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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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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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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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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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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분산되는 일행

DUMMY

“그래? 고맙네. 솔직히 인간들의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잘 구별이 안 된단 말이야. 음······아, 혹시 여긴 12층인가? 12층에 나이가 있어서 계단을 지나가기 힘들다고 놔두고 온 인간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해 주시는군요? 이 나이가 되니 무릎이 너무 아파서 열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저만 이곳에 편하게 있으니 마음이 불편하더군요. 하지만 오히려 그덕에 기르불 왕제님께 도움이 될 수 있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고마워, 함필규. 보아하니 서부지역 사람 같은데, 필규라고 부르면 되겠지? 네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내가 임무를 끝마치면 은혜를 갚을게.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 봐야 해.”

“그러시지요.”


기르불은 손을 만들어 흔들어 준 다음, 문틈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필규는 안락의자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는 잠시 뒤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기르불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야, 잠깐, 일어나! 만칼리 놈들이 올라오고 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계단을 내려가면서 만칼리 인간들과 마주쳤어. 곧 여기로 올라올거야. 피해야 해!”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고요? 자치군들은 어디 있지요?”

“모, 몰라! 역시 그 포탄에 다······. 이, 일단 너부터 살아야 해. 당장 일어나!”


함필규는 기르불의 아우성에 안락의자에 손을 얹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기르불은 벽지를 태우며 이동하면서 함필규를 재촉했다. 하지만, 필규는 곧 다시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뭐해? 무릎이 그렇게 아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기어서라도 움직여야해!”

“왕제님,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빨리 말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기르불은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지원처럼 대답해보려고 했다.


“밑에서 올라오고 있으니까 위로 도망쳐야지?”

“기르불 님이라면 제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저를 지키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제가 눈앞에서 왕제님의 싸우시는 모습을 직접 봤으니까요. 하지만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네요.”

“무슨 소리야?”

“일단 벽난로 안에 잠시 들어가시겠습니까?”


필규는 손으로 열기가 가시지 않은 벽난로를 가리켰다. 기르불은 초조해했지만, 필규의 지나치게 여유로운, 정확히는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 일단 그렇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시간이 없어. 설마 ‘여긴 나한테 맡겨두고 가’라는 식상한 대사나 하려고 이러는 거 아니지? 그럼 화낼 거다?”


필규는 하하 웃었다. 웃는 것도 좀 힘겨워보였다. 육체가 낡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 매순간 활기차게 움직이는 찬호와 지원도 언젠가는 저렇게 변할까?


“이 호텔에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요?”

“몰라. 사람들이 모여있던 5층까지는 못 내려갔어. 다 죽었으면 어쩌지······.”

“그럼 그 사람들을 먼저 지키러 가시지요.”

“역시 식상한 대사 치려고 불러세운거 맞잖아!”


필규는 시가와 성냥,과 재떨이를 꺼냈다. 그가 성냥을 그을려고 했지만 성냥이 자꾸 미끄러지자 기르불이 재빨리 시가 끝에 주먹을 날려 불을 붙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젠장. 너 지금 이러는 거 멋있어보이는 줄 알아?”

“아닙니다. 기르불 왕제님. 제 옛날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기르불,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40살. 왜, 존댓말 해줄까?”

“저는 딱 80살입니다. 소방 전쟁이 끝났을 때가 제가 은퇴했을 때였죠. 저는 소방관이었습니다.”


소방관이라면, 일선에 서서 지사리들에게 석유를 퍼부어 죽이는 걸 업으로 삼던 사람들이었다.


“뭐······나도 그때 어린 시절을 보냈지. 우리한테 감정이 좋지는 않겠네? 평생을 우리와 싸우는데 보냈으니까.”

“그랬지요. 종전에 반대하는 데모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날 죽이고 싶어서 여기 멈춰세운거야?”


필규는 고개를 저었다.


“옥토끼들이 강림해 지사리와 대화의 장을 마련했을 때, 저를 포함한 소방관들은 지사리들이 인격체였다는 사실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그저 더 많은 지사리를 소멸시키고 싶을 뿐이었죠. 지사리는 악마였으니까요.”

“내 또래 지사리들도 마찬가지야. 솔직히 인간들도 아직 대부분 그렇겠지? 지원이나 찬호 같은 애들이 특별한 거고. 나도 내 스승인 코츠불이 아니었으면 인간을 싫어했을 거야.”

“소방 전쟁이 끝나고, 저는 이 세상에 비열한 평화의 시대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조상들이 지사리와 목숨걸과 싸웠던 기억을 잊고 뻔뻔하게도 웃으며 살아갈 거라고요.”


증오는 연쇄되고 역사상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어떤 용감한 사람이 고통을 무릅쓰고 자신의 원수를 용서한다 하더라고, 다른 사람들까지 그러지는 못한다.

증오의 존재는 사람의 존재와 언제나 함께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군요. 소방 전쟁이 끝나자 최전방에 있었던 도시들의 이권을 먹기 위해 내륙 지역 도시들이 그 추잡한 손길을 뻗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브만칼리가 가나 대륙을 삼키기 위해 작당을 부리고 있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결국 인간과 지사리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았다고?”

“아니요.”


예상 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문 밖에서는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는 문을 하나하나 열어재끼면서 ‘클리어!’를 외치고 있었다.


“저는 만족했습니다. 이 땅 위에 불화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죠.”

“만족했다고?”

“전쟁이 끝나고 하루도 제대로 잠든 적이 없었습니다. 머나먼 미래에, 가족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전선에 선 저와 제 동료들이 살인자이자 평화를 방해한 아둔한 작자들로 평가받지 않을까하는 불안에 떨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알았지요. 저희는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앞으로도 영원히 서로를 죽이고 미워할 것이며,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대리인’을 필요로 할 겁니다.”


함필규는 환하게, 만족스럽게, 상쾌하게 웃으며 시가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니 기르불 왕제님, 가서 당신의 동료들을 구하시지요. 그분들은 미래 세대의 증오를 이어갈 훌륭한 살인자들이니까요.”


기르불은 화를 내려고 했다. 찬호와 지원은 증오로 누군가를 죽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크게 부풀렸을 때, 함필규는 품 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냈다. 그는 문 밖으로 총을 난사했다.


고함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총알에 맞은 것 같았다. 함필규는 씨익 웃으면서 계속 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탄창에는 제한이 있었다. 필규가 품 속에서 탄창을 꺼내 재장전하려 할 때, 바깥에서 필규가 쏘았던 것의 수십배에 달하는 총알이 빗발쳤다.


함필규는 ‘찢겼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삶에 미련을 갖는 얼굴이 아니었다.


“가세요.”


그가 벽난로를 보고 말했다.


기르불은 함필규의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반박하거나 대충 져줘서 넘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필규는 죽어버렸으니 그를 살리려는 노력도 필요가 없어졌다.


기르불은 옛 세대의 종족 감정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체감하면서, 굴뚝 위를 향해 점프했다. 그가 타오르던 아래쪽의 벽난로에서는 총알이 다 타버린 숯덩이만 허망하게 들쑤셨다.


###


찬호와 미령과 츠카는 위층으로 간 군인들이 되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층 전체를 둘러보았다.


미령은 무너진 잔해 사이에 숨어 있었기에 군인들이 5층을 수색했을 때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따라 찬호와 츠카는 잔해 사이사이를 중점적으로 생존자를 찾아보았지만, 발견한 건 시체와 출처를 알고 싶지 않은 끈적끈적한 체액들 뿐이었다.


생존자는 찬호와 미령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5층을 뒤지면서 어떤 방문을 열 차례가 되었을 때, 찬호는 사색이 되어서는 그 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공포에 빠져서는 미령을 바라보았다.


미령은 찬호와 눈을 마주치면서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들은 순수한 침묵을 교환했다. 츠카가 그 광경을 보고 그들의 머릿속을 연결해주었지만, 어떤 텔레파시도 없었다. 그저 눈빛만이 있었다.


마침내 찬호는 문손잡이를 잡은 미령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 뒤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 직후 그 결정을 후회했다.


노약자들의 시체가 벽에 달라붙어 노약자들에게 보여주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보호를 위해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을 한 곳에 모아두었었지만, 그것이 역으로 독이 되어 그들은 저항의 기회도 갖지 못하고 끔직히 살해당했다.


“이 안에 주령이가 있나요?”


미령이 조용히 물었다. 찬호는 공포에 몸을 후들후들 떨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네.”


미령은 피인지 무엇인지 모를 역겨운 냄새가 가득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시체들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주령의 흔적을 찾았다. 아주 손쉽고 빠르게 동생의 시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얼굴이 하나도 손상되어 있지 않아 마치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츠카에게 미리 물어봐 이 방 안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았음에도, 미령은 무심코 주령을 부르며 흔들었다.


“주령아. 백주령.”


주령의 시체는 눈을 감은 채 뜨지를 않았다. 하지만 미령은 마치 예전에도 그랬든 동생이 잠에 겨워 일어나라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찬호는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없었다. 그는 공중에 둥둥 떠있던 츠카를 껴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문 옆에 기대앉았다.


방 안에서 흐느끼거나, 혹은 오열하거나, 혹은 분노하는 소리가 들릴까봐 불안했다. 하지만 미령은 생각보다 빨리 방 안에서 나왔다. 찬호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평온해보였다.


미령이 말했다.


“저는 살아야 돼요.”


찬호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는 허공에 츠카를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이대로 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괜찮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찬호 씨. 벌서라로 가요. 저를 거기까지 데려다주세요. 벌서라로 가면, 저는 뭐라도 할 수 있어요. 아무것도 못하는 여기에는 이제 더 있고 싶지 않아요.”


미령이 찬호의 품에 안기자, 그는 마음이 약해졌다. 찬호는 츠카를 바라보았다.


<찾아야 할 사람들이 있잖아. 네 심정은 이해하지마는, 우리가 벌서라로 먼저 가면 지원이랑 기르불이랑 타카슬은?>


찬호는 정말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미령을 계속 안고 있었다. 그는 지원처럼 자신감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원이 없으니 스스로 생각해야 했다.


“일단 이 호텔에서 나가죠. 생각난 게 있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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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신의 이름으로 22.09.15 23 1 9쪽
61 저격 22.09.10 31 1 11쪽
60 개전 연설 22.09.06 35 1 10쪽
59 생명줄 22.09.04 33 1 10쪽
58 단둘이 22.09.02 28 1 9쪽
57 나실 호텔의 최상층 22.08.30 19 1 9쪽
56 대장과의 합류 22.08.27 24 1 10쪽
» 분산되는 일행 22.08.23 32 1 11쪽
54 함필규 22.08.21 15 1 10쪽
53 첫 살인 22.08.16 18 1 9쪽
52 너겨 엿비 22.08.14 15 1 9쪽
51 지사리의 보증 22.08.12 15 1 10쪽
50 단군 하비나 +2 22.08.10 30 1 10쪽
49 불안 22.08.06 19 2 11쪽
48 인질들 22.08.05 17 1 9쪽
47 몰살 22.08.03 19 1 12쪽
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2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4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3 1 9쪽
42 모함 +2 22.07.21 29 1 11쪽
41 감금 +1 22.07.09 40 2 13쪽
40 진술 +2 22.07.06 40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7 2 9쪽
38 패륜 +2 22.07.03 30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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