
“아! 예.”
코르삭의 말에 트베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
주점 카르포에 맛 좋은 포도주 열 병을 사다 주는 의뢰는 성공하지 못했다.
“카멜리 자작령에는 맛 좋은 포도주가 없다고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가 그리 말하더군요. 투리스 인근에서 맛 좋은 포도주는 엔스 백작령의 트라운 산에서 난다고 합니다.”
카르포의 주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걸 누가 모르나? 트라운 산에서 나는 포도주는 너무 비싸서 투리스 사람들이 마실 수가 없다고. 게다가 1년에 몇 병 나오지도 않아서 돈이 많아도 구하기 어려워. 그래서 가까운 카멜리에서 구해 보라고 의뢰한 거잖아. 거기도 포도주 많이 나니까 잘 찾아보면 괜찮은 것들이 있겠지.”
그는 말을 거칠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들이 잘 찾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돈만 먹으려고 하네!”
코르삭이 발끈하여 한마디 하려는 순간, 트베리가 먼저 말했다.
“애초에 그런 생각으로 조합에 의뢰를 한 것이었으면 성공 보상금으로 400민트가 아니라 최소 4천 아니 4만 민트는 걸었어야지요.”
“뭐요?”
“토질과 기후가 좋은 포도주가 날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을 알면서 좋은 포도주를 찾아보라고 의뢰하는 것은 누군가의 시간을 헛되이 날릴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고 한 것이잖소?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벌 수 있는 돈을 못 번다는 소리란 말이오.”
“······.”
“그래도 나름 애를 써 본다고 포도주 대신 특별히 좋은 위스키를 구해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주점으로 갈 걸 그랬군.”
“위스키?”
주점 주인이 관심을 보였다.
“봅시다, 한번.”
“됐소. 안 팔겠소.”
“그러지 말고 봅시다. 이왕 가져왔으니 무겁게 다시 들고 갈 필요는 없잖아요.”
“흐음······.”
“투리스 요새에서 카르포보다 큰 술집은 없어요. 그리고 내가 말투가 조금 거칠어서 그렇지 상품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은 아니오. 품질이 좋으면 좋은 값을 쳐 주고 나쁘면 나쁜 값을 쳐 주니까 어디 한번 봅시다.”
트베리는 결국 못 이기는 척 위스키가 들어 있는 작은 오크 통 하나를 가져와서 맛을 보여 주었다.
“쭙쭙쭙쭙······. 후아~! 흐음!”
주인이 맛과 향을 음미하더니 바로 가치를 매겼다.
“한 잔에 3민트는 받아도 되겠는걸! 상당히 좋은 술이오.”
트베리와 코르삭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박이 난 것이다.
작은 오크 통 하나에서 정확히 몇 잔이 나올지 몰라도 100잔은 족히 나올 것 같았다.
그때 카르포의 주인은 오크 통의 크기와 무게를 보고 용량을 가늠한 뒤 머릿속으로 이미 계산을 마쳤다.
“이거 한 통에 200민트 어때요?”
“200민트?”
“일단 팔아 보고 나서 다시 조정해 봅시다.”
트베리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주점 카르포는 주인이 까다로운 만큼 술꾼들에게 나름 인정을 받는 가게였다.
그는 자신이 술을 거의 취급해 오지 않았기에 카르포의 주인보다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술을 중점적으로 취급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이 술을 만든 카멜리의 농부 영감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방법대로 밀주를 만든 것이지 위스키 제조업자가 아니었다.
물량이 한정적이고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상행 경로가 맞을 때 가끔 들러 몇 통씩 가져오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그럽시다, 그럼.”
“몇 통이나 있어요?”
“모두 네 통이오.”
카르포의 주인은 바로 800민트를 지불하고 위스키 네 통을 인수했다.
“가끔 들러요. 이거 떨어질 때 되면 또 주문할 테니까. 그리고 다니다가 좋은 술을 만나면 가져 와 봐요. 서운하지 않게 쳐 드릴게.”
“뭐, 그럽시다.”
“혹시 아까 내가 한 말에 기분 나빴다면 털어 버려요. 언제든 들러요. 술 한 잔 대접할 테니까.”
“그럽시다.”
결국 그들은 좋게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카르포를 나와서 코르삭이 트베리에게 말했다.
“사실 투리스에 오기 전에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거칠고 험한 곳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딱히 그런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술집 주인도 처음 거친 태도와 달리 상식적으로 이야기를 잘 끝냈다.
“일하고, 밥 먹고, 살아가는 건 다 똑같지요. 여기라고 별다를 게 있나요? 말로 풀 수 있으면 말로 푸는 것이지요.”
“네.”
“하지만, 다툼이 생기면 달라집니다.”
“그런가요?”
“예. 투리스의 주민들 상당수가 검은 숲으로 들어가서 밥벌이를 하잖아요.”
“네.”
“사냥꾼, 채집꾼, 광부, 기사, 병사··· 검은 숲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잔뜩 긴장한단 말이에요.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렇게 늘 긴장한 채 살다가 몬스터가 나타나면 살기 위해 악착같이 싸우죠. 그런 삶이 몸에 배어 있다 보니까 누군가가 나를 건드리면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응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더 조심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어쨌든 요새 안에서만 사는 사람들과 요새 밖으로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은 꽤 다릅니다. 짐승처럼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요.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요.”
코르삭은 아직까지 검은 숲으로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이제 만나러 갈 차례였다.
라우라의 답장을 가지고.
13년 동안 전쟁터에 나갔다가 20여 년 전에 돌아와 홀로 투리스 요새 안의 뒷골목 조직을 박살 내고, 막아서는 기사와 병사들을 뚫고 도박장에 불을 질러 근처 건물들까지 몽땅 불태워 버린 전설의 채집꾼 프라이바드를 만나러.
***
투리스 요새 인근의 마을들은 대부분 요새 후면에 있었다.
요새가 긴 울타리처럼 검은 숲을 막아주고 그 뒤에 안전하게 마을들이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요새 전면, 검은 숲 안에도 마을들이 있었다.
사냥꾼, 약초꾼, 채집꾼, 광부 등 검은 숲으로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채집꾼 프라이바드의 가족도 그런 마을들 가운데 하나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난 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몹시 두려워하여 접촉 자체를 꺼렸다.
부모가 죽고 막내 동생 라우라가 도망치듯 결혼해서 떠나 버리자 그는 결국 마을을 나가서 따로 살았다.
채집꾼 마을에 도착해 용건을 말하고 프라이바드의 집을 물어보자 젊은 약초꾼 하나가 길을 안내해 주겠다고 나섰다.
“마차를 타고는 못 갑니다.”
그래서 코르삭 일행은 젊은 약초꾼을 따라 걸어서 숲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당나귀는 괜찮아요. 오히려 데리고 가는 게 좋죠. 오크한테는 안 되지만, 어지간한 맹수나 코볼트 따위를 쫓아 버리는 데는 도움이 되니까요.”
그래서 쿠왕이와 끄억이도 데리고 갔다.
사실 쿠왕이만 데려가려 했지만, 모자가 하도 구슬피 울며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둘 다 데려가기로 했다.
코르삭은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야 검은 숲이 왜 검은 숲인지 알게 되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거목 밑동에는 두꺼운 이끼가 시커멓게 덮여 있고, 바닥에는 세월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부엽토가 발을 디딜 때마다 푹푹 꺼졌다.
마치 지하 세계의 귀신들이 발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런 곳을 한참 동안 지나자 지금까지 봐 왔던 거목들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대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무가 나타났다.
“천년 고목이라고 부릅니다. 저쪽에 한 그루 더 있죠. 프라이바드 씨의 집은 천년 고목들 사이에 있습니다.”
“아!”
코르삭은 라우라의 남편 호르투스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채집꾼 조합에서는 두 그루의 천년 고목 사이, 약초가 많이 나는 이 땅의 장기 점유권을 조합원들에게 팔았다.
5천 민트면 이 땅 절반의 장기 점유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프라이바드의 남동생이 넋두리처럼 이야기했고, 프라이바드는 동생을 생각해 이 땅을 모두 획득할 수 있도록 1만 민트를 주었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마을에서 살 수 없어 떠났다고 해도 굳이 왜 여기서 사는 걸까? 설마 평생 죽은 동생을 떠올리며 자책하려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약초가 많이 나는 땅을 독점하여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이길 바랐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코르삭은 아기의 등을 받치고 쿠왕이의 고삐를 끌면서 일행과 함께 천년 고목 사이 땅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프라이바드 씨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아요. 오히려 두려워하죠.”
“그래요? 마을 사람들이 프라이바드 씨를 두려워한다고 들었는데?”
“예전에는 그랬다고 하는데 그 사건이 있은 지 20년이 지났잖아요. 그동안 단 한 번도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으세요. 오히려 마을을 안전하게 지켜주었죠.”
“······?”
“물론 겉모습을 보고 겁을 먹는 사람은 있습니다. 옛날 일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여전히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시고 평범하게 대해 주세요. 그러면 평범한 사람입니다.”
“네.”
덤불숲 너머로 집 한 채가 보였다.
귀신이 살 것처럼 나뭇가지와 넝쿨과 낙엽들이 잔뜩 덮여 있는 오래된 통나무집이었다.
젊은 약초꾼이 조심스럽게 사람이 왔음을 알렸다.
“어르신! 조합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계신가요?”
코르삭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과거 홀로 투리스 요새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람이 세월이 지나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두려우면서도 무척 궁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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