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리스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자, 이제부터 부발루스를 때려잡으면 되는 건가?”
불카르가 거대 해머를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코르삭이 물었다.
“뭐 하긴, 부발루스 잡으러 가는 거지.”
“한 마리씩 잡으려고?”
“그럼 한 마리씩 잡지 두 마리씩 잡아?”
“그렇게 해서 언제 다 잡으려고?”
“응?”
“그런 식으로 잡을 거 아니니까 기다려.”
불카르는 의아했으나 일단 기다렸다.
코르삭은 부발루스를 한 마리씩 잡을 생각이 없었다.
먼저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부발루스 개체 수를 확인했다.
그다음에는 부발루스를 몰아넣을 지점을 선정하고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만들었다.
강물에 의해 깎여 나가다가 무너진 강변 땅 아랫부분에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치면 그 안으로 떨어진 부발루스가 달아날 수 없는 함정이 만들어진다.
이 작업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대원들이 길게 늘어서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발루스를 그곳으로 몰아넣었다.
머어어어~
머어어어~
커다란 물소들이, 무너진 땅 아래로 떨어져 발이 푹푹 빠지는 강변 울타리 안에 갇힌 채 울어 댔다.
불카르가 감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대체 몇 마리를 잡을 생각이야?”
“전에 내가 말한 적 있지 않나?”
“뭘?”
“다연발 대형 쇠뇌를 장착한 마차 천 대를 몰고 다니면 어떤 적이 우리를 막을 수 있겠어? 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
모르부스 후작을 잡으러 갈 때 했던 말이었다.
“천 대? 그냥 해 본 소리 아니었어? 진짜 천 마리나 잡을 생각이야?”
“다연발 대형 쇠뇌 천 대를 가지려면 1,500마리를 잡아야 해. 뿔과 힘줄 세 벌 중 한 벌은 투리스군에 주기로 약속했거든.”
“누구랑 약속해?”
“누군 누구야? 사령관님이지.”
“그래서 진짜 1,500마리를 잡으려고?”
“잡는 데까지는 잡아 보려고. 언제 다시 오겠어? 성지와 가까워 오크들이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오크의 땅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잖아.”
“그게 아니라 다연발 대형 쇠뇌를 왜 그리 많이 만들려고 하는 거야? 어디 전쟁에 나갈 거야?”
불카르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다연발 대형 쇠뇌 열 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나름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천 대를 만들려는 것은 과했다.
투리스 요새가 보유하고 있는 것이 겨우 300대 남짓이었다.
게다가 투리스 사령관이 우베르 북서부를 완전히 통합했기 때문에 앞으로 싸울 일도 없었다.
싸움이라면 오크와의 전쟁인데, 그에 대해서는 투리스 사령부가 신경 쓸 일이지 코르삭이 먼저 나서서 대비할 문제가 아니었다.
써 보니 성능이 마음에 들어 100대 정도 갖춰 놓고 싶다고 하면 이해라도 할 텐데 1,000대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코르삭은 아직까지 불카르에게 자신에 대해 모두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카시아를 되찾으려면 로그넘과 싸워서 물리칠 수 있을 만한 힘, 우베르의 왕자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둘러댔다.
“우리 왕국이 로그넘과 큰 전쟁을 하고 있다는 건 알지? 오크도 주력을 살려 돌아갔으니 언제 다시 큰 싸움이 일어날지 모르고. 시간 있을 때 미리미리 대비해 둬야지.”
불카르는 대강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난 또 네가 큰 뜻이라도 품고 있는 줄 알았지.”
“큰 뜻이라니?”
“저번에 그랬잖아? 우리 사령관님이 우베르 북서부를 집어삼키고 나서 결국 왕이 되려고 한다고 말이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런데 너는 사령관님 부하들 중에 가장 큰 공을 세웠잖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걸?”
코르삭은 불카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민망했지만, 일단 묵묵히 들었다.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주목을 받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지.”
“높은 자리는 좀 아니지 않아?”
“민병대와 순찰대 2천 6백 명을 지휘하는 대장, 6천 명을 다스리는 영주. 그 정도면 높은 자리지. 투리스의 기사들 가운데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가 또 있어?”
코르삭은 오크의 침공을 받고 살아남기 위해 백성들을 무장시킨 민병대의 대장과 강제 노역으로 피폐해진 라티시아 난민 6천 명을 다스리는 영주가 그리 높은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높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투리스의 기사들 가운데 누가 있느냐는 말은 정정하고 싶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여섯 개의 성을 지키는 성주들도 있고, 500명의 기사를 지휘하는 기사단장님도 있고, 사령관님의 최측근인 참모장님도 있고······.”
“네가 말한 사람들은 다 투리스에서 수십 년씩 구른 기사들이잖아. 넌 투리스에 온 지 얼마 안 된 신입 주민일 뿐이고.”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혼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으니 이인자를 견제하려는 투리스 기사들의 압박에서 벗어나 사령관님을 따라 더 큰 활약을 하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하는 건가 싶었지.”
“이인자는 무슨······.”
코르삭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인자가 아니면 더 큰 꿈을 꿀 수도 있고 말이야. 솔직히 투리스 사령관도 꾸는 꿈을 다른 사람이라고 꾸지 말라는 법 있냐? 사령관님이 그렇게 대단한 가문 출신은 아니잖아? 대단한 가문 출신이었으면 애초에 투리스로 안 왔겠지.”
이야기가 점점 위험해지는 것 같았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다연발 대형 쇠뇌 1천 대를 만들겠다는 네 말은 그만큼 놀랍다는 말이야.
이미 너는 투리스의 기사들뿐 아니라 주민들도 다 알 만큼 주목받고 있다고. 그런 네가 다연발 대형 쇠뇌 1천 대를 만들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널 더 신경 쓰지 않겠어?
적어도 투리스의 기사들은 널 무지하게 의식할걸? 사령관님의 편애를 받고 있잖아. 물론 그만큼 큰 공을 세웠지만 말이야.”
“투리스의 기사들이 날 의식한다고?”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질투하지 않을까?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도 모르는 녀석이 나타나서 공을 세우고 혼자 주목받고 있으니까.”
“그런가?”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행동과 네가 보여 주는 모습은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아니! 할 거면 더 대놓고 하라고. 넌 애매하게 겸손을 떠는 경향이 있어.”
사실, 겸손을 떤다기보다 조심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었다.
정체가 드러나 라티시아 대공이 보낸 암살자가 다시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나름 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인자 자리를 노릴 거면 더 확실히! 공을 세우면 더 티를 팍팍 내라고! 안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단 말이야.”
“응?”
“나만 해도 그래.”
“네가 뭐?”
“오크 침공 때문에 처음 너를 만났어. 처음에는 카멜리 왕복 상행단의 호위였지. 그러다 민병대를 함께하게 되었고. 카멜리, 자고라, 북서부, 서부, 엔스에서도 함께 싸웠어. 이 정도면 기간은 짧지만, 함께 사선을 넘나든 전우 아니냐?”
“그렇지.”
“그런데 이런 나도 이후에 네가 어떻게 할지 몰라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겠다고.”
불카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지 몰랐기에 코르삭은 놀랐다.
“음!”
“투리스에서 이인자를 노리는 거야? 사령관을 제치고 일인자가 되어 볼 거야? 힘 있으면 남의 영지도 삼키는 세상이니 더 큰 꿈을 꿔 볼 거야? 그러면 나도 기꺼이 선봉에 서서 해머를 들고 방해되는 놈들 대가리를 깨부술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고 네가 워낙에 잘나서 별 생각도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공을 세우고 여기까지 왔지만 사실 딸이랑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 거라면, 나는 사냥꾼의 삶으로 되돌아갈지 상회 호위 노릇을 할지 그것도 아니면 이왕 큰 무기를 든 김에 내 꿈을 직접 꿔 볼지 결정을 해야지.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하단 말이야. 네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고.”
네 꿈이 뭐냐?
네 목표가 뭐냐?
우리는 사선을 함께 넘나든, 누구보다 가까운 전우인데 분명하게 알려주면 안 되겠냐?
그래야 나도 내 삶의 방향을 확실히 정할 수 있으니까.
다연발 대형 쇠뇌를 1,000대나 만들겠다는 걸 보면 분명 꿈이 큰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고, 평소 모습을 보면 또 꿈이 큰 사람 같지 않으니 답답하구나!
불카르의 이야기를 들은 코르삭은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투리스에 도착한 뒤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지 못해 답답하게 만들었다는 점과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목표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힘을 기르려는 이유는 확실했다.
카시아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남들을 동참시킬 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내 아내를 되찾으려는 싸움에서 선봉에 서 줄래?”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나라를 훔쳐 왕이 되겠다, 남의 재물을 빼앗는 도적이 되어 부자가 되자는 말만도 못했다.
그래서 투리스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도 여태껏 가까운 사람들에게 함께하자는 확신을 주지 못한 것이다.
다연발 대형 쇠뇌를 무려 1,000대나 만들겠다고 하면서도 남들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꿈이나 목표가 없었다.
“네가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견제하려는 놈들도 더 확실히 견제할 테고, 너한테 관심을 가지고 친해지려는 기사들도 더 쉽게 다가올 수 있겠지. 밟을 놈, 친해질 놈을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하라고.”
코르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어어어~
머어어어~
강변 울타리에 갇힌 부발루스들이 큰 소리로 울어 대는 가운데 대원들이 조심스럽게 한 마리씩 묶어 끌고 나와 도살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로 인해 무척 위험한 작업이었고,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부발루스들을 무참히 죽여 얻은 부산물로 시시한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코르삭은 곰곰이 생각했다.
불카르는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머어어어~
머어어어~
한참 후에 코르삭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솔직히 털어놓겠지만, 이에라시아의 엄마는 살아 있어. 상당히 지체가 높은 사람이지.”
불카르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뭐가?”
“이에라시아의 엄마가 지체 높은 사람이란 거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
“넌 평범하게 생겼는데 이에라시아는 너무 예쁘잖아. 공주님처럼 말이야.”
불카르의 농담에 코르삭은 웃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투리스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우리가 헤어진 건 로그넘, 우베르, 라티시아 때문이거든.
로그넘, 우베르, 라티시아를 휘어잡을 만큼 강해질 거야.
그러면 이에라시아가 엄마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카드쿠스 주민들처럼 처참한 일을 겪는 일도, 땅굴을 파던 로그넘족 광부들처럼 불행한 삶을 사는 일도 사라지겠지.”
로그넘, 우베르, 라티시아를 휘어잡을 만큼 강해지겠다고 코르삭은 최초로 선언했다.
불카르는 허황되다고 비웃지 않았다.
코르삭이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코르삭과 함께한다면 정말 멋질 것 같았다.
“다연발 대형 쇠뇌 1,000대로는 어림도 없겠는데? 부발루스를 더 많아 잡아야 되겠어.”
머어어어~
머어어어~
부발루스들이 구슬프게 울었다.
***
워낙 많은 부발루스를 잡다 보니 강변 풍경이 달라졌다.
물소들의 게으른 울음 대신 비명이 들리더니 그마저도 점점 사라졌다.
피 냄새가 진동하고 벌레들이 들끓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함을 느낀 성지의 오크 – 카시시들이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왔다.
카시시들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던 프라이바드, 코르삭은 마침내 인간으로 치면 성직자 혹은 성전 기사에 해당한다는 카시시와 마주치게 되었다.
“와나다무!”
인간이다!
카시시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인간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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