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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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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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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5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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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DUMMY

찬호는 밤 내내 미령과 츠카를 탈출시키기 위해 터리놀을 바쁘게 휘젓고 다녔다.


그는 기차역 근처의 영세 호텔을 점령하고 있던 부대 하나를 처리하고 나서,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찬호는 호텔 옥상의 저격수의 시체 옆에 쭈그려앉아 최대한 차분하게 생각해보려 애썼다.


이들은 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찬호 혼자서 이런 식으로 건물을 청소한 게 벌써 3번째였다. 제아무리 터리놀군이 내부부터 썩었다고 하더라도 이딴 병력을 상대로 이 넓은 도시에서 구역 하나조차 점령하고 있지 못한 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동쪽 해안에서 일출이 시작됐다. 새벽의 태양빛이 터리놀을 비추었다. 특히 터리놀에서 가장 높은 두 건물인 나실 호텔과 터리놀 화령탑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나실 호텔을 보자, 지원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찬호 또한 깨달음을 얻었다.


적은 수로 터리놀 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방법······. 바로 지리적 이점, 즉 높은 건물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실 호텔은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자치군이 가장 높은 곳부터 5층까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치군이 점령하기 전 만칼리군은 인질을 잡고 농성이나 했지 호텔 밖으로 사격을 가한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 화령탑이 가장 수상했다.

마침 터리놀 화령탑은 지난밤부터 단군 하비나를 제외한 어떤 지사리도 드나들지 않았다. 평소에는 인간이 함부로 화령탑을 드나들었다가는 재조차 못 남기고 죽을 수도 있었지만, 전쟁으로 지사리가 전부 철수한 지금은 만칼리군이 점령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찬호는 옆에 쓰러진 저격수가 살아있을 때 사용했던 모신나강 소총과 쌍안경을 뺏었다. 소총에는 저격렌즈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확대 배율이 부족해 쌍안경을 보조적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그 쌍안경으로 화령탑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찌나 높았는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목이 아파서 옥상 바닥에 누운 채 고개를 아래로 숙여서 봐야했다. 쌍안경의 렌즈가 위로 향해지자 빗물이 토도독 맺혀서 시야를 방해했다.

찬호는 신경질을 내며 계속 빗방울을 닦아냈다.


화령탑은 마치 날씬한 휜개미집을 거대하게 확대한 것만 모양새였다.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공간지각능력을 가진 지사리에게는 숨쉬듯 자연스럽게 지나다닐 수 있는 건물이었지만, 찬호에게는 보기만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모양이었다.


쌍안경으로 화령탑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훑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총이나 화포를 건물 밖에서 잘 보이도록 걸쳐놓았을리는 없었다. 때문에 찬호는 같은 곳도 여러번 다시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슬슬 눈이 아파오고 자신이 헛짚은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날카로운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새벽 햇살과 빗방울만 있었던 터리놀의 새벽 하늘이 낯선 소리에 온통 물들었다.


찬호는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저격을 시도한 것일까봐 깜짝 놀랐다. 그는 몸을 숨기고는 소리가 난 나실 호텔 방향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나실 호텔은 창이 유리로 되어 있어 햇빛의 반사 때문에 층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저격수를 찾고 있었을 때, 다시금 소리가 울렸다.


다만 이번에는 폭발음이 아니었다. 창문의 유리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였다.

소리의 원인은 바로 찾아볼 수 있었다. 최상층이었다. 눈을 위쪽으로 올리자 의자나 책장 같은 것들이 창문을 뚫고 튀어나오면서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찬호는 곧바로 총을 위로 겨누었다. 나실 호텔 최상층의 창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총구나 대포의 끄트머리가 걸쳐진 것이 살짝 보였다.


“뭐야, 그새 저걸 가지고 올라왔다고?”


찬호는 지원으로부터 VIP룸의 존재를 전달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레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최상층이 공작대가 머물렀던 스위트룸이라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웠다.

스위트룸에는 저런 무기가 없었으니 저 무기는 공작대가 떠난 이후에 가져온 것들일 것이다. 그런데 공작대가 엘레베이터의 줄을 끊어 못쓰게 만들었으니 저 무기들을 옮길 방법은 계단으로 하나하나 들고 나르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총과 대포는 무겁고, 총알과 포탄은 더더욱 무겁다. 너겨 엿비가 자치군의 뒤통수를 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군인들을 갈궜어도 저 장비들을 그 시간안에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 옥상에서 건물 벽면을 통해 창문까지 늘어진 밧줄을 발견했다. 설마 옥상에서 건물 안쪽으로 던져넣었나? 생각만해도 미친 짓이었으므로 그런 가능성은 집어넣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곧 깨진 창문 안쪽에서 연기가 한가득 피어올랐다. 화재가 났을 때의 검은 연기가 아닌 연막탄의 새하얀 연기였다.


안쪽에서 뭘 하고 있길래 연막탄을 터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찬호는 저격수의 인내심으로 조용히 관찰을 지속했다.


몇 십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최상층의 한 부분이 은은하게 빛났다.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찬호는 쌍안경의 배율을 최대로 올렸다. 깨진 창문 안쪽에서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고, 그 앞에 걸쳐진 대포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그리고 불꽃의 역광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불은 자연적인 불이 아니었다. 연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찬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기르불?!”


찬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기르불의 실종에 특별히 동요하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은 미령과 츠카를 탈출시켜야한다는 책임감에 슬퍼하는 걸 미루고 있었을 뿐이었다. 안도감에 쌍안경이 마구 흔들렸다. 그덕에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위치를 다시 찾아야 했다.


침착하게 바닥에 누워 다시 쌍안경을 들었다.

한 사람은 창틀에 걸쳐져있고 한 사람은 위에서 찍어누르는 자세인 것 같았다. 문제는 기르불의 역광 때문에 누가 적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둘 모두가 적인가? 단순히 내분이 일어나고 있을 뿐인가? 아니면 한쪽은 만칼리군이고 한쪽은 터리놀군일까? 아니면 설마······.


찬호는 일단 둘 중 누구라도 저격할 수 있도록 저격총을 겨누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저격은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최상층의 높은 고도에서는 지상과는 다른 바람이 불기 때문에 계산이 복잡해졌다. 심지어 비도 추적추적 내렸다. 저격을 하기에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허나 사람을 죽이려는데 거위털 침대같은 포근한 환경을 기대하는 게 오히려 말도 안되는 발상이었다. 찬호는 결의에 차 입술을 말고는 슬라이드를 당겼다.


옥상 벽에 총신을 기대어 흔들림을 제어하고, 나실 호텔의 옥상에서부터 늘어져있는 밧줄의 흔들림을 관찰하여 풍속과 풍향을 알아냈다.

빗물과 핏물이 고인 물이 찬호의 등과 엉덩이로 스며들었다.


이제 남은 건 피아식별이었다. 저들이 팔에 완장을 차고 있다면 그걸 보고 저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광이 심했다.


그 순간 아래쪽에 깔린 사람의 상체가 건물 바깥쪽으로 밀려나오면서 햇빛이 얼굴을 비추게 되었다. 찬호의 시력으로 이목구비를 완전히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곧바로 그 얼굴을 알아보고는 온몸에 흐르는 전율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지원!”


그럼 이제 죽일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해졌다.


하지만 기르불을 알아봤을 때와 달리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만 심해졌다. 지사리인 기르불과 달리 인간인 지원은 저격을 잘못 맞췄다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위험에 처한게 평범한 터리놀군이었다면, ‘일단 구하려고 시도하는게 이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저격에 임할 수 있었겠지만 지원에게는 그렇게 의연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망설이거나, 심호흡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원은 조금씩이지만 계속 건물 바깥쪽으로 밀려나가면서 당장이라도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찬호는 방아쇠에 걸쳐진 자신의 손가락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서둘러 발포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극도의 부담감에 찬호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만일 저격을 포기하고 지원이 추락사하는 걸 지켜만 본다면 더더욱 커다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게 분명했다.


방아쇠를 당기면서, 찬호는 부디 누군가가 자신을 다잡아주기를 바라면서 읆조렸다.


“다부님, 한번만 도와주세요······.”


반동이 개머리판을 타고 찬호의 어깨를 짓눌렀다.


총알은 터리놀 하늘의 빗방울과 햇살 사이로 나아갔다. 드넓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탄두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비아스의 가슴과 턱에는 그렇게 발사된 총알이 박혔다.


비아스는 매순간 전쟁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찬란한 삶을 청춘에서 끝내버린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죽었다.


그리고 찬호 역시, 자신이 죽인 여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영원히 알일이 없었다.


작가의말

작가 주) 모신 나강은 현실에 존재하는 총기의 이름으로 개발자인 모신과 나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돛대 없는 배의 세계관에 Mr. 모신과 Mr. 나강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적 허용이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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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무력감 22.12.05 11 1 15쪽
63 해후의 때 22.09.23 27 1 10쪽
» 신의 이름으로 22.09.15 23 1 9쪽
61 저격 22.09.10 31 1 11쪽
60 개전 연설 22.09.06 34 1 10쪽
59 생명줄 22.09.04 32 1 10쪽
58 단둘이 22.09.02 28 1 9쪽
57 나실 호텔의 최상층 22.08.30 19 1 9쪽
56 대장과의 합류 22.08.27 24 1 10쪽
55 분산되는 일행 22.08.23 31 1 11쪽
54 함필규 22.08.21 15 1 10쪽
53 첫 살인 22.08.16 18 1 9쪽
52 너겨 엿비 22.08.14 15 1 9쪽
51 지사리의 보증 22.08.12 14 1 10쪽
50 단군 하비나 +2 22.08.10 30 1 10쪽
49 불안 22.08.06 18 2 11쪽
48 인질들 22.08.05 17 1 9쪽
47 몰살 22.08.03 19 1 12쪽
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2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3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2 1 9쪽
42 모함 +2 22.07.21 29 1 11쪽
41 감금 +1 22.07.09 40 2 13쪽
40 진술 +2 22.07.06 39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7 2 9쪽
38 패륜 +2 22.07.03 29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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