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로 처리해
코르삭이 이끄는 마차 부대는 하샤하샤가 거느리는 오크 대병력을 무찌를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요란한 등장으로 충격을 주어 오크의 전열을 일시적으로 흐트러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마차 부대는 오크 병력 가장자리만 훑고 돌아 나갔다.
무리해서 돌파를 시도하다가 멈추면 전멸하기 때문이다.
마차 부대가 바람개비처럼 회전하여 오크 가장자리를 갉아 대는 사이에 코르삭은 말을 달려 오크 병력의 균열을 뚫고 에퀴타스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퀴타스는 반가워할 여유도 없었다.
“엔스 성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고 있네. 오크가 성 안으로 밀고 들어올 수 있다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성문부터 열어야겠군요. 이랴!”
코르삭은 에퀴타스의 다음 이야기도 기다리지 않고 말 머리를 돌려 다시 오크들을 뚫고 밖으로 나가 프라이바드에게 말했다.
“엔스 성 놈들이 성문을 열어 주지 않는답니다. 성문을 열어야겠어요.”
척 하면 착!
프라이바드는 성을 쭉 훑었다.
엔스 성은 크고 튼튼한 성이었으나 투리스 요새만큼 높지는 않았다.
허공 낚싯대로 빠르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라가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다음에는 어쩔 텐가?”
수비병들을 죽이고서라도 강제로 문을 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일단은 대화를 해 보고 그래도 말이 안 통하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성문 밖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오크 손에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좋아! 그럼 해 보세.”
코르삭의 각오를 확인한 프라이바드는 기꺼이 그를 성벽 위로 올려 주기로 했다.
프라이바드는 마차 부대를 지휘하여 오크 병력 외곽을 훑으며 지나가다 방향을 틀어 오크의 약한 부분을 뚫고 성벽 쪽으로 나아가더니 다시 방향을 틀어 성벽 아래쪽으로 길게 달렸다.
“다연발 대형 쇠뇌, 발사!”
마차에 장착된 다연발 대형 쇠뇌가 한 번에 12발씩 커다란 화살을 강하게 날렸다.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사이에 미리 명령을 받은 허공 낚싯대 장착 마차가 투척 준비를 마쳤다.
코르삭이 낚싯대 끝에 달린 끈을 감아쥐고 신호를 주자 대원들이 낚싯대 아래쪽에 달려 있는 끈을 힘차게 당겨 허공 낚싯대를 일으켜 세웠다.
허공 낚싯대가 코르삭을 허공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성벽 위로 날아간 코르삭은 감아쥐고 있던 끈을 놓고 우아하게 착지했다.
이린 식으로 성벽 위로 올라올 줄은 상상도 못한 엔스 성의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투리스의 대장이다!”
멋지게 올라와서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해 놓고 민병대를 언급하는 것은 급을 급격히 떨어뜨리기 때문에 코르삭은 민병대를 뺐다.
“엔스 성의 책임자는 어디 있나?”
“저쪽입니다.”
하급 지휘관이 코르삭을 데리고 성문 안쪽에 있는 노년의 기사에게 갔다.
“무엇이냐?”
“성 밖에서 넘어왔습니다. 투리스의 대장이라고 합니다.”
“뭐라!”
코르삭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투리스의 대장 코르삭입니다. 엔스 성의 책임자, 맡습니까?”
“내가 엔스의 주인이다.”
엔스 백작!
“그래 무슨 일이냐?”
“성문을 열어 주십시오, 밖에 있는 백성들이 다 죽습니다.”
“성문을 열었다가는 성 안에 있는 내 백성들이 죽는다. 꺼져라.”
“투리스의 병력이 오크가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그러니 열어 주십시오.”
“자신감이 과하군! 둑이 터지면 아무리 힘센 사람도 막을 수 없다. 지금이 그런 형국이야. 한번 문을 열면 닫지 못해. 물이 빠지기를 기다릴 것이다.”
엔스 백작은 완고했다.
그러나 코르삭도 물러나지 않았다.
“투리스 사령관께서 지금 2만 병력을 이끌고 오고 계십니다.”
2만까지는 안 되지만, 굳이 정확한 숫자를 댈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2만이라는 숫자에 엔스 백작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게 정말인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성 밖에서는 백성들의 비명과 전투 소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백성들을 이대로 죽일 셈입니까? 만약 투리스 사령관께서 아신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흥! 헛소리. 투리스의 전 병력이 2만인데 2만을 데리고 온다고? 어디서 개수작이야?”
의심 많은 엔스 백작은 좀처럼 믿지 않았다.
“그동안 성 안에만 갇혀 계시느라 바깥소식을 전혀 모르시는군요?”
엔스 백작의 눈썹이 꿈틀했으나 성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 입을 꾹 다물었다.
“투리스 사령관께서 카멜리, 자고라, 글라드, 보트로뿐 아니라 프라토 이남의 군사들을 모조리 끌고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북서부의 군대를 이끌고 조만간 이 땅의 오크를 모조리 쓸어버리실 겁니다.”
“오오!”
“드디어!”
엔스 백작이 아니라 그 뒤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코르삭의 말을 듣고 탄성을 질렀다.
“성문을 여는 게 좋겠군요. 이대로 성 밖에 있는 백성들이 죽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맞습니다. 투리스 군대가 오크 진입을 막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엔스 백작의 조치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중앙군과 인근 영지의 지휘관들이 2만 구원군 소식을 듣고 코르삭을 거들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엔스 백작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오크가 들어오지 않게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러죠.”
코르삭은 다시 성문 위로 올라갔다가 허공 낚싯대를 타고 밖으로 내려가 이 소식을 전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엔스 성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하늘과 엔스 성을 원망하던 바르나와 트로바의 주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방패 붙여!”
마차에서 내린 카드쿠스 순찰대 대원 300명이 반원형을 그리고 서서 키르쿠의 명령에 따라 굳은 얼굴로 절도 있게 방패를 붙였다.
그 뒤에는 사냥꾼 출신의 투리스 민병대 대원들이 긴 창을 들고 섰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마차를 나란히 세워 방벽을 형성했다. 마차 위에는 다연발 대형 쇠뇌 10대와 궁수들이 있었다.
잠시 후 오크를 막고 있던 투리스의 기사들과 바르나, 트로바에서 온 병사들이 뒤로 빠졌다.
코르삭이 이끄는 3열 방어선이 오크와 싸우는 최전선이 된 것이다.
하샤하샤가 지휘하는 험상 오크를 선두로 몇 달째 엔스 성을 둘러싸고 공격하던 별동대 오크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세게 달려들었다.
“자세 낮춰!”
착!
“방패 사이로 창 끼워!”
쑥!
“발사!”
슈슈슈슈슈슈!
슈슈슈슈슈슈!
마차 위에서 발사한 화살이 달려드는 오크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이윽고 3만여 오크가 성문을 막아 선 인간 군대를 해일처럼 덮쳤다.
3열 방어선의 제1선을 책임지고 있는 라티시아 난민 출신 대원들은 키르쿠의 명령에 따라 빈틈을 메우며 악착같이 버텼고, 2선을 담당한 창수들은 창대가 오크 피로 물들 때까지 찌르고 또 찔렀다.
3열을 담당한 사수들은 손가락이 터질 때까지,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활과 쇠뇌를 발사했다.
성벽 위에서는 엔스 성의 병사들이 지원 사격을 했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럼에도 오크는 아무런 타격도 없는 바닷물처럼 끊임없이 인간 방파제를 덮쳤다.
철썩철썩 부서지고 무너져도 다시 새로운 파도가 덮쳤다.
반복되는 오크의 파도를 버티지 못해 1선이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커다란 송곳니 목걸이를 찬 불카르가 나섰다.
그는 높은 파도에 무모하게 맞서는 인간 영웅처럼 홀로 1선 앞으로 나가 거대 해머로 오크들을 사정없이 짓이기며 소리쳤다.
“오르크, 푸아타! 미미 엘푸 쿠미!”
복종하라, 오크여! 나는 만장이니라!
코르삭도 쉬지 않고 오크들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지나가며 겨드랑이, 옆구리, 목, 다리를 베어 1선 방패 벽에 부딪치는 충격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오크는 너무 많았다.
만장이라는 외침도, 빼어난 검술도, 매서운 화살도 끝없이 밀려드는 오크의 파도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인간 방파제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때 뒤로 물러나 쉬고 있던 투리스의 기사들이 말에서 내린 채 검을 들고 달려와 구멍 난 방패병 자리를 메우고 서서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거센 오크의 파도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인간 방파제 앞에서 하염없이 흩어지고 부서졌다.
거대한 오크 부대에 맞서 싸우는 작은 투리스군의 모습은 성벽 위의 병사들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힘내라!”
“쉬지 말고 활을 쏴!”
이윽고 피난민이 모두 엔스 성 안으로 들어왔다.
“투리스군, 고생했다!”
“이제 들어와!”
성벽 위의 병사들이 지원 사격에 더욱 열을 내며 소리쳤다.
“코르삭, 먼저 들어가라.”
에퀴타스가 말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오크 피로 완전히 뒤덮인 코르삭이 투리스 민병대와 카드쿠스 순찰대를 순차적으로 물렸다.
“투리스 기사단, 철수 준비!”
에퀴타스의 명령에 기사들이 눈빛을 번뜩이며 검을 고쳐 잡았다.
“공격!”
기사들이 물러나지 않고 오크를 박살 내며 오히려 전진했다.
마치 성난 인간 영웅들이 무시무시한 파도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철수!”
마지막 힘을 쥐어 짜 오크를 밀어붙인 기사들이 몸을 돌려 성문을 향해 달렸다.
밀려났던 오크들이 기사들을 따라잡으려고 쫓아오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목청껏 소리치며 응원했다.
“달려라, 투리스!”
“투리스!”
“투리스!”
“투리스!”
투리스의 기사들은 응원 소리에 힘입어 속도를 높여 엔스 성으로 속속 들어갔다.
에퀴타스가 성문 옆에 서 있다가 맨 앞에 달려오는 오크의 목을 날려 버리고 마지막으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성문이 닫혔다.
쿵!
바르나와 트로바 그리고 엔스 사람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투리스군의 숭고하고 강인한 모습이었다.
***
투리스 사령관 뷔페스가 이끄는 병력은 열흘 뒤에 도착했다.
1만 4천에 이르는 대군이 야전에서 오크를 상대하는 광경을 보는 이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크는 병력면에서 확실히 우위에 있었지만, 성문 앞을 막아선 코르삭 부대를 덮칠 때처럼 무시무시한 파도가 되지는 못했다.
그때에 비해 인간의 병력도 많았기 때문이다.
뷔페스가 이끄는 북서부군은 길게 황대로 늘어서서 오크를 향해 전진했을 뿐인데 오크는 그 전진을 막지 못하고 진형이 들쭉날쭉 흐트러지더니 무너지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오크의 지휘명령 체계가 아직 인간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달은 하샤하샤가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후퇴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투리스 지방을 어지럽히고 인간에게 오크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인데 여기서 전멸하게 되면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뷔페스는 이번에 잔류 오크를 끝장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잔류 오크 소탕을 빌미로 북서부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훈련시킬 수 있지 않겠어? 이번 기회에 그들을 하나로 묶어.”
“알겠습니다.”
참모장 발테스가 대답했다.
“배후 영지를 지키고 있던 중앙군 병력은 타운을 수비하게 하고.”
“예.”
“중앙군 소속의 기사 하나가 제법 쓸 만하다고?”
“예. 페크투스 제스토라는 자인데 중앙군 3군단 2지대장의 부관입니다. 코르삭이 추천하여 2지대장에게서 떼어 에퀴타스가 데리고 다녔는데, 순간적인 판단력이 뛰어나고 전술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합니다. 몸이 약해 맨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유형은 아니랍니다.”
“칼을 휘두를 놈들이야 많으니까. 그래서 투리스 사령부로 전출 요청을 하면 되나?”
“3군단 2지대장이 살라코 자작이라는 자인데 부관을 꽤 아낀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한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군요. 그래서 전출 요청을 받아 주지 않을 거랍니다.”
“누가 그래?”
“페크투스 본인이 한 말입니다.”
“음! 투리스로 오기 싫어서 하는 말 아니야?”
투리스는 말하자면 중앙군 소속 기사들이 꺼려하는 근무지였다.
플로스에서 너무 멀고, 근무 중에 오크와 자주 만나기 때문에 죽을 위험이 높은 데다, 승진이나 승작과도 거리가 먼 곳이기 때문이다.
막상 와 보면 적응하고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기 전까지는 무조건 꺼린다.
“그건 아닙니다. 투리스가 좋다고 하더군요. 특이한 녀석입니다.”
“그래? 그건 다행이군.”
“어떡할까요? 전출 요청을 해 볼까요?”
“정말 쓸 만한 놈이야?”
“대화를 해 보니 바로 알겠더군요. 악간 맛이 간 놈입니다.”
“쓸 만한 놈이군.”
“예.”
“살라코 자작이 내주진 않을 거다?”
“예.”
“가문은?”
“딱 투리스 기사입니다.”
“별 볼 일 없다?”
“예.”
“그럼 전사로 처리해.”
“예?”
참모장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사 처리 하고 신분증 새로 발급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투리스 고유의 제도를 투리스 사령관이 악용하겠다는 말이었다.
“투리스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과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 온 이름을 없애는 건 다른 문제 아닙니까? 가족 관계, 재산 문제······.”
“가문이 별 볼 일 없다며?”
“그건 그렇습니다만······.”
“별 볼 일 있게 만들어 주겠다고 해. 일단 백장부터 시켜 준다고 하고.”
“······!”
백장부터 시작하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물어나 봐. 어지간하면 다 들어주겠다고 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야, 발테스!”
“예!”
“머리 좋은 놈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 내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코르삭이 지금껏 한 일은 어마어마했다.
발테스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오지에서 머리 좋은 놈 구하기는 쉽지 않아. 품에 들어왔을 때 잡아야지.”
“알겠습니다!”
발테스는 곧바로 페크투스에게 가서 의사를 물어보았고, 페크투스는 투리스의 신분증 제도에 대해 꼼꼼하게 물어본 뒤에 승낙했다.
‘이런 방법이 있다니!’
죽고 다시 태어난다!
영웅이 된 것처럼 근사한 이야기였다.
“전사 처리, 해 주십시오!”
이로써 페크투스는 코르삭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 작가의말
부산김아재 님, 후원 감사합니다.
여러 독자들께서 제목 아이디어를 내 주셨는데 당분간 계속 받겠습니다.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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