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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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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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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7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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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육체가 없는 지사리

DUMMY

모두가 저마다의 반석을 찾아 헤매이던 때, 한 여자가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청명한 달빛이 숲 곳곳에 스며들었지만 지원은 그 달빛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녀를 비추고 있는 것은 바로 앞에 있는 모닥불뿐이었다.


지원은 자신이 직접 만든 단소를 입에 대고 연주하는 중이었다. 기교는 부족했고 단순히 음을 상하로 적절히 나열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그 연주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숲의 소리를 묻어버리기 위해 단소를 연주한다.


노래 좀 한다는 놈들이면 운치를 모른다며 힐난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지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나뭇잎이 서로 부대끼며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냈다.

지원은 눈을 조금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단소는 소리를 키우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연주를 들어야 하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다.


그녀는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소년, 유찬호에게 다가갔다.

그의 잠이 깊어질 때까지 연주를 들려주어야 했다. 안 그래도 모닥불 빛에 비친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 후로 10분, 유찬호가 코를 골기 시작하자 지원은 긴 연주를 멈췄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곡. 낭만적인 것 같지만, 어떤 곡이든 한 번 공연되었다면 평가가 따른다. 그 자리에는 연주를 평가하기 위한 관객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모닥불이 일렁였다.


지원은 지독한 피로함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디 꿈 같은 건 꾸지 않기를 바라면서 눈을 감았다.


그때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원은 그 소리가 꿈에서 들리는 소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명죽림에서는 소리라는 것을 도통 믿을 수가 없다. 때문에 지원은 단지 눈쌀을 찌푸리고 더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 바라며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명죽림의 바람 소리가 귀를 비집고 뇌를 파고들었다.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께서 누누이, 거듭,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던 한 마디가 있었다.


‘낙관을 믿지 마라. 너의 가장 비관적인 추측을 믿어라.’


지원은 환상 속의 선생님께 꾸지람을 받고는, 낙엽 소리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희여멀겋고 악취가 나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지원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팔을 부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잡아채 지원의 등 뒤로 넘겼다.


그녀는 찬호를 깨우기 위해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찬호 또한 이상한 남자에게 목이 졸린 채 캑캑거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대나무숲 곳곳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대략 10명 정도 되는 도적놈들이었다. 지원은 최대한 빨리 수를 파악했다. 그녀는 여자라서 사내가 그렇게 강하게 제압하지 않았다.


찬호는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목이 조이고 있었다. 그에게서 냉정한 판단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너희 둘밖에 없어? 다른 놈들은 어디 갔지?”


도적 중 한 명이 걸걸하고 부정확한 발음의 만칼리 어로 추궁했다.


지원은 이들이 어떤 부류인지 알고 있었다.

추방자들. 온갖 미친 짓을 당연하다는 듯이 자행하는 주브만칼리 대륙의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진짜 악한들. 사형조차도 아까워 숲에 버려진 자들. 자비를 기대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전 만칼리 말을 잘 못 해요! 저 사람이 잘합니다.”


지원이 겁에 질린 만칼리 어와 다급한 눈빛으로 찬호를 가리켜 보였다.


“외국인. 간첩이군. 그럼 쉽지. 잠깐 풀어봐.”


그러자 찬호를 속박하던 남자가 찬호를 대나무에 대고 밀어붙였다. 그는 어느새 찬호의 허리춤에 있던 권총을 뺏어 그에게 겨누고 있었다. 또한, 한 손으로는 찬호의 양 손목을 한꺼번에 쥐고 계속해서 그를 짓눌러 무릎 꿇은 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도록 했다.


찬호가 컥컥 기침하면서 숨을 고르고, 도적들이 찬호에게 뭐라 뭐라 추궁했다. 남은 몇은 지원에게 접근해 치근덕댔다.


“숨겨놓은 무기 같은 거라도 있냐?”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지원의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거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튕기고는 했다. 지원은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죽림을 배회하는 미친놈들을 피하는 건 지원의 임무였지만, 그게 실패했으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지원이 상대할 수도 없을 정도로 힘이 세고, 장기간 명죽림의 바람과 환청에 노출된 놈들이라 제정신이 아니어서 설득도 불가능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슬슬······.’

지원은 찬호쪽을 바라보았다. 도적들에게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다.


찬호는 추궁을 당하는 와중에도 귀를 대나무에 비비고 다리를 움직여 소음을 내어 명죽림의 바람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썼다.

저런 방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슬슬 찬호의 정신력이 다 떨어질 것이다.


“다른 놈들이 있냐?”

“있어요. 아니, 없어요. 뭐라고 하셨죠?”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병신아, 똑바로 말해!”

“제, 제대로······못 들······어서요.”

“네 친구들이 있냐고!”

“친구······동료 말씀이신······가요?”


찬호는 억지로 말을 느리게 해서 시간을 끌려고 애썼다. 그건 대가를 요구하는 기술이었다. 사내 중 하나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찬호를 퍽퍽 때렸다.


지원은 자신에게 들러붙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중 하나가 뭐라고 지껄이면서 지원의 허벅지를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이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지원은 얌전히 기다리다가, 손이 완전히 국부에 다다랐을 때 경련하듯 발을 구르며 가나 대륙의 언어로 소리쳤다.


“하지 마세요! 제발.”


완전히 겁먹은 여인의 일반적인 반응처럼 보였다. 그래서 도적들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지원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녀가 차올린 흙더미가 모닥불 위로 끼얹어졌다. 불꽃과 모닥불이 반응하여 타다닥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지원은 여전히 겁먹은 얼굴과 떨리는 어조를 유지하며 고개를 대각선으로 저었다.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찬호와 모닥불을 번갈아 가리키는 몸짓이었다.


그때 지원의 윗배를 주먹이 강타했다. 그녀는 낮고 짧은 신음을 냈다. 사내들이 킬킬댔다. 그녀를 때린 남자가 말했다.


“누렁이 말 쓰지 마라. 토 나올 것 같으니까.”


지원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배가 아파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때 지원의 뒤편에서 도적 두 명이 걸어나왔다.


“가방에는 아무것도 없어. 피리 몇 개랑 수건, 그리고 이런 것들이 전부야.”

“근데 보따리 안에 들어있는 건 중요해 보이는데?”

“풀어봐. 뭔지 보자.”


찬호의 보따리가 풀어 헤쳐졌다. 투박한 기계장치가 드러났다.


그들은 지원을 보았다.


“이게 뭐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찬호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갔다.


“저건 뭐냐? 이번에도 딴말하면 죽인다.”


지원은 부디 상황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길 원하면서 말했다.


“저희가······우리타 산맥의 파보 절벽에 설치할 기계 장비입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 찬호를 제압하고 있던 남자조차도 지원을 바라보았다.


“설치해서 주브만칼리의 지형과 영보교의 동향을 감시하려고 했어요······. 거기에 있는 그가 엔지니어입니다. 저는 안내역이고요.”


도적들은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일순간 희망에 찬 눈빛이 읽혔다. 그들은 서로 산발적인 의논을 나눴다.


“저 물건이랑 이놈들을 카추샤님께 바치면······.”

“잠깐, 그럼 누구한테 공이 돌아가지?”

“지난번에는 25명이 한꺼번에 면죄받았어. 이렇게 확실한 증거면 우리 정도는 바로 받아준다고!”

“일단 저년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야겠어.”

“야, 장비라고 했지? 여기서 작동시켜 봐!”


아까부터 묘하게 도적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남자가 지원에게 명령했다. 지원은 속으로 미소지으며 변명했다.


“저, 저는 안내역이고, 작동 방법은 저 사람이······.”

“젠장, 야!”


남자들은 흥분해서 찬호를 짓누르고 있던 놈을 재촉했다. 그자는 헐떡이기까지 하면서 찬호를 들어 올려 보따리 앞으로 대령했다.


그 순간 지원이 원하던 일이 일어났다.

찬호를 겨누고 있던 총구가 그에게서 떨어져 땅바닥을 향하게 되자, 지원이 고함을 내질렀다.


“기르불, 지금!”


얌전히 명죽림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던 모닥불은, 주저앉아 있던 땔감 위에서 일어섰다. 불은 인간이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가 찬호를 잡고 있던 놈의 머리통을 휘감았다.


남자는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했다. 뇌가 노릇노릇 익는 냄새가 났다. 근육의 경련 때문에 방아쇠가 당겨져 총이 발포되었다. 총알은 찬호의 겨드랑이에서 한 뼘 떨어진 땅바닥에 박혔다.


도적들이 동요했고, 지원을 잡고 있던 놈은 그녀의 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조였다. 한때 모닥불이었던 것은 그에게 날아들어 지원 또한 구해주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풀려난 찬호는 재빨리 시체에서 자신의 총을 뺏어,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마구 갈겼다. 지원은 아까 불을 깨웠을 때 흙으로 덮어놓았던 자신의 단검을 집어, 도적들의 급소를 하나하나 찔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불덩이 때문에 혼비백산한 도적들은 그녀의 칼날을 막아내지 못했다.


3명 정도가 살아서 도망쳤다.


“쫓지 마십시오.”


지원이 소리쳤다. 그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찬호의 손 위에 손을 덮어 총을 내리게 했다.


찬호가 헐떡이면서 말했다.


“괜찮을까요? 저희 계획을 다 알고 있는 놈들인데.”

“네, 상관없습니다. 기르불, 이만 돌아오세요.”


기르불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불덩이는 대나무 잎사귀를 붙들고 꾸물대다가, 곧 모닥불로 돌아왔다.


지원은 자신의 칼날을 닦고 가방에서 단소를 하나 꺼내 불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격렬한 싸움 끝에 숨이 차 있던 터라 음정이 불안정했다.

찬호는 지원의 연주를 듣자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그대로 대나무 하나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졌다. 일행은 주위의 시체들과 피비린내를 그대로 내버려 둔 체, 잠깐 쉬었다.


찬호는 떨리는 무릎을 붙잡고 일어섰다.

그는 죽은 도적들의 다리를 붙잡아 끌어 한데에 나란히 정렬시켰다. 공간이 좁았기 때문에 자신의 칼을 빼들어 주변의 대나무들을 조금씩 벌목해 공터를 넓혔다.


“뭘 하는 거냐?”


기르불이 물었다. 찬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기르불은 육체가 없는 종족인 지사리였다. 지사리는 육체가 없으니, 당연히 생명이 다한 육신을 취급하는 일에 대해 서투르고 낯설 수밖에 없었다.


“어······. 이렇게 놔두기에는 좀 그래서······, 그냥 제대로 눕혀만 주려고요.”


지원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게······, 하지 말까요?”


찬호는 시체의 다리를 잡고 있던 양손을 놓고 어깨 위로 올렸다. 다리가 바닥으로 풀썩 떨어졌다. 지원이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의 반석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이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쓸모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들을 챙기려면 일단 시체를 정리해야겠지요.”

“반석?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원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대신 기르불이 말을 걸어주었다.


“방금 전까지 서로 죽이려던 놈한테 팔자도 좋다.”

“그런가요······.”


찬호가 멋쩍게 웃으면서 다시 시체를 질질 끌어 정렬했다.

기르불이 죽인 4명은 머리가 맛있게 익어 있었는데, 찬호는 인상을 쓰면서도 꼭 한 번씩 머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곤 했다. 그는 자신이 닭고기로 배를 채우지 않은 상태였다면 여기에 식욕을 느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뜬금없이 어디선가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찬호와 기르불은 누가 말했는지 찾다가 지원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스스로 의심했다. 하지만 지원은 그 의심을 확신시켜주듯 말했다.


“제가 경계했어야 했습니다. 상황을 힘들게 만들었군요.”


찬호와 기르불은 지원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저들이 제가 예전에 말한 추방자들입니다. 영보교에서도 쫓겨난 악질 범죄자들이죠, 놈들의 꼴을 봤을 때, 추방된 지 10일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멀쩡하게 보이더구나. 인격의 의미가 아니라, 그럭저럭 사고 능력도 있고 대화도 가능하던데.”


기르불이 물었다.

일행이 한꺼번에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찬호는 시체를 거의 다 정리하고 다리를 모은 채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원이 한 곡조를 완전히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 하루가 가장 힘듭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명죽림의 바람 속에 숨은 환청들에 노출되면 10시간 이내에 자살합니다. 그 시간을 버티면 점차 편안해지지요.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10시간을 넘겼을 때부터가 시한부입니다. 그 이전에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이자들은 저희가 아니었더라도 이틀 내에 이 숲 어딘가에서 죽었을 겁니다. 자살을 하든, 굶어죽든······. 도망친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찬호는 그 말이, 괜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는 뜻인지, 도망친 잔당들이 자신들을 고발하지 못할 거라는 뜻인지 헷갈렸다. 그는 그 둘 전부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원은 연주하고, 찬호는 주변을 정리했다. 그는 땅을 얕게 파 시체들을 위에 두고 흙과 낙엽을 덮었다. 아쉽게도 이들에게는 쓸만한 물건들이 없었다. 하긴 추방자에게 무기나 식량을 지급할 리 없었다.


그래도 옷가지 정도는 골라내어 겉옷이나 이불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찬호는 시체에서 그나마 덜 상한 옷을 벗겨내 챙겨두었다.


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자격이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찬호는 두 손을 모으고 짧게 기도를 올렸다. 사제가 아니었으므로 구체적인 기도문은 몰랐다. 그래서 그냥 ‘다음 생에는 좋은 데서 태어나세요.’라고 중얼거리는 데에만 그쳤다.


그 다음에는 무기를 점검했다. 자신의 총에는 다시 총알 6발을 꽉 채워 넣고, 지원의 칼은 시신의 옷자락에 대고 박박 닦아 주었다. 피와 진흙이 엉겨 붙어 잘 손질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기르불이 태울 만한 땔감을 주변에서 주섬주섬 모아와 그의 위에 쏟아부었다. 기르불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대나무 가지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보따리를 점검하고 있을 때, 기르불이 말했다.


“잠깐, 이놈들은 추방된 지 10일 된 놈들이라고 했지?”


지원이 연주를 멈추지 않았기에 찬호가 대신 대답했다.


“네, 아마 그 정도 된다고 하셨죠?”

“그럼, 이곳에서 인간 걸음으로 10일 거리에 민가가 있다는 소리겠군?”

“헉, 그렇네?”


찬호는 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취구에서 입을 뗐다.


“지금까지의 행군 속도로는 나흘 정도 걸릴 겁니다. 하지만 조금 서두른다면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10일이 아니라?”

“이자들은 그곳에서 이곳까지 일직선으로 걸어온 게 아닐 겁니다. 이곳저곳 헤매다가 깊숙이 들어온 거죠.”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이 숲 솔직히 지긋지긋해요! 아니, 지금 출발할까요?”


찬호가 희희낙락하여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지원은 단소를 통해서 긴 숨을 내뱉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연주를 계속하면서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성한 대나무 잎에 둘러싸인 하늘에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습니다. 더 이상의 이동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추방자들이 혹시라도 복수하겠다면서 찾아올 수도 있고, 시체 썩는 냄새가 심할 겁니다. 조금 이동해서, 다른 곳에 터를 찾아 쉬도록 합시다.”

“네에······.”


지원은 다시 단소를 불었다.


찬호는 가방을 들어 그녀의 등에 조심스레 메어 주었다. 그리고 풀어 뒀던 밧줄을 단단히 조였다. 다음에는 보따리를 어깨에 걸치고, 횃불의 개수를 점검해 보았다. 더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는 기르불을 횃불에 옮겼다.


“참, 기르불.”

지원이 말했다. 그녀가 기르불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었던지라 기르불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지?”

“이제부턴 오늘처럼 간간이 추방자들과 마주치게 될 겁니다. 대부분은 제가 미리 피해갈 테지만, 제가 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죄송하지만 앞으로 나흘 동안은 잠을 자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사리는 잠을 아주 많이 참을 수 있지만, 그래도 나흘 밤샘은 부담이 될 것이다. 찬호는 걱정스레 기르불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기르불은 시원하게 말했다.


“그러지. 방금은 내가 불침번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 뻔했으니, 그 정도 벌은 받아야겠지.”

“벌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흘은 저희 모두 강행군을 할 겁니다. 찬호, 오늘부터 저희는 하루에 4시간만 잘 겁니다. 며칠만 버팁시다.”


찬호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감각을 받았다. 4일 뒤에는 이 숲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그동안 16시간 밖에 못 잔다는 절망이 그를 앞뒤로 조였다.


지원은 그를 내버려두고 단소를 연주하며 조용히 걸어 나갔다.


찬호는 언제나처럼 그 소리에 이끌려 그녀를 따라갔다.


기르불의 빛이 명죽림의 어둠으로부터 일행을 감쌌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그들의 작전은 순탄히 진행되고 있었다. 공격을 받고 위험에 처하는 것도 일행이 각오한 일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주브만칼리 대륙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작가의말

2화까지는 프롤로그로, 다른 회차들보다 조금 더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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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2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4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3 1 9쪽
42 모함 +2 22.07.21 29 1 11쪽
41 감금 +1 22.07.09 40 2 13쪽
40 진술 +2 22.07.06 40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7 2 9쪽
38 패륜 +2 22.07.03 30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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