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원리
로그넘 정벌을 선언한 뒤에도 루케오는 플로스에 머물러 있었다.
일단 꿈같은 신혼 생활을 만끽했다.
카시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달콤하여 원정을 떠나겠다고 선포한 일을 후회할 정도였다.
내치를 계속 부왕에게 맡기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왕위를 물려받은 데다 아직 원정을 떠나지 않고 있다 보니 선왕과 신하들이 자꾸 나랏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루케오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카시아와 그 일들에 대해 의논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카시아는 매우 현명하게 처신했다.
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먼저 나서서 개입하는 일이 없었다.
주로 들어 주고, 의견을 물을 때만 대답했다.
라티시아를 탈환하여 결혼 선물로 주겠다고 루케오가 약속했지만, 라티시아와 관련된 언급조차 한 적이 없었다.
“라티시아 문제로 왕궁에서 의견이 나뉜다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장인께 돌려드릴까 아니면 일단 우베르에서 임시 총독을 파견하여 관리하는 게 나을까?”
루케오가 이 문제를 먼저 꺼냈을 때 카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라티시아 대공께 돌려드려도 그분에게는 관리도 병력도 없어요. 그리고 로그넘이 라티시아를 지배하던 시기에 로그넘과 교류하던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다시 정립해야 할 거예요. 군대를 동원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로그넘이 다시 공격해 올 수도 있고요.
라티시아 대공께 돌려드린다 해도 실질적으로 우베르의 병력과 관리가 투입될 수밖에 없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약속도 안 지키는 사람이라고 흉보지 않을까? 장인께서도 서운해하실 테고······.”
“폐하와 저의 결합으로 우베르와 라티시아는 하나가 되었어요. 굳이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라티시아를 탈환한 순간, 이미 약속을 지킨 거예요. 전혀 서운해하지 않을 테니 마음 쓰지 마세요.”
카시아로서는 라티시아를 아버지에게 돌려주지 않고 우베르 왕국에 복속시키는 것이 더 나았다.
아버지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지 않았고, 우베르 왕국 직할로 두면 왕의 힘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왕의 힘은 곧 자신의 힘, 라티시아 대공에게 돌려줄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케오가 볼 때는 카시아가 친정보다 우베르 왕국 - 의 왕인 자신 - 을 더 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 카시아를 더욱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정에 대해 더 자주 이야기하고 의견을 구하게 되었다.
“투리스 쪽이 골치가 아픈가 봐. 어떻게 해야 하지? 원정을 떠나기 전에 손을 봐야 하나?”
“로그넘이 라티시아에서 기병을 탈출시켰다면서요? 주력을 보존한 셈이니 원군과 합세하여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몰라요. 이런 상황에서 투리스를 건드린다면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 괘씸하잖아? 멋대로 병력을 움직여 북서부를 차지했어. 왕을 무시하는 행동이야. 왕을 무시하는 자가 북서부를 차지하고 있는데 마음 편히 원정을 떠날 수나 있겠냐고?”
“그 점에 대해서는 언젠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겠죠. 그래도 지금은 아니에요. 로그넘과 싸우는데 내부에서 분란이 생기면 안 돼요.”
“흐음······.”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투리스 사령관도 자신이 한 일이 있으니 내심 불안할 거예요. 왕이 벌을 내릴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늘 무기를 휴대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렇겠지.”
“차라리 그동안 적은 병력으로 오크를 상대하느라 고생했다, 이번에 오크 침공을 막다니 장하다, 하고 치하하는 거예요.”
“벌을 줘도 모자랄 판에 칭찬을 하라고?”
“공은 공이니까요. 적은 병력으로 40만이나 되는 오크를 물리친 일은 충분히 상을 내려야 하는 일이 아니겠어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병력 부족, 물자 부족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오크를 막겠다고 북서부를 차지했으니 물자와 병력을 지원해 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칭찬 한마디로 병력과 물자를 아끼는 셈이니 왕국으로서는 크게 이로운 일이죠.”
“딴은 그렇군.”
“게다가 왕궁의 움직임을 늘 경계하며 무기를 갈고 있을 변방의 사령관 마음을 느슨하게 푸는 것이기도 하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도 투리스를 그대로 두고 떠나는 건 여전히 걸리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북서부를 통합했다 해도 애초에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이라 그쪽 병력만으로는 나쁜 마음을 먹기가 어려워요. 오크를 상대하기도 버거울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그래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면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두 가지 방법? 그게 뭐지?”
“오크 침공 직후에 선왕께서 투리스 배후 영지들이 위태롭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중앙군 3군단을 보내셨는데, 아직까지 그쪽에 있을 거예요.”
“맞아.”
“오크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3군단이 거기에 머무르며 투리스군을 돕도록 하는 거예요. 병력이 부족한 투리스군에 은혜를 베푸는 동시에 투리스군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억제할 수 있겠죠.”
“오! 좋은 생각이야. 그럼 다른 한 가지는?”
“이건 다른 문제와 얽혀 있어서 조심스러워요.”
“조심스러울 게 뭐 있어, 우리 둘이 나누는 이야긴데? 얘기해 봐.”
“······.”
“괜찮다니까 그러네. 난 당신 이야기를 들어야 밖에 나가 무식하다고 욕먹지 않는 왕이 될 수 있다니까? 편하게 말해.”
카시아는 루케오의 독촉에 마지못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위직에 공석이 많잖아요.”
“그렇지.”
“모르부스 후작에게 중임을 맡겨 달라고 북서부 영주들이 청원을 올렸다고 했잖아요.”
“맞아. 투리스 사령관이 모르부스 후작을 다독이려고 그런 짓을 꾸민 모양이야. 그런 걸로 달래질 리도 없지만, 애초에 들어줄 수가 없지.”
“들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응?”
“기존의 플로스 고위 관료 귀족들이 난민 수용소 비위 문제로 대거 퇴출되었어요.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데 누가 적임자일까요?”
“글쎄.”
루케오는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그 사건이 사람들 기억에서 흐릿해지면 다시 플로스의 관료 귀족들이 득세하겠죠. 그들은 플로스, 왕실, 이 나라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기들 주머니를 채울 수 있어요. 그러니 그들이 다시 복귀하는 건 막아야 해요.”
플로스의 고위 관료 귀족들은 대개 선왕의 사람들이었다.
루케오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선왕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선왕의 권력 강화 문제가 아니더라도 플로스의 고위 관료 귀족들은 이 나라의 권력과 금력이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언젠가는 반드시 손을 봐야 했다.
“그렇군!”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 관리들이 있어요. 그들은 열정과 재능이 넘치고 학식이 뛰어나요. 누구보다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죠. 그런데 고위직을 맡기에는 아직 젊어요.”
“그러면 누구에게 고위직을 맡기지?”
“플로스의 관료 귀족들이 안 된다면 지방의 영주들이죠. 문제는, 능력 있는 영주들은 전쟁터에 가 있거나 플로스의 관료 귀족들과 이미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거예요. 마카르스카 공작이나 위스 백작, 바스토 후작 같은 사람들은 단순한 지방 영주가 아니라 한 지역의 수장이면서 플로스에서도 한 정파의 우두머리예요. 그쪽 계통 사람들을 고위직에 앉히고 원정을 떠나신다면 큰 문제가 생길 거예요.”
루케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럼 어떡하지?”
“그래서 모르부스 후작 같은 사람을 고위직에 앉힐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우베르 서부에서야 독보적인 지위에 있다지만, 플로스에서 정치적 연고는 따로 없거든요.”
“정치적 연고가 너무 없어도 문제 아닌가? 말발이 안 먹힌다는 소리잖아.”
“도서관에 다니는 관리들은 왜 도서관에 다닐까요?”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다니겠지.”
“그것도 맞지만,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것 말고는 출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에요. 밀어 주고 끌어 줄 사람이 없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런데 그게 왜?”
“모르부스 후작 같은 지방 영주가 도서관에 다니는 젊은 관리들이 지식과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고 도서관에 다니는 하급 관리들은 플로스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지방 영주를 지지해 준다면 이 나라를 위해서나 폐하를 위해서나 가장 좋은 일이 될 거예요.”
그리고 루케오가 원정을 떠나고 없는 사이에 선왕이 권력을 다시 쥐는 것을 막고, 이미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대귀족들의 발호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바꿔 말하면 왕비가 원정을 떠난 왕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더라도 지지해 줄 세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모르부스 후작에게 내무대신을 맡긴다면 북서부를 특별히 견제할 거예요. 그러면 투리스 사령관이 딴 마음을 먹기가 더 어려워지지 않겠어요?”
“오! 카시아, 당신이 없으면 어쩔 뻔했어? 이리 와, 내 보물!”
루케오는 카시아를 으스러질 듯 껴안고 뱅글뱅글 돌았다.
난민촌 개발 비위 사건이 터진 뒤로 공석이 된 우베르 왕국의 고위직이 신왕 루케오가 임명한 사람들로 속속 채워졌다.
플로스의 관료 귀족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고, 정치 세력이 큰 대귀족들과 관련된 인물도 소수만 임명되었다.
절반 이상은 지방 영주들 혹은 지방 영주들이 유능하다고 추천한 인물 등 플로스 정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졌다.
그렇다고 아무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우베르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은 루케오가 임명한 사람들인 데다 하급 귀족들이 지지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플로스의 관료 귀족들은 자체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지방 영주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야만인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플로스 정계는 하급 관리들의 지지를 받는 지방 영주들이 고위직을 차지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내무대신 모르부스 후작 또한 떨리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그 시대에 함께했다.
***
페로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배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잠든 아기를 안고 등을 살살 토닥이며 주위를 둘러보던 코르삭은 문득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원리를 깨달았다.
원리는 단순했다.
강물이 배를 밀고 내려가는 힘보다 더 센 힘이 반대 방향으로 배를 밀어야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강물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은 두 가지였다.
바람과 선원들의 노 젓기.
이 두 가지 힘이 물살의 힘보다 강해야 배가 상류로 올라가고 더 강하지 못하면 떠내려간다.
바람이 약할 때는 선원들의 노 젓기만으로 물살의 힘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 바람이 물살 방향과 반대로 불어 주지 않으면 배를 멈추고 쉬어 가고는 했다.
코르삭은 깨달았다.
바람과 노 젓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있어 필수 요소가 아니다.
이곳 선원들이 지금까지 발견한 힘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그저 사용하는 것일 뿐.
만약 거인이 있어 배를 줄에 묶어 끌고 간다면 바람과 노 젓기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거북이나 신화 속 거대 물고기도 두 가지 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라이바드는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전쟁은 상상력이야.”
그런데 상상력은 전쟁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삶 전체에 알게 모르게 작용하여 삶을 변화시킨다.
부발루스 사냥 원정대는 페로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타카타 강을 만나 거슬러 올라가려 했으나 물살이 너무 거세 진입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바람이 타카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향으로 불지 않았기에 오로지 선원들의 노 젓기만으로 물살을 이겨 내야 했는데 합류 지점의 물살이 멋대로 맴돌고 거칠어 도저히 뚫고 지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포기했다.
“우리는 더 작은 배를 타고 와서 타카타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건 안 되겠군. 저쪽에 배를 대고 상륙해서 걸어가는 수밖에.”
프라이바드마저 포기했다.
그때 코르삭이 말했다.
“걸어서 가면 우리 짐을 다 지고 가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부발루스를 사냥해 얻은 뿔과 힘줄도 다시 져 날라야 하는데 가능하겠어요?”
“음!”
“배를 끌고 올라가 보죠.”
“그게 안 되니까 하는 소리지.”
“힘이 두 가지만 있는 게 아니에요.”
“뭐?”
코르삭은 일단 배를 대고 대원들을 모두 내리게 했다.
그리고 타카타 강 주위의 습지에서 부발루스를 잔뜩 잡아오도록 시켰다.
그런 뒤 부발루스들을 줄로 묶어 배에 연결하고 육지에서 끌도록 했다.
배를 움직이는 힘이 반드시 배 안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훈련이 되지 않은 물소를 몰고, 물소들이 끄는 배를 조종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지만, 그들은 배를 타고 타카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강변에서 소나 말을 이용해 배를 끄는 지역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해낸 일이었다.
이번 일로 코르삭은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리만 알면 나머지는 부차적이다.”
“상상력은 큰 차이를 가져온다.”
코르삭과 그 일행은 습지 가장자리 마른 땅에 숙영지를 세우고 본격적인 사냥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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